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전서3:10-4:12,하나님을 기쁘시게

호리홀리 2015. 6. 25. 13:46

 권면(3:10-4:12)

 

  1)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고 싶다(3:11-4:2)

    온종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여 그들을 대면하기 원하는 것은 저들에게 더 보충해 주어야 할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상관없는 남에게 무엇이 좀 부족한 것이 있다 한들 그것이 별다르게 눈에 들어올 이유가 없다. 그러나 자식을 바라보는 아비의 눈에는 항상 부족한 것이 보이고 그것 때문에 노심초사한다. 저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어야 나가서 사람 구실을 할 터인데. 제대로 가르치고 구비(具備)를 시켜 놓아야 이 험한 세상에서 잘 살아나갈 터인데. 바울이 그들을 그렇게 간절히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영적인 아비의 눈에 들어오는 자식들의 믿음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야만 한다는 열정 때문이었다(3:10).

 

   보충해 주고 싶은 것은 사랑과 성결 두 카테고리로 요약된다(3:12-13). 토라에 입각한 유대인의 삶은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두 범주로 수렴된다. 바울도 율법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이 두 덕목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기준을 삼고자 했다. 우선 데살로니가 공동체가 상호간의 사랑으로 "더욱 많아 넘치게" 되기를 소망한다(3:12). 그리고 주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 그들이 경건에 있어 흠이 없기를 소원한다.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4:13b). 하나님 사랑(경건)과 이웃 사랑은 복음서의 예수께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응답으로 주신 것이기도 하다(마 22:37-40, 막 12:30-31, 눅 10:27). 인생은 경건과 사랑이다. 두 가지를 잘 점검하면 대개는 문제가 없다.

    2) 거룩해야 된다(4:3-8)

    경건과 관련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은 우선 그들의 성윤리(性倫理)의 정립이다(4:3-8). 하나님의 뜻이 '거룩'이라 하면서 첫 번째로 짚어주는 것이 '포르네이아'(성적 부도덕)를 버리라는 것이다(4:3). 이 점에 있어서 문제가 있으면 단지 사람에게 잘못하는 것이 아니다. 포르네이아는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 하여 경건의 손상으로 취급한다. 같은 논리에서 후에 고린도의 신앙공동체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이렇게 쓴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포르네이아)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5-20).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 몸을 성적 부도덕으로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불경의 죄라는 말씀이다.

    가) 데살로니가의 성 풍속도

    생각만 해 보아도 그토록 감사함이 우러나오게 해 주었던 신앙공동체에게 제 일성(一聲)으로 주는 도덕덕 권면이 성적 순결의 요구라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뜻밖이라는 의아함의 느낌을 갖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대 그레코-로마 세계의 성 풍속도를 조금만 살펴보면, 대놓고 언급하기에는 다소 쑥스러운 영역에 단도직입적으로 정면승부를 거는 바울의 우려를 이해할 수 있다.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던 디오니수스, 아프로디테, 오시리스와 이시스 등의 제의(祭儀)는 성적인 방종을 조장하는 경향을 지닌 행습을 장려했다. 종교적 실천이 반드시 적절하지 못한 성행위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 분위기에 익숙했던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이 소개한 새로운 종교에의 귀의가 굳이 새로운 성윤리의 정립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젊은이가 혼전에 갖는 성관계가 사회적으로 용인된 관행이었다. 데살로니가에서 머물었던 적이 있었던 키케로도 이런 행위가 자신이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그로부터 오는 쾌락을 취할 자유가 있다고 옹호했다. 

 

     나) 성윤리의 재정립

    이와 같은 환경에 둘러싸인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바울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살전 4:3). 위에 인용한 고린도전서 6:15-20에서와 같이 신자의 몸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성전이니 이를 거룩하고 존귀하게 잘 관리해야 된다는 생각이다(4:4). 우리의 한글 성경들은 4절의 '스퀴오스'(=그릇)를 아내에 대한 우회적 은유로 생각하는 해석의 입장을 취하여 아예 '아내'로 번역을 해 버렸다. 뒤이어지는 6절이 다른 사람의 아내와의 불륜을 암시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고 베드로전서 3:7에서 아내를 가리켜 '더 약한 그릇'이라 한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선택도 무리한 것은 아니다.

   바울이 어떤 생각으로 '그릇'이라는 말을 사용했던지 본문에서 의도하는 바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복음의 윤리에 어긋나는 부도덕한 성관계를 지양하라는 점은 분명하다. 바울은 전에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이미 이러한 가르침을 베풀었었다. 이런 새 생활의 윤리는 주변의 풍습과 차별성을 가지며 "주 예수로 말미암아" 준 계명이었다고 상기시킨다(4:2). 확실히 복음은 기존의 풍습과 갈등을 일으키는 새로운 차원의 윤리를 요구할 때가 적지 않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던 일들이 복음의 사도 바울에게는 심각한 죄악이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반복하여 강조하며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바울이 갖는 '극성스러운' 관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로마서 15:16에서 바울은 지난날의 이방인 사역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흠과 점이 없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제사장의 것에 비유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주 예수 다시 오실 때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제물과 같이 흠이 없어야 할 것이다(살전 3:13, 5:23). 그래서 가장 염려가 되는 부분에 대해 재차 강조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이와 같은 옛 행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6절에 언급하고 있는 일이 실제 상황일 수도 있다. 아니면 요즘 같은 환경에 딸자식 가진 부모가 염려를 놓지 못하고 그러하듯이 혹시나 하여 잔소리처럼 반복하는 주의일 수도 있다. 이미 바울은 그들이 "거룩하고 옳고 흠이 없이"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한 바 있었다(2:10). 어쨌든 이 점에 있어서는 바울이 긴장을 풀고 안심하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자지 말고 깨어 근신하라"(5:6).

    3) 형제 사랑은 잘 하고 있다(4:9-12)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사랑에 대해서는 비교적 안심하여 신뢰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거룩함에 대해서는 주변 환경 때문인지 많이 염려를 했다. 하지만 이웃사랑에 대해서는 더 쓸 것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4:9). 데살로니가가 속해 있는 속주(屬州) 마게도냐에 있는 모든 신자들에게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를 많이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던 것 같다(4:10).

   오히려 우려는 풍성한 형제 사랑의 나눔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향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나 복지제도가 발달한 나라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이다. 사회적 혜택이 항시 준비되어 있다 보니 이러한 사랑의 수혜를 악용하는 사고구조가 형성되기 싶다. 사랑의 명령은 언제나 사랑을 이용하여 기생하는 부류를 형성할 위험을 감수해야 된다. 현명한 이기주의자가 되라고 외쳤던 요리후지 카츠히로 교수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자기가 손해를 보면서도 무조건 상대방을 위한 행동만 하는 이타주의자들을 '선심파'로 정의했고 이러한 선심파가 많아지면 이들을 등쳐먹고 사는 '사기파'도 덩달아 많아지기 때문에 건강한 사회가 되지 못한다고 보았다. 틀리지 않은 말이다. 사랑이 삶의 규범으로 지배하는 사회에는 반드시 그 사랑을 악용하는 마음의 상태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바울은 이를 염려했던 것 같다. 아니, 이미 데살로니가를 중심으로 하여 마게도니아 그리스도인들 속에는 이러한 기생적 게으름뱅이들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명한다(4:11). 잘못하면 사랑의 공동체가 오히려 남에게 의존하여 사는 버릇이 들어있는 게으름뱅이들의 집단으로 악명을 얻을 수도 있다. 외인(外人)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건강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우려하며 권고하는 것은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도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