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11장,성찬과 새언약

호리홀리 2015. 6. 10. 08:50

성찬

 

초기 교회는 오늘날의 주일(主日)인 안식 후 첫날에 모임을 가졌다(행 20:7, 고전 16:2).  별도의 교회 건물을 갖고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개 부유하여 큰 집을 갖고 있는 교인의 집에서 모였을 것이다.  식당인 ‘트리클리니움’(triclinium)은 일반적으로 많아야 9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식탁에 둘러앉을 수 있는 사람 수가 이렇게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손님들은 ‘아트리움’(atrium)이라 불리는 안마당에 앉거나 서서 식사를 해야 되었다(Murphy-O'Connor, St. Paul's Corinth, 153-61). 물론 ‘트리클리니움’에는 주인과 가까운 친구와 상류층 인사들이 자리를 같이 했다.

당시 로마의 관리요 저술가였던 Pliny the Younger의 경험을 들어보면 고린도 교회 만찬의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최고의 음식들은 자신(주인)과 선택된 몇 사람 앞에 마련되었고 싸구려 음식들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포도주까지도 세 종류로 나누어져 각기 다른 용기(容器)에 나누어져 있었다. 물론 손님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주는 대로 받아먹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첫째 종류는 자신과 우리들을 위한 것이었다. 둘째는 덜 가까운 친구들을 위한 것이었고(그의 친구들은 모두 등급이 매겨져 있었다), 나머지는 그와 우리들의 해방 노예들(freedmen)을 위한 것이었다(Letters 2.6).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모일 때 갖는 ‘주의 만찬’은 ‘주의 만찬’이라 할 수 없다고 꾸중한다 “여러분들이 함께 모였을 때 하는 짓이 [내가 보기에는]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올시다”(21절). 자기네 것을 챙겨다가 먼저 먹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어 어떤 사람들은 아예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일부는 포도주에 취해서 헤롱헤롱 했다고 한다(21절). 이런 추태는 (1) 하나님의 교회를 무시하는 것이며, 또한 (2)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수치심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22절). 그러니 이들을 칭찬할 이유가 없었다.

고린도 교인들이 주일에 유력한 사람의 집에 모일 때 주의 만찬을 같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참고, 행 20:7). 그러나 이들은 주의 만찬을 당시의 ‘심포지움’(모여서 먹으면서 학문적 토론을 하는 것)이나 사교성 잔치들과 혼동을 했던 것 같다. 주인과 가까운 유력한 사람들은 별도의 자리에 앉아 자신들이 준비한 음식을 풀어놓고 나머지 사람들에 아랑곳없이 잔치를 벌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다 보니 잔뜩 마셔 취한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제대로 음식을 대하지도 못하면서 소외감과 수치심을 느꼈다. 이것을 어찌 주의 만찬이라 할 수 있었겠는가? 차라리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꾸중을 들을만도 하다(17절). 그래서 바울은 주의 만찬이 무엇인지를 가르칠 필요를 느꼈다.

 

 

주의 만찬은 예수께서 체포되시기 전에 제자들과 같이 했던 유월절 만찬에서 시작되었다. 이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이 일을 계속 할 것을 요청했다. 예수 죽음의 의미가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이었다. 주의 만찬은 ‘먹고 마시는 즐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묵상함’에 있었다. 마가복음 14:12-25를 중심으로 당시의 상황을 다시 상고해 보자.

 

 열 둘 중에 가룟 사람 유다가 대제장들과 금전적 연계를 가졌다. 이제 언제 어디서 그를 확인하여 체포하는지의 문제만 남았다(10-11절). 한편에서 이렇게 음산한 계획이 진행되는 중에 예수는 유대인의 관행대로 유월절 식사를 준비시킨다. 예루살렘 성내에 들어가면 물동이를 이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 조용히 그가 들어가는 집에 가서 장소를 부탁하라. 그곳에서 우리는 유월절 식사를 갖는다(12-16절). 음모의 진행을 알고 있는 예수로서는 거동을 무작정 노출시킬 수 없었다. 일단 안전한 곳에서의 유월절 식사를 원하셨던 것 같다.

식사의 분위기를 상상해 보라. 이미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의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었다. 병자들이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나가고 군중들이 환호하며 몰려들던 그 시절의 흥분은 이미 옛날이야기였다. 분위기가 깊이 가라앉았을 것이다. 제자들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같이 다니던 열 둘 중에 예수를 배반할 사람이 있다는 지적까지 있어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되물어 왔다(19절).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공포가 이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원래 출애굽 때에 모든 것을 준비하고 밤을 지새다시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불안과 긴장과 비밀스러움이 이곳 예수의 유월절 만찬에서도 유사하게 드리웠다. 죽음의 사자가 애굽 전체를 휩쓸 던 그 음산한 밤이 연상되는 분위기였다.

 

유월절 식사가 항상 그렇듯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내셨는지가 상기되었을 것이다. 그때 그 위기와 어려움에서 저들을 건져내신 하나님은 이 암울한 현실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다시 강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매년 먹어오던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선언하신다. “여러분들이 먹는 이 유월절의 무교병이 바로 나입니다. 여러분 나를 먹어서 그 안에 영원히 보전하십시오. 이것은 나입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느꼈을까? 주님께서 나를 위해 내가 먹는 유월절 빵이 되시는구나. 스승님께서는 나를 위해 내가 마시는 유월절 포도주가 되시는구나. 이제 죽음을 앞두고 계신 주님께서 떼어주는 떡을 받아먹는 그들의 마음은 신비의 숙연함 속에 빠져 들어갔을 것이다. ‘이것이 내 몸이다’라는 아람어 표현은 ‘이것이 나다’(=person, self)라는 뜻이다. 적포도주는 그 빛깔로 인해 주님의 보혈로 상징되었다.

 

새 언약

 

피는 언약을 위해 필요한 제사를 가리킨다. 일찍이 옛 언약, 즉 시내산 언약도 짐승의 피를 통해 세워졌다(출 24:1-8). 짐승의 피를 받아 그 반은 단에 뿌리고 나머지 반은 백성에게 뿌렸다(출 24:6-8). 그렇게 피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특별한 관계에 들어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시면서 저들의 왕이 되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말씀을 준행하여 그 뜻을 행하는 그 나라의 백성들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언약이 깨졌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스라엘은 반복하여 범죄하고 우상을 섬기며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면서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다. 결국 북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 유다는 주전 586년 바벨론에 멸망했다. 왕이 눈을 뽑힌 채 포로고 잡혀가고, 약속의 땅을 빼앗겼으며,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중개자들인 제사장들도 끌려가고, 절대로 범할 수 없는 성전마저 무너져 버렸다. 남은 것이 없었다. 언약이 깨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약이 깨진 바로 그 위치에서 예레미야를 통해 새 언약을 세우겠다고 약속을 했다(렘 31:31-34).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의 피가 그 약속된 새 언약을 위한 것이라고 선언하신다(막 14:24, 고전 11:25).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흘리신 피의 절반은 하나님의 단에 그리고 절반은 믿는 우리들을 향해 뿌려져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을 이루시고 그로 말미암아 새 언약이 세워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신약(新約)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새 언약의 피를 말씀하시고 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때가 오기 전에는 다시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이셨다(25절). 이것은 유월절 잔의 관행을 염두에 두고 그 의미를 풀어야 할 것 같다. 원래 유월절 만찬에서는 식사 중 잔을 네 번 들어 포도주를 마신다. 그리고 이 네 번의 잔은 각기 출 6:6-7에서 언급된 사중의 구속 약속을 상징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②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③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④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출6:6~7, 개역).

 

예수께서 24절에 하신 언약의 피에 대한 언급은 ‘구속’의 개념이 들어가 있는 세 번 째 잔을 들 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원래 이어졌어야 할 마지막 잔을 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마지막 잔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때에 들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다짐이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잔치가 벌어질 것이다. 그때는 기쁨과 지복(至福)의 향연이 될 것이다. 그 메시아의 잔치에서 축제의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는 다시 잔을 들지 않겠다 하시면서 마지막 잔을 거두어 미래를 향해 열어두신 것이다. 그 중간에 예수께서 마실 잔은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언급한 “이 잔”(36절), 즉 십자가의 죽음밖에는 없다는 결연한 자세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언급한 그 쓴잔을 마셔야만 예수께서는 먼 미래에 메시아 잔치에서 다시 포도주 잔을 기울일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면 바울이 전해 받은 주의 만찬 전승이 재림을 언급하면서 그때까지 이 일을 행하며 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우리는 남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잔을 위하여 그분이 오실 때까지 성찬식을 행하며 이 성찬이 담고 있는 구속의 소식을 땅 끝까지 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 제자라면 주님께서 마지막 잔을 드시는 날을 위해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성찬식의 핵심은 ‘기억’이다. 예수께서 왜 돌아가셨고 무엇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나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시청각 교육의 예배이다.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이다. 의식의 참여자들이 실제로 당시의 상황을 재연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의미를 가슴에 다시 새기는 것이 목적이다. 떡을 떼면서 나를 위해 찢긴 주님의 몸을 깊이 묵상한다. 잔을 들면서 나의 죄를 위해 흘리시고 새 언약을 세운 주님의 보혈을 깊이 되새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확인하는 축복의 시간이 성찬식이다.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 때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이 교회 내에서 선포되고 나가서 교회 밖에서 전도되어야 할 것을 상기하는 시간이다.

 

The Living Word of God - Jesus Christ

The Written Word of God - Bible

The Spoken Word of God - Preaching

The Acted Word of God - The Lord's Supper

 

 주의 만찬은 그 의미를 알고 그 의미에 부합하는 올바른 자세로 임하여야 한다(27절). 그렇지 않을 경우 새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귀한 죽음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죄나 마찬가지이다(27절). 그러나 이것이 성찬식에서의 떡과 포도주를 신격화하는 화체설(化體說)로 가는 것은 말씀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다.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가 실질적으로 그리도의 몸과 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성찬의 자리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은혜를 주신다.

 

성찬의 자리는 ‘한 몸된 교회’를 확인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는 시간이다. 성찬은 예수께서 돌아가심으로 만들어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하나됨을 확인하는 일치의 선포이다. 고린도 교회는 바로 이 중요한 진리를 범함으로써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분열 중에  주의 만찬을 더럽혔다. 그래서 실제로 하나님의 징계가 공동체에 임했던 것으로 보인다(29-30절). 성찬에서 살펴야 할 것은 교회의 모습이다. 주의 한 몸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한 가지 잘못된 오해는 불식되어야 한다. 혹자는 개인적으로 범한 죄가 있을 때 성찬에 참여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다. 죄 없어 완벽한 상태에 있는 사람만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성찬을 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오늘의 본문에서 자기를 살피며 주의 몸을 분변하라는 권면은 구체적으로 고린도 교회의 일부 부유한 사람들이 보였던 추태를 가리킨 것이다. 모임에서 만일 사람을 차별하고 교회를 망가뜨리면서 성찬의 진정한 의미도 몰라 장난하듯이 의식에 끼어 든다면 분명히 문제이다. 그러나 완벽한 상태에 있는 신자만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본문을 잘못 이해한 데서 온다. 성찬은 도덕적 완벽성을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는 시간이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을 때 주님 앞에 회개하고 새 생명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찬에 참여하여 그분의 떡과 잔을 나누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