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마가복음

마가복음5:1-20,거라사 광인

호리홀리 2015. 5. 20. 12:27

거라사 광인을 고치심
(막5:1-20)

 

 

  

     1. 사건의 배경(5:1)

 

   막 5:1에 언급된 배경은 지리적으로는 갈릴리 바다 건너편(동편) 지역이지만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는 거라사인들이 사는 이방지역이다. 이곳은 데가볼리 지역(20절) 중 하나로서 많은 돼지들을 치는 것으로 보아 유대지역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 지역은 로마제국의 동쪽 변방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였다. 결과적으로 독자는 예수가 유대지역을 떠나 밤에 제자들과 함께 풍랑이 일어난 거친 갈릴리 바다를 항해한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이방지역에서 '군대' 귀신 들린 난폭한 광인을 구원하여 그로 하여금 복음 전파자로 삼으시기 위한 일이었음을 알게 된다.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다 건너편의 거라사인의 지방은 예수께서 이방지역에서 사역한 최초의 장소로서 이 이적 사건을 통해 예수의 소문(복음)이 데가볼리 지역으로 퍼져가고 있음(막 5:20)을 마가는 언급하고 있다. 이점은 기독교 선교가 펼쳐질 시발점으로서 간주됨과 동시에 모든 이방지역을 대표하는 장소로 여겨질 수 있다. 그리고 귀신들로부터 해방된 거라사인에게 복음 전파자로서의 사명이 주어진 모습은 기독교 선교의 한 모델로 소개될 수 있다(Starobinski 1971:382).

 

   특히 본문에 묘사된 장면의 모든 것들(무덤, 돼지 떼들, 이방인들, 그리고 더러운 귀신들린 광인의 난폭한 모습)은 유대인에게는 정말 부정(不淨)한 것들로 온전한 유대인이라면 결코 이런 지역으로 들어섰을 리가 없고 또한 이곳에 왔다 할지라도 영접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제자들을 데리시고 어두움의 풍랑 가운데서 바다를 건너 이곳에 복음전파를 위해 의도적으로 오셨다(cf. 막 1:38; 3:27). 이곳에서 예수는 어두움의 세력, 불결한 세력(군대 귀신)에 지배를 당하고 있는 광적이고 파멸적인 한 사람(5:2-5)을 만난다. 특별히 독자에게 자세히 소개되는 거라사 광인의 처절한 모습(3-5절)은 사건의 중대성을 암시할 뿐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놀라운 사건들(장면들)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배경이 된다. 이 장면으로 인해 독자는 커다란 긴장 가운데 놓이게 된다.

 

   2. 거라사 광인의 모습(막 5:3-5)

 

   여기에 묘사된 거라사 광인은 '군대' 귀신들린 사람으로서 하나님(예수) 없이 버려진 인간의 사회적이고 파멸적인 모습(버림받음과 유리함, 그리고 광란과 난폭함과 자학)을 극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특히, 그의 모습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이 사람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잘 보여준다.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축출되고 격리되었고 무덤가에 거주하면서 벌거벗은 채 광란과 자학의 반사회적 행동을 하고 있었다. 더러운 귀신이 들린 이 사람은 인간 편(마을사람들 편)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버림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유대의 정결법에 따라서 '부정(不淨)한 자'로 낙인이 찍힌 그는 동네에서 쫓겨나 무덤 가에 기거하였다. 더러운 '군대' 귀신이 들린 이 사람은 너무나 난폭하였기 때문에 손과 발이 착고 되었고, 아무도 그를 통제할 수 없었으며, 밤낮으로 소리를 지르며, 스스로 돌로 자신의 몸을 자학하며 살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을 분석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거처 : 무덤이나 산(3절)

 

   더러운 귀신이 들려 마을로부터 축출을 당하여 무덤이나 산에서 기거하는 이 사람은 사회적으로 완전히 버려진 인생으로 죽음 같은 삶을 살아간다. 비록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주변(무덤)의 죽은 자들(시체들)과 다름이 없다. 특히 돼지들에 대한 언급과 함께 묘사된 무덤 가에 기거하는 이 사람은 이사야에 따르면 우상을 숭배하는 불결한 백성으로 이해된다(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으며-사 65:4).

 

   제어할 수 없는 사람(3-4절)

 

   모든 통제력과 사회성을 상실한 그는 어떠한 것으로서도 길들여 질 수 없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쇠고랑과 쇠사슬도…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4절).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없는 인생, 더러운 귀신들린 인생의 통제가 불가능한 파멸의 모습을 본다.

 

   벌거벗은 채 처절한 자학의 사람(5절)

 

   하나님 없이 사는 귀신들린 이 사람에게는 벌거벗음의 수치와 소외(버림받음)와 자기 번민과 소리 지름과 광란만 있다(5절). 정말 사람들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인간이며 또한 자기 자신도 혐오스러운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자학의 심도가 깊다.

 

   이러한 사람이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고 있다(6절). 성경은 그가 어떻게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침묵하지만 아마도 들리는 풍문에 의해 예수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특히 마가복음에서 귀신들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예수의 신분과 그의 사역을 잘 알아보았다.

 

   3. 귀신들의 반응과 예수의 사역(6-14절)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 올 때는(치유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이지만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달랐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 무덤으로부터 나아온 이 사람은 치유를 위해서 자의로 나아 온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를 지배하고 있던 '군대' 귀신이 이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나와 그를 통해 예수와 대면하였고 그들은 예수께 자신들을 멸망치 않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이 군대 귀신의 간청은 그들이 이 곳에 머물게 해달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돼지 떼들 속에 들어가기를 청한다. 결국 예수의 허락에 의해 군대 귀신은 돼지 떼들 속에 들어가서 바다를 향해 달려가 그 속에 빠져 죽게 된다.

 

   1) '군대' 귀신과 돼지 떼의 몰사

 

   먼저 자신에게 나아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 본 더러운 귀신이 자신을 괴롭게 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자 예수는 그에게 "너 이름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한다. 이 질문에 그는 자신을 '군대'로 소개한다. 이 명칭은 6000명의 군인으로 조직된 로마군대 조직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독자는 현재의 그의 광적 상황의 근원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즉 그의 광적 모습(3-5절)은 마치 그 안에 6000명의 군대가 거주하여 움직여 다니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Lowry 1990:30). 거라사의 광인에게 거주하는 더러운 귀신은 '군대' 귀신들로서 그들은 이 지방에 계속 머물기를 원한다. 결국 그들은 예수께 돼지 떼들(부정한 동물) 속에 들어가기를 간청하였고 이에 그들은 돼지 떼 속에 들어간 후에 비탈길로 내려가(혼돈의) 바다를 향해 달려감으로써 결국 바다 속에 빠져 죽게 된다. 물론 여기서 독자는 마가가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쟁을 할 수 있다. 즉, 더러운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그들을 멸망시켜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돼지 떼의 익사가 귀신들의 미래적인 운명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적 논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가 돼지 떼를 몰살하려는 것이 그의 의도가 아님은 분명하다. 여기에 나오는 군대 귀신과 그들의 운명(파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시도되어졌다.

   첫 번째는 사회-정치적 해석(팔레스타인을 지배하는 로마의 군대의 추방[몰락])이고 두 번째는 영적-신학적 해석(출애굽 사건과 함께 사탄과 하나님의 아들과의 전투 혹은 세례의 의미)이다.

 

   독자는 이 사건을 통해서 사탄의 실제와 그 목적을 볼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의 미래의 운명(멸망)을 보게 된다. 사건의 장면들이 전환되어 가는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사건의 장면은 거라사인의 지방(이방지역) ―〉 더러운 귀신 -> 더러운 무덤 가 -> 더러운 돼지 떼 -> 바다(혼돈)으로 전환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사탄은 바다 속으로 침몰하여 몰사된다. 결국 사탄의 목적은 돼지 떼의 죽음에서 보는 것처럼 멸망인 것이다(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요 10:10a).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사탄의 무력한 권세를 본다(cf. 막 3:27). 이들은 예수의 단순한 명령에 의해 쫓겨 나간다(8절). 그러나 아직 사탄의 완전한 멸망은 그 때가 아니다(때가 이르기 전에-마 8:29). 그러므로 예수는 귀신의 요구를 허락하고 있다(10-13절). 더러운 '군대' 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의 운명은 미래의 사탄의 운명(cf. 눅 8:31; 계 20:1-3, 10)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더러운 '군대' 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들의 바다에 빠져 죽음은 홍해에 빠져 죽은 애굽 군대의 운명(출 14:28)과 같다(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출 15:4). 돼지 떼에 들어간 '군대' 귀신이 바다에서 빠져 죽음의 모습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출애굽의 사건과 견줄 수 있다(Wefald 1995:15; Derrett 1979:7) 이것은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에게는 일종의 출애굽의 사건으로 여겨진다. 마치 옛 사람의 죽음을 상징하는 세례적 의미(cf. 고전 10:2)로도 이해할 수 있다(Johnson 1992:130). 그리고 귀신들과 돼지 떼의 죽음의 모습은 사 65:1-7에서 보여진 대로 이방인의 신들을 멸망시킨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부르셔서 그들로 하여금 복음 전파자로 만드신 것을 보여 준다(Wefald 1995:15-16).

 

   4. 온전해진 거라사 광인(15절)

 

   사람들만 아니라 쇠사슬과 쇠고랑도, 어떤 제도도 이 사람의 난폭과 광란을 제어할 수 없었으나 예수에 의해 거라사의 광인은 유순하고 온전하여 졌다. 본문에 나타난 그의 고침 받은 모습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졌다.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15절).

   사나움에서 온순함으로, 벌거벗음에서 옷을 입고 수치가 가려짐으로, 그리고 광란과 발작의 행동에서 평온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그가 온전하여짐을 잘 대변해 준다. '군대' 귀신이 쫓겨 나간 후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아 있게"(15절)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거룩(정결)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 지를 알게 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은 온전하고 거룩한 사람이 된다.

 

   이 사건을 통해서 독자는 예수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3:20)이 아니라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정결케 하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된다.

   결국 예수는 세례요한의 말대로 "성령으로 세례(정결)를 주시는 분"이시다.

 

   5. 두 가지 반응들(16-20절)

 

   이 사건의 결론으로 보여진 두 가지 종류의 반응(예수를 떠나라고 간청하는 마을 사람들과 예수와 함께 있기를 간청한 고침 받은 광인)은 사람들이 구하는 종교적 추구란 어떤 모습이며 그리고 기독교가 추구하는 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1) 마을 사람들 : 예수를 떠나시라고 간청함

 

   우리는 여기서 고침 받은 이 사람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태도를 통해 참된 종교인이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를 교훈 받는다. 마을사람들은 그 동안 마을의 고통거리였던 더러운 귀신들린 한 사람이 고침 받고 온전해진 모습을 보고 기뻐하기보다는 그들이 손해 본 것(이천 마리의 돼지 떼가 바다 속에 빠져 몰사함)만 바라봄으로써 두려움 가운데 예수를 떠나도록 간구한다.

   마을 사람들은 더러운 '군대' 귀신들을 마을에서 쫓아내신 예수를 따뜻하게 영접하고 모시는 것이 그들에게 진정한 축복이 되는 줄 알지 못한다. 오히려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더 큰 골칫거리로 생각하는 이들의 모습 속에(종교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추구가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가시떨기 밭과 같은 자들로 그들의 관심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으로 인해'(막 4:19) 신앙으로 나아 오지 못하고 도리어 예수를 떠나시도록 간구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세속적 삶에 안주하고자 한다. 이들은 과연 '귀신들린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16절) 사이에서 어느 것을 더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을까? 이처럼 예수의 현존하심이 그들의 사회(삶)에 큰 도전이 되어졌을 때에 그들은 변화와 개혁의 길로 나아가기보다는 오히려 예수(혹은 의로운 사람들)를 떠나게 하거나 제거해 버린다. 이점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보는 대로 세상 사람들은 도덕적이고 사회적 더러움(부패)을 청산하는 정결과 개혁에는 별 관심이 없다. 돼지들이나 더러운 군대 귀신들의 현존이 그들에게 세상적 부를 안겨 준다면 고통 당하는 한 사람의 온전함과 마을의 정결(개혁)에는 별 관심이 없는 세상이 오늘의 세상이다. 이것은 썩은 고기들(불결)을 즐기는 까마귀의 삶과 같다. 이점에 있어서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가?

 

   2) 고침 받은 거라사 광인: 함께 있기를 구함(cf. 막 3:14)

 

   고침 받은 거라사의 광인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게 되어서 이제는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자기 학대와 광란과 폭력으로 사람들을 무섭게 하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로 다가가서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사람(복음 전파자)이 되었다. 거라사의 광인은 이제 절제하고 유순하며, 온전한 삶을 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는 옥토와 같은 밭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치유와 회복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보는 대로 오히려 예수는 우리를 위해 광인처럼 벌거벗겨진 채 수치를 당하시고 조롱을 당하심(막 15:16-20)으로써 우리의 속죄양이 되셨다.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친히 수치와 조롱과 더러움(저주받음)에 내어버림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시다.

 

   결국 고침 받은 이 광인은 예수의 제자가 되어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 사람은 이방인을 위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다. 비록 제자가 되는 첫 번째 과제인 '예수님과 함께 함'은 거절되었지만 두 번째 과제인 '보냄을 받음'의 명령이 주어진다(막 3:14). 우리는 여기서 단순한 '이적 베푸심(고치심)'이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한 '복음전파'가 그 목적(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전파하니 - 막 1:38)인 것을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독자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이방의 땅에서 악(더러움)을 제거하고 새로운 환경(자비와 제자도의 환경)을 창출하심을 본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예수가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게 된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에 의해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분이시다. 더러운 귀신들린 이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는 사나운 풍랑이 일고 어두움이 깔려 있는 바다를 건너오신 분이시다.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은 배척과 수난을 당하신 분이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를 정결케 하시기 위해 오히려 자신을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친히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셔서 조롱과 모멸을 당하심으로써 우리의 정결의 원천(정결의 샘)이 되셨다. 오직 더러움으로부터의 정결은 속죄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인데 예수는 우리의 속죄 제물(10:45; 14:24)이 되셨다.

 

   무덤 가에서 소리지르는 거라사의 광인. 그는 더러운 '군대' 귀신들에 의해 사나움과 광란과 자학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모습은 마치 더러운 '군대'가 그를 끌고 돌아다니는 모습과 같다. 6000명의 더러운 귀신들로 구성된 군대가 그의 내면 속에서 활동하며 그를 이리 저리로 끌고 다니는 모습은 사단에 시달리는 인간의 전형적 모습이다. 이러한 그가 예수를 만나 구원 받았을 때 그는 정신이 온전해 지고 수치가 가려지고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한 복음 전파자가 되었다. 우리 역시도 이러한 모습 속에서 부름을 받지 않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자주 이 사실을 망각하며 산다.

   마을 사람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귀신들린 자의 당한 것'(온전함)과 '돼지의 일'(몰사함)을 듣고 예수를 떠나도록 간청하는 이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으로' 가득한 이들. 다른 사람의 회복(구원)과 마을의 정결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직 재물(기득권)의 손실에만 관심을 둔 사람들. 이들의 모습이 오늘의 한국 사회며 한국 교계의 현실은 아닌지…어쩌면 나의 모습은 아닌지…. 우리는 본문 앞에서 스스로를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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