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언약적해석)

창세기6장,믿음으로 노아는

호리홀리 2015. 4. 16. 12:41

노아의 홍수


1. 노아의 방주 (6:9-22)


1) 노아의 믿음(6:9-12)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라는 말씀으로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는 이야기가 일단 마무리되며(5:1-6:8), 창세기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됨을 알려준다. 노아는 새 시대의 주인공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장차 방주를 타고 홍수의 혼돈과 공허를 건너 하나님이 새롭게 만드실 세계를 열어갈 자이다. 이리하여 나래이터는 노아를 그 시대의 사람들과 비교하며, 노아의 "의"(9-10절)와 "모든 육체의 폭력"을 강하게 대조하고 있다(11-12절).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9절)는 노아가 당시대의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지 세 가지 관점에서 그려준다. 노아는 세례 요한(막 6:20)과 시므온(눅 2:25)처럼 "의인"이었으며, 아브라함(창 17:1)과 욥(욥 1:1)처럼, "흠이 없이 완전하였고", 에녹처럼(창 5:22,24)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다. 

(1) "노아는 의인"이라고 할 때 이것은 노아가 어떤 추상적인 도덕 규범이나, 윤리 규범을 완전히 지키고 있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닮은 자"로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웃과 건강한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시 1, 15편). 노아는 바리새인처럼, 형식적 규범을 치밀하게 따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닮아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의인은 이 세상에서 고고하게 독선적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 속에서 살며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공동체를 세우는 자이다.

(2) "노아는 완전한 자"라고 할 때, 이것은 노아가 세상의 도덕과 윤리적인 잣대에서 어떤 절대적인 완전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도 아니며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동물이 무흠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 "흠이 없다"는 뜻이다(출 12:5; 레 1:3, 10; 3:1 등).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질 수 있는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노아는 "온전하며, 건전하고, 솔직한 모습"을 지녔음을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보실 때 노아는 사랑스럽고 친근감이 가며 자신의 비밀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3)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는 말은 노아가 왜 "의인"이며 "완전한 자"인지를 설명해 준다. 노아가 "의롭고 완전한 사람"이 된 것은 그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며, 다른 사람보다 성품이 천성적으로 어질고 착하였기 때문도 아니다. 그도 보통사람이었지만, 늘 하나님의 친구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즐겼으며, 하나님과 교통했기 때문에 노아는 점점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갔을 것이다. "의인"이요,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서의 노아는 역사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된다. 하나님께서 옛 세상을 버리시고 새로운 세상을 구상하실 때, 노아는 새 출발을 만드는 자가 될 것이다(고후 5:17).


노아의 "의"는 그가 살고 있던 세상이 어두웠기 때문에 더욱 빛났다. 그 당시 세상은 "부패하였고" 또한 "폭력이 만연하였다." 여기에서 "부패함"(개역, "패괴함")이란 단어는 다섯 번이나 나타나 철저하게 썩은 세상의 모습을 그려준다. 특히 이 단어는 옷이 더러운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된다. 마치 모든 사람이 누더기와 걸레를 걸친 것처럼 방탕하고 더러워졌다. 귀부인들은 아름답고 비싼 옷을 걸치고 다니지만, 그 속은 부정부패로 물들어 마음이 더러워졌으며 진실이라고 강변하지만 화려한 거짓말 잔치만 벌이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그 당시의 세상은 "폭력"이 가득 찼다. 여기에서 "폭력"(hamas)은 강한 단어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완력 뿐 아니라 제도나 법이나 권력으로 한 사람이나 한 그룹을 침범하며 해를 가하고, 희롱하며, 약탈하는 것을 뜻한다(창 49:5; 신 19:16; 잠 16:29). 강자가 약자를 약탈하고 짓밟으며, 공동체가 붕괴되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힘이 있는 자들은 공의와 정의를 사랑으로 세워가야 했지만, 모두 물질과 권력에 눈이 어두워져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만을 이루기 위해 혈안이 되고 공동체를 질식시켜 가고 있었다.

이리하여 원래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좋았던 세상(창 1:31)은 이제 전적으로 "썩었으며" 이 세상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들과 그가 손수 만드신 짐승들로 가득 차길 원했지만(창 1:26-28) 오히려 "폭력배"와 "모리배"로 가득 차게 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높은 기대를 가졌던 인간들이 그의 의도를 철저하게 배신하였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바램을 무산시켰다. 이것은 후대 이스라엘의 비극이기도 하였다(렘 3:19, 20). 이리하여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금이 갔고, 둘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하나님이 보시니 정말 썩었더라"(12절)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이 묘사된다. 하나님의 파토스가 깊다. 그는 분노하는 독재자가 아니라, 아픈 마음을 가진 부모와 같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소외되었음을 아파하신다. 그는 비분강개하기 보다 슬퍼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묘사하는 참 하나님의 모습이시다. 그는 오래 참으시며, 인자하시며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찬 분이시다(출 34:6).


2) 노아의 순종(6:13-22)


이 세상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부패와 폭력이 하늘에 닿았을 때, 하나님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세상의 악을 제거하시기로 결심하신다. 13절의 "멸하다"(mashitam)는 12절의 "부패하였다"(hishit)와 언어의 유희를 이룬다. 인류는 땅에서 부패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 썩은 부분을 도려내신다. 그 수술은 철저하다(창 13:10). 세상의 폭력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육체의 종말을 선언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지 않는다. 그는 노아에게 구원의 계획을 알리시며 노아를 통한 새 출발을 준비하신다.


(1) 홍수의 이유(13절)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다. 홍수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연설(혹은 말씀)이 네 번 나타난다(6:13-21; 7:1-4; 8:15-17; 9:1-17). 그렇지만, 흥미롭게도 노아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노아가 한 첫 마디는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지어다"이다(9:25). 노아는 방주를 만들면서도 아브라함이 모리야로 갈 때처럼 침묵 중이다. 홍수 기사에는 하나님과 노아 사이의 대화도 없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노아는 시행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부 정보를 주신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에 대해 말씀을 주시는 것 같다. 그러나 아브라함과는 달리 노아는 항의하지 않는다.


(2) 방주의 규격(14-16절)

"방주"(teba)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노아의 배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며, 단 두 번 모세를 담은 "광주리"를 가리킬 때 다시 사용된다(출 2:3, 5). 여기에 예표적인 의미가 있다. 즉,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물에서 건짐 받은 것 같이, 모세도 같은 운명에서 건짐 받았다. 모세의 구원체험과 노아의 구원체험이 유사하다. 우리도 이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죽음의 물에서 건짐 받을 것이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방주"는 노아와 모세가 구원받기에 충분한 도구가 되었다.

우리는 노아의 방주를 짓는 나무(gopher wood)로 사용된 목재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단지 여기에만 한 번 나타나기 때문에, 확인하기 힘들지만 학자들은 "잣나무"(cypress)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배를 만들라고 명하신 것은 그가 배를 만드는 전문 조선사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가인은 도시를 세우고 그의 후손들은 농사, 음악, 동철 기술자였지만, 노아는 전문적인 조선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배짓는 규격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방주의 크기는 약 450피트 길이와 75피트 넓이와 45피트 높이로 만들어진다(15절). 방주는 3층으로 만들어지며 여러 개의 방으로 다시 나누어진다. 16절에 따르면, 작은 문들이 여러 개 있었다. 이 창문으로 빛과 공기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붕을 전체로 덮어 비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노아 방주의 모양은 현대의 배와 같지 않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이야기에 나오는 우트 나피쉬팀의 배처럼 정사각형도 아니다(정방형 120규빗). 벤 우리(M. Ben-Uri)는 방주가 길고 납작한 상자로서 그 두 끝은 마름모꼴이라고 한다. 약 6,000톤의 무게로서 약 15,000톤을 실을 수 있는 배로 본다. 어떤 이는 노아의 방주가 퀸 엘리자베스 2호(Queen Elizabeth II) 보다는 작지만, 콜롬버스의 배들(Nina, Pinta, Santa Maria) 보다는 더 큰 것으로 본다.


(3) 홍수 선언(17절)

배의 모양이 어떠했든지 간에, 이 배는 8명의 사람과 수천 마리의 짐승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생물이 다 죽을 때, 그 안에 있는 사람들과 짐승들은 목숨을 건진다.


(4)  노아 언약(18-21절)

홍수가 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내가 내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너무나 돌발적이다. 우리는 이 앞에서 "언약"이란 단어를 본 적이 없다. 물론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는 분명히 "언약"이 있었을 것이다. 아담은 제사장으로서 에덴 동산을 지키고 가꾸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계명을 깨뜨리고 언약은 파기되며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과 땅에 임했다. 이제 하나님은 노아와 "내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 하나님의 헌신은 홍수 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언약을 맺은 것(창 9:8-17)이 결코 우발적이 아님을 보여준다. 노아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홍수가 끝나자 비로소 이 언약의 의미를 이해했을 것이다(9:8-17). 그렇지만, "내가 내 언약을 세우겠다"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 분명할 것이다.

노아의 방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짐승들도 포함한다(19절). 대표적인 암수 짐승들이 완전한 구원을 얻는다. 노아는 모든 짐승을 각기 한 쌍씩 방주로 들인다. 여기의 한 쌍은 최소수를 가리킨다. 그러나 모든 짐승들은 자발적으로 노아에게 나아온다. 그가 짐승들을 잡으러 다니지 않는다. 그들이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왔든지 혹은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였을 수 있다.


(5) 노아의 순종(22절)

방주를 만드는 데 하나님은 아주 세밀한 지시를 하며, 노아는 빈틈없이 순종하고 있다. 이것은 성막을 만드는 기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출 25-39장). 즉 노아나 모세는 "모든 뜻"을 다해 순종하였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6:22).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모습에 대한 틸리케의 관찰이 흥미롭다. "날씨가 그렇게 청명했을 때,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예언자들과 정치가들은 태평성대를 예언하였다. 이때 노아는 마른 땅 위에 방주를 만든다. 밤이 되면 청춘 아베크들이 이 이상한 배를 보려고 산책 나왔다. 별난 늙은 성자를 조롱하였다."

노아도 방주를 지으면서 고민하였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합리성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노아는 "마른 땅의 선박의 제독"으로 놀림받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였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상식 선에서 벗어나 있다 하더라도 순종한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루어야 할 이상이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즉각적인 순종을 하는 백성이어야 했다.

사람들은 하늘의 구름이나, 폭풍이 오는 것을 보고 배를 지으려고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일찍부터 순종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아의 믿음은 자라는 믿음이었다. 우리는 임종의 순간에 즉각적으로 믿어 구원받는 것을 생각하지만, "어떻게 씨앗을 뿌리고 동시에 거기에서 열매를 거둘 수 있겠는가?" 노아는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추수하는 믿음의 비밀을 아는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