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사도행전

사도행전12장,복음의 능력

호리홀리 2015. 6. 2. 12:30

 누가는 두 가지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첫째, 베드로가 헤롯으로 인해 강제로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어(17절) 이방세계에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제 초점이  바울에게로 옮겨지게 되었다. 둘째로, 헤롯의 난폭한 핍박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교회핍박이 그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그 성도들은 마침내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하게 되었고, 결국 이제는 이방인에게로 나아가야 할 때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다음 장에서 우리는 안디옥 교회에 의해서 초대교회 최초의 선교사가 이방인들의 전도를 위해서 파송되는 장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야고보의 순교

바울이 회심한 후 제사장들의 하수인들이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핍박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 전혀 다른 측면에서 폭풍이 일고 있다. 국가 권력으로 핍박이 진행된 것이다. 헤롯 아그립바 Ⅰ세는 헤롯 대왕의 손자이다. 그는 주후 41~44년 동안 자기 조부 헤롯 대왕의 전체 영토를 다시 한 번 더 통일할 수 있었다. 헤롯 아그립바 Ⅰ세는 로마에서 가이오 갈리굴라와 친하게 지냈다. 그 결과 갈리굴라가 로마의 황제가 되었을 때, 그는 조부 헤롯 대왕 이후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유대인 ‘왕’이 되었다. 아그립바의 조모 마리암네가 하스모니아가의 딸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두매인인 동시에 유대인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힘을 백성을 위해 사용했던 그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는 바리새파를 지지했고 성전에도 자주 찾아갔다. 그리하여 그는 교회 지도급 인사들에게 적대적으로 대했다.  야고보는 예수께서 아끼시던 세 제자 중 한 사람이다. 또 그는 예수께서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은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으리라(마 20,23)고 말씀하신 세베대의 두 아들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의 그 말씀이 그에게 이루어졌다. 이 사도가 순교함으로 남은 사도들에게 그들이 무슨 각오를 가져야만 할 것인가를 보여 주었다.

참수형은 이전에는 도끼로 행해졌지만 당시에는 칼로 행해졌다. 이 형벌은 로마 시민들과, 십자가형으로 처형하기에는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가해졌던 훨씬 더 자비로운 형태의 처형법이었다. 이 위대한 사도의 순교에 대하여 스데반의 경우처럼 상세히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 짤막한 기사로도 초대의 복음 전도자들이 자기들의 피로써 진리를 보증하려 했음을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다.


베드로의 석방

헤롯은 사도들의 대표격인 베드로를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야고보를 처형한 뒤 유대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다렸다. 반응이 호의적인 것을 보자, 그는 베드로를 체포해서 옥에 가두었다. 누가는 이 소송이 시간적으로 무교절과 관련해서 일어나야 하며 왕이 또한 백성을 염두에 두고 이 일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로 예수의 소송에 대한 기억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켜준다.(눅 22:1~2, 7; 23:18~25)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당한 체험과 교회가 당한 체험이 유사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이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부터의 속박에서 풀려난 것을 기념하는 바로 그 절기인 것이다.

베드로는 넷씩인 네 패의 군사에게 즉 16명의 군사에게 넘겨졌다. 그 군사들은 한번에 네 명씩 교대로 베드로를 감시했다. 이렇게 하였으므로 그들은 베드로를 단단히 붙잡아 두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힘으로는 빠져나갈 희망이 전혀 없었다. 헤롯의 계획은 그를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헤롯은 결박당한 베드로를 그들에게 보여줌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고 그들의 눈을 기쁘게 해주려 하였다. 그는 이 일을 유월절, 즉 부활절 후에 행하려 하였다. 이 절기의 분주함이 지나가고 성이 한산해질 때, 그는 베드로를 공개 재판을 통해 처형함으로써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던 것이다.

베드로가 갇힌 후 교회는 그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기도와 눈물은 교회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의 죽음이 그들에게 경고가 되어서 그들은 베드로를 위하여 더욱 열심히 기도하였다. 또한 그들은 4장에서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였다. 비록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의 죽음과 고난이 그리스도의 나라의 이익에 크게 보탬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여도 이들의 생명과 자유와 평안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이다.    헤롯이 그를 끌어내기로 예정되었던 날의 전날 밤이었다. 헤롯은 베드로를 죽이려고 결심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피할 수 있도록 옥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극한 상황에서는 도우신다. 이 때는 그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있을 때였다. 이것 이외에도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켰다. 이런 상황 하에서는 누구도 그를 구출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구를 구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군사들 틈에서 누워 자고' 있을 때였다. 그는 닥쳐올 위험에 떨지도 않았다. 죽음을 지척에 두고도 그는 평안히 누워서 잤다. 그것도 적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말이다. 감옥의 군사들 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잠을 주셨다. 그는 구출될 것을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깨어서 안절부절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구출을 받았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     비록 그곳은 어두운 곳이고 또 밤중이었지만 베드로는 그가 갈 길을 환하게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베드로의 손에 수갑을 채워 도망가지 못하도록 확실한 조치를 취했던 것 같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푸시고 그 손을 자유케 하셨다. 그는 즉시 옷을 입고 천사를 따르라는 지시를 받고 그 말에 순종하였다(8,9절).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위해 구약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하셨던 것(단 3:28; 6:23)처럼 천사를 보내주신 것이다. 베드로는 잠에서 깨어나 어찌할 줄 몰랐으나 천사가 지시한대로만 따랐다. 그는 허리띠를 띠어야 했고, 그는 걸어 갈 수 있도록 신을 신어야 했다. 또 그는 천사를 따라갈 수 있도록 겉옷을 입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하늘에서 온 사자가 그를 지켜주고 안내해 주었으므로 큰 용기와 기쁨으로 따라갈 수 있었다. 그는 나와서 따라갔다. 그는 천사의 인도를 받아 무사히 위험을 벗어났다(10절). 파숫군들이 통로마다 겹겹이 지키고 있었으나 그들에게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또 들키지도 않고 그 길로 빠져 나왔다. 천사와 베드로는 '첫째와 둘째 파수를' 무사히 지났으나 그들 앞에는 아직도 쇠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쇠문 앞에 이르자 그 문이 열렸다. 그들이 그 쇠문에 손을 댄 것도 아닌데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서 '절로 열렸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때 그 앞길에 극복하기 힘든 어떤 장애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쇠문조차도 저절로 열리게 하셨다. 이 쇠문은 그 성을 빠져 나오는 통로로 이곳을 통과하자 그들은 거리로 들어 갈 수 있었다.

베드로가 제정신을 되찾아 스스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드디어 베드로가 정신이 나자 그것이 꿈이 아니고 사실임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이제야 참으로…알겠노라(11절). 즉 내가 이제야 이것이 꿈이 아니고 사실임을 알았다. 베드로는 곧 바로 한 교우의 집으로 갔다. 그 집은 요한 마가의 어머니요 바나바의 자매인 마리아의 집이었다. 그 가정 교회에서 작은 예배 모임을 갖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많은 사람을 모아 함께 기도하고 있음을 알았다. 모두 곤하게 잠이 든 야심한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대문 앞에 이르러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이기까지는 약간의 소동이 일어났다(13-16절).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13절).

한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 그러나 그는 밖에 누가 무슨 용무로 왔는지 확인될 때까지는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서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같은 나이 또래에 비하여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한 소녀같이 보인다. 그녀는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미처 그를 추운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게 하지 못하였다. 즉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였다'. 그녀가 달려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밖에 섰더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였다. “그럴 리가 없다. 그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다”는 말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틀림없는 베드로라고 굽히지 않으니 그때 그들은 “그렇다면 그의 천사다”라고 말했다(15절).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가 보낸 사자가 그의 이름을 빌어 사용한 것으로 보았다. 즉 그 계집아이가 그를 베드로라고 믿은 것은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었으나 그들은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문 밖에 있는 사람이 자기가 베드로라고 칭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들은 베드로가 심부름을 보내서 온 자인데 네가 그를 마치 베드로인 것처럼 착각하였다. 그는 그의 수호천사다"라고 말했다. 어떤 학자는 그들이 베드로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불길한 전조로서 천사가 나타난 것으로 상상했다고 생각한다. 그 베드로의 수호천사가 ‘이것으로 족한 줄 알라 베드로는 죽어야만 한다.’고 말하러 온 것처럼 생각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알리려 하늘에서 천사가 온 것으로 생각했다. 어떤 잘 알려진 유대 전승은 의인이 죽은 후에 천사가 된다고 해서 그들이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기도 모임의 목적을 생각해 볼 때(12:5), 그들이 놀란 것은 모순이며 아마도 이것을 읽은 고대 독자들은 그러한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베드로는 계속 문을 두드려야 했는데 어쩌면 이웃을 깨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중에는 귀족 계층의 제사장 집도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매우 위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급기야 그들은 계속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고, 문 앞에 서있는 베드로를 보고 놀란다. 베드로는 자기가 구출된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가 그들 앞에 나타나자 그가 구출된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그 주변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들이 너무나 소란을 떨었으므로 그는 자기가 구출된 경위를 잘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였다(17절).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크신 일에 대하여 그들과 함께 엄숙히 감사를 드린 다음 거기를 떠난 것 같다. 베드로는 다른 교우들에게도 이 소식을 알리도록 사람을 보냈다. 가서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17절). 이 야고보는 열두 사도 중 한사람이었던 야고보가 아니라 주의 형제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다.(15:13, 갈 1:19) 여기서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베드로로부터 야고보로 옮겨지게 되며, 이러한  완성이 15장에서 발견된다. 베드로는 현재로서는 자기의 안전을 위하여 피신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17절).

이 일로 인하여 가장 큰 곤혹을 겪었던 것은 파숫군들이었다(18절). 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18절). 그들은 지난밤까지만 해도 가능한 한 가장 단단하게 그를 단속했는데 그건 지난 밤 일이고 이제는 새처럼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세상은 이들을 찾아내는 데 무력할 뿐이다. 군사들이 매우 주의를 기울였던 것으로 볼 때(쇠사슬, 문 그리고 각 방마다 다른 파수꾼이 세워졌던 것), 파수꾼들이 그를 돕지 않았다면 베드로가 빠져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적으로 전무했다. 아그립바는 더 자세한 정보를 얻어 내려고 군사들을 심문했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로마법에 의하면, 파수꾼은 죄수를 놓칠 경우 그 죄수가 받게 될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이 경우에는 사형이었다. 아그립바는 군중의 호의를 잃으면서도 이 풍습을 따랐다. 결국 간수들이 그의 탈출을 묵인한 것으로 간주하여 헤롯은 파숫군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하였다(19절). 그리고 마침내 그도 이 일에 대하여 물러나고 말았다.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19절). 그는 마치 먹이를 놓친 사자처럼 마음이 상했다. 더군다나 그는 베드로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를 만족시키겠다고 그들을 기대에 부풀게 해 놓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거만을 떨려던 그의 얼굴은 수치로 먹칠하게 되었고 위신을 회복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그의 거만한 기질에 수치를 안겨주었으므로 그는 더 이상 유대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가이사랴로 떠났다.


아그립바 왕의 최후

두로와 시돈의 주민들이 헤롯을 매우 화나게 했다. 매우 사소한 문제라도 헤롯처럼 거만한 사람에게는 큰 분노를 일으키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하여튼 이유는 잘 모르지만 그는 두로와 시돈 사람들로 인하여 매우 불쾌해 있었다. 그를 거슬렸던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그에게 아첨했다. 그들은 그에게 굴종하고 어떤 조건하에서라도 그와 화친하려고 노력하였다. 두로와 시돈은 상업도시였기 때문에 곡물들을 항상 가나안 땅에서 조달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만일 헤롯이 화가 나서 두로와 시돈의 곡물수출 금지법이라도 제정하면 그들은 끝장이 나는 것이었다. 그들이 헤롯과의 불화를 막으려고 취한 방법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구로 삼은 것이었다. 블라스도는 헤롯의 귀의 역할을 하는 자로 그의 분노를 진정시킬 수완을 가진 자였다. 이제 그의 중재로 두로와 시돈의 대표들이 헤롯에게 와서 공식적인 사과를 하고 그의 관대한 용서를 빌고 또 다시는 그를 거슬리지 않겠다는 맹세를 할 시간을 정했다. 이렇게 함으로 그의 자만심을 충족시키고 그의 격노를 진정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헤롯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 앞에서 훌륭한 연설을 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되 그들이 더욱 놀라고 즐거워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연설을 하기 전까지 그들의 운명이 자기 손아귀에 있음을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려 했을 것이다. 백성들은 그에게 갈채를 보냈다.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22절). 물론 이것은 그들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온 것도 아니며 그들이 그를 고귀하고 선하게 생각한 데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이 그의 환심을 얻고 그와 그들 간의 화평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처럼 후원을 해주는 왕을 향한 이러한 아첨은 헬라 동부에서는 수세기 동안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로마 시대에 가이사는, 황제가 아닌 이교도들까지도 겸손한 자세로 그렇게 칭송받는 것을 피하기를 기대했다. 유대인으로서 그리고 유대인의 왕으로서 헤롯은 그것을 분명히 거절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헤롯은 이렇게 부당한 찬양을 취하였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죄가 되었다. 결정적인 그의 잘못은 자기 아첨자들을 꾸짖지도 않고 또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고 잠잠했다는 것이다(23절). 오히려 그는 자기를 신으로 생각하여 자기에게 신적인 영예가 주어진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23절).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고 야고보를 죽였으며 베드로를 투옥시키고 그외 많은 잘못을 저지른 죄과에 대한 처벌을 받은 것이다. 누가는 이 죽음을 아그립바 왕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행했던 또는 행하려고 시도했던 일과 관련짓고 있는 것이다. 헤롯을 죽이라는 명을 받아 그를 친 것은 '주의 사자'였다. 이 주의 사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나 자비를 베푸는 일을 수행하는 역할을 하며 하나님께서는 또 그러한 때 그들에게 일시키기를 기뻐하신다. 천사는 백성들의 갈채에 의기양양해 하며 자기의 영광에 도취되어 있던 바로 그 순간에 그를 악질로 쳤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천사가 그를 친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24절). 순교자들의 용기와 위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으신 사실은 기독교에 닥친 고난을 능가하고 사람들을 교회로 더욱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헤롯이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렸다.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왔다.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라(25절). 기아의 곤경(11:17~30)도 그리고 박해도 복음의 확장에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예루살렘 교회의 한 중요한 구성원인 마가 요한이 안디옥에 함께 내려왔다. 그는 안디옥 교회의  선교에 곧 참가할 것이다.(13:5,13; 15:37,39)

4장에서도 베드로는 요한과 공회 앞에서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는 질문을 받으며 자신의 목숨에 대한 위협을 받는 위기를 당했다. 이에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대답하게 되고, 그들은 그 기탄없는 대답과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있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어 경고만하고 놓아준다. 이처럼 베드로는 비슷한 위기에서 한번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고 또 한번은 천사의 도움으로 벗어난다. 이는 예수의 복음이 박해의 결과로 침체되기는커녕, 오히려 역동적인 증언을 가속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