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14장,영적질서

호리홀리 2015. 6. 11. 09:22

 바울은 은사를 사모할 것을 권했다(고전 12:31, 14:1). 그러나 은사를 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사랑이다. 은사를 구하는 것은 사랑이 되어야 한다(14:1). 사랑하기 위해서 은사를 구해야 한다. 무엇보다 사랑 자체를 은사로 사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은사들도 사랑을 위해 구해야 한다. 12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은사는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즉 공동체를 세우는 성도 사랑이 은사의 존재 이유라는 말이다.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하는 이유도 후자가 교회를 세우면서 성도를 섬기는데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4장의 요지는 비교적 분명하다. 첫 절과 마지막 두 절을 그대로 읽기만 하면 된다. “신령한 것을 사모한다면 특별히 예언을 구하라. 그렇다고 방언을 금하라는 말은 아니다. 단지 적절한 질서를 유지하면서 이 은사들을 활용하라.”

 

 

 ‘글로싸’(glossa, 방언)는 사람들이 들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이다. 사람들이 소리를 듣지만 의미를 지닌 일반적 언어는 아니다. 방언하는 사람 자신도 발성된 소리가 지닌 뜻을 알지는 못한다. 그래서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했다(2b). 따라서 방언을 듣는 분은 하나님이시다(2절). 사람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방언은 방언하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신비한 의사소통이다. 그래서 방언을 통해 유익을 얻는 것은 방언하는 사람 자신이다. 방언은 자신을 세운다(4a).

이런 의미에서 ‘은사는 교회를 위한 것’이라는 일반 원리가 방언에서는 약간 빗겨간다. 교회의 지체인 나를 세움으로서 교회를 세운다는 의미에서는 여전히 이 원리가 적용된다. 그러나 다른 것들에 비해 좀더 이기적인 은사이다. 로마서 8:26은 방언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물론 방언을 하지 않는다고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방언은 성령의 중보기도의 증거 중의 하나일 뿐이다).

 

 예언은 사람들이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예언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방언을 듣는 것이 하나님이라면 예언을 듣는 것은 사람이다.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듣는 쪽은 사람이며 예언자는 매개(媒介)로 사용되는 것이다. 예언의 목적은 사람을 세우고, 위로하고, 격려하는데 있다(3절). 따라서 예언은 교회를 세운다(4b). 그래서 예언은 방언과 달리 본래 은사의 의도에 꼭 들어맞는다.

 

 

바울 사도는 예언이 방언보다 더 크다고 명백하게 선언한다(5절). 그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바 예언이 방언보다 더 본래 은사의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통역이 없으면 방언은 명백하게 예언보다 열등하다(5절). 예언은 교회를 세우지만 방언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 내에서 방언의 가장 큰 한계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라는 점이다(7-11절). 나 자신은 감사하거나 축복하는 마음을 갖고 방언을 하겠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16-17절). 영은 기도를 하지만 마음 차원의 결실은 없다(14절, 방언 기도는 기도하는 당사자에게 힘을 준다. 그러나 타인에게 유익을 끼치지는 못한다).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면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과 오랜 시간 멀뚱멀뚱 앉아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서로 야만인이 된다(11절). 듣는 사람을 무식하게 만들어 버린다(16절). 외부인들에게 혐오감을 주거나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23절).

 

이 한계를 극복하여 본래 의미의 은사의 반열에 속하기 위해 바울은 방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통역’의 은사를 구하라 권한다(13절). 영과 마음이 같이 기능할 것을 권한다(15절).

고린도 교회의 은사 문제를 좀더 좁혀 본다면 ‘방언의 남용과 무절제’였다. 그들은 ‘신령한 것’(뉴마티코스)을 사모했다. 그렇게 신령한 것을 사모하려면 아예 더 풍성하기를 구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기를 바란다고 했다(12절). 무슨 뜻인가? 이들은 주로 방언을 추구하고 방언 말하기를 남용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방언 자체가 갖고 있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방언 활용이 교회에서 야기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은사추구의 열정을 건강한 방향으로 돌린다. 방언은 통역과 함께 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말이다. 통역이 없으면 방언 일만 마디가 깨달음의 말 다섯 마디보다 못하다. 그러나 방언 말하기 자체를 금하지는 않는다(18절, 39절).

 

 예언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친다는 점에서 방언보다 우등한 것으로 평가된다.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을 통해 사람들은 죄에 대해 책망을 받으며, 잘못한 일들을 깨닫게 되며, 그래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느껴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25절). 예언은 그 역할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다양한 계시, 지식의 말씀, 각종 교육 행위들과 같은 반열에 있다(6절). 기본적으로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이 전달되는 여러 가지 방법들 중의 하나이다.

 

초기 교회의 예배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의 정형화된 예배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정해진 순서에 의해 틀에 짜이기보다는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가운데 적지 않은 자유로움이 있었던 것 같다. 바울 사도는 이 자유로움이 방종이 되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14:40).

찬송,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 등을 예배의 요소로 들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신앙 공동체에 유익을 주는 것이어야 된다. 찬송과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예배의 요소가 되고 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를 통해 그 일면을 볼 수 있는 초기 교회에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대로 비교적 자유롭게 계시(예언)와 방언이 예배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 같다. 바울이 주목하여 교훈을 주고자 하는 것은 이 방언과 예언 활동이다.

 

 예배 중의 예언과 방언

 

 통역이 없으면 방언은 공중 예배에서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통역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순서를 따라서 하도록 한다.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일어나 방언으로 말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된다(27-28절).

 

예언도 2-3인이 순서를 따라서 하도록 되어 있다. 한 사람이 예언을 하고 있는 중에 옆에 있는 사람에게 새롭게 계시가 내리면 먼저 하던 사람은 스스로 절제하여 중단하고 바통을 넘겨주어야 한다(29-30절). 예언을 듣는 사람들이 분변을 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29절). 예언을 통해 주어지는 교훈이나 지시는 절대적이지 않다. 듣는 사람이 분별을 해야 된다. 예언이 현대인의 시각으로 볼 때 초자연적 현상이지만 그것이 초자연적이라 해서 절대적으로 오류가 없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오히려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부분이 많았고 그래서 잘 분별해야만 되었다. 이것은 또 다른 초기 공동체인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19-22).

 

 이러한 분별의 상호견제를 무시하여 독선적으로 방언과 예언을 마구잡이로 예배 중에 터트렸던 사람들에게 주는 권고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33절). 결국 샬롬(화평)이 없으면 하나님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샬롬을 만드시는 분이다. 어지러움과 혼돈과 혼잡과 아비규환은 하나님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사단의 영역이다. 모든 은사(=신령한 것)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몸의 샬롬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상당히 강력한 경고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자신의 의견일 경우 그 점을 밝히는 바울이 이 건에 있어서는 주의 명령이란 사실을 분명하게 한다(37절). 이것이 주의 명령이란 것을 알지 못할 경우 공동체에서 무시를 당해도 마땅하다고 선언한다(38절). 논조는 이렇다. “이것은 의견이 아니라 주의 명령이다. 이것을 모른다면 너희는 희망이 없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이 모든 것의 마지막 결론은 질서이다. 교회를 위해 예언하기를 사모하라. 그러나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절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예언의 목적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로 하여금 배우고 권면을 받게 하는 것이다(31절). 사람들이 믿음에 바로 서도록 돕고 그래서 신앙의 공동체를 세워나가기 위한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 교회에서 이것은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현대 교회의 예배에서 예언 활동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예언과 동일한 효과를 갖는 것들이 많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예언 활동이 있을 때 갖는 신앙의 효과는 크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이던 사람들이 예언의 현상 자체에 도전을 받아 믿음을 갖기 시작할 수 있다(이 점에 있어서는 방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언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말씀을 통하여 깨달음을 주어 격려하고 경책하는 일과 동일하다. 아직 말씀이 정착되지 않았던 초대교회에서는 예언의 역할이 중요했다. 하지만 복음과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전승이 정착되어 성경을 형성해 가면서 예언 활동은 목사와 교사의 설교와 교육으로 대체되어갔다(엡 4:11).

여기서 바울이 예언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신약성서’가 아직 정착되지 않던 시절에 예언이 교회에서 말씀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책보다 영이 더 지배하던 시절이다. 지금도 책이 잘 활용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이 더 지배적인 경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과 책은 같은 역할을 한다.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책도 영이 없으면 제대로 이해되지 않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책을 통한 설교는 예언의 구실을 하고 있다. 고린도전서의 예언 자체를 현대 교회의 설교와 동일시하는 것은 본문의 곡해이다. 그러나 예언이 갖는 효과는 오늘날의 설교와 동일하다고 보아야 한다.

교회에서 가르치기 위해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의 방언을 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울은 공동체 세우기 차원에서, 철저하게 말씀을 방언보다 중요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