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사무엘하(언약적해석)

삼하 24장과 대상 21장 비교

호리홀리 2015. 7. 30. 10:57

 삼하 24:1은 인구조사의 배경을 “하나님의 진노”와 연결시키는 반면, 대상 21:1은 인구조사가 사탄의 정체와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언뜻 보기에 이 두 본문에 제시된 다윗의 인구조사에 대한 배경과 그 원인은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특히 이와 같은 신학적 난제는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이들에게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성경신학적 이슈가 아닐 수 없다.다윗의 인구조사 문제를 다룰 때 사탄의 시험에 대한 하나님의 “허용하심”혹은 사탄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섭리”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접근도 하나의 가능한 해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삼하 24:1의 “하나님의 진노”를 사탄의 시험에 대한 허용적 개념으로만 이해해야 하는가? 또한 대상 21:1의 사탄은 하나님의 섭리아래 심판의 도구로 등장하는 존재로만 반드시 보아야 하는가?

 

 삼하 24:1과 대상 21:1의 난제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삼하 24장과 대상 21장 전체를 비교해  볼 때,  두드러진 차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삼하 24장은 “다시”라는 표현으로 시작하지만, 대상 21:1에는 이런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다. 대체로 학자들은 히, “야삽”이라는 표현이 선행 단락인 삼하 21:1-14을 연상시켜준다고 본다. 둘째, 앞서 지적한 바대로 삼하 24:1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격동시켜 인구조사를 시행한 것으로 소개하는 반면, 대상 21:1은 사탄이 다윗을 격동시켜 인구조사가 이루어졌다고 기술한다. 셋째, 대상 21:1에는 삼하 24:2의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표현 대신에 “이스라엘”이라는 말로 대체되고 있다. 넷째, 대하 21:2은 삼하 24:2의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를 “브엘세바에서 단까지”로 변경시킨다. 다섯째, 인구조사의 숫자에 차이가 나타난다. 삼하 24:9은 이스라엘은 800,000명으로 유다는 500,000명으로 소개하는 반면, 대상 21:5은 이스라엘 전체 숫자를 1,100,000으로 소개하며 유다의 숫자를 470,000으로 보고한다.


삼하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대상 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각각의 본문에는 인구조사의 원인과 그 주체를 서로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난제에 직면한 학자들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각각의 해석학적 대안들을 제시해왔다. 학자들은 두 본문을 논리에 맞도록 상호 조화시키거나 아니면 후대의 편집적 관점으로 설명함으로써 이 난제를 극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입장들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 최근의 학자들은 새로운 해석학적 관점의 필요성을 인식한 뒤 이전과는 다른 대안적 입장을 제시해 왔다.

 

 상호 조화적 접근

이런 입장은 독자들에게 가장 친숙한 접근방식이다. 이와 같은 접근은 인구조사의 원인을 “하나님”과 “사탄”으로 각각 다르게 표현하는 두 본문이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이런 조화적 접근은 일찍이 역대기 탈굼에서 나타나고 있다. 역대기 탈굼은 21:1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ארשׁי תי ינממל דיודב ירגתאו לארשׁי לע אנטס הוהי םיקאו ל
        (And the Lord raised up the adversary against Israel and he was aroused against  David to number Israel) 
        
두 본문의 조화를 위해 사탄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허용적 개념을 도입한다. 즉  삼하 24:1은 인구조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강조하는 반면, 대상 21:1은 이런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사탄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이런 입장을 취하게 되면, 인구조사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유혹하는 사탄의 역사를 허용하심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박윤선 박사는 이와 같은 입장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여기 “이스라엘을 향하여”란 말은 “이스라엘을 대항하여”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이스라엘 민중의 죄를 벌하시려고 그 지도자 다윗이 사단의 유혹에 빠짐을 허용하 셨다. 여기[삼하 24:1]에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감동시키사”라고 하였지만 대상 21:1에는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고 하였다. 여기 “격동하였다”는 말은 “감동시켰다”는 말과 같은 단어이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을 격동시켜 범죄케 하신 것은 아니고 사단의 격동함을 막지 않으시고 그대로 두신 것이다. 사람이 죄의 유혹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범죄하도록 내버려 두심도 일종의 벌이다. 이 때에 하나님이 일반 민중의 죄를 벌하시기 위해 왕의 실수함을 그대로 방임하셨던 것이다.또 어떤 이들은 삼하 21:1의 사탄의 등장은 하나님의 심판을 위한 도구적 측면을 강조해 준다고 본다.
여하튼 사무엘 본문은 사탄과 다윗의 악한 의도들이 여호와의 진노의 도구로서 사용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역대기 본문은 그런 궁극적 원인(the ultimate cause)보다는 직접적인 원인(the immediate cause)에 초점을 두고 있다.
요약하자면, 이 두 본문은 다윗을 유혹한 장본인은 사탄이었으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 유혹을 허용한 것임을 나타내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두 본문은 서로 상충되는 논리를 보여주기보다는 하나의 사건에 대한 두 가지 측면 즉 “사탄의 유혹”과 “하나님의 허용하심”이라는 두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본문 그 자체의 의미로부터 벗어나 본문의 의미를 논리적 사유에 끼어 맞추는 인상을 남긴다. 하나님의 허용적 관점에서 볼 때, 인구조사의 죄를 적극적으로 부추기고 유혹한 장본인은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사탄이 된다. 다윗을 죄악에 빠뜨린 장본인은 사탄일 뿐이며 하나님은 단지 그것을 허용하신 것뿐이다. 하지만 삼하 24:1은 분명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다윗을 “감동시켰다”고 진술한다. “감동시키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여러 가지 용법을 갖고 있지만 대체로 “자극하다” 혹은 “충동하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전반적인 용법은 적극적으로 자극시켜 무너뜨리려는 의도를 암시하고 있다. 특히 이 단어는 심각한 파멸의 결과를 의도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의 의도를 갖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그렇다면 삼하 24:1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적극성과 주도성을 암시해 준다. 그러므로 사탄의 유혹에 대한 하나님의 허용적 개념은 본문의 의도와는 다소 부합하지 않는다.
또한 이와 같은 조화적 입장은 대상 21:1의 사탄의 정체를, 인간을 유혹하는 (타락한) 천사 개념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대상 21:1의 사탄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타탕한 본문분석인가? 나아가 대상 21:1의 사탄을 오직 천상적 존재로만 보아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조화적 접근과 다른 해석의 가능성도 상고해 볼 필요가 있다.

 

편집 비평학자들은 역대기 기자의 관점과 의도를 부각시키고 있으나, 실상 그들이 말하는 역대기 기자의 관점이란  가설로부터 온 것이다. 다시 말해, 역대기 기자의 관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편집 비평학자 자신들의 가설과 추론을 역대기 기자의 신학 혹은 의도에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삼하 24:1에 대한 역대기 기자의 이차적인 수정 혹은 편집에 의한 신학적 재기술을 강조하는 편집 비평적 접근에 다소 회의를 느끼면서 대상 21:1에 대한 새로운 해석적 대안들을 제시하였다. 예를 들면, 라이트(John W. Wright)와 같은 학자는 삼하 21:1의 전통적인 해석에 도전하며 획기적인 해석학적 대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전통적인 조화적 접근방식과 편집 비평적 접근과는 다른 새로운 입장을 피력한다. 첫째, 라이트는 역대기 기자의 관점에서 볼 때, 다윗의 인구조사는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역대기 기자는 다윗 왕조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다윗이 행한 인구 조사에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그에 따르면, 대상 21:1에 등장하는 사탄은 군사적 대적자를 가리키며, 이 대적자와 맞서기 위해 다윗은 당연히 병력을 점검하기 위한 차원에서 인구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인구조사는 타당한 것이다. 만약 인구조사가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여기서 라이트는 역대기 기자가 요압의 태도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역대기 기자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이유는 요압이 다윗의 인구조사 명령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래서 역대기 기자는 삼하 24장과는 달리 요압의 불성실을 크게 부각시킨다: “요압이 왕의 명령을 밉게 여겨 레위와 베냐민 사람은 계수하지 아니하였더라”(대상 21:6). 그렇다면 왜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있는가? 라이트에 따르면, 다윗은 공동체의 대리자로서 공동체의 잘못을 대신하여 회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역대기 기자는 다윗 왕조를 보다 더 긍정적으로 묘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라이트는 대상 27:24의 진술은 이와 같은 자신의 주장을 확고하게 뒷받침해 준다고 주장한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조사하기를 시작하고 끝내지 못하여서 그 일로 인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한지라 그 수효를 다윗 왕의 역대 지략에 기록하지 아니하였더라.” 결론적으로 라이트는 대상 21장에서 다윗의 죄가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요압의 잘못이 강조되고 있으며, 다윗은 죄인이 아니라 오히려 무죄한 자로서 공동체를 위해 대신하여 죄를 자복하는 의로운 자로 묘사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라이트의 주장은 우리의 관심 밖에 있었던 이슈들에 집중함으로써 매우 독특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석은 몇 가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첫째, 다윗이 행한 인구조사는 정당하며 다윗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21:8에서 다윗은 분명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라이트는 다윗이 말하는 “이 일”을 요압의 불충성으로 이해하지만 이런 해석은 보다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다윗이 행한 잘못으로 보는 것이 무난해 보인다. 둘째, 대상 27:24의 진술을 근거로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을 요압의 불충성으로 돌리는 라이트의 입장은 이 구절에 대한 여러 가지 대안적 해석의 가능성들을 살펴보지 못한 우를 범하고 있다. 예를 들면, NIV는 “그 일로 인하여”를 “이 인구조사로 인하여”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상으로 우리는 21:1과 관련된 라이트의 입장을 살펴보았다. 대체로 그의 논지는 수용하기 어렵지만 사탄의 정체에 대한 그의 해석은 주목해 볼만하다. 그는 21:1의 사탄을 천상적 존재로 이해했던 전통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역대기 상의 전후 문맥을 살펴본 뒤, 사탄의 정체를 이스라엘의 대적 특히 군사적 대적으로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