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전서4:13~18,파루시아

호리홀리 2015. 6. 25. 13:57

파루시아(4:13-18)

     이들은 예수의 강림 때에 이루어질 구원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공동체였다. 모든 현재의 생각과 행동은 그날의 강림과 구원의 완성과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었다. 예수의 '파루시아'(=강림)와 함께 이루어질 이 세계의 종말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알고 있는 복음의 핵심이었다. 신약성서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인정되는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이 그들에게 전했던 전도 메시지로 암시된 1:9-10은 초기 복음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있어 긴요한 열쇠가 되는 구절이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9-10).

    구원은 앞으로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고 그것은 강림하는 예수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그들의 삶은 예수의 강림을 기다리는 삶이었다(1:10).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예수 강림 때 바울의 기쁨이요 자랑이며 면류관이었다(2:19). 그들의 신앙은 곧 기다림이었다. 그리고 바울의 극성스러운 염려와 돌봄은 바로 이 강림 때까지 공동체가 흠 없이 보전되기를 바람에서였다(3:13, 5:23).

    1) 에스카톤의 청사진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된 이 신앙의 공동체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저들이 겪었던 것으로 보이는 핍박의 결과였을 수도 있다(2:14).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이렇게 죽은 자(들)로 인해 많이 슬퍼했음에 틀림이 없다(4:13). 극성스런 바울이 어찌 이를 그냥 두고 넘어갈까. 저들이 세상의 소망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일찍 죽었다고 해서 그들이 주님 다시 오실 때에 하나님 나라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는 것은 아니다. 이미 가르쳐서 알고는 있겠지만 좀더 확실하게 정리를 하여 위로하고 흔들림이 없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핵심이 되는 '에스카톤'(종말) 완성의 청사진을 그려준다.

 가) 기본 진리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 그리고 주안에서 죽은 자들도 그의 부활과 연합하여 마지막 때에 다시 살 것이다(살전 4:14, 참고, 롬 6:5, 고전 15:12-19).

 나) 에스카톤의 시간표(4:16-17)

   ① 호령, 천사장의 소리, 나팔소리와 함께 강림(예수의 파루시아[출현])이 시작된다.

   ②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죽은 신자의 부활).

   ③ 남아있던 신자들이 부활한 신자들과 함께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

   ④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먼저 죽은 자들을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들과 비교해 볼 때 그들이 주님의 강림 때에 불이익을 겪을 이유가 없다는 요지이다. 그러니까 주 안에서 죽은 자들로 인해 너무 슬퍼 말고 서로 위로하면서 힘을 내라(4:18).

    2) 파루시아에 대한 의문들

    사실 이렇게 그려주는 에스카톤의 실상을 우리의 사고로 정확하게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한된 시공(時空)에 갇힌 경험으로 학습된 우리의 인식으로는 아직 궁금한 것이 너무도 많다. 둥근 모양의 광활한 지구에 흩어져 살고 있는 수많은 신자들이 동시에 천지개벽의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 그리고 팡파레를 어떻게 들으며 강림하시는 주를 볼 수 있는지 궁금하다. 물론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 어느 한 공간을 통해 나타나신다 해도 카메라에 잡히기만 하면 위성을 통해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장면을 사운드와 함께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우 신약의 다른 문서들이 증거하는 '동시 목격'도 가능한 상상이 된다.그러나 이것은 역시 상상일 뿐이다.

    가) 파루시아는 초역사적이다

    예수의 '파루시아'에 대한 바울의 묘사는 우리의 역사(歷史)가 마감되어 그 역사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새롭게 열리는 세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어차피 상징적이다. 소리나 모습이 모두 사실적 묘사이나 그 묘사의 개념과 이미지는 어차피 이 현실 세계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인(sign)이 되어 가리키는 실재는 우리의 사고 범주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굳이 티브이 위성중계를 들이대지 않아도 된다. 유사한 힌트를 찾아본다면, 고린도전서 15:51-53을 유념하여 읽어야 할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바울의 이 증언에 따르면 우리는 파루시아를 현재 인간존재의 물리적 제한 속에 맞는 것이 아니다. 나팔 소리가 울리는 순간 역사의 시공(時空) 제한은 소멸되고 만다. 죽은 자들이나 남아있던 자들이나 현재의 껍데기를 탈피한다. 그리고 썩지 아니할 그 무엇, 죽지 아니할 그 무엇으로 바뀐다.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고전 15:49)을 입는다 했다. 우리가 시간과 공간에 갇히는 것은 바로 "흙에 속한 자의 형상"에 속했기 때문이다(고전 15:48). 한 시점에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변화된다면 지구가 둥글건, 땅덩어리가 얼마나 넓던, 강림하는 주님과의 거리가 아무리 멀던,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는 바울이 '미스테리온'(= 비밀 = mystery, 고전 15:51)이라고 부르는 그 어떤 신비한 방식으로 모두 함께 주를 목격하며 그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나) 개인의 종말과 우주적 종말

    또 한가지 자주 의문에 부쳐지는 것은 바울의 편지 이후 상당한 시간이 경과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개념에 잘 잡히지 않는 시간의 거리이다. 바울은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의 가능성을 두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 1:23).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 그대로 들어서 이해하자면 바울이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 옆에 달린 강도 하나도 비슷한 약속을 받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분명히 바울도 환상(입신) 중에 경험한 낙원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후 12:4). 즉 바울을 비롯한 신자들은 죽음과 함께 이미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거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을 '잔다'고 하며 파루시아 때까지 땅 속에 있는 것으로 언급하는 데살로니가전서와 고린도전서의 본문은 이런 생각들과 심각한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역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초역사적 세계가 갖는 신비의 영역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일단 인간은 현재 우리를 제한하고 있는 물리적(物理的) 세계를 벗어나면 시간과 공간의 제한도 벗어난다. 성경에서 자주 말하는 영원(永遠)이란 개념도 '지리하게 계속되는 장구한 시간'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할 것 같다. '영원'이란 시공(時空)을 초월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곳에서는 우리 식 개념의 시간 길이는 별 의미가 없다. 베드로후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신자들은 죽는 순간에 바로 파루시아의 시점으로 건너뛴다. 죽는 순간에 시간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자들은 죽는 순간에 바로 파루시아 때의 부활을 경험하여 강림하시는 주님과 함께 영원 속에서 같이 살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낙원'은 바로 그렇게 주님의 강림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동거의 현장이며 실재이다. 따라서 죽은 자들이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고후 5:8, 빌 1:28)과 죽은 자들이 변화된 형상으로 부활하여(고전 15:51-53) 주님을 맞아 영원히 동거한다는 것(살전 4:16-17)은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 두 다른 방식의 표현이 된다. 그리고 죽음을 통과하는 개인적 종말과 파루시아를 살아서 맞는 우주적 종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된다. 단지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나 물리적 육신을 벗어나는 순간에 시간의 의미는 없어지니 그 차이 또한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살전 4:15).

      3) 종말론을 위한 변명

    바울 복음의 핵심에는 종말론이 있다. 종말론의 신앙은 도피적인 환각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 기초한 확실한 소망이다. 사람들은 사라져 없어질 것을 붙잡고 살면서 스스로 현실적이라고 고집한다. 썩을 것에 매여 더 중요한 것을 마구 희생하며 살면서 현실적이라 한다. 가장 사실적인 현실은 누구 하나 예외없이 종말(에스카톤)을 맞는다는 것이다. 개인적 종말과 우주적 종말의 구분은 물리적 육신에 갇힌 한계 존재의 미련한 오산(誤算)에 지나지 않는다. 종말은 현실이다. 그리고 종말론은 가장 현실주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말의 그 날을 사모하는 것(벧후 3:12a)은 방향을 바로 잡아 현실을 직시하는 가장 현실적인 현실주의이다. 종말론이 실제이다. 끝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렇다면 끝을 염두에 두고 사는 것이 가장 현실적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끝을 사모하는 것은 내세주의가 아니다. 소망을 갖고 그 소망을 현재에 끌어다 사는 엄연한 현실주의이다. 반드시 있게 될 끝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어서 그것을 사모하면서 현재를 사는 것이 정작 똑똑한 전략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