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장은 엘리야에게서 엘리사로 이어지는 제자도를 보여주며,예수님의 제자도의 예표를 보여주고있다.
왕하 2장은 이전 엘리야 이야기를 많이 반영하고 있다. 바로 앞장에서 "불"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여기에서도 "불말"이 등장한다. 본 장에서 선지자들 50명이 엘리야의 시체를 찾는 모습은 앞 장의 50부장들이 살아 있는 엘리야를 찾아오는 모습을 상기시킨다. 엘리사는 이전에 엘리야가 바알의 권세를 무너뜨린 "갈멜산"에 잠깐 머물다가(25절), 다시 그곳으로 간다(4:25).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를 때 던졌던 그의 겉옷은(왕상 19:19-21) 이제 엘리사에게 선물로 주어지며, 엘리사는 그의 스승 엘리야의 망또를 입고, 공식적으로 그의 후계자가 된다.
"병거 타고 하늘에 올라간 엘리야" 이야기를 담고 있는 왕하 2장의 핵심적인 초점은 어디에 있을까? 만약 우리가 설교자라면, 우리는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까? 우리는 대부분 불수레를 타고 하늘에 올라간 엘리야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사건의 의의는 무엇인가? 우리도 장차 엘리야처럼 부활 승천한다는 것인가?
그러나 열왕기 기자의 관점에서 보면, 본 장에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은 엘리사의 시험에 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영감의 갑절"을 구했다(9절). 그러나 그것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승천을 볼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10절). 만약 엘리사가 엘리야의 승천을 "보면", 그는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며 "보지 못하면" 될 수 없었다. 이것이 엘리사가 받은 시험이었다. 엘리사는 스승의 승천을 보아야, 참된 후계자가 되며, 비로소 "선지자직의 계승"이 이루어지게 된다.
선지자직의 계승! 이것은 얼마나 심각한 주제인가? 만약 제자도의 계승이 올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에서는 다시 엘리야 같은 선지자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계승이 올바로 이루어진다면, 엘리사는 엘리야의 사역을 이어받으며 완성해 갈 것이다. 그러나 그 계승의 첫 단추는 스승의 승천을 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따라서 본장의 초점은 11-12절에 있으며, 이것은 15절에서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는 말씀으로 설명된다. 엘리야는 정말 떠났고 엘리사는 새로 부여받은 선지자직의 권위로 여리고의 쓴 물을 정결케 하고(왕하 2:19-22), 그를 조롱하는 벧엘의 소년들을 죽인다(23-24절). 이리하여 엘리사는 새로운 선지자로 세움받고 인정받는다.
1. 요단강을 향하여(1-6절)
엘리야의 승천과 엘리사의 계승 이야기는 여행과 대화로 엮어져 있다. 엘리야는 이 세상에서의 사역을 정리하기 위해 계속 움직이고 있다. 엘리사는 끊임 없이 엘리야를 따라간다. 이 여정에서 엘리야는 묻고 엘리사는 대답하며, 결국 둘은 요단강 건너편까지 나아간다. 중요한 길목에서 마다 동료 선지자들은 엘리사에게 스승의 임종에 대해 물으며, 그 때마다 엘리사가 침묵을 지키라고 대답한다.
1) 길갈에서 벧엘로(1-2절)
열왕기 저자는 갑자기 "여호와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구약성경에서 "회오리바람"이 자연현상을 가리킬 때는 비를 수반하지 않는 폭풍을 가리킨다(시 107:25, 29; 148:8).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신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사 29:6; 41:16; 겔 1:4). 주님께서 친히 엘리야를 데리러 오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11절에서 이루어진다. 주님께서 엘리야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바로 하늘로 "올라가도록" 하신다.
그러나 엘리야는 아직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바로 주님께 불려 올라가기 전에, 엘리야는 그동안 길렀던 모든 제자들을 만나고자 한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이런 결단을 내린 것이 아니다. 그는 "주님의 보내심을 받는다"(2, 4, 6절).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고 있다.
이 때 엘리야는 엘리사와 함께 길갈에 있었다(1절). 2절에서는 그들이 길갈에서 "벧엘로 내려갔다"고 말하기 때문에, 여기의 "길갈"은 옛날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후 처음으로 진을 치고 할례를 행하였던 곳으로 보기는 어렵다. 만약 여기의 길갈이 요단강 근처의 길갈이라면, 그들은 "벧엘로 올라가야 하며" 또한 요단 근처에서 "벧엘로 올라갔다가" 다시 "길갈 근처에 있는 여리고로 내려가서" 요단강을 건너는 긴 여행을 하게 된다. 즉, 그들은 돌고 도는 여행을 한 셈이다. 따라서 여러 학자들은 여기의 "길갈"은 벧엘 근처의 어떤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카일, 델리취 등). 우리는 여기의 길갈이 정확하게 어떤 곳인지 알지 못하지만, 독자들은 여리고와 요단강 사이에 있는 성소인 "길갈"이 암시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수 4:19 이하; 5: 9이하; 왕하 2:8, 14).
엘리야가 길갈에서 벧엘로 가는 도중 엘리사와의 첫 대화가 나타난다(2절). 엘리사는 처음으로 "너는 여기 머물라"는 말씀을 듣는다. 이 말씀은 이 후에도 계속 반복된다(4, 6절). 엘리야의 명령은 긴장을 더욱 감돌게 한다. 우리는 엘리야가 왜 엘리사를 떼어놓으려고 했는지 모른다. 따라서 엘리야의 명령은 우리에게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 때 마다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 하겠나이다"라며 강경하게 거부한다.
2) 벧엘에서(3-4절)
그 때 "벧엘에는 선지자 생도들"이 있었다. 여기에서 "생도들"은 원어로 "아들들"로서, 동일한 직업을 가진 공동체를 가리키므로 "선지자들의 무리"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엘리야의 제자들로서 이미 "선지자들"이었다. 그들은 단지 "수련생들"(표준역, 공동역)이 아니었다.
그들은 엘리사에게 찾아와,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십니까?"라고 묻는다. 이 때, 엘리사는 이미 엘리야의 수제자로 다른 제자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는 구절은 5절에도 반복된다. 엘리야의 제자들은 침묵 가운데 있다. 그들은 그들의 큰 지도자가 떠날 때, 마음이 착잡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 세기 동안이나 사용하셨던 선지자를 불러 가신다. 남은 우리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많은 제자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엘리사는 "나 역시 알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묵묵히 엘리야만을 따른다. 지도력의 변화는 항상 위기와 불안을 가져오는 데, 엘리사는 침묵을 가르치고 있다.
벧엘에서 엘리야는 두 번째로 엘리사에게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고 말한다(4절상). 엘리사도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며 대답한다(4절하). 엘리야의 장군!에 엘리사는 멍군!으로 답한다.
엘리야는 계속 엘리사를 떼 놓고 가려고 한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궁금해진다. 엘리야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엘리야는 왜 홀로 떠나려고 하는가? 그는 지금 엘리사를 시험하고 있는가? 벧엘에서 여리고까지는 보통 길이 아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집요하다. 그는 다시 한번 더 맹세하며,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며 뒤따른다. 그들은 함께 여리고까지 나아간다.
3) 여리고에서(5-6절)
여리고에도 엘리야의 제자들이 있었고, 그들도 벧엘에 있는 제자들과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 엘리사는 동일한 대답을 하였다(5절). 이후 엘리야는 다시 엘리사에게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고 명하며, 엘리사는 전과 동일한 맹세를 하며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며 따라간다.
엘리야는 계속 이 동네 저 동네로 돌아다닌다.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그리고 여리고에서 요단강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볼 때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는 것 같고 빙빙 돌고만 있는 기분이다. 여행은 하지만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엘리사를 떼어 놓기 위해 걷고 또 걷는 모습이다. 그들은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너는 여기에 머물라", "내가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는 말을 주고 받는다. 엘리사와 다른 제자들 사이에는 "너는 아느냐"와 "잠잠하라"라는 말을 오고간다.
우리는 엘리야가 떠날 것을 알지만 어떻게 떠날는 지는 모른다. 또한 최종적으로 엘리야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엘리사는 스승을 따라가지만, 마지막 순간에 엘리사가 선생님과 함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궁금해진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대화는 3번 반복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엘리야는 그가 최후에 어떤 자리에 서야 하는지, 그가 어디로 가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것 같다.
2. 요단강에서: 엘리야의 승천(7-15절)
1) 요단강 뚝에서(7-8절): 요단강 도하
7절부터 장면이 바뀌고 있다. 이제는 주변의 모든 인물들이 사라지고, 오직 두 선지자만 남는다. 선지자들 50명은 멀리서 두 사람이 요단강 가로 가는 것을 바라본다. 이제 우리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 때 갑자기 "엘리야가 겉옷을 취한다." 이 "겉옷"은 엘리야가 엘리사를 처음 부를 때 던졌던 것이며(왕상 19:19), 한평생 그가 입고 있던 옷으로서 "선지자직"을 상징하는 옷이었다(왕하 1:8).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8절). 앞에서 우리가 "길갈"을 잠깐 보았지만, 길갈은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을 기념하는 중요한 제의적 장소였다. 이제 출애굽의 역사가 다시 나타나고 있다. 요단강이 갈라지며, 두 선지자는 "마른 땅 위"를 걷는다. 마치 출애굽과 정복이 다시 이루어진 것 같다(8절; 출 14:21; 수 3:17; 4:18). 이제 역사의 시간대가 되돌아 돌아간다. 그들은 옛 구원사의 시간대와 장소로 되돌아간다.
물의 깊음은 구약에서 가끔 죽음을 상징한다(요 2:3-6; 시 69:1-2).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와 요단을 건너며,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였다. 이제 엘리야도 요단의 깊음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믿음으로 건너고 있다. 그는 두려움 없이 요단을 건넌다.
2) 요단강 건너편에서: 엘리야의 승천과 엘리사의 계승(9-12절)
요단강을 건넌 후, 다시 두 선지자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기의 대화는 이전 것과는 다르며 새로운 주제로 넘어간다. 엘리야는 더 이상 엘리사를 떼어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의 사랑하는 제자 엘리사에게 큰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는 엘리사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는다. 엘리사는 큰 것을 구하고 있다.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9절). 엘리사는 장자의 유산을 구하고 있다(신 11:27). 엘리사는 자신의 영감이 엘리야의 "두 배"가 되기를 구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두 몫"을 구한다. 그는 그의 영적인 "아버지" 엘리야의 예언적 직분을 장자로서 계승하길 구하고 있다(12절).
엘리야가 볼 때, 엘리사의 청원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10절 상).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한다(10절 하).
여기에는 시험 모티프가 나타난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승천을 "보면" 그의 간청은 이루어지고, "보지 못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엘리사가 정말 엘리야의 후계자가 될 것인가?"하는 문제는 그가 엘리야의 승천을 "볼 것인가, 못 볼 것인가?"에 달려 있었다.
11절은 다시 두 선지자의 여행과 대화를 묶어준다. "두 사람이 가면서 서로 말한다." 엘리사는 끝까지 스승을 따라왔다. 마치 룻이 나오미를 따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갑자기 그들의 대화가 중단된다. 갑자기 폭풍이 휘몰아치며, 두 사람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엘리사가 회오리바람과 불말과 불수레를 보았을 때,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분명하다(왕하 2:10-11). 그것은 신현의 불길이었다. 구체적으로 거룩한 용사시요, 천군의 대장된 주님께서 자기 종을 친히 데려가신다. 당신의 전차에 태워가신다. 엘리야는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 이제 그의 대장이 그를 싸움터에서 빼어가시며 하늘로 데려가신다.
드디어 엘리야는 "하늘로 올라갔다"('ala). 앞에서 엘리야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엘리야를 "데려가신다"(laqach)는 용어를 사용하였다(3, 5절). 그들은 엘리야의 "죽음"을 내다 보았지만, 열왕기 저자는 엘리야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바로 주님 앞으로 나아갔다고 말한다. 엘리야는 옛날 에녹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데려가셨다"(창 5:25).
12절은 엘리사의 반응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싣고 하늘로 올리실 바로 그 순간, 엘리사는 보았다"는 뜻이다. 이리하여 10절부터 계속 내려온 긴장이 비로소 해소되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승천을 보았다. 엘리야는 완전히 사라졌고, 엘리사는 "더 이상 보지 못했다."
그 순간 엘리사는 자신의 옷을 잡아 둘로 찢는다. 이것은 그의 슬픔과 애도를 표시하는 것이다. 또한 전차가 엘리야를 데려갈 때, 엘리사는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전차와 기병이여"라고 부르짖는다(왕하 2:12). 이것은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여,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전차와 기병이 오고 있습니다"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는 엘리야가 바로 "이스라엘의 전차와 기병"이라고 말한다. 엘리야는 사실 "이스라엘의 마병과 병거였다." 그는 이세벨과 바알 선지자들과도 잘 싸웠다.
엘리사도 죽을 때 동일한 칭호로 부름받는다(왕하 13:14). 비록 그를 데려가는 전차가 없었지만 그는 "이스라엘의 전차와 기병"으로 인정받았다. 엘리사의 사역으로 나라는 안정되었고, 전투마다 이겼다. 엘리사에게는 보이지 않는 불말과 불수레가 있었다(6:15-17; 7:6-7). 주님이 이스라엘의 비밀 병기였다.
고대 이스라엘의 전투에서 선지자를 갖는 것은 하나님의 군대를 갖는 것이었다(왕하 3:14-19; 6:8-12, 17). 왜냐하면,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는 거룩한 용사의 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투장에 나타나며, 왕에게 어떻게 전투할 것을 신탁으로 가르친다. 선지서에는 열국에 대한 긴 예언이 나타난다. 이것들은 이스라엘 원수들에 대한 언어적인 성전을 말해준다.
3) 요단강둑에서(13-15절): 요단강 재도하
엘리사가 떨어진 엘리야의 겉옷을 잡는다. 이리하여 그는 예언자직을 물려 받는다. 그러나 그는 엘리야의 능력까지 물려받았는가? 엘리야는 요단강둑에 섰다. 그리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14절)고 보고한다. 엘리사는 엘리와와 동일한 기적을 행하였다. 이리하여 선지자직의 계승은 올바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엘리사가 물려받은 선지자직을 엘리야의 다른 제자들도 인정할 것인가?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저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저를 영접하여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렸다"(15절)
3. 요단에서 여리고까지(16-22절) : 엘리사의 확증
이제 여리고의 선지자들은 엘리사를 영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친히 데려가신 것을 믿지 못하였다. 그들은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시체를 찾자고 간청한다. 그러나 사흘동안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엘리야의 다른 제자들은 엘리사와 여러 면에서 달랐다.
그동안 엘리야는 떠나고 있는 데, 그들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멀리에 서서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을 건너는 것만을 보았다(7절). 그들은 참여자가 아니라, 관망자였다. 그들은 엘리야의 최후의 순간도 보지 못하였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어떻게 영접하셨는지 몰랐다.
그러나 돌아온 엘리사는 변해 있었다. 그는 그동안 엘리야의 종이었다(2, 4, 6절). 그는 일관되게 침묵하고 있다(3, 5절). 그러나 선생이 떠난 후에는 슬퍼하고 절망한다(12 하). 그동안 그는 목적지도 없는 듯한 여행을 계속 따라 다니고 있다. 그렇지만 끝까지 엘리야를 따라 갔다. 그는 엘리야를 따라 요단도 건넜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더 깊은 체험을 하였다. 신비로운 사건이 그 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엘리야는 사라져 버렸다. 그에게 겉옷 한 벌만 남겨두고 가버렸다. 그는 이제 그에게 부여된 새 일을 해나가야 한다.
그가 요단강을 건너 돌아올 때에도 "엘리야의 하나님"을 부르며, 물을 두 번 친다(14절). 엘리야를 찾자는 다른 제자들의 제안에 대해 그는 평온한 확신을 갖고 대처한다. 그 이후에 그는 엘리야의 사역을 이어받으며, 완성해 간다. 이제 엘리사의 옷이 그에게 맞을 정도로 그는 자라고 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는 단지 엘리야의 승천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이야기의 핵심은 엘리사가 스승의 승천을 볼 수 있느냐에 있다. 즉, 스승의 승천을 보면 그의 권위를 물려받아야 하는 것이다(3:11).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결국 물려받는다. 그리고 그는 엘리야가 완수하지 못한 사명을 이루어야 한다(왕상 19:15-16). 이후에 엘리사의 능력은 입증되며, 완성된다(13:14).
예수 그리스도와 엘리야의 생애 사이에 있는 수많은 유사성은 신약성경에서도 나타난다. 예수의 승천은 엘리야의 승천을 닮았다. 예수께서는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다(행 1:9). 엘리야처럼 가신 예수는, 엘리야와는 달리 다시 오실 것이다(행 1:11).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단 7:13-14; 마 24:30; 26:64; 막 13:26; 14:62; 눅 21:2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때 어떻게 오실 것인가? 대부분의 기독교 미술에서 그리스도는 솜털같이 희고 평화로운 뭉게구름 가운데 오신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께서 구름 가운데 오실 때, 그는 폭풍의 전차를 타고 오시며, 천군의 대장으로 오실 것이다. 불이 튀기며, 강력한 바람과 함께 오신다. 그가 땅을 심판하시며, 자기 원수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왕국을 세우기 위함이다(계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예수는 최후의 위대한 선지자일 뿐 아니라, 주님 군대의 대장이시다(계 19:11-16).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 그는 어떤 전차나 말보다 더 귀하다(시 20:7). 물론 우리의 전투는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의 전투와는 다르다. 우리의 무기는 영적 무기인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모든 것을 부수어야 한다(고후 10:3-4). 우리는 영적 전투를 위해 무장해야 한다(엡 6).
신약성경에서 마태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로 설명한다. 요단강가에서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로 세움받은 것처럼, 요단강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의 후계자가 된다. 그곳에서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감의 갑절을 물려받은 것처럼,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보다 더 충만한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를 누렸다. 모세는 홍해 바다를 나누었으며, 엘리야는 요단을 나누었다. 엘리사는 모세와 엘리야의 후계자로 같은 성령의 능력으로 요단강물을 나눈다(왕하 2:8, 14). 그와 같이 예수께서도 요단의 근원인 갈릴리의 폭풍을 다스린다(눅 8:22-25). 바람과 파도도 그에게 순종한다.
엘리사의 겉옷은 하나님의 영이 그를 감싸시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7장을 보라). 엘리사가 엘리야의 옷으로 물을 치자말자, 강가에 있던 선지자들은 즉각적으로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 위에 임했음"을 알게된다. 요한은 엘리야와 같은 털옷을 입었다(왕하 1:8; 마 3:4). 그리고 요단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후계자로 지명하며 세웠다. 그러나 그 때에는 강이 열리는 대신, 하늘이 열렸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예수 위에 임하셨다(마 3:16-17).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임했던 성령의 갑절을 구했다. "갑절"은 고대 이스라엘 가족에서 장자에게 주는 유산의 몫이었다(신 21:17). 성령이 예수에게 임할 때, 하나님의 소리가 하늘에서 증거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장자이다". 우리는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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