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도
1. 엘리야의 마지막 / 1절,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중심 단어는 "하늘로 올리다"이다. "올리다"는 단어는 본 장에서 여러 번 반복되고 있다. 선지생도들은 엘리사에게,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를 두 번이나 묻는다 (3절, 5절). 여기에서 "취하다"는 "올리다"와 같은 단어이다. 같은 단어가 2:11에서는 "승천하더라"로 번역된다.
엘리야는 이제 지상에서의 모든 공적인 사역을 마쳤다. 그는 "선한 싸움을 다 싸웠고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다 갔다." 아합과 이세벨의 결혼으로 이스라엘의 삶의 모든 영역에 뿌리를 깊이 내리던 "바알종교"에 그는 철퇴를 가하였다. 그는 "나봇의 포도원을 무고와 살인"으로 빼앗은 아합에게 "왕조의 멸망"을 선언하였다. 만약 엘리야가 없었다면, "여호와 종교는 북왕국에서 사멸 혹은 소멸되었을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권대사요 용사였던 엘리야를 후대하셔서 불말과 불수레를 보내셔서 그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신다.
1) 엘리야는 마지막까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
2절.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이와 동일한 말씀이 4절에서는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6절에서는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야는 한 평생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엘리야는 주님께서 “그릿"으로 가라 하시면 그릿으로, “사르밧"으로 가라 하시면 사르밧으로 갔다. “아합"에게 가라 하시면 아합에게로 “아하시야"에게 가라 하시면 아하시야에게 갔다(왕하 1:15). 엘리야는 거의 문자적으로 주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한다. 엘리야는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가는 선지자가 아니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는 주의 신실한 종이었다.
2) 끝까지 제자들을 돌보는 엘리야
우리가 엘리야를 기억할 때, 갈멜산 전투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을 죽인 이야기를 가장 큰 업적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는 “파괴적인 사역" 보다 사실은 “건설적인 사역"에 힘쓴 자이다. 그는 선지자 학교를 세운 자이다. 엘리야는 “시내산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진 후(왕상 19:11-14), 더 이상 “폭풍"과 “불"과 “지진"과 같은 무시무시한 사역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말씀 교육"의 사역에 집중한다. 그는 “정밀하고 정교한 주님의 음성"이 온 세상을 뒤흔드는 신현보다 더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이 후에 그는 신학교를 여러 개 세웠다. “길갈"(2:1)과 “벧엘" (3절)과 “여리고"(5절)에는 모두 신학교가 있었다. 그는 사람 키우고 제자를 키우는 일이 가장 소중한 사역임을 깨달았다. 더 이상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인재의 중요성을 그는 깨달았다. 이제 엘리야는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한다.
3) 마지막을 준비하는 엘리야
우리가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그가 집요하게 엘리사를 떨어뜨려 놓으려는 점이다. 그는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라는 말을 길갈, 벧엘, 여리고에서 계속하여 세 번이나 반복한다(2, 4, 6절). 왜 그랬을까? 이것은 단지 엘리사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아마 그는 "홀로 하나님 앞에 서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점이다. 엘리야처럼, 훌륭한 주의 종이 이렇게 고독하게,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생애를 홀로 마감하기를 원했을까? 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내노라며, "영예로운 은퇴식"을 준비하지 않았을까? 그가 자신의 제자들과 여러 국빈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식"을 한다면 그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되지 않았을까? 그에게는 이와 같은 "인간적인 유혹"이 없었을까?
2. 엘리사의 일편단심
엘리야가 세상을 갑작스럽게 떠나는 것은 선지자와 이스라엘에 큰 위기를 가져왔다. 지도력의 변화는 어느 사회에나 위기와 긴장을 가져온다. 엘리야처럼 큰 별이 사라진다면 온 하늘이 어두워질 것이다. 엘리야처럼 큰 나무가 사라진다면 그 안에 살던 모든 새들과 주위의 동식물들이 슬퍼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진정한 위기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엘리사는 알았다. 엘리야가 떠남으로서 수많은 공백이 생기겠지만, 가장 큰 공백은 "영적인 지도력"임을 엘리사는 알았다. 따라서 엘리사는 영적 지도력이 올바로 계승되기 위하여 스승 엘리야를 끝까지 따른다.
1) 세 번이나 거절하는 엘리사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다른 곳으로 보내시느니라"며 세 번이나 부탁하지만 그 때마다 엘리사는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스승의 살아계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저는 스승을 떠나지 않겠습니다"를 반복한다(2, 4, 6절).
너무나 엄숙한 스승의 부탁에도 엘리사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스승을 끝까지 따르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스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살아계심과 스승의 목숨을 걸고" 따르고자 한다. 즉, 그는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스승의 목숨을 걸고 끝까지 스승을 따르고자 한다. 마치 룻이 나오미를 끝까지 따르겠다고 결심하며 맹세하는 것과 같다.
스승을 마지막까지 따르는 엘리사의 열정과 진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에게 귀한 모범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고난과 시련을 감당하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2) 엘리야의 영감을 사모하는 엘리사
엘리사가 이렇게 충성스럽게 일편 단심 엘리야를 따르는 진정한 의도와 목표가 무엇이었는가? 이제 비로소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묻는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9절 상).
엘리야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의 사랑하는 제자 엘리사에게 큰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는 엘리사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는다. 그 당시 선지자는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줄 수 있는 위치였다. 아마 엘리사는 이 때, 당황했을 수 있다. 갑자기 “무엇을 원하느냐?"고 선생님이 묻는다.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9절 하). 여기에서 "당신의 영감"이란 단어가 어렵다. “엘리야의 영감"이란 무슨 말인가? 그것은 “성령의 감동"을 가리킨다. 선지자들은 “성령의 감동과 영감"을 받은 자들이었다. 모세에게 역사하시던 성령은 모세의 안수를 통하여 70장로에게 전수되며 이후에 여호수아에게 전수된다.
그동안 성령이 엘리야를 특별히 감동하셔서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않도록 기도하였고 또 비와 이슬을 그치게 하였다.
성령이 엘리야를 특별히 감동하셔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을 물리쳤다.
성령이 엘리야를 특별히 감동하셔서, 엘리야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고 이스라엘에 다시 비가 내리게 하였다.
성령이 엘리야를 특별히 감동하셔서, 엘리야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
성령이 엘리야를 특별히 감동하셔서, 엘리야는 제자를 키우는 사람이 되었다.
엘리야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를 감동시킨 성령의 역사가 깊었다. 성령께서 그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이다.
성령이 그를 떠난다면,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성령께서 엘리야에게 역사하실 때, 엘리야의 심령은 늘 열려 있었고, 협조적이었으며,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이후에는 엘리야가 하는 모든 일이 성령의 역사인지, 엘리야의 사람됨에서 나온 것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선생님의 영"이라고 말한다.
엘리사가 본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감을 구하고 있다. 그것은 선지자직의 영감이다. 엘리사는 “두 몫"을 구한다. “갑절의 영감"은 아버지가 장자에게 두 몫을 주는 고대 이스라엘의 유산법을 반영하고 있다.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신 21:7). 엘리사는 그의 "스승이신 아버지" 엘리야에게 장자의 유산을 구하고 있다. 즉, 예언적 직분을 계승하길 구하고 있다(12절).
엘리사의 소원은 마치 솔로몬의 소원과 같다. 솔로몬은 “오직 지혜"만을 구하였다. 통치자로서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엘리사는 선지자로서 게하시처럼 “옷과 은과 금과 토지"를 구하지 않았다. 오직 “영감의 갑절"을 구하고 있다. 그는 엘리야가 한 일을 계승하여 계속하고 싶어한다.
3) “너가 보면 이루리라"
엘리야는 엘리사의 소원을 듣고 기뻤지만 이 일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고 냉정하게 말한다.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10절).
엘리야가 볼 때, 예언자 직분의 계승은 주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었다. 물론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제자로 지명한 자였다. 그러나 엘리사가 그를 계승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오직 주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다. 엘리사는 자신의 신실한 제자이지만 지도력의 계승은 "혈과 육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주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믿고 있다.
엘리야는 이어서 하나님의 선택기준을 제시한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승천을 보아야 한다. 엘리사의 계승은 주님께서 친히 시험하신다. 주님께서 엘리야의 승천을 보도록 허락하실 것인가? 아닌가? 엘리사가 엘리야의 승천을 “보면" 그의 소원은 이루어지고 “보지 못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엘리사가 정말 엘리야의 후계자가 될 것인가?"하는 문제는 “그는 스승의 승천을 볼 것인가, 못 볼 것인가?"에 달려 있다. 이것이 본문의 중심 주제이다.
3. 엘리야의 승천
왜 제자가 스승의 승천을 보는 것이 계승에 있어서 그렇게도 중요한 기준이 될까?
사실 스승이 승천해야, 제자가 마음놓고 일할 수 있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제자로서 스승의 승천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승의 사역을 완전히 받아주셨음을 확인하는 기회가 된다. 스승의 사역을 주님께서 친히 인 치시는 것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이 그의 승천으로 마무리되고 그가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셔서 제자들을 통하여 더 깊고 넓은 사역을 이루어 가시는 것과 같다. 승천을 본 제자들이 참된 제자도를 이제 추구하는 것 같이, 엘리야의 승천을 본 엘리사는 모든 점에서 엘리야를 따를 것이다.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11절).
스승과 제자가 여행의 마지막 단계에서 서로 이야기하는 중에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자, 두 사람이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 때 불말과 수레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른다.
엘리사가 회오리바람과 불과 말을 보았을 때,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분명하다 (왕하 2:10-11). 거룩한 용사이신 하나님, 천군의 대장께서 자기 종을 친히 데려가신다. 자신의 "불말이 끄는 불수레"에 태워 가신다. 엘리야는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 이제 그의 대장되신 주님께서 그를 싸움터에서 빼가시며 하늘의 상을 주신다. 엘리야는 진실된 주님의 종이었고 주님의 용사였다.
4. 계승된 지도력(12-14절)
엘리야는 떠났다. 그리고 하나의 물건을 남겼다. 그것은 그가 평생 입고 다니던 “겉옷 한 벌"이었다. 그 옷은 엘리야의 선지자적 직무와 권위를 상징한다. 그것은 엘리야의 인격의 화신이었다. 그가 평생 입고 다니며 병자를 고치고 바알 선지자들을 물리치고, 아합 왕을 대적하며 공의를 실현하고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사랑의 옷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능력의 옷이 아니라 엘리야의 인격을 상징하는 옷이었다. 성령의 감동이 배어 있는 옷이었다. 엘리사의 겉옷은 하나님의 영이 그를 감싸시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옷으로 물을 치자마자 요단강이 갈라졌으며 강가에 있던 다른 선지생도들은 즉각적으로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 위에 임했음"을 알게 된다. 이리하여 “선지자직은 엘리사에게 완전히 계승된다." 그래서 엘리야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부분, “엘리사가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리라"(왕상 19:16)는 말씀이 이루어진다. 주님은 새 시대의 새로운 지도자인 엘리사를 통하여 선지자직을 계속 수행하게 하신다. 이 계승을 통하여 모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내 종 선지자를 보내리라"는 주님의 약속은 다시 한번 더 이루어진다.
5. 엘리야 - 엘리사의 계승 이야기와 그 구속사적 의미
이 장은 여행으로 시작하여, 여행으로 마친다. 엘리야의 최후 여행에는 구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들이 등장한다. 길갈, 벧엘, 여리고는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들이었다. 길갈은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을 기념하는 중요한 제의적 장소였다. 여리고는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후 처음으로 정복한 고대의 도시였다. 엘리야는 요단을 건너기 전에 이 세 곳을 방문하며 엘리사는 요단을 건넌 후 다시 이 세 곳을 들르면서 열왕기하 2장의 모든 여행이 마쳐진다.
달리 말하자면, 구속사가 새롭게 진행된다. 엣날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루어진 주님의 구원사가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엘리야는 아무런 목적도 없는 것 같고 빙빙 돌고만 있는 것 같았고, 여행은 가지만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고 오직 엘리사를 떼어놓기 위해 걷고 또 걷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구속사적으로 모두 중요한 곳만을 걷고 있다. 주님의 백성들은 새로운 시대마다 이 길들을 걸어야 한다.
두 선지자는 요단 강을 건넌다. 그들은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만들고 그 위를" 걷는다. 마치 출애굽과 정복이 다시 이루어진 것 같다(8절; 출 14:21; 수 3:17; 4:18). 두 선지자는 이제 고대의 구원사 시대로 되돌아가며 엘리사는 새로운 정복 역사를 위해 다시 요단을 정복하고 벧엘, 여리고, 길갈로 돌아간다.
우리도 엘리사처럼, 엘리야의 영감을 사모하자. "엘리야의 영감"은 "선지자와 사도"의 영감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뒤를 쫒는 갑절의 영감을 구하자. 그리하여 악한 이시대에 제자도의 계승을 통하여 영적전쟁에 승리자가 되기를 기원한다.
'구약 > 열왕기하(구속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왕기하 4:38-41,메시아 예표사역3 (0) | 2015.04.13 |
---|---|
열왕기하 4:8-37,메시아 예표사역2 (0) | 2015.04.13 |
열왕기하4:1~7,메시야 예표사역1 (0) | 2015.04.13 |
열왕기하1장,엘리야와 예수 (0) | 2015.04.13 |
열왕기하2장,제자도의 계승 (0) | 2015.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