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전서2장,사도권

호리홀리 2015. 6. 25. 13:29

2장
1-12은 바울의 목사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나고 있는 부분이다. 특히 이 부분은 전통적으로 바울의 자기 사도직에 대한 변증의 부분으로 보았는데 왜 바울이 연약한 신앙인들인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변증하는 것이 필요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가 역사적인 배경으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떠돌이 냉소주의 철학자로 매도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외양적으로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떠돌이 냉소주의 철학자들과 별반 틀릴 것이 없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러한 점을 악용하여 유대교를 떠나 새롭게 그리스도인들이 된 연약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미혹하였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이 스스로 자기 변증을 할 필요가 있었고 또한 더 나아가 자비량 원칙을 아주 고집스럽게 주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일들을 통해 떠돌이 스토아철학자들이나 혹은 냉소주의 철학자들과 차별화를 이루려 한 것이다.

그러면 바울의 변증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2-4
2-4을 통하여 바울의 사도로서의 자기 이해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복음전하는 자로 인정됨'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전할 사명을 위임 받았다는 것이 바울의 사도로서 자기이해의 기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다(4)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빌2:12절의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의 태도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하고 의지하면서 그의 사도직을 감당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도로서의 자기이해는 고난과 능욕을 당하는 중에도 용기를 잃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했으며(2) 또한 복음을 전하는데 옳지 않는 동기로 전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솔직하고 투명하게 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3).
그러므로 당연하게 그는 인간들로부터 자유하며 5-6절에 나와있듯이 “탐심의 탈을 쓰지 않고 또한 사람들에게는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라고 사도 바울은 아주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거나 평가가 전전긍긍하지 않았고 또한 사람들에게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6-7
6절에 나와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권세를 행사할 수 있으나)”란 말씀은 사도 바울이 예수의 말씀을 재 확인하고 있는 것인데(고전9:14) 이 사도의 권세를 말하면서 자신은 그런 영광을 구하고 있지 않고 도리어 유순한 자가 유모와 같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돌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도바울이 자기의 권위에 대해서 아주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편지이다. 또한 데살로니가전서의 전체가 교인들에게 권면하고 혹은 명령하는 글들이다. 그래서 아주 상징적으로 2:11절에서 '위로한다'라고 쓰인 단어가 이중적으로 '명령한다'고 쓰이고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체에서 특히 4장의 곳곳에서 부드럽지만 강한 권면이나 명령을 내리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의 구체적인 지시와 명령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나타내고 있지만 이것은 자신을 위해서 권위를 내세우는 것도 아니고 직위를 힘입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이 모든 권면이나 명령은 자기의 봉사에 근거해서 겸손하고 유순한 섬김의 자세와 유모의 모습으로(6-7) 혹은 자비량 함으로써(9) 얻은 사도의 권위를 힘입어 권면하고 명령하고 지시하고 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자기의 희생적 봉사에 근거해서 영적 도덕적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높은 사도적 권위의식을 나타내지만 절대로 권위주의적인 것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아서 사심이나 탐심이 없이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함으로 얻은 영적 도덕적 권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권위는 전적으로 복음을 위한 권위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스스로 희생하면 힘들게 자비량의 원칙을 고수한 것도 자신이 떠돌이 철학자 정도로 권위가 떨어지면 그들의 철학적 지식과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동일시 될까봐 그가 스스로 높은 영적 도덕적 권위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가지고 높은 선교의 성취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권세를 부리거나 주장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의 하는 말이나 그의 모든 가르침은 함부로 거역할 수 없는 상당한 권위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사도의 진정한 권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사도의 참 권위주장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자로서의 자기 이해를 갖고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정직하게 전할 때 그리고 자신의 탐심이나 유익을 위해서 인간들과 타협하거나 아첨하지 않고 사도로서 자세를 견지할 때 참된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럴 때 사도 바울은 진정한 사도의 권위는 말씀의 권위이지 직위의 권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0절에서 자신의 행위를 한마디로 “거룩하고 옳고 흠 없는 삶”이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자비량 원칙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다른 각도에서 좀 더 심도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울이 자기 손으로 육체적 노동을 통해서 자기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을 전한 이 태도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만 하는 원칙인가? 우리는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가 마땅히 본받을 만한 부분이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전에 이미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교회로부터 마땅히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 바가 있다(마10:10, 눅10:7). 그래서 바울 이외의 다른 사도들은 심지어 아내까지 동반하고 다니면서 교회로부터 헌금지원을 받아 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바울은 고전 주께서 주신 이 권한을 일체 쓰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9장).
이렇게 바울이 굳이 자비량 원칙을 고수하려 했던 그 의도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 했다. 즉 지식을 돈을 가지고 파는 스토아철학자들이나 혹은 냉소주의 철학자들과 차별화를 이루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그들이 전하는 철학적 지혜의 사변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또한 더불어 누구에게도 신세나 빚을 지지 않으므로 복음을 전함에 있어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하려한 바울이 강한 의지의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바울의 그러한 의도를 우리가 충분히 인정한다 하더라도 바울이 마치 예수의 말씀을 어기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굳이 취하느냐 하는 것이다(사실 이 부분은 자유주의 학자들로부터 예수와 바울의 신학적 연관성에 대해서 공격 당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자구적인 해석보다 그 정신을 구현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즉 복음의 효과적인 선포수단을 찾으려고 복음을 전하는 그 자세와 방법을 차별화하며 복음의 은혜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자비량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사도 바울의 이 태도는 예수 말씀의 자구적인 해석보다 더 철저하게 예수 말씀의 실천하고 삶속에 구현하려고 노력한 증거인 것이다. 


목사가 자기 회중의 눈치를 보거나 아첨하지 않고 구원의 복음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자의 자세로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온전하게 전한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던지는 큰 교훈이자 도전인 것이다. 사역자가 이런 자세를 갖고 있어야만 인간들로부터 자유할 수 있고 인간적인 탐심으로부터도 자유할 수 있다.

아울러 사도 바울의 자비량 원칙이 주는 모범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원래 우리에게 준 교훈이 정상적인 것임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만약 교회의 지원을 받아서 사역자가 복음을 전하는데 더욱 전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욱 훌륭한 태도인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복음을 전하는데 더욱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어떠한 태도라도 취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