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마가복음

마가복음 1:9~11,믿음의 3단계

호리홀리 2015. 6. 24. 09:42

 마가 1:9-11



마가복음은 복음서 가운데 제일 먼저 쓰여진 책입니다. 그 시기를 대략 주후 67~7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던 사건은 그를 메시아라고 믿고 따르던 사람들에겐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바울 역시 나중에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경험을 한 후에, 그 누구보다 정열적인 예수의 증인이 됩니다.

그러나 최초로 예수를 따르던  그룹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 예수께서 다시 오시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는데, 이 부활의 증인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정리해서 다음 세대에 전하지 않으면 잊혀 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가공동체는 신뢰할만한 목격자들과 증인들의 기억을 토대로 예수님의 가르침, 그리고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글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역사상 최초로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탄생합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입니다. 후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마가복음을 참조해서 자신들의 복음서를 기록합니다. 즉 마가복음은 복음서의 시금석이 되는 책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하면서 마가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복음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기도했을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과 역사하심은 우리가 생각하듯 인간은 완전히 빠지고 하나님이 전적으로 알아서 처리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갈등과 고뇌와 땀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 놀라운 경험들을 후대에 전해야겠다는 절실한 마음, 성령께서는 그들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통해 일하셨고, 그들의 노력과 수고를 통해서 거룩한 복음의 말씀이 완성됩니다.

이렇게 복음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드디어 첫 발을 떼게 됩니다. 이렇게 시작한 마가복음의 첫 장은 얼마나 중요한 걸음이겠습니까? 따라서 마가복음이 소개하는 첫 번째 이야기를 지나치듯 읽어갈 수는 없습니다. 최초의 복음서는 무엇으로 복음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을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에 대해 언급한 후에, 곧바로 복음의 첫 번째 이야기인, 예수님이 겪으셨던 대단히 중요한 한 사건을 소개합니다. 마가복음은 이 사건을 복음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가장 가까이서 생생히 목격했던 사람들, 그래서 삶을 다 바쳐 그분을 믿고 따르기로 결심했던 사람들, 이제 죽기 전에 반드시 자녀와 후세들에게 들려주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 그들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 복음의 시작은 어떤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을까요?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 물에서 막 올라오시는 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신 사건, 그리고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신비한 소리를 들었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간단히 세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 둘째는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 셋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흔들어 놓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 하나님이시기도 하신 분에게 왜 성령이 임하셨을까?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음성을 왜 새삼 들려주셨을까? 이런 질문들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인정하지 않는 선입견 때문에 나오는 질문입니다. 처음부터 메시아였고,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도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분명히 이 사건 이후로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 예수로 살기 시작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와 ‘그리스도 예수’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나사렛 예수는 누구이고, 그리스도 예수는 누구입니까?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메시아 혹은 구원자 예수라는 뜻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인간 예수를 의미하고,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는 제약과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연약한 인간 예수를 의미하고, 그리스도 예수는 죄와 죽음을 이기시는 완전한 예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연약함과 제약을 가진 인간 나사렛 예수이기도 하셨습니다. 그것은 낮은 인간의 자리에 오시고자했던 하나님의 본래 계획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본문의 그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나사렛에서 그리스도의 자리로 옮기셨습니다. 이 모든 계획은 연약한 인간의 자리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로 나아가는 구원의 완전한 모형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나사렛의 지점’에서 ‘그리스도의 지점’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일의 본질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나사렛의 지점에서 그리스도의 지점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어떻게 나사렛의 지점에서 그리스도의 지점으로 나아가셨는지 정확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를 받는 것, 성령과 동행하는 것,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사렛의 지점에서 그리스도의 지점으로 나아가는 각 단계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세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세례를 받으신 분도 영적 세례를 끊임없이 받아야 합니다.성령충만이지요. 우리에겐 마음의 세례, 생각의 세례, 삶의 세례가 여전히 필요합니다. 세례는 단지 의식이 아닙니다. 신앙인의 삶에 요청되는 매순간의 영적 결단이요 자세입니다. 참된 세례는 물에 푹 잠기는 침례식이냐 약식으로 하는 세례식이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라는 자각과 더불어 죄 씻음 받기를 원하는 진정한 마음’이 있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지려고 하면 당장 큰 벽에 부딪힙니다. ‘왜 내가 죄인인가?’ 이것은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만 생기는 질문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면, 많은 신앙인들이 교리적으로는 죄인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으로 죽을죄를 짓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과 마음을 살피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람을 가만히 살펴보면, 어린 아이 때는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 따위의 ‘생각의 덩어리’가 거의 없습니다. 분노, 미움, 한, 응어리 같은 ‘감정의 덩어리’도 거의 없습니다. 고집, 자존심, 집착 같은 ‘의지의 덩어리’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어른의 마음 안에는 온갖 생각의 덩어리, 감정의 덩어리, 의지의 덩어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덩어리들이 어른들로 하여금 얼마나 많은 죄를 짓게 하는지 모릅니다. 어른이 되는 과정은 어린이의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자라는 과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우리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어둡고 부정적입니다. 억압된 욕망이 있고, 해소되지 않은 정서의 찌꺼기와 상처들이 있습니다. 분노와 우울 같은 감정들이 계속 쌓여갑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서 마음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부정적으로 되어 갑니다. 게다가 마음은 전염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남편의 마음이 어두우면 아내의 마음도 어두워집니다. 부모의 마음이 어두우면 자녀들의 마음도 어두워집니다. 집안마다, 사람마다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데, 이것은 오랜 기간 마음이 서로 전염되면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이런 죄들은 인류 전체를 연결하는 죄의 연대가 되어 그 뿌리를 찾을 수 없는 엄청난 죄의 바탕이 됩니다.

우리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내가 얼마나 많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덩어리에 눌려 사는 사람인지, 얼마나 어둡고 부정적인 사람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그런 마음을 전염시키며 살았는지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죄인 됨의 자리, 죄 씻음 받기를 원하는 자리까지 나아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죄 씻음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죄인이라는 자각과 죄 씻음 받기를 원하는 마음은 우리를 회개로 이끌어 줍니다. 회개는 감상적인 통회자복이 아닙니다. 눈물 콧물 쏟는 슬픔의 의식이 아닙니다. 회개란 냉철하게 내 자신의 죄를 살피고, 차분하게 죄인 됨을 인정하며, 단호하게 삶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나아가야 ‘세례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자신의 죄를 살피고 죄인 됨을 자각하며, 깨끗한 존재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영혼들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매순간 세례를 받게 될 것이고, 나사렛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성령

예수께서 이렇게 세례를 받으시고 강에서 올라오시자, 이번에는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성령이 예수님에게 임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에 대해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먼저 “하늘이 갈라졌다”는 대목을 봅시다. ‘갈라진다.’는 말, 희랍어 ‘스키조’는 마가복음에 한 번 더 나오는데, 예수님이 숨을 거두실 때 성전의 휘장이 (스키조)갈라지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성전의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가로막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갈라진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이 갈라졌다는 말은 마치 성전 휘장이 갈라지듯이, 하늘과 땅 사이의 가로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가로막이 갈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틈으로 성령이 내려옵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성령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했던 가로막을 걷어내고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영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장애물을 넘어 우리에게 다가 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왔다”는 대목을 봅시다. 성령은 우리가 가진 선입견과 달리 요란하게 찾아와 우리를 들었다 놨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치 비둘기처럼 부드럽게 다가와서 우리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성령은 부드러운 영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는 문장에서 ‘자기에게’를 정확히 번역하면 “자기 안에”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밖에서 우리를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 안에 머무르고, 우리와 함께 일하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친절한 하나님의 영입니다.


또 한 가지  “성령이 자기 안에 임하는 것을 보셨다”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자신 안에 찾아와 머물러 계신 성령을 보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보는 행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오신 성령을 느꼈다는 것이고, 자신과 함께하시는 성령님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이후로 예수님은 오직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셨고, 생의 끝까지 성령과 동행하셨습니다. 성령은 그것을 보고, 그와 동행하는 자에게만 능력이  되고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처럼 성령의 임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 언제나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우시길 원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 ‘돕는 이’라는 뜻입니다. 온갖 가로막과 장애물을 넘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영, 언제나 부드럽고 친절하게 우리 영혼에 머무시는 거룩한 영, 자신의 죄를 깨닫고 깨끗한 존재가 되기를 소망하는 영혼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시는 감동의 영, 성령은 우리를 돕기 위해 내 뻗으신 하나님의 거룩한 손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을 눈치 채지 못한다면, 이 귀한 성령과 동행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성령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령이 이끄는 대로 성령과 동행하며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 안에 성령이 임하시자, 곧 하늘로부터 한 음성을 듣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예수님은 이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살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버지 요셉은 대단히 당황했을 것입니다. ‘아들이 집을나가 돌아다니더니 완전히 돌았구나.’ 가까이서 그를 잘 알고 있던 그 형제와 친인척, 친구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처음엔 미친 사람 취급하다가, 나중에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들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육체적 혈연관계의 방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렇게 이해했고, 오늘 우리도 그렇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같은 피를 나눠가진 혈연관계의 부자지간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 속에서 단한 번도 없었던 전혀 다른 관계의 방식입니다. 그것은 최초로 예수님에게서 시작된 ‘하나님과의 관계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가장 깊은 사랑 속에서 맺어지는 영적 관계의 신비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많이 오해하는 것은 이 하나님과의 관계 방식이 예수님에게만 해당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관계는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하나님과의 관계 방식이기도 합니다. 가장 깊은 사랑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일은 예수님만 해야 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나사렛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자리로 나아가면서 겪으시는 모든 일들은 나사렛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자리라 나아가야 할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일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만 들려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혈연관계의 부자지간으로 오해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밋밋한 일반론 ‘그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야’라는 생각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심한 관념일 뿐 실제적인 인식이 아닙니다.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실제적인 인식을 가지고 살아가면 우리 삶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나사렛 예수로부터 엄청난 기적과 구원의 역사를 일으킨 그리스도 예수님의 삶처럼, 우리도 나사렛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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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강에서 일어났던 사건, 그 세 가지요소는 밀접하게 연결된 일련의 과정(process)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회개하고 죄 씻음을 받은 깨끗한 영혼의 눈이 성령의 임재를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생생하게 바라보며 그 성령과 동행하는 영혼의 귀에 ‘너는 내 아들(딸)이다’는 하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것이 나사렛 예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시작했던 출발점이었고, 또한 이것이 나사렛의 지점에서 그리스도의 지점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우리 모두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첫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 시대의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린 어떻게 진정으로 예수를 따를 수 있을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틀림없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나 수퍼맨처럼 오셔서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 주는 그런 방식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삶과 존재의 한계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사렛 예수’로 사셨습니다. 단지 겸손하셔서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출발선상에 서기 위해서였습니다. 거기서부터 당신이 가시는 곳 까지 우리도 갈 수 있도록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그 곳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지점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나사렛의 지점’에서 ‘그리스도의 지점’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날마다 세례를 받음으로, 매순간 성령과 동행함으로, 한순간도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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