개혁이라는 말은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판을 짜는 혁명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는데 영적인 개혁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영적 개혁은 ‘본래의 길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개혁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언약을 맺고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정신 차리는 것 같더니 이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불순종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순종과 불순종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한 삶을 살았던,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던 왕들이 몇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다윗이 그 첫째의 사람이요, 북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제대로 하나님을 섬긴 왕이 하나도 없었다) 남유다의 왕들도 제대로 믿음으로 행한 왕이 겨우 세 명 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여호사밧, 요시야가 그들입니다.
오늘 말씀은 유다의 마지막 개혁자 요시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시야는 그가 태어나기 360년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요시야라는 인물이 일어나 개혁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왕상13:2-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 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그리고 360년이 흘러간 이후에 그가 실제로 역사 속에서 나타나 왕이 되어 우상숭배를 척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합니까? 하나님은 필요하실 때마다 미리 말씀하시고 그 때가 되면 성취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다가 400년 이후에는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3-14)고 하셨는데 400년이 지난 후에 정확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게 되었습니다.(고레스의 등장을 미리 말씀하시고 고레스가 300년 이후에 등장한다)
주님이 예언하신 요시야가 왕이 된 것은 그의 나이가 겨우 8세일 때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유다의 왕 아몬이 24세의 나이로 피살됨으로 어린 그가 유다의 16대왕 왕위에 올랐습니다. 요시야가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남 유다의 영적인 분위기는 이미 우상숭배가 극에 도달했습니다. 할아버지 므낫세이나 아버지 아몬은 요시야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전혀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상숭배를 주도해 나갔습니다.
요시야의 증조 할아버지가 히스기야입니다.
왕하18:5-6에 보면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 히스기야에 대하여 극찬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히스기야가 죽자 그 아들 되던 므낫세는 바로 우상숭배에 빠지고 맙니다. 왜 므낫세가 우상숭배에 빠졌을까요? 히스기야가 자기 자식인 므낫세를 믿음으로 양육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므낫세는 히스기야에게 특별한 아이였을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이 눈물의 기도로 15년이라는 시간의 연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15년의 생명의 연장기간에 낳은 아들이 므낫세입니다. 히스기야가 죽은 후 므낫세가 왕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가 12세,그런 귀여운 아들에게 신앙을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가 죽자 그 아들은 곧바로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요시야의 나이가 8세입니다. 너무 어려서 위태로워 보입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왕이 됩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8세에 왕이 되어 16살에 신앙이 정립이 되었습니다. 대하34장에 보면 “요시야가 곧 위에 있은지 팔년에 (16세에)그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고 그 십 이년에(20세)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케 하여 우상을 제거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사람을 준비시키십니다. 어린 요시야의 곁에서 그를 도와 믿음을 갖게 한 숨은 일꾼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특히 대제사장 힐기야의 역할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위대한 신앙의 왕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그들 곁에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조언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 곁에는 나단 선지자가 있었고 히스기야 왕에게는 이사야가 있었습니다. 요시야 왕 곁에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있었습니다.
만일 요시야 왕 곁에 믿음의 사람이 아니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가 그의 곁에 있었다면 요시야도 우상숭배에 빠졌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 곁에도 누가 있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내게 끼치는 영향력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많은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믿음의 사람으로서 우리 주위에 있는 자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요시야가 개혁을 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예배회복
요시야는 즉위 12년에는 모든 이방 우상을 파괴하고 이교적인 예배를 금지했습니다. 그러던 중 요시야는 즉위 18년에 획기적인 사건을 맞게 됩니다.
(왕하22:3-6) 요시야왕 십 팔년에 왕이 므술람의 손자 아살리야의 아들 서기관 사반을 여호와의 전에 보내며 가로되 너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올라가서 백성이 여호와의 전에 드린 은 곧 문 지킨 자가 수납한 은을 계수하여 여호와의 전 역사 감독자의 손에 붙여 저희로 여호와의 전에 있는 공장에게 주어 전의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되 곧 목수와 건축자와 미장이에게 주게 하고 또 재목과 다듬은 돌을 사서 그 전을 수리하게 하라 하니라
요시야가 26세가 되는 해에 서기관 사반을 제사장 힐기야에게 보내어 백성이 바친 돈을 가지고 하나님의 전을 수축하도록 분부하였습니다(왕상22:1-7).
성전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그 백성들을 만나는 장소로 구별하신 거룩한 장소입니다. 주님은 성전가운데 계시며 그 백성들을 만나주시겠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성전은 이렇게 방치되고 있었습니다. 성전 안에는 우상을 숭배하는 기물들을 채워져 있었습니다.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을 만나는 성전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에서 떠나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의식이 사라지고 성전예배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성전은 방치되어 퇴락한 건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요시야는 믿음이 성장하자 무너진 성전을 수축하려고 결단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면 우리 속에 채워져 있던 죄악과 불경건한 것들을 몰아내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성전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생깁니다.
신앙의 개혁은 예배의 회복이요 성전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비둘기 팔고 돈 바꾸는 어수선한 곳을 기도하는 곳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 회복입니다. 예배회복은 관계회복입니다. 예배는 나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드려지는 예배, 올려지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성전 마당 뜰만 밟고 가서는 안 됩니다. 지성소로 들어가십시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주님께 산제물로 드려지는 산 예배가 되게 하십시다. 우리의 심령의 성전에 퇴락한 것을 방치하지 마십시오. 무너진 제단에 수축하고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2.말씀의 회복
8절.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던 중에 모세의 율법서가 발견이 되었고 대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하여 서기관 사반에게 전하고 사반이 요시야 왕 앞에서 그것을 낭독했습니다.
여러분 이 부분에서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율법책이 성전 안에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신31:26에 보면 율법책을 하나님의 언약궤 곁에 항상두어 제사장들이 수시로 율법책을 읽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므낫세가 통치할 때 므낫세가 하나님의 율법책을 파손하는 것을 보고 어떤 이가 율법책을 몰래 감추어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영적인 침체기에는 이런 당연한 일, 하나님의 말씀에 접촉하는 것조차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 힐기야도 성전 속에 율법책이 있는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고치는 중에 발견한 것입니다.
본문 8절에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 율법책을 처음으로 봤다는 말로 들립니다. 만일 우리의 추측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까지 율법책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로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순종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율법책은 신명기를 가르킵니다. 신명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27장 부터 나오는 세겜언약,즉 미래언약에 대한 것 가나안에 들어가 언약을 지켜라 불순종하면 바벨론에 포로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회개의 운동이 그렇게 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율법책을 그때서야 발견했으니 일반 백성들은 당연히 말씀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없으니 제멋대로 살며 우상을 숭배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상숭배가 극심할 때(영적침체)는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 그들에게서 떠났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말씀을 잃어버릴 때 타락했습니다.
중세시대 로마 카톨릭교회가 타락할 때도 교회에서 말씀이 사라졌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교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감추어둔채 백성들에게는 저희가 필요로하는 부분만 외우게 하고 성경에 접할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였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 것뿐 아니라 성경책을 소유하는 것조차도 금했습니다.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읽는 것을 금할 뿐 아니라 성직자들 자신도 성경을 읽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잃어버리자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상실되고 사람의 사고가 오히려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은혜가 실종되고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강조되게 되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계셔야 할 자리에 성모 마리아와 사도들과 숱한 성자들과 사제들이 너도나도 끼어들었습니다.
무슨 의미인지도 알 수 없는 온갖 의식과 화려한 장식이 순수한 신앙을 밀어냈습니다. 구원과 구원의 확신을 갈구하는 뭇 심령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원하게 갈증을 해소시켜줄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열심히 면죄부만 선전하며 팔았습니다.
교회는 어느새 온갖 우상과 우상숭배로 가득차고 말았습니다. 중세말기의 교회는 그야말로 회생불가능의 상태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마틴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목숨을 걸고 종교개혁에 앞장섭니다.
이때 마틴 루터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반포함으로써 사제들의 전유물로 감추어져 있던 성경을 백성들이 직접 읽고 깨닫게 하였습니다. 사실상 이 일이 종교개혁을 성공하게 만든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3.회개운동
22:10-11 또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왕의 앞에서 읽으매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으니라
말씀을 듣던 요시야가 크게 감동합니다. 요시야가 율법책의 말, 요시야는 말씀을 듣다가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남왕국 유다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 하나님을 떠나 이방우상을 숭배한데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왕이 말씀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었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회개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왕의 권위도 자존심도 다 벗어던지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하였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통분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말씀은 우리를 회개로 인도합니다.
요시야는 오늘 당면한 문제의 핵심을 말씀에서 찾아내었습니다.
롬7:9에 보면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고 바울이 고백합니다.
말씀을 모를 때는 내가 문제가 아니라 내 환경이 좋지 못해서, 저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보니 문제는 환경도 저 사람도 아닌... 내가 문제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 요시야는 몇몇 핵심 측근들에게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고 명령을 내립니다(왕하22:13).
이 명령을 받은 이들이 여선지자 훌다를 찾아갑니다. 이때 여선지자 훌다는 아마 정부에서 공인한 성전의 여선지자로 보입니다. 당시 선지자로서는 스바냐나 예레미야도 있었지만 그들은 외곽지역에 있었습니다.
요시야는 훌다에게 물으라는 겁니다. 뭘 물어봅니까? 정말 책에 기록된 심판이 내려질 것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될것인가? 주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 여선지자에게 보냈습니다. 여선지자 훌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16,17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곳과 그 거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의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 손의 모든 소위로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이곳을 향하여 발한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왕하22:16-17)
요시야가 믿음으로 개혁해도, 하나님은 이미 이곳을 향한 진노를 거두시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우상숭배가 주님의 노를 격발하였고 그 진노를 거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시야의 믿음 때문에 주님은 요시야가 나라가 망하는 모습을 보지는 않게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예언되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간구한다고 주님의 계획하신 재앙이 스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대에 회개하고 믿음으로 서면 하나님의 우리를 멸망 중에서도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4.철저한 종교 개혁
요시야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재앙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재앙은 우상숭배로 말미암은 것이다. 네가 죽게 될 때까지는 재앙을 연기하겠다”
그렇다면 이젠 요시야가 한나라의 왕으로서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지 목표가 분명해졌습니다. 재앙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면 유다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요시야는 사명감을 가지고 본격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첫째, 말씀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열왕기하 23:1-3에 보면 왕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또 제사장과 선지자들까지 다 여호와의 성전에 모이게 하고 그 발견한 율법책의 내용을 낭독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내가 감동받은 말씀을 들려준 것입니다. 요시야는 직접 대위(강단)에 높이 서서 백성들을 상대로 자기가 먼저 여호와께 순종하여 그 계명과 법도를 준수할 것이라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위로부터의 개혁입니다. 요시야는 자신이 개혁의 대상임을 알았습니다. 내가 먼저 변하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변하면 남이 변합니다. 가정이 변합니다. 나라가 변합니다. 문제의 원인은 내가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데 있었습니다.
둘째, 우상을 제거합니다.
백성의 지지를 얻은 요시야는 결연한 자세로 철저하고도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는 갖가지 우상을 모조리 끌어내서 불살랐습니다. 우상숭배을 섬기게 한 제사장을 폐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이 우상숭배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아세라 상은 불사르고 가루로 빻아 묘지에 뿌렸고 여호와의 전 가운데 미동의 집을 헐어 버렸습니다.
셋째, 유월절을 지킵니다(왕하 23:21-23)
22절을 보면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중요한 의미가 있는 명절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유월절은 민족과 국가의 존립의 근거가 되는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것에 대한 감사요 , 자녀들에게는 신앙을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신앙의 핵심, 국가기반의 핵심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요시야가 유월절을 지키게 했습니다.
요시야는 쓰러져가는 남유다를 믿음으로 세우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2절에 보면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고 했고 왕하23:25에 보면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하23:29에 보면 요시야가 39세의 나이로 전장에서 애굽 군대에게 살해를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 요시야가 이렇게 비참하게 죽을 수 있습니까?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요시야의 죽음을 불행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죽음은 복된 죽음입니다.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의 성취입니다. 우리의 시각과 주님의 시각은 다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요시야가 비참하게 죽었는 것 같은데 주님은 요시야가 평안히 열조의 묘실로 들어갔다고 하십니다. 요시야는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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