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15장,파루시아와 에스카톤

호리홀리 2015. 6. 11. 09:49

고린도전서 15장의 중심 이슈는 ‘종말 때의 신자들의 상태’이다. 어떤 사람들이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생각했다(15:12). 즉 신자들이 마지막 때에 부활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①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② 장사지낸바 되었다. (= 무덤에 묻혔다).

③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④ 게바에게 그리고 이어서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다.

 

②번은 죽음의 실제성을 위한 확증이고 ④번은 부활의 증인들이다. 따라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①)과 부활(③)이다. 이것을 믿어 수용하고 그 가운데 서면 구원을 얻는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복음의 골간이었다(행 2:23, 32).

 

 

이어서 바울은 그 이후 연속된 그리스도 부활의 목격자들을 추가한다.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다는 증언은 예수의 부활 출현이 환상이 아님을 증거한다. 오백여명이 동일한 환상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울은 그 오백여명 중에 250명 정도는 당시 주후 55년 경 여전히 증인으로 살아있다고 말한다(6절). 주의 형제 야고보가 예수님의 지상사역 시에는 신앙도 없이 예수님께 부정적이었으나(막 3:20-21, 요 7:3-5) 후에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부각되는 이유가(행 1:13-14, 행 15:13, 갈 1:19) 무엇이었는지가 여기서 확인된다. 야고보도 바울과 같이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제자가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마지막으로 예수 부활의 확실성은 교회를 핍박하다가 갑자기 교회를 위해 핍박을 받는 전도자로 바뀐 바울 자신의 간증에 의해 더욱 견고해진다(8절). 그리스도의 부활은 확고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로서의 빈 무덤 - 마태 28:11-15.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확실성을 역설한 것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고린도인들 일부가 ‘신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교정할 필요가 있었다. ‘부활이 없다’는 것은 결국 종말론적 소망이 없다고 하는 주장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14:19).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은 그 안에서 우리도 다시 살리기 위한 대장정의 시작이었다(롬 6:5-9).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신앙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신자의 부활이 없으면 신앙은 무의미한 관념이 되고 만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확고한 종말과 부활의 소망이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과의 관계(20-28절)

 

(1) 그리스도의 부활은 첫 열매이다(20절). 첫 열매는 앞으로 이어질 대량 수확의 시작이다. 첫 열매는 전체 추수의 예고이며 상징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앞으로 있게 될 신자들의 부활의 선구(先驅)이며 시작이다.

 

(2) 신자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과의 연합으로 설명된다(21-23절). 그리스도인은 신비한 방식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안에서 옛 사람이 같이 연합하여 죽었고,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하여 다시 살게될 것이다(롬 6:3-5). 이것이 “그리스도께 붙은 자”의 뜻이다(고전 14:23). 우리는 신비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께 붙어있다. 죽을 때도 붙어있고 살아날 때도 붙어있을 것이다.

 

(3) 종말의 시나리오(23-28절)

 

그리스도의 재림 -> 신자의 부활 -> 종말(= 나중 = 하나님 나라의 완성. 모든 악한 영육 세력이 붕괴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께 바쳐짐) -> 사망의 종식 -> 하나님의 주권의 구현.

 

 

부활이 현재의 삶에 주는 의미(29-34절)

 

이어서 신자의 부활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재의 사건 몇 가지가 추가로 제시된다. 우선 그들 중에 죽은 자를 위해 세례를 받는 신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9절). 이것은 그리스도교 정통 신앙의 입장도 아니고 역사 속에서 이런 예가 확인되지도 않는다. 물론 바울이 그 효과를 인정한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고린도 교인들 중에 이런 관행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되묻는다. 부활이 없다면 무엇하러 그런 짓을 하는가?

이어서 바울 자신의 예를 든다. 솔직하게 말하자. 내가 왜 죽음을 무릅쓰고 이 고생을 하는가?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현재의 삶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겠다. 차라리 짧은 생애를 아쉽지 않게 보내련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32절). 바울의 신앙이 얼마나 솔직하게 현실주의적인지를 알려주는 발언이다. 부활 없는 사람들에게 도덕과 윤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죄를 짓고 쾌락에 젖어 산다 한들 뭐가 잘못될 것이 있는가?  그러나 부활 때에 현세의 질서는 완전히 뒤집어진다. 거지 나사로에게 물이라도 찍어서 자기 혀 끝에 대어달라는 부탁을 하던 부자에게 아브라함이 하는 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 16:25).

  

 부활 실체에 대해(15:35-57)

 

바울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의문이 있었다. “그렇다면 부활 때에 우리가 어떤 종류의 몸을 갖게 되는가?” 현재의 몸은 물질로서 부패하여 흙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그것은 다시 생태계에서 순환된다. 그러다 보면 우리 몸 속에도 먼저 간 자들의 육체의 일부가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섞여버린 몸이 나중에 어떤 방식으로 개체의 부활을 이루겠는가?

이에 대한 답은 44절과 49절에 요약되어 있다. 부활의 몸은 현재의 몸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것을 바울은 “신령한 몸”(영적인 몸, spiritual body)이라 명한다(44절).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49절)이라고도 했다. 부활의 몸이 설명하기 힘들지만 형체를 지니고 있었고 우리의 현재의 육신과는 무엇인가 다른 점이 있었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부활하신 예수는 분명히 몸을 갖고 있었지만 만난 자들이 예수의 정체를 처음에 잘 알아보지 못하는가 하면 공간의 제약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눅 24:13-43). 부활의 몸은 현재의 몸과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종류의 몸이다. 부활을 믿지 않던 사두개인들도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예수께 질문을 했었고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부활의 실체가 우리의 현재 실체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주목하도록 하셨다(마 22:23-32). 부활의 때에는 장가나 시집도 가지 않는다.

예수의 재림 나팔 소리와 더불어 죽어 있던 신자들은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나고 살아 있던 신자들도 동종의 몸으로 모두 변형이 된다. 현재의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 했다(50절). 그래서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으로 변형된다. 마침내 인류 최대의 적 사망은 이렇게 신자의 부활과 함께 패배를 당해 물러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영광의 소망(15:58)

 

그리스도인의 삶은 종말을 염두에 두는 삶이다. 현재가 모든 것이 아니다. 부활의 종말을 계산에 두어야 한다. 현재의 어려움과 고난은 그때의 영광을 생각하며 겪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마다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6-18).

현재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그때 가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하면서 절제해야 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5:23-24).

이 부활의 소망을 염두에 두면서 마지막으로 주는 권고가 있다. 흔들리지 말라. 주의 일에 더욱 힘을 쓰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종말론

 

종말론적 승리가 없다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역사 내에서의 불공평과 종말론적 승리를 확보해야 ‘하나님의 불의(不義)’의 문제가(롬 3:25-26; 9:14) 해소되는 신학적 필연성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가 이 세상만을 생각하고 그리스도께 소망을 걸었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고전 15:19). 이 세상은 결코 우리에게 정의의 문제가 해결되는 만족스런 답을 주지 않는다. 종말론은 꼭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은 어떤 이들을 불편하게 한다. 무신론적 인본주의자들에게는 신과 관련된 일체의 담론이 의미 없는 언어의 유희이기 때문에 그네들이 느끼는 불편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리라. 그러나 종교인을 표방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종말론을 어색해 하는 것은 종말론으로 소망하는 일들이 싫고 지금의 이 세상에서 누릴수 있는 것들이 더 좋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어쨌든 ‘가진 자’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돈을 가진 자, 권력을 누리는 자, 지식이 있는 자, 또는 지식을 습득할만한 머리를 갖고 그 지식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주무를 수 있는 자, 주변의 사람을 즐겁게 할만한 재능을 부여받은 사람, 다른 이들을 현혹할 만큼 용모가 뛰어난 사람, 경쟁자와 싸워서 이길 만큼 강인한 신체와 정신력을 가진 자들의 무대가 되는 것이 이 세상이다. 이렇듯이 다양한 종류의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소유 축적을 위해 노동과 물질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무대 아래서 자신들을 보아 줄 동원 관객이 필요하다. 관객이 없으면 자신들의 삶은 너무 싱거워질 것이다. 자신들을 존경하며 찬사를 보내고 우러러봐 주는 보통 내지 보통 이하의 범인(凡人)들이 있어야 할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자신들의 지배욕을 성취시킬 누림의 공간으로서의 ‘갖지 못한 자들’ 내지 ‘별로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이 요청된다. 가진 자들을 보며 그래도 세상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경쟁과 싸움을 포기하지 못하여 사지(四肢)를 움직이지만 일생동안 넘어지도록 결정되어 있는 엑스트라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엑스트라, 범인(凡人), 관객, 노예들이 이 세상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다른 세계를 기대하기 시작하면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존재의 터전을 잃을 것 같아 강한 위협을 느낀다. 이들은 자신들의 선(善)이 돋보이게 하고 자신들의 소유(所有)가 소유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하는 배경을 구성해야 하는 다중(多衆)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신들의 권력과 물질과 문화의 소비자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공포를 느낀다는 말이다.

우리의 시대를 살아오며 느낀 ‘가진 자들’에 대한 불쾌감이 있다. 민중을 부르짖고 가난을 주제로 장사를 하던 소위 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들은 가난하지만 가난을 무기로 싸울 힘조차 소유하지 못했다. 아니 그것이 무기임을 자각할 여력(餘力)이나 자신감조차 없었던 것 같다. 한때 우리의 ‘무소유’(無所有)를 위해 싸운다던 한시적인 혁명가와 ‘위장 빈자’(僞裝 貧者)들은 어느 사이에 우리를 억압하는 지배 권력자로 변모해 버렸다. 결국 그들은 ‘가지지 못한 자들’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노예와 동원 관객으로서의 가지지 못한 자들을 놓고 누가 주연 배우가 될 것인가를 위해 자리다툼을 했던 것이었다. 그들은 종말론을 민중의 역사 투쟁 역량을 말살하는 내세주의의 ‘아편’이라고 매도했었다. 당시의 지배자들이 종말론을 사회 노동력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잠식하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미신으로 보았던 것처럼, 그때의 운동가들은 앞으로 올 차세대의 ‘젊은 피’ 지배자들로서 자신들의 권력쟁취의 운동력을 무력화시키고 자신들의 지배 대상으로서의 터전을 갉아먹는 종말론의 피안성(彼岸性)을 혐오했었다. 어쨋든 이 세상의 지배자들, 잘나고 똑똑하고 힘이 있어 누가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나머지 다중(多衆)을 지배하게 될 것인가를 겨루는 사람들에게는, 보수건 진보건 할 것 없이 그 다중이 자신들이 지배하는 세계에 신경을 써 주기를 원하지 역사 너머에 정신을 빼앗겨 현실을 갈망하지 않는 것을 싫어한다. 혹시 당신도 ‘가진 것을 누리고 사는 지배자’가 아닌가 한번쯤은 생각해 보라.

 세상의 재미가 솔솔 넘치는 이들은 결코 ‘마라나 타’(고전 16:22,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의 아람어)를 외치지 않는다. ‘마라나 타’는 한 생애를 지체 장애자로 살아야 하는 이들, 눈에 보이는 모든 좋은 것들을 빼앗긴 자들, 운명의 역풍이 너무 거세 최소한의 행복감조차 느낄 수 없었던 사람들, 너무나 받은 것이 적어 이문(利文)을 남길 한 달란트 조차 없는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이다.  바울의 하나님은 분명히 종말론에 기초한 ‘파루시아의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갑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룩해 줍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질 때에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압니다. 우리는 이 장막 집에서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덧입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장막 집을 벗을지라도 벌거벗은 몸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막에서 살면서, 무거운 짐에 눌려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막을 벗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킴을 받게 하려 함입니다. 이런 일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에 머물러 살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이지, 보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고후 4:16-5:7, 새번역).

 

 

 

  파루시아(4:13-18)

 

데살로니가 공동체의 특정 문제로 부각된 것은 이어지는 종말론과 연계되어 있다. 이들은 예수의 강림 때에 이루어질 구원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공동체였다. 예수의 ‘파루시아’(=강림)와 함께 이루어질 이 세계의 종말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알고 있는 복음의 핵심이었다. 신약성서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인정되는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이 그들에게 전했던 전도 메시지로 암시된 1:9-10은 초기 복음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있어 긴요한 열쇠가 되는 구절이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9-10).

 

구원은 앞으로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고 그것은 강림하는 예수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그들의 삶은 예수의 강림을 기다리는 삶이었다(1:10).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예수 강림 때 바울의 기쁨이요 자랑이며 면류관이었다(2:19). 그들의 신앙은 곧 기다림이었다. 그리고 바울의 극성스러운 염려와 돌봄은 바로 이 강림 때까지 공동체가 흠 없이 보전되기를 바람에서였다(3:13, 5:23).

 

1) 에스카톤

 

세워진지 얼마 안 된 이 신앙의 공동체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저들이 겪었던 것으로 보이는 핍박의 결과였을 수도 있다(2:14).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이렇게 죽은 자(들)로 인해 많이 슬퍼했음에 틀림이 없다(4:13). 극성스런 바울이 어찌 이를 그냥 두고 넘어갈까. 저들이 세상의 소망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일찍 죽었다고 해서 그들이 주님 다시 오실 때에 하나님 나라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는 것은 아니다. 이미 가르쳐서 알고는 있겠지만 좀더 확실하게 정리를 하여 위로하고 흔들림이 없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핵심이 되는 ‘에스카톤’(종말) 완성의 청사진을 그려준다.

 

가) 기본 진리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 그리고 주안에서 죽은 자들도 그의 부활과 연합하여 마지막 때에 다시 살 것이다(살전 4:14, 참고, 롬 6:5, 고전 15:12-19).

 

나) 에스카톤의 시간표(4:16-17)

 

① 호령, 천사장의 소리, 나팔소리와 함께 강림(예수의 파루시아[출현])이 시작된다.

②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죽은 신자의 부활).

③ 남아있던 신자들이 부활한 신자들과 함께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

④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먼저 죽은 자들을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들과 비교해 볼 때 그들이 주님의 강림 때에 불이익을 겪을 이유가 없다는 요지이다. 그러니까 주 안에서 죽은 자들로 인해 너무 슬퍼 말고 서로 위로하면서 힘을 내라(4:18).

 

2) 파루시아에 대한 의문들

 

사실 이렇게 그려주는 에스카톤의 실상을 우리의 사고로 정확하게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한된 시공(時空)에 갇힌 경험으로 학습된 우리의 인식으로는 아직 궁금한 것이 너무도 많다. 둥근 모양의 광활한 지구에 흩어져 살고 있는 수많은 신자들이 동시에 천지개벽의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 그리고 팡파레를 어떻게 들으며 강림하시는 주를 볼 수 있는지 궁금하다. 물론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 어느 한 공간을 통해 나타나신다 해도 카메라에 잡히기만 하면 위성을 통해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장면을 사운드와 함께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우 신약의 다른 문서들이 증거하는 ‘동시 목격’도 가능한 상상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역시 상상일 뿐이다.

 

가) 파루시아는 초역사적이다

 

예수의 ‘파루시아’에 대한 바울의 묘사는 우리의 역사(歷史)가 마감되어 그 역사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새롭게 열리는 세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어차피 상징적이다. 소리나 모습이 모두 사실적 묘사이나 그 묘사의 개념과 이미지는 어차피 이 현실 세계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인(sign)이 되어 가리키는 실재는 우리의 사고 범주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리라.  고린도전서 15:51-53을 유념하여 읽어야 할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바울의 이 증언에 따르면 우리는 파루시아를 현재 인간존재의 물리적 제한 속에 맞는 것이 아니다. 나팔 소리가 울리는 순간 역사의 시공(時空) 제한은 소멸되고 만다. 죽은 자들이나 남아있던 자들이나 현재의 껍데기를 탈피한다. 그리고 썩지 아니할 그 무엇, 죽지 아니할 그 무엇으로 바뀐다.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고전 15:49)을 입는다 했다. 우리가 시간과 공간에 갇히는 것은 바로 “흙에 속한 자의 형상”에 속했기 때문이다(고전 15:48). 한 시점에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변화된다면 지구가 둥글건, 땅덩어리가 얼마나 넓던, 강림하는 주님과의 거리가 아무리 멀던,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는 바울이 ‘미스테리온’(= 비밀 = mystery, 고전 15:51)이라고 부르는 그 어떤 신비한 방식으로 모두 함께 주를 목격하며 그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나) 개인의 종말과 우주적 종말

 

또 한가지 자주 의문에 부쳐지는 것은 바울의 편지 이후 상당한 시간이 경과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개념에 잘 잡히지 않는 시간의 거리이다. 바울은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의 가능성을 두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 1:23).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 그대로 들어서 이해하자면 바울이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 옆에 달린 강도 하나도 비슷한 약속을 받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분명히 바울도 환상(입신) 중에 경험한 낙원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후 12:4). 즉 바울을 비롯한 신자들은 죽음과 함께 이미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거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을 ‘잔다’고 하며 파루시아 때까지 땅 속에 있는 것으로 언급하는 데살로니가전서와 고린도전서의 본문은 이런 생각들과 심각한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역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초역사적 세계가 갖는 신비의 영역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일단 인간은 현재 우리를 제한하고 있는 물리적(物理的) 세계를 벗어나면 시간과 공간의 제한도 벗어난다. 성경에서 자주 말하는 영원(永遠)이란 개념도 ‘지리하게 계속되는 장구한 시간’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할 것 같다. ‘영원’이란 시공(時空)을 초월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곳에서는 우리 식 개념의 시간 길이는 별 의미가 없다. 베드로후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그렇다면 바울을 비롯하여 파루시아 전에 죽은 자들의 사망 시점과 파루시아 시점 사이의 2천년은 시공을 초월하는 영원의 세계 속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우리 현존재의 사고 한계 개념일 뿐이다.

 신자들은 죽는 순간에 바로 파루시아의 시점으로 건너뛴다. 죽는 순간에 시간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자들은 죽는 순간에 바로 파루시아 때의 부활을 경험하여 강림하시는 주님과 함께 영원 속에서 같이 살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낙원’은 바로 그렇게 주님의 강림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동거의 현장이며 실재이다. 따라서 죽은 자들이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고후 5:8, 빌 1:28)과 죽은 자들이 변화된 형상으로 부활하여(고전 15:51-53) 주님을 맞아 영원히 동거한다는 것(살전 4:16-17)은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 두 다른 방식의 표현이 된다. 그리고 죽음을 통과하는 개인적 종말과 파루시아를 살아서 맞는 우주적 종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된다. 단지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나 물리적 육신을 벗어나는 순간에 시간의 의미는 없어지니 그 차이 또한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살전 4:15).

 

 

바울 복음의 핵심에는 종말론이 있다. 종말론의 신앙은 도피적인 환각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 기초한 확실한 소망이다. 사람들은 사라져 없어질 것을 붙잡고 살면서 스스로 현실적이라고 고집한다. 썩을 것에 매여 더 중요한 것을 마구 희생하며 살면서 현실적이라 한다. 가장 사실적인 현실은 누구 하나 예외없이 종말(에스카톤)을 맞는다는 것이다. 개인적 종말과 우주적 종말의 구분은 물리적 육신에 갇힌 한계 존재의 미련한 오산(誤算)에 지나지 않는다. 종말은 현실이다. 그리고 종말론은 가장 현실주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말의 그 날을 사모하는 것(벧후 3:12a)은 방향을 바로 잡아 현실을 직시하는 가장 현실적인 현실주의이다. 종말론이 실제이다. 끝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렇다면 끝을 염두에 두고 사는 것이 가장 현실적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끝을 사모하는 것은 내세주의가 아니다. 소망을 갖고 그 소망을 현재에 끌어다 사는 엄연한 현실주의이다. 반드시 있게 될 끝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어서 그것을 사모하면서 현재를 사는 것이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