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스겔서 강해(구속사)

2).사회적,종교적 배경

호리홀리 2015. 3. 23. 09:48

2).사회적,종교적 배경

 


 

  여호야긴 왕과 예루살렘의 지도급 인사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난 다음의 유다는 한 마디로 쓸만한 인물이 귀했기 때문에, 나라 살림을 제대로 꾸려나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시드기야는 비록 유다의 왕이긴 했지만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형편이었고, 궁궐 내의 친 이집트 강경세력에 밀려 어리석게도 반기를 드는 대 실수를 저질러 화를 재촉할 뿐이었다.

 


 

  시드기야 통치의 말엽에 다가서면서 사림(왕실의 고관이나 귀족)이 왕에게 예레미야를 고소하면서 그가 백성의 사기에 미친 악영향 때문에 처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렘 38;4). 라기스 문서 제6호에도 보면 용병대 사령관에게 한 애국적인 군장관이 서신을 보내며 사림이 보낸 순환 서신에 대해 심하게 불평하고 있는 것이 나오는데 같은 말로 “그들이 백성의 손을 약하게 만들고 있다”고 항변한다.  

 

  주전 598-586년 기간은 완전히 침울한 때였는데 여호야긴이 유다의 지도자들 및 최고의 장색인들과 함께 유배를 가게 되었다. 예레미야는 당시 섭정의 모습에 대해 냉혹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시드기야와 그의 추종자들을 ‘나쁜 무화과’라고 부른 반면, 갈대인이 취한 것은 ‘좋은 무화과’라고 하였다. 결국 시드기야와 그의 추종자들은 완고하게 사메티쿠스 2세 및 그의 아들 아프리스와 갈대아 영주에 대항해 반역을 공모하다가 파멸의 길을 걷고 말았다.

 


 

  이 같은 상황 하에서 민심은 흉흉하며 도덕은 땅에 떨어졌다. 에스겔의 환상을 통해 비쳐진 예루살렘은 “피 흘린 성읍”(22:2)이며, 그 곳에서는 살인, 착취, 강탈, 음행, 불경, 불손 등 갖가지 범죄가 자행되는 무법천지였다. 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불쌍히 생각 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토지를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될 지경이었다. 종교적으로도 요시야 종교개혁의 반작용을 일으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가나안 여신, 바벨론의 타무즈 신, 이집트의 호루신, 그리고 태양신들을 숭상할 정도였다. 한편 거짓 예언자들은 평화가 곧 찾아오리란 거짓된 낙관론을 펴기도 하였다.

 

   많은 지식층 인사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든지, 아니면 이집트나 다른 주변 나라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유다에서는 포도원을 가꿀 농부들만 남게 되었다. 이 같은 몇 차례의 대이동 거기에 따른 유다 도시들의 황폐함이 많은 인구들을 흐트러 놓았고, 소수의 남은 사람들은 초근목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절박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바벨론 왕국은 앗시리아와는 달리 외국인들을 조직적으로 데려다가 유다 땅에 강제로 풀어 놓아 섞여 살도록 하는 이민 동화정책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다에서는 “땅의 백성”들이 땅을 갈아 먹으면서 자기 고향땅에서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은 포로로 잡혀 와서도 왕의 신분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여호야긴과 그의 다섯 아들이 바벨론 왕실에서 매달 제공하는 식량을 보급 받았다는 사실이 ‘여호와긴 문서’를 통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문서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10실라의 기름을 야휴의 땅의 왕 야우킨에게 2와 2분의 1실라의 기름을 야후드(유다) 땅의 왕...들에게.” 에스겔 자신의 예언활동을 여호야긴왕의 연대로 계산하였다.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지 오년 그달 오일이라”(겔 1:1-2). 여호야긴은 바벨론 포로민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된 것이다.

 

  에스겔은 자신이 “그발강가에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겔 1:1)라고 자신의 거처를 명시한다. 바벨론에 잡혀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몇 군데 흩어져 살았지만 대개 집단거주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중 한곳이 에스겔이 살던 텔아빕(겔 3:15)이다.

 

  섬은 이곳이 고대 도시 니푸르(니볼) 근처에 있는 그발 운하 곁은 농경부락이라고 본다. 이 운하는 느부갓네살 왕이 유프라테스강의 풀을 관개 수로로 끌어올리기 위해 지은 것이며, 따라서 이스라엘 집단은 농경 사업에 종사했을 것이라고 본다.

 

  느부갓네살의 정책은 바벨론 제국에 쓸모 있는 사람들만 데려온 것이다. 처음에는 정부의 개간사업에 고용되었으나, 나중에는 각자의 재능대로 교역이나 공예분야까지 종사하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기 집도 짓고 정원도 가꾸며 윤택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바벨론 당국은 이들에게 특별한 정치적 또는 종교적 박해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장로도 선출하고 또 모여서 예배도 드릴 수 있었다. 물론 희생제사는 용납되지 않았으나 이 때 회당 제도가 시작되었고, 또 그들의 민족적인 종교성을 유지하기 위해 안식일 제도와 할례 제도가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짧은 기간이긴 했으나 한동안 유다의 왕이 두 사람 나온 적이 있다. 고국에 남아 있는 시드기야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이다. 이 두 사람을 옹호하는 지지 세력은 각자 자기파가 주체 세력이나 정통 세력이라고 주창 하였다. 노트는 이 두 집단 중 어느 쪽이 참 이스라엘의 ‘남은 자’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바벨론으로 잡혀간 이들은 여호야긴을 중심으로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가 정통성을 다시 찾겠다고 그 날을 고대했을 것이며, 시드기야는 포로 사건으로 고국을 떠난 이들은 그것으로 끝장난 것이니, 남은 이들끼리 뭉쳐 살길을 찾아보려고 애쓴 것이다. 결국은 시드기야나 여호야긴이나 그 어느 쪽도 합법정부를 다시 세울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신앙의 정통성을 누가 이어 받았느냐 하는 문제는 귀한 공동체에서 다시 대두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한편 바벨론 포로민들이 자유롭게 모여 예배를 드렸다고 하지만, 뉴섬이 추측하는 대로 많은 사람들 마음속에 여호와는 예루살렘 성전과 함께 불타버리고 결국 마르둑의 승리로 끝난 상황에서 이스라엘 고대 여호와 종교의 신앙이 영원히 상실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을 지워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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