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전서의 특징

호리홀리 2015. 6. 25. 13:18

데살로니가전서의 특징

1. 칭찬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이 쓴 그 어떤 다른 서신보다 성도들에 대한 칭찬으로 가득 찬 서신이다. 그런데 이러한 칭찬의 표현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사도바울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표현인 것이 분명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분히 수사학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표현들이다. 즉 바울은 이러한 칭찬의 표현들을 통해서 연약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인정해주고 추켜세움으로 지금까지 그들이 어려운 환경 가운데에서도 훌륭히 지켜온 그 덕목들을 유지하며 계속 그 길을 걸어가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첫번째 부분은 1:6-10절로 이제 신앙생활한지 겨우 4-5개월밖에 안된 자들을 말하면서 이들이 이 마게도니아 전체 기독교인들의 본이 되었다고 대단한 칭찬을 하고 있는 바울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연관된 성경구절인 고후8:1절을 통해서 알아보면 "마게도니아 교회(데살로니가 교회와 빌립보 교회)가 환란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넘치는 기쁨있고 극한 가난 가운데에서도 풍성하게 연보 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단순히 수사학적인 언급으로만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들은 핍박과 극한 가난 가운데 에서도 훌륭한 믿음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칭찬하고 있는 부분은 2:13-14절인데 여기서 바울은 그와 떨어져 아무런 신앙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도 바울이 전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여러가지 핍박과 어려운 상황을 믿음안에서 잘 견디고 있는 성도들을 칭찬함으로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 아울러 그들이 받는 고통과 고난은 전 세계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 함께 겪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상기시킴으로 그들을 위로하려는 수사학적인 의도도 함께 갖고 있다.

세 번째 칭찬하는 부분은 3:6-10절로 연약한 성도들은 남겨둔 채 데살로니가를 떠나온 바울이 그들에 대한 걱정으로 노심초사 하다가 고린도에 머물고 있을 때 디모데로부터 좋은 소식을 전해 듣고는 그 마음에 기쁨과 위로가 넘치는 상태에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부분이다.

네 번째로 4장에 들어서서 바울은 4:3-12을 통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화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당면한 도덕적이고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강한 어조로 명령하며 심각하게 교훈과 권면을 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언급을 하기 전에 먼저 4:1-2에서 "너희가 우리에게 받은 바대로 잘 행하고 있다"라고 우선 칭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권면의 말을 하는 도중에도 “너희에게 더 이상 쓸 말이 없다”(4:9-10) 라고 그들을 또 한번 추켜세우고 있는데, 이러한 모든 칭찬들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살아야 할 성화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우선 칭찬해주고 인정해 줌으로 바울의 말에 그들이 온전히 순종하기를 바라는 교육적 효과가 그 이면에 숨겨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바울의 사랑의 표현

데살로니가전서와 빌립보서는  바울의 자기 양떼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아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나타나는 곳인데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그러한 표현들을 먼저 2장과 3장에 걸쳐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2:19-20의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하는 언급은 빌립보서 4:1(고후1:14, 빌2:16)에도 나와 있는 말로 바울의 성도 사랑에 대한 아주 유명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과 자신의 관계를 아주 가까운 가족적 유대관계를 나타내는 그림언어로 말하고 있는데 2:7에서는 '유모'로 2:11에서는 '아비'로 2:17에서는 '고아'(개역성경에는 ‘너희를 떠난 것’이라고 표현되었다)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고아는 바울 역시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떨어져 매우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는 동변상련을 나타내는 그림언어이다. 이러한 감정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는 부분은 바로 3:1에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라고 말하는 부분인데 이 말은 바울이 아덴에 홀로 떨어져 있기를 감수했다는 말이다. 즉 디모데와 동료들을 데살로니가에 보내고 스스로 자기 혼자 떨어져 남는 일을 감당했다는 말인데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이 그들을 떠난 것 때문에 버려진 것과 같은 느낌을 갖는다면 나 역시 너희를 그렇게 보기를 원했으나 가지 못하므로 내 동료들을 다 보내고 나 혼자 남아 '방기'되는 경험을 했다는 말이다. 이 말을 한 이후 3장 전체를 걸쳐 바울이 그들의 신앙과 그들의 안녕에 대해서 얼마나 큰 관심과 걱정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간절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3.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불신자들을 대조

바울은 이 서신서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불신자들을 대조하여 보여줌으로 성도들에게 하나님 백성됨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만이 종말에 있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라는 그 신분에 대한 의식을 강화한다.

1:4 너희는 선택받은 자들이다.
1:9-10 너희가 우상 섬기는 자들로부터 분리되어서(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사시고 참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며 그래서 너희들은 하나님의 심판(장래 노하심)에서 구원 받을 자들이다.
2:13-16 유대교회가 동족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듯이 너희들도 너희 동족들로 핍박을 받는다. (데살로니가 교인과 그들을 핍박하는 동족들을 대조하고 있다.)
4: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라
4:7 우리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부름받은 자들이다.
4:11-13 여기서는 외인들과 소망 없는 다른 자들과는 다르게 행동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의 질서가 교회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명성을 가져와야 하고 성도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과는 다른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대조하고 있다.
5:13-15 교회 내에서 피차 대할 때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사랑으로 대하라.

이러한 모든 언급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선택 받은 자들로서 참 하나님을 섬기는 구원 받는 백성임 확인시키고 종말에 하나님의 진로로부터 구원 받지 못할 자들과 대조 시킴으로써 이제 막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서의 자기 의식을 심어 줄려고 한다. 즉 바울은 이들에게 소위 말하는 재 사회화 작업(resocialization)을 하려는 것이다.

4. 데살로니가전에서 나타난 믿음 이라는 단어
데살로니가전서의 이 짧은 편지에 믿음이라는 말이 1:3, 8, 3:2, 5, 6, 7, 10 5:8에 걸쳐서 8번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 빈도가 얼마나 많은가를 비교해 보려면 고린도전서에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7번 나오고 고린도후서에도 7번 그리고 빌립보서에도 5번 밖에 안나오는데 데살로니가전서 이 짧은 편지에 그것도 바울의 초기 편지에 믿음이라는 단어가 8번 나오는 것이 매우 많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8번의 믿음이라는 말은 "너희 믿음"이라는 문형 속에 대부분 나온다(1:8, 3:2, 5, 6, 7, 10).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바울은 "너희 믿는 자들"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이런 문구들을 통해서 보면 믿음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을 결정하는 요소임을 우리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익숙한데 이것이 종교사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특이하고 새로운 현상이다. 다른 종교들 특히 인도계열의 힌도교와 개혁 힌두교라 말할 수 있는 불교에서는 믿음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고 깨달음이 강조되고 있다. 지식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헬라종교와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철학도 지식을 강조하는 것에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 종교의 특징을 덧붙인다면 이들 종교들은 선행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개의 종교는 지식과 선행을 구원을 얻는 방도로 주장하고 여기에 더불어 첨가되어지는 것이 신비주의적 요소로써 우주적 신과의 합일, 요가, 참선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들 종교에서는 믿음이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또한 구약에서도 믿음이란 단어 자주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올 때에는 아주 의미심장하게 나온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갑자기 믿음이라는 어휘가 아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주 새로운 종교적 현상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다름 아닌 바울이 이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믿음이 바로 우리와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원의 사건을 연결시키는 도구이고 또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시키는 도구인 것을 아주 강조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모든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믿는 바 구원의 사건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우리의 믿음으로 마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시키는 이 '믿음'이라는 말의 근본 의미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믿음의 가장 근본 의미는 다름 아닌 '선포된 이 기쁜 소식을 즉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이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 즉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고 대표하는 객관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그리스도안으로 내포시킨다.
왜 그러한가?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리 대표이자 대신이니까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를 대표하심을 받아들이는 믿음은 동시에 새 인류의 조상인 그리스도의 몸 속으로 우리를 내포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울은 종종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결국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 속으로 내포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그 존재가 결정된 자라는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여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하므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한 일로 인정되고 그리스도의 됨됨이 우리의 됨됨으로 간주된다. 또한 그리스도의 하나님 앞에 순종이 우리의 순종이 되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우리 죄를 대속한 것이 우리의 죄가 없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 됨에 우리가 참여하여 우리가 하나님 아들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내포시키고 그리스도 안으로 연합시킴으로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이 바로 오늘 나에게 그 효력을 발생시키도록 한다. 바로 이것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이고 또한 이 믿음으로만 이 구원의 사건이 바로 오늘 나에게 주관적 구원의 사건으로 효력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칭의'라는 것 역시 우리가 믿음 안에서만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부터 사함을 받아 우리가 의인이라는 무죄선언됨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