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12장,그리스도의 몸

호리홀리 2015. 6. 10. 09:33

그리스도의 몸

 

“신령한 것”으로 번역된 ‘뉴마티코스’(pneumatikos)는 ‘영적인 것’ 또는 ‘영적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일부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신령한(성령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여 ‘신령한(성령의) 것들’을 추구했다. 물론 자신들을 이렇게 부를 때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육신적’이고 ‘세속적’이라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는 것이었다. 물론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바울 자신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용어가 특정 그룹의 자기 주장을 위한 배타적 용어가 되는 것에 대해 경계를 하고 있다.(1절).

 

중요한 신앙고백 상의 진리를 표명한다. 누구도 성령으로 인하지 않고는 “예수가 주님”이라고 할 수 없다. 다른 영적인 세력들도 있다. 그런 영적인 세력들은 예수를 주로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에 감동된 사람만이 ‘예수가 주님’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다. 영 분별의 핵심은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바로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넓은 의미에서 ‘성령에 속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용어의 오용(誤用)이 가져온 오해를 수정하기 위해 바울은 3절에서 ‘뉴마티코스’라는 말 대신에 ‘카리스마’(은사)라는 단어를 도입한다. 전자가 개인의 능력이나 개인에게 속한 자질을 암시하는 반면 후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즉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발견되는 예언이나 방언과 같은 영적 현상들은 그들 자신의 특성이나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은사는 개인의 소유이기 이전에 한 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동일한 기원을 갖고 그 은사를 총체적으로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다양성은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목적에 따른 것이다. 은사는 여럿이지만 그 은사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한 몸을 이루어 하나이다.

 

그렇듯이 은사는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능력이 아니라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봉사를 하도록 하나님께서 개별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선물이다. 은사는 철저하게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자신을 위해 사용하면 그 순간부터 타락이 시작된다. 또한 공동체를 위한 ‘유익’이(7절) 없으면 성령의 은사라 할 수 없다. 신앙 공동체에 도움이 안 되면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은사의 주체는 내가 아니고 하나님(성령)이시다. “이 모든 일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11절). 은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선물이다. 교회가 잘 만들어지게 하기 위해 주시는 것이다. 그 분배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다. 수혜자는 교회이고 통로는 은사를 받은 개인이다. 종종 통로인 개인에게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라.

 

 

이곳에 나와 있는 은사의 목록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의 모든 것은 결코 아니다. 은사의 종류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증감하고 변한다.

 

        은사

 

(1) 사역의 주체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이다. 신자들은 그 몸의 지체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활용하여 전체로서의 몸을 세우고 그 몸이 사역을 하도록 개별적 역할을 한다.

(2)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개별 그리스도인들에게 몸을 섬겨 세울 수 있도록 은사를 주신다. 이 은사는 자기 영광을 위한 전리품이 아니고 철저하게 교회를 섬겨 세우기 위한 ‘봉사의 역할’을 위한 것이다. 은사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교회를 위한 것이다.

(3) 교회는 같이 움직이는 팀이다. 교회에서의 직분과 역할은 은사에 부합되도록 짜여져야 한다. 위계서열에 맞추어 공평하게(?) 나누어 갖는 것이 직분 구조의 목적이 아니다. 직분 구조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적절한 은사를 가진 사람을 역할에 배치시키는 틀일 뿐이다. 또한 공식적인 직분이 아니더라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은 계속 만들어지고 보전되고 또 경우에 따라 소멸될 수 있다. 직분(position)보다는 역할(role)에 신경을 쓰자. 역할을 위해 은사가 있다. 제도로서의 교회는 성도들의 은사에 따라 역할을 잘 배분해야 한다.

(4) 은사는 신약성서에 나열된 것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당시 교회에 따라 각기 다른 은사의 목록이 주어져 있듯이 은사의 종류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증감하고 변한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시간과 공간 속에 위치한 교회를 세우는데 필요한 현재의 역할들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그 역할에 맞는 은사들을 그 역할에 맞추는 일이다.

(5) 개인적인 은사:

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주어진 특별한 영적 은사들이 있다. 방언이나 예언, 병 고침 등이 여기에 속한다.

② 이러한 초자연적 은사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은사들은 기질과 성격, 특기, 선호도 등에 따라 선천적으로 주어지거나 후천적으로 개발된 것들이다.

③ 나의 은사를 알기 원하면:

▶ 고린도전서 12:8-10, 27-28, 로마서 12:3-8, 에베소서 4:11-12 등에 열거된 항목들 중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 있는지 살펴본다.

▶ 기도하여 하나님께 여쭈어 본다.

▶ 하면 신나고 잘 되는 것이 은사일 경우가 많다. 일 자체가 신나고 잘 되는 것과 그 일을 하면 사람들에게 멋져 보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전자는 은사일 가능성이 높지만 후자는 개인적인 욕심일 경우가 많다.

▶ 주변의 형제, 자매들이 보기에 내가 잘하는 것도 은사일 가능성이 많다. 다른 이들이 나의 은사라고 하는데 내가 하기 싫다면 역시 ‘욕심’과 ‘능력’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자기 자신을 영적으로 잘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다양성(12:12-28)

 

몸 메타포는, 한편으로 교회 내에서의 개별적 부분들의 다양성을(14-20절), 또 한편으로는 개별적 부분들 간의 상호의존성(21-26)을 주장하기 위해 주어졌다. 인간 집단을 몸에 유추하는 일은 그레코-로마 세계에서 널리 발견되는 것이었으나 바울이 몸의 메타포를 통해 유추해내고자 하는 명제는 당대의 것들과 다소의 차별성을 갖는다.

 

우선은 앞에서 언급한 ‘하나됨’을 되풀이하여 확인한다. 우리는 한 몸이다. 신분과 출신에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같이 한 성령을 마셨다.  잊지 말아야 한다.

   

몸의 메타포는 그레코-로마 세계에서 주로 ‘일치’를 호소할 때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몸 메타포들은 일반적으로 전체의 일치를 위해 부분들의 순응을 요구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고린도전서의 몸 메타포와 유사한 것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몸의 우화는 메네니우스 아그리파(Menenius Agrippa)의 이야기이다. 이 우화에서 몸의 각 부분들은 일하지 않고 먹을 것만 받아먹는 배에 대해서 분노한다. 그래서 손, 입, 이 등이 더 이상 음식이 배에 공급되지 않도록 태업을 공모했으나 결국 그로 말미암아 영양이 공급되지 않아 몸 전체가 빈사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 우화의 목적은 분명하다. 평민들의 반항을 억제하여 장로들을 상층부로 하여 유지되는 사회의 위계질서를 보전하기 위한 일치에의 호소이다.

 

여기서 보여지듯이 이러한 몸 메타포에 입각한 고대의 합심연설들(concordia)은 보수적 위계질서의 옹호를 주목적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이러한 정치 연설이 의도하는 사회체의 일치나 단결은 당시의 사회적 응집의 원리인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보전하는 것이었다. 로마는 피라미드형으로 위에서 아래까지 자세하게 규정된 등급으로 위계서열이 매겨진 계급 사회이다. 그리고 개인은 그러한 위계서열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래서 몸의 지체를 구분하는 방식도 그러한 위계질서의 관점을 따른다. 즉 “사회체(social body)는 신체(physical body)를 인식하는 방식을 규정한다”

 

따라서 자아의 여러 단면들은 위계질서에 입각하여 배열되어 있다. 여성보다 남성을, 약함보다 강함을, 열등보다 우등을 선호하는 견고한 사회적 위계질서가 고대인의 몸 안에 존재한다. 더구나 각 개별적 몸은 자연의 생리학적 위계질서의 어느 장소에고 분명하게 위치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각 몸은 그 자신 내에서 나름대로의 위계질서를 담고 있고 각 개별 몸은 사회와 자연의 위계질서 속에서 적절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그러한 위계질서가 붕괴될 때 건강은 위협을 받는다.

 

 

바울의 몸 메타포는 계급의 구별을 자연적 질서로 보는 그레코-로마 사회의 몸 메타포들과 달리 평등에 입각한 다양성을 천명한다. 후자에게 있어서 일치를 이루는 것은 위계질서의 순기능이다. 그래서 위계질서를 보전하기 위한 우화적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전자에 있어서는 일치를 이루는 것이 몸의 근원인 ‘같은 하나님-성령-주’이기 때문에 일치는 존재론적 전제가 된다. 그래서 에베소서의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2)는 명령이 가능해진다. ‘하나 되는 것’은 성령의 통일성으로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공동체는 그 하나되게 한 것을 보전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다양성은 하나 됨을 손상하지 않는다(고전 12:20)

 

서로 돌본다(22-27절)

 

후반부에서 메타포의 초점은 ‘다양성’에서 좀더 ‘일치’ 쪽으로 이동한다. 여기서는 일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지체들간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이 주안점이다. 그레코-로마의 합심연설은 위계서열의 필연성을 전제로 하여 상층부에 속한 존재들의 적절하게 절제된 지배와 하층부에 속한 지체들의 순응을 요구하는 기성의 보수성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에 바울의 메타포는 가부장적 위계서열의 이데올로기를 전도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역동적 일치를 지향한다. 어느 지체도 다른 지체를 무시해서는 아니 된다. 상층부에 속하는 눈과 머리가 천한 일을 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손과 발을 홀대할 수 없다(21절). 메네우스 아그리파의 우화가 상류계급을 상징하는 배에 대한 변호에 초점을 둔 메타포인 반면 바울의 우화는 상류계급(머리와 눈)이 하층계급(손과 발)에 대해 갖는 오만과 편견을 질책한다. 위계서열에 입각한 계급의식은 “종이나 자유자나”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한 성령을 마셨다는 초반부의 선언적 고백에 의해 이미 심판을 받았다(13절).

그뿐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존귀와 비천함의 외모는 역할의 중요도나 실질적인 신분과 반비례의 관계를 갖는다는 역설을 지적한다.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내장)들이 사실은 꼭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들이다(22절). 그리고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은 더 귀한 옷으로 씌워주고 “아름답지 못한 지체”가 아름다운 것을 취하지만 정작 “아름다운 지체”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생각해 보라(23-24a절). 이러한 지적을 하는 바울의 의도는 명약관화하다. 고린도 공동체의 상류층 구성원들이 사회적으로 하층에 속한 신자들이 자신들과 같이 한 집단을 이루고 있는 것을 불편해하며 그들을 무시하는 태도가 비판을 받고 있다. 상류층에 속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층에 속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자들에게 오히려 존귀와 영예로 옷을 입혀야만 된다. 상류층에 속한 자신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신앙의 공동체 내에서 존귀와 영예의 옷을 입을 필요도, 입으려고 노력할 이유도 없다(24a).

바울의 처방은 상류층에게 가는 적절한 권력과 영예와 존귀를 당연시하면서 하층계급에게 약간의 자비심을 베풂으로써 분쟁의 소지를 없애고 사회체의 일치를 주장하는 것과는 발상이 다른 접근이다. 그리스도의 몸에서 분쟁의 소지를 없애고 성령의 일치를 지키는 원리는 기성 사회에서의 분배의 법칙을 뒤집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쳬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다]”(24b-25절). 그렇다. 그리스도의 몸에서는 지체들이 계층에 관계없이 서로 필요가 있는 다른 지체들을 똑 같이 관심을 기울여 돌보아 줄뿐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분명한 사실로서의 몸의 진리 한 가지를 천명한다. 몸은 부품들의 조립인 기계가 아니라 서로 하나로 붙어있는 유기체(organism)이다. 한 부분의 고통은 몸 전체의 고통으로 느껴지고 한 부분의 영광은 몸 전체의 즐거움이 된다(26절). 하나로 생각하라. 바울은 서로 다른 부분들 사이의 관용 도에 만족하지 않는다. 바울이 비전으로 제시하는 것은 “모든 구성원들이 다른 이들의 슬픔과 기쁨을 공유하는 은혜롭고 사랑이 넘치는 ‘시너지’(synergy)이다.” 그리고 이 모든 교훈의 요점은 가진 자들에 대한 권면으로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명예로운 위치에 있는 상류층의 신자들은 교회 내에서 사회적 명예를 누리지 못하는 하층계급의 신자들에게 영예와 존귀를 부여함으로써 즐거워하고 기뻐하라.

 

여기에 바울의 가르침의 핵심이 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부담을 짊어짐으로써 조화와 일치를 유지해 나가라는 것이다(참고, 롬 15:1).

 

그렇듯이 다양한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사람들에게 다른 은사를 나누어주셨고 이것들이 종합되어 한 몸을 섬기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하나로 엮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가장 큰 은사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은 개별적으로 기독교 안팎에서 널리 애용되어 와서 나름대로의 다양한 해석과 설명을 낳았다. 하지만 고린도저서 내에서는 ‘성령의 은사’가 불러온 고린도교회의 혼란을 바로잡는 차원의 은사론의 일부로 주어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