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구약의 역사

(에스라3장-6장) 제 22 장 - 성전 건축(에스라3-6)

호리홀리 2014. 12. 10. 13:44

 

제 22 장 - 성전 건축(에스라3-6)


귀환한 포로들은 조상들의 본성으로 돌아갔으나 기원전 537년 7월에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모여 가장 큰 절기의 달로 1일은 나팔을 불어 기념하는 성회(나팔절)로 10일은 대속죄일이요 15일은 7일 동안 연속으로 지키는 초막절이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옛 성전터 위에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조석으로 번제를 드렸다. 이렇게 성회를 지키며 제사에 힘쓴 것은 해방과 귀환의 감격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 때문이었다.

다음 해 2월에 성전건축을 시작하여 지대를 놓았으나 북방 사마리아인들(에살하돈기원전 681-669, 앗수르왕의 식민정책으로 이스라엘로 이민되어 온 자)이 성전 건축에 저들도 참여하겠다고 제안하자 스룹바벨이 거절했다. 그들은 성전건축을 방해하며 파사왕에게 유다인들을 고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성전건축을 중지시키는 왕의 명령이 내려 15년 동안 중단되었다.

1. 성전건축 중단기간 중의 파사의 정세 -

그때의 파사왕은 고레스의 아들'캄비세스'(까우마라)였다. 캄비세스는 애굽을 점령하려고 출정한 때에 사마리아의 총독이 유다의 귀환자들이 성전 건축을 서두르며 배반을 꾀한다는 상소문은 파사왕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또 그때 동생인 '스멜디스'가 본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돌아와서 그 아우를 죽였으나 사실은 동생의 이름을 빌린 제삼자인'까아우마타'였고 그 반란으로 왕위를 점령했고 '캄비세스'는 자살하고 말았다. 그가 죽은지 2개월 뒤 파사는 다시 군사반란이 일어나 '까우마타'는 처형되고 다리오왕 1세가 왕위에 올랐다.


2.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

귀환공동체가 흉년으로 곤고를 겪고 있을 때 선지자 학개는 하나님의 일에 게을리 한 징계라고 했다. 용기를 잃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들을 격려하여 마침내 다리오왕의 허가를 얻어 건축은 진전되어 착공한지 20년 후인 기원전 516년에 완공했다(스가랴 선지자도 스룹바벨을 격려했다). 성전은 그 자체의 중요성이 성전의 실체인 장차 오실 메시야의 상징이기 때문에 힘썼다(슥9:9, 11:12-13, 12:10-13:6, 13:1, 14:8, 14:16- 참 성전인 메시야는 나귀를 타고 시온 성에 입성하실 것, 은 삼십에 팔릴 것, 창에 찔릴 것, 그의 죽음으로 속죄의 샘의 문이 열릴 것, 왕중 왕이 될 것, 온 만국의 백성은 그 앞에 회개하며 돌아올 것등).

아하수에로왕은 그리스를 침략하여 아덴까지 공격하였다가 해전에서 실패했다. 그의 패전은 에스더의 사건이 있은지 4년 후의 일이다. 


3. 2차귀환:에스라(스7:27-10:44) -영적부흥운동

아하수에로왕의 뒤를 이어 아닥사스다1세가 위에 오른지 7년에 제사장 아론의 후손인 에스라가 포로들의 2차 귀환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아닥사스다왕은 조서와 함께 성전건축을 위한 많은 은금을 주었고 그들은 그 은금을 성전에 바치며 수송아지 열둘로 희생제물을 드리며 제사를 드렸다. 에스라의 귀환 후 남아있던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이방화되어 이방결혼으로 인해 타락해 가고 있었다. 에스라의 회개 운동으로 옛날의 순결을 회복하는 큰 역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