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전서3장,열정

호리홀리 2015. 6. 25. 13:43

 2장의 말미에 등장하는 '열정'(ephithumia)이라 번역한 단어에서 잡으면 적절할 것 같다(살전 2:17). 그저 의무감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의 속에는 그를 충동하는 강렬한 힘의 분출이 있었다.   그는 이미 데살로니가를 떠났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은 멀고 진척시켜야 할 일이 앞에 산더미같이 놓여있다. 그저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 생각하고 전방에 닥치는 일들에 몰두하는데도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라면 보통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와 같은 경우를 골치 아픈 과거지사로 돌려 곧 잊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울이 자신의 사람들에 대해 갖는 애정의 강렬함은 분명히 남다르다.

 

 

     열정(3:1-10)

        바울은 두고 온 데살로니가 신자들에 대한 염려를 참아낼 수 없었다고 쓰고 있다. "참다 못하여" 디모데를 보내야 했다(3:1-2). 그들의 믿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점검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3:5). 바울에게 있어서 이 사랑의 열정은 억누르면 그 속에서 번민이 된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8).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자신의 양무리를 간절히 보기 원한다 했다(3:6). 그는 사람 만나기를 좋아했다. 대부분 자신에게 어떤 필요가 있기 때문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귀찮아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바울의 고단한 심신을 더욱 고단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을 향해 보고싶어 하는 열정을 발산하여 더욱 그들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이러한 열정은 디모데를  파견하게 만들었다(3:2). 사람을 보내 점검과 대언(代言)이라도 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을 만큼 그들에 대한 애정은 강렬했다. 그들에 대한 열정이 참을 수 없는 정도가 되었는데 직접 갈 수가 없으니 자신을 대표할 사람이라도 보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디모데가 돌아와 긍정적인 소식을 전하자 그것이 바울에게는 곧바로 행복이었다. 고린도에서의 가난과 어려움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데살로니가로부터의 좋은 소식은 그러한 고난을 위로하는 힘으로 구실한다(3:7). 이어지는 고백은 가히 압권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3:8). 바울의 삶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것이었다. 그들이 살아야 바울이 사는 것이다. 설사 바울이 죽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제대로 되면 바울은 사는 것이었다. 철저하게 사역지향적인 삶이다. 감탄을 자아내는 타자지향적 자아정체이다. 너의 행복이 나의 삶이다. 

 

    이러한 열정은 어디서 오는가?  종말론적 확신 때문이었다. 바울은 현재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의 운행이 인생과 역사의 모든 것이 아님을 잘 알았다. 그냥 추론한 것이 아니라 확신하였다. 마지막 때에 그들로 인해 주와 함께 누릴 기쁨을 생각하면 영광의 비전으로 충만했다(2:20). 주께서 강림하실 때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그분께 드려야 함을 염두에 두었다(3:13). 그러한 종결을 바라보며 현재 하나님 앞에 갖는 충성이었다. 이러한 강한 확신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충성심이 그로 하여금 이토록 극성이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