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부터 시작된 사도들의 성령사역은 13장에서 그 내용이 더욱 확대되고 널리 전개되는 것을 보면서 전과 후로 구분질 수 있겠다. 덧붙여 말하자면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사도중심의 특히 인물 중심의 행전을 다루고 있다. 1장부터 줄곧 등장해온 베드로가 13장부터는 갑자기 사역의 모습을 감춘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까지 베드로는 15장에서 한번만 언급될 뿐이다. 그것도 12장까지 보여준 베드로의 모습과는 다른 공회의 한 변론가로만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스데반의 등장을 알리는 6장과 7장에서도 베드로의 모습은 감춰진다. 누가의 저작인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의 사람으로 대표적인 인물들의 흐름이 이처럼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13장부터는 바울의 모습이 끊임없이 등장하면서 사도행전이 기술되어 있다.
13장 처음을 알리는 말씀도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안디옥교회에는 ‘선지자들과 교사들’이라고 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 지도자들의 이름이 말씀에 기록될 정도로 특별한 사람들이었다(1절). 그들이 금식하며 주를 섬길 때(2절) 성령의 말씀이 나타난다. 바로 13장의 서막을 알리는 바나바와 사울의 안수사건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안수하여 보낸다. 사도행전을 다른 말로 하자면 성령행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면 무슨 사역이든지 성령이 함께하시고 성령의 인도함으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안수를 받은 바나바와 사울도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의 살라미에 간다(4절).
7장에서의 스데반의 죽음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을 흩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바로 한 사람의 순교이후 기독교의 박해는 더욱 가해졌지만, 결과적으로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다(사마리아 끝까지). 바로 이어서 12장에서의 요한의 형제 야고보의 죽음(순교)은 다시 한번 기독교의 핍박(베드로의 수감)을 암시하지만, 결과적으로 더 넓은 복음의 전파(이방인을 향한 바울의 파송)를 가능케 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행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이다. 누가는 이러한 성령의 사역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사울이 성령의 충만할 때 그 이름을 바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9절)사 도행전의 핵심 주제인 복음전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다시 말해 성령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바보에서 만난 거짓 선지자 바예수라 하는 박수는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이 만난 마술사 시몬과 비교가 된다. 하지만 시몬과 달리 이 바예수는 총독 서기오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힘쓰고 있다(8절). 이러한 모습에 바울은 성령의 충만으로 박수를 주목하고, 그에게 저주를 한다(9-10절). 그러면서 사도행전 11장에 언급된 적이 있는 ‘주의 손’으로 얼마동안 소경이 되게 한다. ‘주의 손’이 함께 할 때, 11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는데, 13장에서는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박수를 소경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처럼 성령의 사역을 방해하고 특히나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영혼에 악행을 행할 때는 믿음을 주는 주의 손도 그를 벌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현상으로 총독은 믿음을 갖게 된다(12절).
바울과 함께 동행한 요한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버가에 이를 때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13절). 이것은 함께 사역을 하고 수종자로 일한 요한이지만, 보내심을 받고 안수를 받은 바울과 바나바처럼 늘 성령의 충만함으로 가득하지 못하다면, 힘든 사역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계속해서 바울과 바나바는 바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복음을 전한다(14절). 회당에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을 때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기회가 주어진다. 이때 분명하게 바울은 손짓을 하면서 ‘들으라’하며 복음을 담대하게 전한다. 우리에게는 항상 복음에 확신과 분명한 대답이 있어서 언제든지 전할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면 누가의 복음전파 흐름을 엿볼 수 있다. 다름이 아니라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항상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고 구분 짖는다(16절). 이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과 그 외 이방인들에게도 전하는 복음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뒤에 가서는 불신앙적인 유대인들에게 경고하듯이 ‘이방인에게 향하노라’라고 말하기도 한다(46절). 이처럼 복음은 예루살렘을 넘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전달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에 흐르는 큰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바울은 구약을 많이 이용한다. 그러면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축복들을 설명한다. 애굽에서 인도하신 분도, 40년간 광야에서 참으신 분도,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을 멸하신 분도,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신 분도,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왕을 주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신 분도, 약속을 하신 분도, 약속을 이루신 분도 전부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설교한다(17절 이하).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또한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항상 약속하신 백성을 지키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바울은 예수의 이야기를 하면서 선지자의 말을 응하게 하였다는 말을 자주한다(27절 이하). 그러면서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라고 경고한다(40절). 바로 하바국1장 5절에 기록된 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경고한다. 바울은 하나님을 살리시는 자로 표현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이는 사람들로 표현한다. 하나님은 자꾸만 생명을 주시면서 살리시려고 노력하시는 분이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살리신 아들은, 죽었던 다윗과는 다른 썩음을 당하지 않은 분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실 거라고 전달한다(35절-). 바로 이러한 부활의 주를 우리가 만났을 때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31절).
이러한 바울의 설교는 다음 안식일에도 청함을 받는다(42절). 그리하여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모였다(44절). 많은 무리를 본 유대인들이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한다(45절). 이에 바울은 주께서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하셨다는 말씀으로 자신들이 이제는 먼저였던 유대인을 뒤로 한 채 이방인에게 향한다는 엄청난 발언을 한다(46절). 이것은 누가복음 13장에 나온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30절)” 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바울의 담대한 외침은 큰 힘을 발휘한다. 누가가 쓴 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담대히’에는 모든 이로 하여금 믿음에 거하도록 돕는다(48절). 이로써 주의 말씀이 사방에 퍼지게 된다(49). 다시 한 번 믿는 자에게 가해질 고난이 유대인들의 선동에 의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장차 있을 성령의 충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향하는데, 이것은 누가복음 9장에 나온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라는 말씀과 함께 볼 수 있다. 영접지 아니할 때에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그것으로 증거를 삼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주목이 되는 것은 성령의 충만을 이야기 할 때 꼭 기쁨이 함께 나온다. 바로 사도행전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믿음이 충만할 때에도(48), 성령이 충만할 때에도(52절) 항상 기쁨이 있다. 이것으로 비춰보면 성령의 사역은 항상 기쁨가운데 있는 것 같다. 성령의 충만함이 바로 기쁨의 충만과 함께 생각해 본다면 항상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은 즐거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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