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역대상(구속사)

역대상13장,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지 아니하면

호리홀리 2015. 8. 19. 14:53

13:1-8. 다윗은 왕이 된 후 제일 먼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자 했다. 이 궤는 본래 실로에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이 승리를 위하여 전장(戰場)으로 모셨으나 그들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인하여  블레셋에게 빼앗겼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게는 수치였고 블레셋에게는 재앙이었다. 이스라엘로부터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과 겨누어 승리한 것처럼 착각하고 기뻐하며 그 법궤를 블레셋의 땅으로 옮겼지만 하나님은 법궤로 인하여 블레셋에 독종 재앙을 내리셨다. 그러므로 블레셋 사람들에게 법궤를 탈취한 것은 재앙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법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냈다. 이 법궤는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모셔가기 전까지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다윗이 왕이 되기까지 왕궁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도 법궤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윗이 왕이 된 후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고자 한 것은 그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특별히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고자 한 것은 그의 모든 행사를 하나님께 물어 인도함을 받고자 함이었다. 다윗은 온 백성들로 하여금 법궤를 모셔오는 일에 참여하게 하였고 또한 수금과 비파로 노래하며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런 모습은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지 그리고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일을 얼마나 크게 여기고 있었는지 말해준다. 7.8절은 그때의 모습을 이렇게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13:7,8)”

우리는 다윗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또는 영적인 일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를 나타내 준다는 것을 배운다. 어떤 사람이 입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할지라도 영적인 일에 무관심하고 있다면 그의 신앙은 거짓이라는 의미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이 입으로만 하나님을 존경하고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적 예배에 대한 사모함과 참여함, 개인적으로 갖는 경건의 시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하는 열정, 하나님을 깊이 알고자 하는 고뇌 등은 모두 우리의 신앙의 진실함과 깊이를 나타내 주는 시금석이 된다.

특별히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일을 하고자 할 때 절차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누구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법궤를 옮겨 오는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법궤를 옮겨오는 일을 이스라엘 가운데 어떤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을 일이 아니고 오히려 환영 받을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독단적으로 그 일을 결정하지 않고 먼저 천부장과 백부장들을 모아 그 일을 의논한 후, 그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여 그들의 동의를 구함으로 이 선한 일에 이스라엘 모두가 참여하여 그 일이 그들 모두에게 축제가 되게 했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으로서 백성들을 존중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할 줄 아는 자였다. 또한 그는 백성들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법궤를 옮겨오는 절차도 잊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 온 땅에 거하고 있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모이 이 거룩한 일을 담당하게 했다. 이것은 그가 율법에 따라 법궤를 옮기고자 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13:9-14.  법궤를 옮길 때는 사람이 어깨에 메고 가야 했고(민4:4-15, 10:21, 수3:6), 어떤 경우에도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되었다(미4:15). 이것은 제사장들이나 특히 레위인들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사와 아히오는 법궤를 마차에 싣고 옮긴 것이다.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히오가 법궤를 마차에 싣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중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뛰었다. 이로 인하여 마차 위에 실은 법궤가 흔들리므로 웃사는 안전을 위하여 손으로 법궤를 붙들었다. 이것은 언급한 것처럼 불법이었다. 율법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죽임을 당한다(민4:15). 법궤를 마차에 싣고 가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는데 여기에 그것을 손으로 붙듦으로 불법이 가중 되었다. 이런 불법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성이 완전히 상실 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하는 법궤가 이들의 무지로 인하여 일반 상자처럼 취급됨으로 하나님의 위엄(거룩성)이 이스라엘 앞에서 상실케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앞에서 웃사를 치심으로 스스로 위엄을 지키셨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다(갈6:7). 웃사의 일로 인하여 축제는 곳 분노의 변하였다. “다윗이 노하여 그 곳을 베레스 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13:11)” 여기 “베레스 웃사”란 “웃사를 침”이라는 뜻이다. 홉니와 비느하스도 같은 죄로 죽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다윗의 책임이 크다. 그는 이 거룩한 일을 하기에 합당한 사람은 레위인들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관습에 의하여 아비나답의 아들들로 하여금 하게 했기 때문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성물을 옮기는 일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관계 된 일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물을 옮길 때 레위인들에게 가계(家系)에 따라 그들 각자가 옮길 성물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지정해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영원히 지키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이처럼 레위인들로 하여금 각자 부여받은 일에 전문가가 되게 하심으로 성물을 옮길 때 무지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성을 상실하지 않도록 하셨다. 왜냐하면 이 일은 생명과 관계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즉 레위인들이 고의는 아닐지라도 무지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성을 상실케 될 때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목격한 후, 다윗은 이 일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워하여 그날에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가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갔다. 이렇게 하여 오벧에돔의 집은 여호와의 법궤를 석 달 동안이나 모실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 집에 복을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