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스겔서 강해(구속사)

4). 에스겔서의 신학

호리홀리 2015. 3. 23. 09:54

4). 에스겔서의 신학

 


 

  포로로 잡혀간 공동체에서 사역한 선지자 에스겔은 예루살렘에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고, 예루살렘이 멸망하자 회복의 메시지를 계속 선포한다. 혹자는 에스겔이 사역한 곳이 예루살렘이며, 포로 공동체가 머물던 바빌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1:1-3과 3:15에서 사역지를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에스겔서의 신학은 포로 공동체의 소망 신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에스겔서는 하나님의 본질, 심판의 목적, 개인적 책임, 이스라엘의 윤리적․종교적․도덕적 역사와 회복 등을 강조하고 있다.

 


 

(1). 하나님의 백성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사 40장) 열방의 구원과 회복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으신다(사 2장)고 강조한다. 그러나 에스겔은 철저히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과 대적들의 멸망에 대한 메시지에만 관심이 있다. 이것에 대해 편협주의(parochialism)라고 부를 만큼, 에스겔은 철저히 유다 백성의 회복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방 민족의 회복에 대해 특별한 관심과 언급이 없고, 유다 백성의 과거 모습과 현재 상태 그리고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계획만을 묘사한다.

 

  과거에 유다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범죄를 저질렀던가? 이런 유다 백성에 대해 16, 23장은 영적 행음자로, 20장은 하나님의 언약을 끝까지 버린 자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철저하게 자기 조상들에게 죄를 전가하는 모습을 보이며(18:1-2), 조상들처럼 영적으로 음행하는 모습을 보인다(6장; 8:5-17; 14:3-5; 16:15-22; 20:30-31). 유다 백성의 이런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계획과 언약대로 그들을 회복시킬 것을 약속하신다(34-39장). 그리고 개인뿐 아니라(36:26-28) 민족적 회복을 묘사하고 있다(37:15-28).

 


 

(2).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케도쉬 이스라엘)으로 언급하는 이사야서와 유사한 내용이, 에스겔서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로 나타난다. 시작부터 하나님을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으로 묘사하며(1장), 성전에도 영광으로 임하시는 모습으로 기록한다(43:5; 48:35).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이 유다 백성의 죄악으로 인해(8-11장)성전에서 떠났다가 다시 회복되는 내용이다. 처음에 하나님의 영광은 지성소 안 언약궤에 있었지만(9:3), 성전 문지방으로 가시고(10:4), 그곳에서 동문까지 떠나시며(10:18-20), 마침내 성읍에서 떠나 성읍 동편 산에 머무시게 된다(11:23), 그리고 다시 성전으로 돌아와 가득히(43:5) 유다 백성 중에 거하시게 된다(48:35).

 

  성경 외의 다른 근동 자료들은 그 신당에 돌아오는 신들의 마음이 먼저 변화될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에스겔서는 하나님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이 먼저 변화됨을 강조하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11:18-21). 사람의 전인적 변화는 하나님의 임재와 연관시켜 이해할 수 있다.

 


 

(3). 회복자의 성령님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와 연관된 에스겔서의 회복은 바로 성령님의 임재이다. 선지자 에스겔은 메시지를 받을 때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영에 철저하게 의존한다(3:12, 14상; 8:3; 11:1; 24상; 37:1; 43:5). 하나님의 영은 에스겔을 들어 올려 환상 가운데로 데려가기도 하시며(3:15; 8:3; 11:1) 움직이게도 하신다. 즉 성령님께서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주고 계시하시는 것이다. 이는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 주었다는 히브리서 3:7의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는 신약성경의 언급과 일치한다.

 

  에스겔은 성령님께서 절망 가운데 있는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주셨을 뿐 아니라 유다 백성의 완전한 변화조차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일어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새 영’이고, ‘나의 신’(36:26-27)이신 성령님께서 유다 백성의 마음속에 임하여 그들을 완전히 변환(transformation) 시키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신학적 강조점은 다른 선지자들과 차이를 보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년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은 때가 주전 627년임을 참고하면 그의 출생 연도는 대략 주전 643년이 된다. 에스겔이 소명을 받은 때가 주전 593년이었고 그는 30세였으니(1:1-3), 그가 주전 623년생이라면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20세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동시대에 사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새 언약(31:31-34)의 말씀을 통한 회복을 강조한 반면, 에스겔은 철저히 성령님을 통한 회복을 강조했다. 이런 면에서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한 회복과 에스겔의 성령님을 통한 회복은 우리에게 신앙적 균형을 제공한다(참고 엡5:18; 골3:16).

 


 

(4). 회복자 예수 그리스도

 

  에스겔서에 하나님의 영광과 성령님에 관한 예언만 있는 게 아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에 관해 예언했듯이, 에스겔서도 그리스도를 회복자로 묘사하고 있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8:2의 ‘불같은 형상’을 ‘사람 같은 형상’ 또는 ‘인자 같은 형상’으로 해석하는 성경도 많다. ‘불같은 형상’을 1장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로 이해하는 것이다(1:26-27).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예표로 ‘이마의 표’(9:4)를 지적한다. 이것이 십자가를 직접적으로 예언한다고 말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이마의 표’는 엑스자형 즉 십자 형태로써 십자가를 예표 한다. 이표를 받은 무리만 심판에서 제외된다는 약속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과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참고 고전5:7; 계7:3; 14:1).

 

  그리고 ‘연한 가지’(17:22-23)가 참 소망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것도 메시아적 사역으로 이해할 수 있다.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는 역사를 감당하는 것이 바로 ‘연한 가지’(&r 라크)의 사역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한 목자’(로에 에하드)로 묘사되고 있다(34:23-41). 주로 선지서에서는 목자를 인도자인 왕으로 봐야 하는데, 그리스도는 거짓 목자와 달리 양들을 돌보는 참 목자로서 구원 사역을 감당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왕’(나시)이시며 (37:25. 참고 44:3; 45:7-8; 45:21-46:12; 48:21), ‘나시’는 영원한 성전에서 높아진 인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며 그 임무도 신비적이다. ‘나시’의 역할이 그리스도와 연관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 있는데, 이것은 ‘나시’ 자신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기 때문이라고 한다(참고 45:22).

 

  그러나 40-48장은 죄를 사함 받기 위한 제사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메시아적 인물의 역할로 이해한다.

 


 

(5). 구원자 성부 하나님

 

  에스겔서에서 많이 나타나는 표현 중에 하나가 ‘너희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6:7, 10, 13, 14; 7:4, 27; 11:10, 12; 12:15, 16, 20; 13:9, 14, 21, 23; 14:8; 15:7; 16:62; 20:20, 26, 38, 42, 44; 22:16; 23:49; 24:24, 27; 25:5, 7, 11, 17; 26:6; 28:22, 23, 24, 26; 32:15; 33:29; 34:27; 35:9, 15; 36:11, 23, 38; 37:6, 13, 28; 38:23; 39:6, 7, 22, 28)이다. 에스겔서에서 이 표현은 ‘열국의 목전에서’, ‘내 거룩한 이름’, ‘여호와의 거룩’이라는 주제와 연결되어 주로 사용되었다. 또 이 표현은 유다 백성에 대한 심판뿐 아니라, 이방 심판을 통한 유다 백성의 회복과 연관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심판과 구원을 행하는 분이시다(17:24; 22:14; 36:36; 37:14). 그리고 유다 백성에게 구원을 베푸는 분이시다(출6:7; 7:5). 민족적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는 유다 백성에게 이런 표현들이 많이 사용된 것은 하나님은 새 출애굽을 행하는 분이심을 강조하며 백성을 위로해 주시려는 의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