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사무엘하(언약적해석)

사무엘하24장,인구조사

호리홀리 2015. 4. 8. 13:23

 

인구조사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 - 최소한 요압이 보기에는 그렇다(3절).

그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죄악스럽다 - 다윗은 그렇게 믿게 되었다(10절).

그것은 죄악스러울 뿐만 아니라 징벌을 받아야 할 일이다 - 야웨께서 그것을 보여 주셨다(15절).

 

인구조사는 어리석고 죄악스럽다.

하지만 인구조사가 왜 어리석은 일이었는가?

그것은 왜 죄악된 것이었는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사람들의 수를 세는 것이 왜 잘못이란 말인가?


이 질문들에 대해 두 가지의 대답이 있다.

첫 번째 것은 이유를 따지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째 것은 다시 네 가지의 견해들로 나누어진다.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우선 두 번째 대답부터 살피기로 하자.

1. 요세푸스(「유대고대사」(Antiquities, 7.13.1)는 유대인들의 전통적 해석을 소개해 주고 있다.

그것은 출애굽기 30장 11~16절(특히 12절)에 근거한 것인데, 이에 따르자면 다윗은 인구조사를 할 때마다 바쳐야 했던, 각 사람에 대한 생명의 속전, 즉 인두세를 바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출애굽기 30장이 말하는 인두세가 일회적 요구사항이었고, 다윗 이후에도 계속 시행된 관례가 아니었다면, 이 인구조사에는 잘못된 것이 없는 것이다.

 

2. 다른 이들은 잘못은 인구조사를 시작한 다윗의 동기에 놓여 있다고 추론한다

그래서 그들은 ‘비난받아야 할 것은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다윗의 허영심이다’라고 말한다.

 

3 하지만 다른 이들은,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인구조사의 군사적 성격에 주목하면서(9절), 인구조사는 또 다른 군사적 정벌을 위한 준비였는데, 그것은 악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었거나 혹은 하나님의 허락의 선을 넘어서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4 마지막 추측은, 다윗이 역대상 27장 23~24절에서 아직 징병의 대상이 아닌 자들의 수를 조사하도록 요압에게 명령했다는 것이다

(즉, 나이가 아직 이십 세가 되지 않은 자들을 말한다).

아마도 다윗은 미래의 군사력을 미리 점검해 보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이스라엘을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암묵적 거부였다. 인간의 계획이 하나님의 약속을 대체한 것이다.

 

 위에 열거한 설명들 중 그 어느 것도 정확한 것은 없다.

사무엘하 24장 역시 그 인구조사가 왜 잘못된 것이었는지 분명하게 밝혀 주지 않는다.

 

 

이제 본 장에 대해 살피기로 하자.


본 장은 세 개의 주요 부분들로 나뉘어져 있고, 각 부분은 다윗이 상대하고 있는 주요 인물들에 의해 요약될 수 있다:

다윗과 요압, 2~9절
다윗과 갓, 10~19절
다윗과 아라우나, 20~25절


진노의 신비(24:1~9)
우리는 1절에서 곧장 이 신비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혹은: 진노하셨고]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여기서 ‘다시’라는 단어는 아마도 21장 1~14절의 사건을 시사할 것이다.

어쨌든 다윗은 명령을 내렸고(2절), 요압은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며(3절),

다윗은 그것을 무시했고(4절), 그래서 요압과 그의 부하들은 전국을 누비며 조사를 했다(5~9절).

 

그러나 1절의 단순한 인용은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야웨의 진노를 둘러싼 신비보다는 그 방법론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든다.

어떻게 야웨는 다윗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가 죄스러운 행동을 취하도록 만들 수 있었는가?

역대상 21장 1절의 평행구에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역대상 21장 1절과 사무엘하 24장 1절을 결합시켜서 읽으면, 우리는 사무엘하 24장 1절이 하나님의 허용적 의지를 다루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사단이야말로 진짜 범죄자였다;

야웨는 단지 그것을 허용했을 뿐이다.

 

 두 본문들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허용적 의지에 호소하는 것은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허용적 의지라는 것이 우리 귀에는 더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허용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피하기 위해 사단을 이용할 수 없다.

사무엘하 24장 1절에서의 야웨의 책임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 다른 것들이 사용되기도 한다.

「현대어 성경」(Modern Language Bible)은 ‘수트’(sut; 자극하다, 충동질하다, 깨우다)라는 동사를 비인격적 의미로 번역한다:

‘어떤 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그들을 대적하도록 자극했다.’

이것은 가능하긴 하지만 자연스러운 번역은 아니다.

우리는 보통 동사 앞에 등장하는 절 속에서 주어를 찾는데, 이 경우에는 야웨 혹은 야웨의 진노이다.
영어 성경 NASB는 ‘그것은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라고 말하도록, 또 그것들을 대적하도록 다윗을 자극했다’라고 번역함을 통해 야웨의 직접적 연관성을 감소시킨다.

주어로 번역된 ‘그것’이란 ‘야웨’가 아니라 ‘진노’를 지칭한다. 물론 엄격히 말하자면 이런 해석은 정당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야웨의 진노이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동사의 핵심적 주어로 남아 있다.

그의 진노는 그에게서 독립하여 작용하는 어떤 제3의 존재가 아닌 것이다.

NASB는 히브리어 부정사 ‘레모르’(le’mor)를 ‘말하도록’(to say)이라고 번역하여, 그 다음에 등장하는 명령이 다윗의 것이며 야웨의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도록 했다.

이것은 그럴듯한 번역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번역들은 대부분 이곳의 부정사를 ‘...라고 말하며’(saying)라고 번역한다.

그럴 때의 의미는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앞의 주어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이 경우에는 야웨가 주어이다). 이 형태는 우리가 가끔 ‘내가 ...라고 인용하는 바’라고 말할 때의 용법과 같다. 여러 번역들을 살펴보았지만, 나는 아직도 문법적으로 보았을 때 더 자연스러운 해석은 그 말을 야웨의 것으로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윗은 야웨가 명령한 일을 행한 것에 대해 어떻게 비난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모른다.

하지만 신학적 난제를 회피하기 위해 본문을 적당히 변조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10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죄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기자는 야웨의 역할을 명령의 ‘형태’를 통해 드러낸 후(1절), 이어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 ‘참된 진실’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즉 다윗에게 책임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문제의 일부는 우리가 그런 문제들에 대한 히브리적 사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월터 카이저(Walter Kaiser)는 역대상 21장 1절과 사무엘하 24장 1절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히브리적 사고에 따르자면, 무엇이든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행하시는 것이다. 이 인구조사를 허용하심을 통해, 하나님은 그 행위를 야기한 자로 간주된다.

히브리인들은 이차적 원인들을 결정하고, 그것들과 일차적 원인과의 적절한 관계를 설명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그분의 탓으로 돌려졌다;


이제 다시 1절(“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로 돌아와 진노의 신비라는 주요 쟁점을 살피도록 하자. 대부분의 독자들이 감지하는 명백한 난점보다 더 깊은 신비가 이곳에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야웨의 진노가 타올랐고,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진노의 매개체로서 다윗의 죄악을 사용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왜 야웨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본문은 우리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 않다. 더흐라프(De Graaf)는 다음과 같이 믿고 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진노가 백성들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야기시키셨다. 그것은 아직 징벌을 당하지 않은 그들의 죄악들 때문이었다. 백성들이 다윗을 거부하고 압살롬, 그리고 세바를 좇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들은 언약의 ‘머리’를 거부했고, 결국 그것을 통해 주님의 언약 그 자체를 거부했던 것이다. 이것 때문에 주님은 이제 그들을 징벌하시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앞선 장들을 바탕으로 추정한 그럴듯한 설명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단순히 알지 못할 뿐이다. 본문 자체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본문은 야웨의 진노라는 사실에 대해서만 말할 뿐, 그것의 원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을 설명하셔야 하며, 자신의 방법들을 정당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우리가 본문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을 것이다.

만약 본문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는 말하면서도 그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해 우리가 마음이 상해 있다면, 그것은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믿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들 속에는 하나님 안에 신비들이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성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실 의무가 있다고 은근히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자비의 따스함(24:10~19)
다윗은 분명히 어떤 선지자의 간섭 없이 죄를 확신하게 된 것이다.

갓은 다윗이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 다음에 그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기 위해 왔을 뿐이다(10절).

그는 다윗을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었다.

갓은 다윗에게 야웨께서 그의 앞에 세 가지 선택사항을 두고 계시며, 그는 그것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11~12절):

 삼 년 간의 기근인가, 석 달 동안 대적에게 쫓길 것인가, 아니면 삼 일 동안의 온역인가(13절)?

 

우리는 다윗의 대답(“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14절)을, 그가 선택사항들 중 두 번째 것을 제외시켜 버리고, 나머지 선택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야웨는 역병이 돌게 하여 칠만 명을 죽이셨다(15절). 그것은 9절의 교만한 통계에 대해 치명타를 날리신 것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야웨의 자비하심을 잘 알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16절). 진노는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멈추었다.
다윗은 야웨의 자비하심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 만약 본문의 상세한 부분들을 잠시 그대로 놓아두고 24장 전체의 구조를 살핀다면, 우리는 다윗의 강조점을 더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24장의 구조에 대한 제안>
진노와 명령들, 1~2절
요압의 반대와 다윗의 주장, 3~4절
여행과 통계, 5~9절
다윗의 뉘우침과 갓의 방향제시, 10~13절
자비하심을 신뢰함, 14절
진노가 쏟아짐, 15절
자비가 드러남, 16절
다윗의 뉘우침과 갓의 방향제시, 17~18절
여행과 그 목적, 19~21절
아라우나의 반대와 다윗의 주장, 22~24절
제사와 진노, 25절

 모든 본문을 위와 같이 깔끔하게 정돈된 구조로 보는 것에 대해 의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론의 금송아지처럼(출 32:24) 결과가 이렇게 나온 걸  어쩌란 말인가? 어쨌든 본 장의 핵심은 이스라엘에게 진노를 쏟으시는 야웨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15절);

하지만 15절 직전과 직후의 구절들이 야웨의 자비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하라.

  이것이 본 장 전체의 색깔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자비에 둘러싸인 진노.’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14절의 다윗의 진술에 대해 계속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다윗이 이런 종류의 진술을 하는 것을 우리는 최소한 세 번째 듣고 있다(12:22과 16:12 참조). “내가 곤경에 있도다”라고 다윗은 말한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다윗은 이제 막 야웨의 진노를 당하려 하고 있지만, 그분의 자비를 확신하고 있다.

 그분의 손이 자신을 치시기는 해도, 그분이 또한 자신을 아껴 보실 것이라는 사실을 다윗은 알고 있다. 다윗의 추측은 놀라운 것이다!

14절에서의 그의 말은 필요한 체념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무한한 위로를 보여 주고 있다. 그가 자신의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눈여겨보라!

위기들 속에서 그의 신학이 거의 반사작용처럼 튀어나오고 있다.

우리의 믿음의 경험이 바로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은 자신의 가장 어두운 순간들을 위해 당신의 가장 훌륭한 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인생의 재앙들과 죄악의 순간에 ‘야웨의 손에’ 빠지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있겠는가?

 

 우리는 자비를 하나님의 성품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어떤 예외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자신이 하나님과 직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여기 자비를 움켜쥐고 있는 신자가 있다.  자비가 그를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속죄의 필요성(24:20~25)
우리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따라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16절의 내용을 살필 필요가 있다. 야웨의 자비하심에 대한 다윗의 생각은 옳았다. 파괴의 천사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했을 때, 야웨께서는 그 재앙을 멈추게 하셨다. 자비가 진노를 억제했던 것이다: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야웨의 천사가 징벌을 멈추었을 때, 그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있었다. 갓은 다윗에게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고 말했다(18절); 다윗은 갓의 명령에 순종했다. 그것은 또한 야웨의 명령이었다(19절).
만약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세워진 제단이 야웨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면(19절), 그곳에서 드려진 제사들 역시 명령에 의한 것이어야 했다. 이것은 그 상황이 16절 끝 부분에서 완전히 종결된 것이 아님을 뜻한다. 진노는 그 자리에 멈춰 섰지만, 아직 희생이 치러진 것은 아니었다.

16절에서 징벌은 멈추었다. 그러나 징벌 뒤에 있는 진노는 단지 삭감되거나 ‘대기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처리가 되어야 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화해가 이루어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5절의 제단과 제사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속죄라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다윗과 그의 측근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아라우나는 밖으로 나가 그들을 맞는다. 그리고 왕에게 합당한 예우를 갖춘 후, 왜 그가 자신의 타작 마당으로 왔는지를 묻는다. 다윗은 이렇게 대답한다: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21절 하반절).

야웨의 진노의 표현인 역병의 완전한 종결과 앞으로 드려질 제사들 사이에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다. 아라우나는 제사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주변 기물들(아직 그 마당 자체를 주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지 않는가?)을 무료로 제공하려고 하는 것 같다(22~23절).

 

그러나 다윗은 공정하고 완전한 가격을 지불할 것을 주장하고, 은 오십 세겔을 달아 준다(24절)

 

그리고 그곳에서 다윗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 그러자 모든 것이 변한다. 야웨께서는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셨다’(25절; 21:14 참조).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다’(여기서 사용된 동사 asar는 21절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 것이다. 21절에서도 ‘그치다’로 번역했다).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가 노래한 대로 ‘그것은 모두 은혜’였다.

자비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노를 억제하신 것이다(16절); 그리고 자비의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친히 제시해 주신다. 그것은 속죄제사를 통해서이다(21, 2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