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데살로니가전서

역사적 배경

호리홀리 2015. 6. 25. 13:13

 역사적 배경


데살로니가는 중요한 항구도시(무역로)였으며  당시 로마의 중요한 군사도로의 선상에 있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는 로마로부터 마게도니아 행정구역의 수도로 정해져서 경제적으로 번창한 도시였으며 아울러 상당한 자치권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로마에 대해서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제국숭배 사상에 헌신적이었으며 아울러 여러 신비종교가 혼합되어 있는 다신교적 사회였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종교는 디오니소스를 섬기는 것이었는데 이 종교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으로 삼고 성적 탐닉을 통해서 풍요를 기원하는 생식종교였다. 그래서 이 종교 때문에 마게도니아 지역은 지나칠 정도로 성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한 지역이 되었다.

바울은 사도행전 17장의 기록에 의하면 3주 정도 머물면서 유다 회당으로부터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대회당에는 소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 불리던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그들 사회에 만연하고 있던 도덕적 타락과 불합리한 지적 세계에 회의를 느끼고 더 나은 것을 추구하던 중에 유대교로 전향한 이방인들이었다. 그런데 회당에서 전한 바울의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는 배척당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들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는 환영 받는 경향이 있었다. 그 이유는 유대교의 강한 민족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이들 개종한 이방인들은 그들이 아무리 열심이 유대교를 믿는다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으로부터 소외되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최소한 차별된다고 주장되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한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는 예수의 십자가의 구원사건은 이들에게는 정말 복음의 소식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로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은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도 하부계층 출신자들로서 사회적 냉대를 받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고전1:26). 그러나 바울은 이런 자들 뿐만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 중에서 아주 부유하고 활동적인 여성들도 얻은 것 같다(행17:4)

사도행전16장을 통해서 바울의 여행경로를 살펴보면 바울은 드로아에서 본 환상 중에 계시를 받고 마게도니아의 첫 성인 빌립보에 가서 선교를 하고 이후에 그의 동역자였던 실라, 디모데와 함께 로마 군사도로를 통해서 마게도니아의 수도였던 데살로니가에 도착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데살로니가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도중 역시 유대인들로 부터 배척을 받아 성도들의 도움으로 베뢰아로 도망왔는데 살전 2:18절에 의하면 그가 다시 베뢰아에서 데살로니가로 돌아가려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행과 떨어져 혼자 아데네로 내려갔다가 고린도로 갔는데 거기서 바울은 간절히 데살로니가의 소식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그가 떠나온 데살로니가 형제들은 불과 2-3개월 밖에는 바울과 함께하지 못했던 연약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디모데로부터 전해들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소식은 아주 기쁘고 놀라운 것이었다(3:2-6).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 

1. 데살로니가 교회는 약한교회였다.
겨우 3개월간의 바울의 사역을 통해서 어렵게 이루어진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충분한 가르침을 줄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바울은 자비량으로 선교활동을 폈으므로 이들에게 기독교적 가르침을 줄 기회도 많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연한 결과지만 이들의 신앙은 아주 어리고 유치한 단계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체계화된 신앙과 조직적인 교회 공동체를 이루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전1:6-10절에서 바울이 칭찬하는 것처럼 그들의 신앙이 모든 마게도니아와 아가야의 다른 교회에 모범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사실이었다.

2. 데살로니가 교회는 핍박받고 있었다.
데살로니가에 있던 유대인들은 그 도시의 시민들을 충동질해서 바울이 선포한 것은 더 이상 유대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당시에 로마 통치자들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유대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에 대해서 많은 특권을 주고 있었는데 만약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주장한 바와 같이 기독교가 개혁유대교 내지는 더 나아가 유대교의 완성으로 로마통치자들에게 받아들여진다면 기독교 역시 로마의 보호 하에 들어가서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특권이 생길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염려한 유대교도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에 대해 이단으로 비난하고 더 나아가 로마에 대한 반역행위를 조장하는 종교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예수단의 두목으로 바울을 지목하여 공격하였다.
그런데 유대교도가 바울를 공격한 공격수단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울을 떠돌이 스토아 혹은 냉소주의 철학자로 매도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이런 자들은 부유한 도시를 찾아 다니면서 영생이나 구원에 대한 지식이나 또는 행복한 삶의 지혜와 같은 것을 나누어준다고 떠벌리면서 그 대가로 돈을 받았다. 그런데 이것이 때로는 비리로 전락해서 많은 비난을 사기도 했는데 바울이 바로 그러한 자의 한 사람으로 매도된 것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러한 비판을 앞세워서 새롭게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을 회유해서 그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종교심을 버리고 유대교로 다시 회귀하기를 종용하거나 만약 그들의 회유에 응하지 않는 경우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해서 가혹한 핍박의 화살을 거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 이들은 버림받은 고아와 같은 신세에 있었다.
그런 와중에 그들이 신뢰하고 전적으로 의지했던 그들의 영적 아버지 바울이 그들을 떠나갔으므로 거기서 성도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불안감은 그들 마음을 짓누르기에 충분했으며 게다가 바울이 곧 돌아온다고 했던 그 약속마저 끝내 지켜지지 않음에 따른 그들의 실망감은 큰 것이었다.

4. 성적타락에 대한 심각한 도전
더 나아가 데살로니가 도시의 사회문화적 요인으로 그들에게는 성적 타락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있었다. 왜냐하면 디오니소스와 같은 생식종교가 발흥하고 있었던 당시에 사회상은 일반사람들에게 있어서 성적 문제는 죄이거나 부끄러운 행동으로조차 여겨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런 죄악된 삶에 젖어 살던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복음을 통하여 회심한 이후라 하더라도 갑자기 그리스도인들로서 요구되는 높은 도덕적 삶으로 돌아서는 것은 매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된 이상 이들은 절대로 이전의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저지르는 것과 같은 성적 타락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여야 했으면 또한 강력하게 그 삶을 실천하도록 권면하여야만 했다. (4:3-8).

5. 재림전 죽은 자들의 구원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에 대한 신학적 문제
또한 이들에게는 재림 전에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에 대한 신학적인 문제가 있었다. 아마도 데살로니가 성도들 사이에는 살아서 재림을 맞아야 구원을 얻고 재림 전에 죽은 자들에게는 구원받음에 있어서 상당한 불이익이 있다고 생각해서 먼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슬퍼하고 걱정했던 것같다(4:13-18). 뿐만 아니라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 즉 종말의 때에 대한 아주 과도한 관심 때문에 열병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성도들 사이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과연 그리스도가 오는 때는 언제냐를 놓고 토론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또 일부 과격한 성도들은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비한다고 하면서 직업을 갖지 않거나 일 손을 놓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무위도식하며 지냄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 경제적으로 굉장한 무리가 갔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의 직업을 가지며 열심히 일하라고 권면하여야 했으며(4:11-12) 또 더 나아가 데살로니가 후서에서는 강경한 어조로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3:6-15)라는 언급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6. 교회내의 무질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조직적으로 아직 리더쉽의 구조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기준으로 세상적인 높은 지위에 있었다던가 혹은 카리스마적 은사가 있던 사람들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인 리더쉽이 생겨 났는데 이것이 신학적으로 제도화되지 않아서 종종 이런 리더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반발을 사게되거나 하는 경우에는 교회 공동체 전체가 무질서한 상태에 빠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편지의 후반부에서(5:12-22) 여러 권면을 하는 중에 바울은 이런 자연발생적인 리더들에 대해서 교회가 그들의 리더쉽에 순종하고 협력하여 선한 일을 이루도록 독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