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스겔서 강해(구속사)

에스겔서 강해(구속사)

호리홀리 2015. 3. 23. 09:41

 

에스겔서 강해(구속사)

 

                                   박인대교수

 

                         1강.에스겔서의 배경

 


 

 

1). 역사적 배경

 

  에스겔서는 특정한 시대,포로와 포로공동체를 위해 기록되었다. 더욱이 성경의 다른 예언서들 중에 역사적 연대를 확실히 추정하기 어려운 책들과 달리 에스겔서는 정확한 연대를 제공한다. 그 연대를 통해 에스겔서가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 가운데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정확히 결정할 수 있다. 에스겔서는 구원사의 특정한 정점에서 특정한 상황속에 있는 특정한 인물이 받은 예언이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환상들의 시발점(겔1:2-3)은 유다 왕 여호야긴의 포로생활 5년차에 바벨론 그발강가(바벨론 평야에 종횡으로 나 있던 큰 운하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 운하의 이름은 아카드어로 ‘나르 카바리(대운하)’였으며, 바벨론에서 남동쪽의 우루크(에렉)에 이른다. 그 연안 어딘가에 에스겔을 지도자로 둔 유다인 정착지가 있었다.) 이다.

 

  

 

  당시 남왕국 유다에서는 바빌론의 1차 침략이 있었던 주전 605년에 다니엘과 많은 지도자들이, 2차 침략이 있었던 주전 597년에 여호야긴과 에스겔 그리고 많은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렇게 포로로 붙잡혀 간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히 임했다. 하나님께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는 유다 백성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와, 미래에 있을 회복에 대한 계획을 말씀해 주셨다.

 

  연대적으로 보면, 에스겔서의 메시지는 주전 593년부터 시작해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주전 586년까지 주어졌고 이어 포로 후 25년인 주전 573년과 포로 후 27년인 주전 571년 기록이 간헐적으로 나타난다(40:1). 따라서 30세에 부르심을 받은 에스겔은 53세가 되기까지 즉 주전 593-571년까지 약 23년 동안 사역했다.

 

  역사적으로 에스겔에 나타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바빌론 포로 상황(1:1-2)과 예루살렘 훼파(33:21)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통해 유다 백성은 정신적·물질적·영적 충격을 받게 되었고, 나중에는 포로로 붙잡혀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포로 그룹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그룹 간에 갈등도 생기게 된다.

 

  당시 바빌론의 포로는 대략 4,600명(렘 52:30)으로 그들은 정치적·종교적 지도자들로서 신 바빌론을 위한 노동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바빌론은 포로 정책을 통해 유다를 경제적으로 황폐화시키고 반란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유다 백성을 등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지도자들이 잡혀가자.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면서 식민지 백성으로서 많은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닥친 가장 큰 시련은 그들이 겪어야 했던 신학적 갈등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어찌하여 이방 민족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는가(36:6). 더 이상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가(37:11).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와 함께하시는가(11:23)라는 신의론적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에스겔의 회복에 대한 예언은 유다백성의 이런 신학적 질문들에 해답을 준다.

 


 

  에스겔은 주전 597년에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10년간의 포로 생활을 보낸 후 유배지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멸망 소식을 듣고 경악한다. 그는 유배지에서 아내를 잃었지만 공식적으로 애도 의식도 거행치 못했을 만큼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사독 계열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난 에스겔은 30세의 나이에 바빌론 포로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적 목회에 들어간다. 그는 성전의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불 전차를 타고 세계를 종횡무진 하시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이고 자유로우신 하나님과 부딪힌다. 그는 25세에 바빌론으로 유배되어 온 지 5년 후 동족들이 운하 건설 공사에 동원되어 노동하던 그발(the kebar River)강가에서 ‘하늘이 열리는’ 묵시(vision)를 경험한 것이다.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가 사로잡힌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 지 오년 그달 오일이라”(1:1-2).

 

  그가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한 그발강가는 유다의 포로들이 민족 멸망의 아픔과 상처 속에서 시온을 기억하는 노래(고라 자손의 시온 순례시들)를 부르며 망국의 한을 삭이던 장소였다(시 137편). 에스겔은 조국의 멸망과 더불어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고국의 왕도 포로로 잡혀 가고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되었다. 그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제사장으로 봉사해야겠다는 희망은 아득히 멀어져 간 신기루와 같이 되어 버렸다.

 

  그런 우울하고 답답한 포로 생활이 5년째로 접어든 시점에, 그가 고국에 있었다면 성전에 나가 제사장 직무를 감당해야 할 30세가 된 시점에 하늘의 불 전차 보좌 위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목도한 것이다.

 

  그는 유다 왕실이 망하고 왕의 보좌가 비어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보좌에는 아무 이상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 열리는 경험이다.

 

  전후좌우 평면적 차원의 모든 전망이 흑암처럼 답답하고 닫힐 때 하늘이 열리는 묵시의 경험이 시작된다. 우리는 에스겔서 전체에 걸쳐 유다 왕조의 흥망성쇠와 상관없이 여전히 우주와 역사, 인생과 삼라만상을 주재하는 왕이신 하나님을 만난다. 유다 왕의 보좌는 비어 있지만 하나님은 불 전차 보좌 위에 앉아 계시며 세계를 다스리신다.

 

  역설적이게도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파멸되고 자신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 포로의 신분으로 전락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에스겔은 예언자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좋고 안정된 직장(예루살렘의 제사장직)을 잃고 다소 불안정하지만 매우 거룩하고 역동적인 직장을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옛 세계의 멸망을 통해 새 세계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에스겔은 자주 말씀의 능력에 의해 끌려 올림(영적 부양)을 경험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역사와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예언자적 통찰력과 상상력을 획득했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 보좌의 시야로 역사를 조감하고 민족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 환상을 보면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왕적 다스림과 이스라엘의 미래를 확신하게 되었다.

 


 

<에스겔 활동시기의 역사적 배경>

 

640년     요시야의 즉위

 

627년경   앗수르 왕 앗수르바니팔의 죽음

 

627년     예레미야의 소명(렘 1:2)

 

626년     바벨론 제국의 창건자 나보폴랏사르

 

623년경   에스겔의 출생

 

622년     유다에서의 종교개혁(왕하 22-23장)

 

612년     니느웨의 멸망 : 앗수르의 통치의 종언

 

609년     므깃도에서 요시야의 전사(왕하 23:29-30)

 

609년     여호아하스(살룸)가 애굽인들에 의해 폐위됨(겔 19:1-4)

 

609년     엘리야김(여호야김)이 애굽의 꼭두각시로서 통치함

 

605년     느부갓네살의 즉위 : 갈그미스 전투

 

601년     느부갓네살에 대한 여호야김의 반란

 

599년     여호야김의 죽음 : 여호야긴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감

 

          (여호야긴과 함께 에스겔이 바벨론으로 끌려감)

 

598년     맛다냐(시드기야)가 바벨론의 봉신으로 통치함

 

          (겔 12:8-13, 17:5-21, 19:11-14, 21:25-27)

 

595년경   바벨론에서의 반란 : 시드기야 조공을 거부함

 

593년     애굽의 바로 프사메티쿠스 2세가 반란을 부추김

 

588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인들에 의해 포위됨(겔 24:1-2)

 

588년     애굽의 바로 호브라가 포위를 푸는데 실패함

 

586년     예루살렘의 멸망 : 제2차 포수

 

584년경   유다 총독 그달랴가 암살됨

 

562년     바벨론 왕 아멜마르둑(에윌므로닥)

 

561년     여호야긴이 풀려남(왕하 25:27-30)

 

566년     바벨론 최후의 왕 나보니두스

 

548년경   고레스의 루디아 정복

 

539년     바벨론의 멸망 : 바사 통치의 시작

 


 


 

2).사회적 배경

 


 

  여호야긴 왕과 예루살렘의 지도급 인사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난 다음의 유다는 한 마디로 쓸만한 인물이 귀했기 때문에, 나라 살림을 제대로 꾸려나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시드기야는 비록 유다의 왕이긴 했지만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형편이었고, 궁궐 내의 친 이집트 강경세력에 밀려 어리석게도 반기를 드는 대 실수를 저질러 화를 재촉할 뿐이었다.

 


 

  시드기야 통치의 말엽에 다가서면서 사림(왕실의 고관이나 귀족)이 왕에게 예레미야를 고소하면서 그가 백성의 사기에 미친 악영향 때문에 처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렘 38;4). 라기스 문서 제6호에도 보면 용병대 사령관에게 한 애국적인 군장관이 서신을 보내며 사림이 보낸 순환 서신에 대해 심하게 불평하고 있는 것이 나오는데 같은 말로 “그들이 백성의 손을 약하게 만들고 있다”고 항변한다.  

 

  주전 598-586년 기간은 완전히 침울한 때였는데 여호야긴이 유다의 지도자들 및 최고의 장색인들과 함께 유배를 가게 되었다. 예레미야는 당시 섭정의 모습에 대해 냉혹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시드기야와 그의 추종자들을 ‘나쁜 무화과’라고 부른 반면, 갈대인이 취한 것은 ‘좋은 무화과’라고 하였다. 결국 시드기야와 그의 추종자들은 완고하게 사메티쿠스 2세 및 그의 아들 아프리스와 갈대아 영주에 대항해 반역을 공모하다가 파멸의 길을 걷고 말았다.

 


 

  이 같은 상황 하에서 민심은 흉흉하며 도덕은 땅에 떨어졌다. 에스겔의 환상을 통해 비쳐진 예루살렘은 “피 흘린 성읍”(22:2)이며, 그 곳에서는 살인, 착취, 강탈, 음행, 불경, 불손 등 갖가지 범죄가 자행되는 무법천지였다. 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불쌍히 생각 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토지를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될 지경이었다. 종교적으로도 요시야 종교개혁의 반작용을 일으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가나안 여신, 바벨론의 타무즈 신, 이집트의 호루신, 그리고 태양신들을 숭상할 정도였다. 한편 거짓 예언자들은 평화가 곧 찾아오리란 거짓된 낙관론을 펴기도 하였다.

 

   많은 지식층 인사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든지, 아니면 이집트나 다른 주변 나라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유다에서는 포도원을 가꿀 농부들만 남게 되었다. 이 같은 몇 차례의 대이동 거기에 따른 유다 도시들의 황폐함이 많은 인구들을 흐트러 놓았고, 소수의 남은 사람들은 초근목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절박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바벨론 왕국은 앗시리아와는 달리 외국인들을 조직적으로 데려다가 유다 땅에 강제로 풀어 놓아 섞여 살도록 하는 이민 동화정책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다에서는 “땅의 백성”들이 땅을 갈아 먹으면서 자기 고향땅에서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은 포로로 잡혀 와서도 왕의 신분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여호야긴과 그의 다섯 아들이 바벨론 왕실에서 매달 제공하는 식량을 보급 받았다는 사실이 ‘여호와긴 문서’를 통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문서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10실라의 기름을 야휴의 땅의 왕 야우킨에게 2와 2분의 1실라의 기름을 야후드(유다) 땅의 왕...들에게.” 에스겔 자신의 예언활동을 여호야긴왕의 연대로 계산하였다.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지 오년 그달 오일이라”(겔 1:1-2). 여호야긴은 바벨론 포로민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된 것이다.

 

  에스겔은 자신이 “그발강가에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겔 1:1)라고 자신의 거처를 명시한다. 바벨론에 잡혀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몇 군데 흩어져 살았지만 대개 집단거주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중 한곳이 에스겔이 살던 텔아빕(겔 3:15)이다.

 

  섬은 이곳이 고대 도시 니푸르(니볼) 근처에 있는 그발 운하 곁은 농경부락이라고 본다. 이 운하는 느부갓네살 왕이 유프라테스강의 풀을 관개 수로로 끌어올리기 위해 지은 것이며, 따라서 이스라엘 집단은 농경 사업에 종사했을 것이라고 본다.

 

  느부갓네살의 정책은 바벨론 제국에 쓸모 있는 사람들만 데려온 것이다. 처음에는 정부의 개간사업에 고용되었으나, 나중에는 각자의 재능대로 교역이나 공예분야까지 종사하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기 집도 짓고 정원도 가꾸며 윤택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바벨론 당국은 이들에게 특별한 정치적 또는 종교적 박해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장로도 선출하고 또 모여서 예배도 드릴 수 있었다. 물론 희생제사는 용납되지 않았으나 이 때 회당 제도가 시작되었고, 또 그들의 민족적인 종교성을 유지하기 위해 안식일 제도와 할례 제도가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짧은 기간이긴 했으나 한동안 유다의 왕이 두 사람 나온 적이 있다. 고국에 남아 있는 시드기야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이다. 이 두 사람을 옹호하는 지지 세력은 각자 자기파가 주체 세력이나 정통 세력이라고 주창 하였다. 노트는 이 두 집단 중 어느 쪽이 참 이스라엘의 ‘남은 자’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바벨론으로 잡혀간 이들은 여호야긴을 중심으로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가 정통성을 다시 찾겠다고 그 날을 고대했을 것이며, 시드기야는 포로 사건으로 고국을 떠난 이들은 그것으로 끝장난 것이니, 남은 이들끼리 뭉쳐 살길을 찾아보려고 애쓴 것이다. 결국은 시드기야나 여호야긴이나 그 어느 쪽도 합법정부를 다시 세울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신앙의 정통성을 누가 이어 받았느냐 하는 문제는 귀한 공동체에서 다시 대두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한편 바벨론 포로민들이 자유롭게 모여 예배를 드렸다고 하지만, 뉴섬이 추측하는 대로 많은 사람들 마음속에 여호와는 예루살렘 성전과 함께 불타버리고 결국 마르둑의 승리로 끝난 상황에서 이스라엘 고대 여호와 종교의 신앙이 영원히 상실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을 지워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다.

 


 

3). 문학적 형식

 


 

  에스겔서는 다양한 문학적 형태를 띠고 있다. 시와 산문은 물론이고 꿈과 환상의 구조(1-3장; 8-11장), 계시적 문학(37:1-14; 40-48), 드라마(4-5장; 12장), 알레고리, 풍유, 잠언(14:44; 18:2), 장례 노래(19; 26-28; 32장) 등의 형태를 보이고 수사학적 용법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꿈과 환상은 주전 6-7세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나타나는 문학적 형태이기도 하다. 에스겔서는 회복과 축복의 메시지를 위해 계시적 환상을 많이 사용하고, 내용상 대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면, 24장은 예루살렘의 포위에 대한 예언의 시작에 이어 33장은 마침내 멸망을 선포하며, 3장에서 에스겔이 처음 사명을 받을 때 파수꾼으로 부르심을 받고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33장에서 다시 파수꾼의 소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6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산에 임하신 심판과 파괴와 황폐, 36장에서는 같은 산에서 회복과 새롭게 임하시는 풍성함을 묘사하고 있다. 7장에서는 끝을 언급하고 있지만, 37장에서 끝난 마른 뼈의 환상에서 성령님을 통한 회복을 보여 준다.

 


 

4). 에스겔의 신학

 


 

  포로로 잡혀간 공동체에서 사역한 선지자 에스겔은 예루살렘에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고, 예루살렘이 멸망하자 회복의 메시지를 계속 선포한다. 혹자는 에스겔이 사역한 곳이 예루살렘이며, 포로 공동체가 머물던 바빌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1:1-3과 3:15에서 사역지를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에스겔서의 신학은 포로 공동체의 소망 신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에스겔서는 하나님의 본질, 심판의 목적, 개인적 책임, 이스라엘의 윤리적․종교적․도덕적 역사와 회복 등을 강조하고 있다.

 


 

(1). 하나님의 백성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사 40장) 열방의 구원과 회복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으신다(사 2장)고 강조한다. 그러나 에스겔은 철저히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과 대적들의 멸망에 대한 메시지에만 관심이 있다. 이것에 대해 편협주의(parochialism)라고 부를 만큼, 에스겔은 철저히 유다 백성의 회복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방 민족의 회복에 대해 특별한 관심과 언급이 없고, 유다 백성의 과거 모습과 현재 상태 그리고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계획만을 묘사한다.

 

  과거에 유다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범죄를 저질렀던가? 이런 유다 백성에 대해 16, 23장은 영적 행음자로, 20장은 하나님의 언약을 끝까지 버린 자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철저하게 자기 조상들에게 죄를 전가하는 모습을 보이며(18:1-2), 조상들처럼 영적으로 음행하는 모습을 보인다(6장; 8:5-17; 14:3-5; 16:15-22; 20:30-31). 유다 백성의 이런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계획과 언약대로 그들을 회복시킬 것을 약속하신다(34-39장). 그리고 개인뿐 아니라(36:26-28) 민족적 회복을 묘사하고 있다(37:15-28).

 


 

(2).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케도쉬 이스라엘)으로 언급하는 이사야서와 유사한 내용이, 에스겔서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로 나타난다. 시작부터 하나님을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으로 묘사하며(1장), 성전에도 영광으로 임하시는 모습으로 기록한다(43:5; 48:35).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이 유다 백성의 죄악으로 인해(8-11장)성전에서 떠났다가 다시 회복되는 내용이다. 처음에 하나님의 영광은 지성소 안 언약궤에 있었지만(9:3), 성전 문지방으로 가시고(10:4), 그곳에서 동문까지 떠나시며(10:18-20), 마침내 성읍에서 떠나 성읍 동편 산에 머무시게 된다(11:23), 그리고 다시 성전으로 돌아와 가득히(43:5) 유다 백성 중에 거하시게 된다(48:35).

 

  성경 외의 다른 근동 자료들은 그 신당에 돌아오는 신들의 마음이 먼저 변화될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에스겔서는 하나님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이 먼저 변화됨을 강조하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11:18-21). 사람의 전인적 변화는 하나님의 임재와 연관시켜 이해할 수 있다.

 


 

(3). 회복자의 성령님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와 연관된 에스겔서의 회복은 바로 성령님의 임재이다. 선지자 에스겔은 메시지를 받을 때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영에 철저하게 의존한다(3:12, 14상; 8:3; 11:1; 24상; 37:1; 43:5). 하나님의 영은 에스겔을 들어 올려 환상 가운데로 데려가기도 하시며(3:15; 8:3; 11:1) 움직이게도 하신다. 즉 성령님께서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주고 계시하시는 것이다. 이는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 주었다는 히브리서 3:7의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는 신약성경의 언급과 일치한다.

 

  에스겔은 성령님께서 절망 가운데 있는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주셨을 뿐 아니라 유다 백성의 완전한 변화조차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일어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새 영’이고, ‘나의 신’(36:26-27)이신 성령님께서 유다 백성의 마음속에 임하여 그들을 완전히 변환(transformation) 시키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신학적 강조점은 다른 선지자들과 차이를 보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년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은 때가 주전 627년임을 참고하면 그의 출생 연도는 대략 주전 643년이 된다. 에스겔이 소명을 받은 때가 주전 593년이었고 그는 30세였으니(1:1-3), 그가 주전 623년생이라면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20세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동시대에 사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새 언약(31:31-34)의 말씀을 통한 회복을 강조한 반면, 에스겔은 철저히 성령님을 통한 회복을 강조했다. 이런 면에서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한 회복과 에스겔의 성령님을 통한 회복은 우리에게 신앙적 균형을 제공한다(참고 엡5:18; 골3:16).

 


 

(4). 회복자 예수 그리스도

 

  에스겔서에 하나님의 영광과 성령님에 관한 예언만 있는 게 아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에 관해 예언했듯이, 에스겔서도 그리스도를 회복자로 묘사하고 있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8:2의 ‘불같은 형상’을 ‘사람 같은 형상’ 또는 ‘인자 같은 형상’으로 해석하는 성경도 많다. ‘불같은 형상’을 1장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로 이해하는 것이다(1:26-27).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예표로 ‘이마의 표’(9:4)를 지적한다. 이것이 십자가를 직접적으로 예언한다고 말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이마의 표’는 엑스자형 즉 십자 형태로써 십자가를 예표 한다. 이표를 받은 무리만 심판에서 제외된다는 약속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과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참고 고전5:7; 계7:3; 14:1).

 

  그리고 ‘연한 가지’(17:22-23)가 참 소망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것도 메시아적 사역으로 이해할 수 있다.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는 역사를 감당하는 것이 바로 ‘연한 가지’(&r 라크)의 사역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한 목자’(로에 에하드)로 묘사되고 있다(34:23-41). 주로 선지서에서는 목자를 인도자인 왕으로 봐야 하는데, 그리스도는 거짓 목자와 달리 양들을 돌보는 참 목자로서 구원 사역을 감당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왕’(나시)이시며 (37:25. 참고 44:3; 45:7-8; 45:21-46:12; 48:21), ‘나시’는 영원한 성전에서 높아진 인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며 그 임무도 신비적이다. ‘나시’의 역할이 그리스도와 연관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 있는데, 이것은 ‘나시’ 자신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기 때문이라고 한다(참고 45:22).

 

  그러나 40-48장은 죄를 사함 받기 위한 제사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메시아적 인물의 역할로 이해한다.

 


 

(5). 구원자 성부 하나님

 

  에스겔서에서 많이 나타나는 표현 중에 하나가 ‘너희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6:7, 10, 13, 14; 7:4, 27; 11:10, 12; 12:15, 16, 20; 13:9, 14, 21, 23; 14:8; 15:7; 16:62; 20:20, 26, 38, 42, 44; 22:16; 23:49; 24:24, 27; 25:5, 7, 11, 17; 26:6; 28:22, 23, 24, 26; 32:15; 33:29; 34:27; 35:9, 15; 36:11, 23, 38; 37:6, 13, 28; 38:23; 39:6, 7, 22, 28)이다. 에스겔서에서 이 표현은 ‘열국의 목전에서’, ‘내 거룩한 이름’, ‘여호와의 거룩’이라는 주제와 연결되어 주로 사용되었다. 또 이 표현은 유다 백성에 대한 심판뿐 아니라, 이방 심판을 통한 유다 백성의 회복과 연관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심판과 구원을 행하는 분이시다(17:24; 22:14; 36:36; 37:14). 그리고 유다 백성에게 구원을 베푸는 분이시다(출6:7; 7:5). 민족적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는 유다 백성에게 이런 표현들이 많이 사용된 것은 하나님은 새 출애굽을 행하는 분이심을 강조하며 백성을 위로해 주시려는 의도일 것이다.

 


 


 


 


 


 


 


 


 

2강.에스겔서의 메시지

 


 


 

1. 에스겔서의 특징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에게, 그들이 왜 국가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고 앞으로 어떻게 회복될 것인지에 대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통해 해답을 주는 것이 에스겔서의 목적이다. 주로 포로기 및 후기 선지서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겪는 갈등을 말씀으로 해결하는 메시지에 관심이 있다.

 

 

 

  에스겔서는 포로기와 후기 선지서들과 절망 속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로 시작해(1장), 마지막에 회복될 하나님의 임재인 ‘여호와 삼마’로 끝을 맺는다(48:35). 또한 그들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불손종과 죄악 때문이고(8-11장), 하나님의 백성뿐(1-24장)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한 이방 민족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며(25-32장), 유다 백성을 위한 회복의 계획도 나타난다(33-39), 그리고 미래에 새로운 성전(40-48)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완전히 회복될 것임이 드러난다.

 

 

에스겔서에 나타난 특징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그리고 ‘영’에 대한 관심이다. ‘영’(루아흐)이라는 단어는 ‘바람, 마음’등 여러 가지 뜻이 있으며, 구약 성경에서 총 389회 나타나는데 아람어로 11회, 히브리어로는 378회 사용되었다. 그런데 통계적으로 보면, 구약성경 중 에스겔서에서 ‘영’이라는 단어가 무려 52회나 사용되고 있어 다른 어느 성경보다도 강조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영이라는 단어가 주는 자연에 대한 현상으로 6회, 사람들의 영의 개념으로 8회, 하나님의 영으로 16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자연적 용례로 22회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임재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의 회복을 위해 우주적 ․역동적으로 역사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 즉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내면적으로 완전히 변화시키시며(36:26-28), 하나님의 백성을 살아 있는 군대로 회복시키신다(37:9-10). 하나님의 영으로 유다 백성을 회복시키신다고 에스겔이 강조하는 것은, 에스겔보다 20세가 많은 예레미야가 내면적 말씀을 통해 변화를 강조한 것과도 균형을 이룬다(렘31:33).

 


 

2. 에스겔서의 행위메시지

 


 

  이스라엘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선포하는 에스겔 예언자는 상징 행위와 말씀이라는 두 가지 방법으로 표현한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상징적 행위에 담아 전함으로써 청중으로 하여금 참여케 하고, 그 메시지를 해석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절실하게 듣게 만든다.

 


 

1). 유다와 예루살렘 멸망을 상징적 행위메시지로 선포한다.

 

  에스겔은 주전 593년에 예언자로 부름 받았다. 에스겔의 메시지는 두 단계로 구분되는데 주전 586년 이전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예루살렘의 완전한 함락을 선포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된 후에 유다 백성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전하는 것이다.

 

  주전 593년에 예루살렘과 백성은 완전 함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적들에게 그냥 내어 줄 리 없다고 생각하고 곧 회복이 이뤄지리라는 낙관적인 생각으로 멸망 직전까지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한다. 이 선포를 하나님은 행위메시지로 선포한다.

 


 

⑴ 벽돌의 상징적 행동(4:1-3) 

 

  에스겔은 이 징조를 통해 심판의 첫 단계가 이뤄질 것을 예언한다. 주위에 포위된 벽과 요새와 성벽 그리고 수직으로 만나는 축대를 쌓는다. 또 성벽을 허무는 데 필요한 쇳덩이를 설치한다. 그리고 자신과 모형 사이에 철벽을 설치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가혹하게 다스리실 의지를 표현한다.

 


 

⑵ 좌우편으로 눕는 상징적 행동(4:4-8)

 

  여기에서 상징적 행위는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이 얼마동안 포위를 당하여 멸망을 기다리는 모습을 상징한다. 상징의 내용은 예언자 자신이 좌편과 우편으로 눕는 행위를 보여주는데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해야 한다. 예언자가 하는 행동은 대속의 의미가 아니라 유다백성이 겪어야 할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에스겔로 하여금 좌편으로 눕게 하시고, 다시 우편으로 눕게 하신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면서 우편은 남쪽을 뜻하고, 좌편은 북쪽을 뜻한다. 따라서 이스라엘 족속은 남유다와 구별되는 북왕국을 의미한다. 390일 동안 왼편으로 눕는 것은 북왕국이 390년 동안 지은 죄악을 계산하고 있다. 유다의 40년은 앞으로 닥칠 처벌의 기간을 상징한다. 390년과 40년을 합하면 430년이고 이는 애굽에서 포로 기간과 동일함으로 귀환이 있을 때까지 그들이 값을 치러야 하는 상징적 포로 기간으로 묘사된다.

 

 

 

⑶ 부정한 양식의 상징적 행동(4:9-17)

 

  포위 기간 390일 동안 예루살렘 백성이 비참한 상황을 보여 준다. 남은 곡식을 모두 모아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 즉 극심한 기근을 표현하고 있으며 식량이 모자라는 이때에 하루 할당되는 음식이 빵 이십 세겔(228g)과 물 힌 (힌 (Hin) 밧(bath)의 육분의 일에 해당하는 용량 단위로 약 3.6리터이다(출 30:24 ; 겔 46:14)).육분 일(0.6ℓ)이라는 사실에서 강조된다. 이 말씀은 포위된 상황에서 양식이 부족한 그들의 삶을 더욱 악화 시키는 여호와의 명령이다. 이 명령은 멸망 후에 다가올 포로 시대까지 예견하고 있다. 12절에 인분 불에 구워먹으라는 명령에도 수행하는데 부정한 떡임을 의미한다. 예언자의 간구로 인분이 아니고 쇠똥으로 대신하였지만 포로기에는 부정한 떡을 먹게 됨으로써 상황이 더욱 악화됨을 예언한다. 포위당함과 식량 부족 후에는 식량과 물이 점점 더 줄어들고 마침내 완전히 고갈되고 만다.

 


 

⑷ 털을 깎는 상징적 행동(5:1-4)

 

  면도의 비유는 이방 정복자들에 의해 팔레스타인이 학살되고 황폐화되는 것을 의미한다(사 7:20). 면도를 하는 것은 슬픔의 표시이기도 하고(렘 41:5), 수치의 상징이기도 하며(삼하 10:하), 동시에 전쟁의 선포이기도 하다. 에스겔은 이런 주제들을 더욱 발전시켜 면도칼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심판의 도구인 이방 국가의 검으로 상징한다. 에스겔은 면도칼로 자신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음으로써 멸망하는 예루살렘의 수치를 표현하다.

 

  이어서 머리카락과 수염을 대충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저울에 달아 셋으로 나누는데, 무게를 달아 세며 나누는 것은 심판의 행위를 뜻한다. 머리카락과 수염을 날려 보낸다고 하는 것은 칼로 멸망당하는 유다 백성의 운명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일이다. 성읍 안에서 불사른 3분의 1은 포위 기간 동안 기근과 질병으로 멸망당함을 의미하고,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는 자는 함락되는 과정에서 방어하거나 도망하다가 죽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바람에 흩어진 나머지 3분의 1은 멸망당한 후에 남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거나 도망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이웃 나라로 가서 포로가 되어 사로잡히곤 한다(렘 40:1; 41:15; 43:5-7)

 


 

2). 하나님을 아는 은혜(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라)

 

  에스겔서는 다른 예언서들과 마찬가지로 ‘종말론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린 심판’(겔 1-24장)과 ‘이방 민족들에게 내린 심판’(겔 25-32장)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에 내린 구원’(겔 33-4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언서에 나타난 ‘종말론적 구조’는 궁극적으로 심판을 통해 구원을 이룬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처벌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혹독한 심판을 내리시는 중에도 새 역사와 정의의 공동체를 바라보신다고 에스겔은 메시지로 선포한다.

 


 

(1) 이스라엘 산하에 내린 심판(6:1-7)

 

  6장에서 ‘이스라엘 산’이라는 표현은 주로 에스겔에서만 사용되고 있으며 이스라엘 전역에 있는 산하(山河) 즉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말한다(3절). ‘이스라엘 산’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팔레스타인의 땅’이나 정치적 단위인 ‘이스라엘’ 그 이상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주신 그 땅의 귀중함을 나타낸 것이다.

 

  에스겔 예언자는 ‘이스라엘 산’들을 청취를 잘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전국의 산하를 하나님의 말씀의 청취자로 삼은 것은 그곳에 ‘산당’(바모테켐 너희의 산당들)이 있기 때문이다(3절). 칼은 ‘전쟁’ 또는 ‘적의 침입’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기도 하며, 바빌론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스겔 예언자는 바빌론을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바빌론을 들어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묻는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일으켜 이스라엘 산하에 놓인 산당들을 모두 철폐시키겠다고 선언한다. 

 


 

(2)멸망 선언 (6:11-14 )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을 선언한다. 하나님께서 명령을 받은 예언자는 매우 안타까운 심정으로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이스라엘의 멸망’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스라엘의 범죄를 ‘모든 가증한 악’이라고 지칭하며 심판하신다. 심판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의 수단으로 이스라엘을 멸망에 이르게 한다(11절). 심판의 내용으로는 먼 곳에 있는 자들을 ‘전염병’으로 심판하시고,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을 칼로 심판 하신다. 그리고 포위를 당해 에워싸인 자들을 기근으로 심판하신다. 이로써 하나님의 분노를 모두 표현하신다.

 

  이스라엘의 전역에 우상을 위한 성소들이 널려있다. 성소마다 우상과 제단과 분향단이 즐비하다. 산과 언덕마다 우상을 위한 성소들이 있으며, 푸른 나무 아래와 무성한 상수리나무 아래에도 우상을 위한 성소들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곳을 신성하고 거룩한 곳으로 여겼으나 하나님께서는 우상이 있는 곳을 부정한 것으로 만드신다.  하나님께서 권능의 손으로 그들을 심판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전 국토는 황폐해지며 사람이 사는 도시는 부서지고 불에 타서 황량하게 된다.

 


 

(3) 폭력과 교만에 대한 심판(7:10-13)

 

  몽둥이는 원래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의 상징적 표현이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자기 자랑으로 가득 찬 교만으로 바뀔 때, 몽둥이는 포악하고 폭격적인 행동의 상징적 표현으로 다시금 바뀐다. 이런 폭력과 교만에 찬 몽둥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며, 따라서 모든 삶을 종결시키는 파멸로 이어진다.

 


 

(4) 전쟁 준비에 대한 심판(7:14-16)

 

  예언서의 여러 곳에서 전장에 배치할 수 있는 군사력에 대한 신뢰를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거절로 간주하고 불경스럽게 보고 있다(사 2:7; 3:25). 여기서 여호와의 분노는 모든 전쟁 준비의 행동을 마비시킨다. 전쟁을 피해 산 위로 도망하더라도 각자의 죄악에 따라 처벌될 것을 강조한다(7:16).

 


 

(5) 축적한 재산에 대한 심판(7:17-21)

 

  하나님을 동한시하는 자들의 행동 양식 중에 두드러진 특징은 맘몬에 대한 믿음이다. 그들은 맘몬의 도움을 받아 위험을 모면하고자 한다. 그들은 욕심 사납게 맘몬을 추구하고 마구 끌어 모은다. 하지만 자신들의 배를 다 채우지 못하면서 욕심은 끝이 없다. 더욱이 그들은 화려한 장식으로 교만을 드러낸다. 또한 가증한 우상과 미운 물건으로 자신들을 자랑하지만 모든 것들은 오물이 되고 만다.

 


 

(6) 성전에 대한 심판(7:22-24)

 

  하나님의 신성한 구역인 성전을 더럽혔다고 고발하며 더럽힘의 내용을 소개한다. 그들은 온갖 폭행을 일삼는 피에 굶주린 자들이다. 그들은 계약 백성 상호간의 연대를 흉악하게 파괴하는 자들이다(7:22). 힘 있는 자들의 폭행 모습과 쇠사슬에 묶여 포로로 끌려가는 자들의 모습을 중첩해 유비시키고 있다(7:23). 여기서 에스겔 예언자는 제의상의 불결함보다 형제적 연대를 우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찾더라도 하나님의 자애로운 얼굴은 그들에게서 돌이킬 수밖에 없다. 악한 이방인들을 데려 와서 그들을 치게 하신다. 따라서 악한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집들을 점령하고 또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성전도 짓밟는다. 이런 파멸은 스스로 강하게 여기고 교만했던 자들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7:24).

 


 

3) 신앙적 탈선과 심판 그리고 구원

 

  주전 597년의 제1차 바빌론 포로에서 살아남은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징계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8:17; 9:9등). 전체가 환상에 해당하는 8-11장은 포로로 잡혀 바빌론에 있던 유다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처음과 마지막, 즉 8:1상과 11:25절은 실제 현실에 속한 내용이다.  그 중간의 환상은 여호와의 손(권능)이 임하시는 것으로 시작하며(8:1하), 환상이 떠나 ‘올라가는 것’으로 끝맺는다(11:24). 예언자는 여호와의 영에 의해 옮겨지며(8:3), 다시 본래 자리로 되돌아온다(11:24). 환상 자체는 8:3-11:23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8장의 환상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견되는 빗나간 네 개의 우상숭배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고(3-6, 7-13, 14-15, 16-18절), 9장은 성소에서부터 시작되는 심판을 다루며(1-2, 3-7, 8-11절의 세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면은 하나님의 외침이나 ‘부르심’(카라) 또는 예언자의 ‘외침’(자아크)으로 시작한다.

 

  10-11장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시는 모습을 네 단계에 걸쳐 묘사하고 있다. 첫째로, 지성소에 있는 법궤 위의 보좌에서 성전 문지방으로(10:4 참고 9:3), 둘째, 그룹들이 이끄는 움직이는 보좌로(10:18), 셋째, 성전 안뜰의 동문으로(10:19), 넷째, 성읍을 벗어나 감람산으로(11:23) 옮겨가신다. 여호와의 떠나심은 곧 파멸을 의미한다.

 


 

(1) 성전을 더럽히는 온갖 우상 숭배 행위들(8장)

 

  에스겔은 제사장이면서 선지자였기에 포로로 끌려온 장로들이 자주 찾아와 질문을 던질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8:1, 14:1, 20:1) 포로가 된지 6년째 주전592년 6월5일 장로들의 방문을 받는다. 8장부터 11장-24절까지 장로들에게 들려주는 대답이 환상의 내용으로 되어있다. 11:24, 25절에 나오는 ‘사로잡힌 자’는 장로들을 가리키고 있다.

 

  장로들의 방문을 받은 에스겔은 여호와의 권능에 이끌려 긴 환상을 체험한다. 에스겔은 성령에 이끌려 예루살렘성전으로 가는 환상을 체험한다. 성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눈에 뛴 것은 ‘투기의 우상’이다. = 하나님을 너무 화나게 한 우상은 바알 신상이다. =성전 입구에 바알 신상이 세워져 있었다. 이것은 므낫세 왕이 세워졌으나 요시야 왕에 의해 파괴된 바알의 우상이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임재)을 보게 된다. 성의 주인은 하나님인 것을 보이시는 것이다. 이제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본다. 성전 문어귀에 ‘투기의 우상’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로 인해 성전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이 차지하고 있으니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전 뜰의 문으로 인도함을 받은 에스겔은 성전 담벼락의 구멍을 발견한다.(7)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 담을 헐자 한 개의 문이 나타난다. 성소 안에 비밀의 종교라고 하는 비밀의 우상 숭배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가증하고 악한 일 곧 사방 벽에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우상들을 그려놓고 그 앞에서 분향하는 모습이 보인다.(겔 8:8-11)

 

  에스겔이 본 우상숭배자들은 놀랍게도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70명의 장로들이었다. 그 중에는 요시아 왕의 서기관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 사반은 경건한 신앙인이었는데 그 아들과 70장로들이 은밀하게 우상숭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향연이 오르는 향료를 들고 있었다. 분향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데 장로들이 더구나 우상 앞에 분향하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예전에 웃시야가 분향하다 문둥병에 걸렸는데 이것은 그 이상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은밀하게 자행되고 있었던 우상숭배를 보여주심으로 심판의 당위성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돌보지 않고 버렸다고 불평한다.(12) 우상숭배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더 가증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북문어귀로 데려가신다.(14) 그곳에선 여인들이 앉아서 ‘담무스’신을 애도하고 있었다. ‘담무스’는 ‘이난나’의 남편 신으로 바벨론의 신이다. 당시 사람들은 6-7개월 지하세계로 내려간 담무스를 위해서 애곡하는 의식을 행했다.=이것은 음행의 신이다. 발가벗고 성행위를 하는 음행의 종교를 섬기고 있었다. 성전 안에 들어서니 더 가증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25명이 성전을 등지고 얼굴을 동쪽으로 향해 태양에게 경배하는 장면을 목격한다.=고관 대작들의 이 모습에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인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떠나시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제 하나님은 종교적 탈선에서 사회적 불의를 지적하신다.(17) 그들은 그 땅을 폭력으로 가득 채움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있을 뿐 아니라 나뭇가지를 코에 두는 새로운 우상숭배에 빠지기도 했다. 이는 우상에게 입을 맞추는 행위(욥 31:27)와 같은 우상에게 경배하는 행위이다. 이에 하나님은 긍휼도 자비도 없는 그리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분노의 심판이 있을 것을 보여주고 있다.

 


 

(2) 성소에서 시작되는 심판(9장)

 

  하나님의 심판은 성전 앞에서 시작 된다. 심판을 명하시는 분노에 찬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떨어진다. 무기를 들고 나아오라. 놋제단 옆에 6명이 서있었다. 심판의 첫 단계는 지성소에 있던 하나님의 영광을 거두시어 성전 문지방으로 옮기신다. 성전을 떠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먹 그릇을 찬 심판자에게 예루살렘을 다니며 우상숭배에 탄식하는 자들에게 이마에 표하라 하신다. 그 후 심판자에게 그들을 긍휼이 여기지 말고 우상숭배의 진원지인 성소부터 치되 이마에 표가 있는 이들은 살려두라 하신다. 심판자들은 성전 앞에 있는 장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한다. 그런 후에 우상숭배자들을 죽여 성전 뜰에 채우라하신다.

 

  이를 본 에스겔은 엎드려 기도한다. 재난을 피해 살아남은 자들 마저 죽이려 하십니까? 라고 항변한다.(8) 에스겔의 중재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의 죄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3) 성전을 떠나시는 하나님(10장)

 

  1장에서 본 것과 비슷한 수레바퀴들로 하나님이 떠나시는 장면이 구체적으로 보여 진다.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 문지방을 떠나 그룹들 위에 머문다. 이것은 4절에서 이어지는 것으로 심판을 집행하기 위해서 성전을 떠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어 하나님의 영광은 그룹들과 성전 동문으로 옮겨가신다. 이 장면은 다시 11:23절로 이어진다.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에서 동편산(감람산)에 머물고 심판을 집행하신다.

 


 

(4) 우상숭배자들에게 임할 심판(11장)

 

  10:19절의 장면을 이어간다. 성전 동문으로 여호와의 영광이 옮겨가는데 그곳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 25명이 보인다. 고관들(싸레하암)이다. 그들은 불의를 꾀한 자들이다. 부동산을 탈취하며 불의를 행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진다. ‘그들을 쳐서 예언하고 예언할지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 것을 보여 주며 5절 마음(루아흐)속에 있는 것을 모두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가마 솥 안에 우리가 들어 있다고 한다. 자기들은 보호를 받는다고 한다. 그 속에 고기들이 자기들이라는 것이다. 이미 가마솥에 불이 당겨졌는데 아직도 모르고 있다.

 

  14절부터는 회복을 보여주신다. 예루살렘 성전의 심판은 예배의 회복을 위함이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 한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부어 주셔서 돌 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셔서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것이다.(19) 하여 하나님의 뜻(토라)을 기쁨으로 행하게 하실 것이다.(20) 그리고 언약관계를 회복할 것이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4)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려질 심판(12-15장)-비유로 예언한다

 

  12-15장은 크게 두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이고(12-14장), 둘째는 비유와 표상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으로써(15장) 이스라엘은 쓸모없는 포도나무의 첫 비유이다.

 


 

(1) 포로가 될 것을 나타내는 행위 메시지(12장)

 

  유다의 멸망을 예고하는 에스겔의 행위 메시지는 이사 가는 것(3-5)과 공포 속에서 먹고 마시는 것(17-20)이다. 짐을 싸서 배에 오르는 이유는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2). 이미 이사야 6:9에 나오는 말씀이다.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유배라는 것이다.

 

  10절의 왕은 시드기야이다. 시드기야는 밤에 어깨에 짐을 지고 나갈 것이며 사람들은 그를 위해 벽을 뚫지만 그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붙잡혀서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이다.(실제로 시드기야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도망치다 체포된다. 그리고 보는 데서 두 아들이 칼에 맞아 죽고 자신은 두 눈을 뽑힌채로 끌려가다가 죽는다. 도착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16절에서 희망을 보여 주신다. 그 때 사람들은 여호와가 하나님인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인 말뚝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유다의 잘못인 것을 지적하고 있다.

 

  두 번째 행위 메시지는 황폐한 땅에 남아서 음식을 먹는 행위를 통해서 예루살렘이 포위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 모든 것이 속히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2) 거짓 예언자의 종말(13장)

 

  거짓 선지자들이 성의 무너진 곳에  올라가지 않았다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족속의 파멸된 영적 상태를 치유하기 위해 진단해 보지도 않고 그들을 바르게 고치거나 인도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된 것을 진실인 것처럼 왜곡하는 죄를 범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을 거짓된 말로 속이고 헛된 길로 가도록 미혹했으며, 그들은 자신을 속이면서 하나님을 떠나 악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바로 이러한 죄악들을 범한 거짓 선지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심판을 선포하신 것이다(5-8).

 


 

(3)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심판하신다(14장)

 

  다른 신을 버리고 오직 여호와뿐이라는 신앙 고백을 요구하신다. 우상을 숭배한 자들을 하나님 백성의 명단에서 제하신다고 언급한다(8). 거짓 예언자에게도(9-11) 심판하신다. 심판은 양식이 떨어져 굶주림이 있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가장 아끼시는 의인(노아, 다니엘, 욥)이 있다할지라도 그 의인만 심판을 면할 것이다.(12-14).

 


 

(4) 쓸모없는 포도나무

 

  15장은 산문이 아니라 운문으로 된 글이다. 포도나무의 소명은 열매 맺는 것이다.  열매를 맺지 않는 포도나무는 아무 쓸모없고 오직 땔감으로 아궁이에 들어갈 뿐이다. 농부와 포도나무의 관계는 사5:1-7, 렘2:21, 겔17:6, 호10:1, 시80:9-17, 마20:1, 요15장에 나온다.

 

  1-8절은 이스라엘을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로 비유한다.(호10:1) 에스겔은 2-5절에서 그림언어로 6-8절은 그 뜻을 설명한다. 즉 포도나무는 열매가 없어 아궁이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뜻이다.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심판이다. 포도나무만 화목으로 쓰시는 것이 아니다 그 땅까지 징계하신다. 하나님의 진노는 무서울 정도로 내려치고 있지만 그 속에서 회복을 선포하고 있다.

 


 

(5) 영원한 언약(16장)

 

  예루살렘을 여성으로 의인화하여 은유적으로 말씀을 선포한다.(사5:1, 렘47:6, 암5:19)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부정한 태생임을 선언한다. 즉 예루살렘이 태어난 곳은 가나안이고 그의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고 어머니는 헷 사람이다. 모두 가나안 7족속이며 음란하고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다. 이런 예루살렘을 택하셔서 거룩한 다윗의 도성으로 만드셨다. 예루살렘은 여부스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다윗은 가나안 땅을 200년 동안 차지하지 못한 성을 정복한다. 다윗 성이라고 불렀다. 출생은 우상의 산지인데 화려하게 만들고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유배지역의 아나돗 출신의 선지자로 모압언약을 강조했다면 에스겔은 사독계열의 제사장으로서 다윗언약을 강조한다. 성경은 이렇게 균형을 맞추고 있다. 다윗언약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다윗왕조를 세우신 것과 하나님께서 자기이름을 두시려고 예루살렘을 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예루살렘에 대한 애정을 갖고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부스족에게 속해있던 예루살렘을 택하신 것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버려진 아기를 양육하셔서 아름다운 왕비로 만드셨다. 존귀한 자가 되어 이방에까지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행음하여(언약파기) 창기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예루살렘을 택하시고 성전을 세우신 것은 신명기 말씀대로 국가의 중앙 성소로서의 기능이다. 광야에서 성소가 진의 중앙에 자리한 것같이 말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산당을 꾸미고 그곳에서 음행한다(16). 더구나 이방 종교를 받아들여 자녀를 재물로 드리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집트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분노케 한다.(26) 북쪽의 호세아왕도 앗수르의 침략에 이집트를 의지했다가 망하고 말았다. 이것 역시 음란이라고 지적한다. 그 후 예루살렘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우상까지 끌어들여 섬겼다. 이 모든 행위는 돈을 받고 음행하는 것보다 그들은 돈을 주고 음행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심판뿐이다.

 

  북쪽의 마지막 왕 호세아왕은 애굽만 바라보다가 망한다. 그리고 시드기야도 마지막까지 애굽만 바라보다가 망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을 심판한다. 언약 백성들을 혼란하게 한 죄다. 이는 죽은 우상이다. 힘이 없는 것을 의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시며 다시 언약을 세우는 이유는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이다(16:60절).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깨닫게 해서 다시 시작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다.(새 하늘과 새 땅)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조건적이 아닌 회개를 전재로 하는 용서와 회복이다.

 


 

(6)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17장)

 

  17장은 독수리와 두 나무 비유의 예언으로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행위를 묘사한다. 유다왕국은 요시야(주전639-609)가 므깃도 전투에서 죽으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를 데려가신 이유는 비참함을 피하게 해 준 것이다. 이후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를 끝으로 망하고 망한다. 이런 배경으로 15절,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 유다가 이집트의 왕에게 외교사절단을 보낸 시점에 선포된 예언이다.

 

  1-2절은 도입부로 17장 전체의 서론이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수수께끼(히다)와 비유(마샬)로 말하라 명하신다. 예언의 이중적구조이다. 수수께끼와 비유는 평행적으로 사용되었다. 비유의 이중적 구조는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비유로 말하지만 모두가 다 아는 것은 아닌 것이다. 독수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로 쓰여지지만 여기서는 힘세고 재빠르며 적대적인 정복자 바벨론에 대한 상징으로 쓰였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나무의 왕으로 일컫는다. 독수리가 레바논에서 높은 가지를 꺽어 교역의 땅(가나안)상인들의 도시에 둔 것은 느브갓네살이 유다를 침공해서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그곳에 포로로 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독수리는 그 땅의 씨앗을 가져다가 물 많은 종자의 땅에 심었더니 포도나무가 자라서 독수리의 보호아래 있게 된다. 이것은 여호야긴 대신 시드기야를 왕으로 삼아 유다를 다스리게 한 것이다. 여기서 유다의 두 왕은 백향목과 포도나무로 나오는데 이것은 시드기야가 여호야긴에서 스룹바벨로 이어지는 합법적인 왕조가 아닌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7-10절은 포도나무의 배반과 그 결과가 서술된다. 여기의 다른 독수리는 애굽의 왕을 가리킨다.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는 독수리 아래 머물면서 많은 열매를 맺어야했다. 즉 바벨론왕의 영향아래 있어야 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독수리를 배반한다. 즉 느브갓네살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애굽과 동맹을 맺는다. 이것은 당시를 기준으로 100년 전 이사야 때와 같고 따라서 에스겔도  책망한다. 하여 포도나무에 대한 심판은 당연하다.

 

  9-10절의 심판은 이중으로 진행된다. 독수리가 포도나무의 뿌리를 뽑아 마르게 하며 또 동풍이 그 나무를 마르게 한다. 유다의 멸망은 언약파기에 있음을 계속 반복 경고한다.

 

  19-21절에서 바벨론 왕과의 언약파기는 ‘내 언약’ ‘내 맹세’를 깨트린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한 언약이기에 깨트린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파기이며 멸망은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7) 실패의 역사와 회복(20장)

 

  15-19장은 비유였으나 20장에서는 실제적사실로 시작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패역과 배교로 인한 실패의 역사임을 묘사한다. 그들의 패역은 불순종으로 나타났으며 배교는 우상숭배를 뜻한다. 그러나 메시지는 포로시대와 회복에 두고 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실패가 반복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거룩한 백성이라 칭하시며(의인 삼아주심) 언약백성으로 삼아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인도되지 못하고 징계를 받게 된다. 40년간 광야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패역(마라)을 계속 반복 사용하심으로 그들의 반역이 고질적이고 지속적임을 강조한다.

 

  그들의 실패는 광야에서 뿐 아니라 약속의 땅에서도 여전히 지속되며 포로 징계 후에도 계속된다. 하여 하나님은 장로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을 약속하신다. 37절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징계는 있으나 언약은 영원하다는 것을 확인 하신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언약의 하나님은 끝까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실 것이다.

 


 

(8) 여호와 칼에 비유된 심판(21장)

 

  예루살렘 심판의 상징, 마광된 칼을 갈고 계시는 하나님: (그칼이 바벨론이였다. 19절 바벨론 왕이 두 길 사이에서 점을 친다. 암몬 랍바와 유다의 예루살렘 길 사이에서=이들의 점은 짐승을 잡아 활에 묻혀 통에 넣고 어디로 갈까 해서 활이 넘어지는 곳으로 간다. 하나님이 현장을 목격하게 한 것을 받아 쓰고 있다.) (21-24)

 


 

(9) 피의 도성 예루살렘(22장)

 

  도성과 그 거민들의 타락상을 적나라하게 규탄하고 있다. 백성들이 부모를 업신여기고, 나그네 고아, 과부를 학대하며, 성물과 안식일을 범하고, 산 위에서 제물을 먹으며, 부모와 동침, 이웃의 아내와 며느리, 딸을 범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피를 흘리며, 고리대금을 받고, 토색하며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 지도자들은 약탈하는 이리 같이 권세를 가지고 백성의 피를 흘리게 하며, 선지자는 사자가 식물을 움키듯, 허탄한 이상을 보고, 거짓 복술 행하며, 하나님께서 말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 사람의 영혼을 삼키며, 재물과 보물을 탈취하고, 과부를 많게 만든다. 제사장은 율법을 무시하며, 성물을 더럽히고, 거룩하고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분별하지 않고, 안식일을 돌아보지 않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더럽힘을 받으시게 한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는데 주민을 이방 사람들 속에 흩으며, 여러 나라로 흩뿌려서, 더러운 것을 소멸시키겠다고 언급 하신다. 또한 이스라엘 지도층의 죄악상으로 분노가 치솟아 격노의 불길로 그들을 멸절시키겠다고 한다.

 


 

(10)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죄(23장)

 

오홀라(북 이스라엘)는 앗수르를 의지하다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를 지켜 본 동생 오홀리바(유다)는 그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또 다시 앗수르와 바벨론을 의지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다.

 


 

(11) 씻어도 소용없는 솥 예루살렘(24장)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예고한 대로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한다. 주전588년 1월이다. 에스겔은 이 사건을 끓는 가마로 비유한다. 하나님께서 패역한 족속에게 이 비유를 전하라고 명령하신다.(3) 예루살렘을 가마로 비유하고 그 안에 사는 백성들을 양고기로 비유한다. 침략자들은 양고기를 요리해서 먹을 것이다.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거기서 빠져나올 사람은 아무도 없고 방법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 녹슨 가마가 첨부된다. 녹슨 가마는 녹을 없애지 않은 가마로서 패역한 백성들을 가리킨다. 바벨론 군대가 닥치는 대로 백성들을 살상 할 것이다. 하나님은 가마의 녹을 제거하려 계속 애쓰지만 녹은 없어지지 않는다. 결국 가마가 깨끗해야 하나님의 진노는 그친다.

 

  예루살렘 멸망을 선언한다. 이제 하나님은 극단의 조치를 행위 메시지로 취하시는데 에스겔의 아내를 죽이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에 애도도 하지 말 것을 명하신다. 이 예언은 아침에 선포되고 저녁에 아내가 죽는다. 네 눈의 기쁨인 아내를 빼앗을 것이나 곡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에스겔의 아내가 죽었지만 이 일로 인해 슬퍼하지도 못하고 눈물도 흘리지 못한다. 에스겔 아내의 죽음이 하나님의 마음의 표징이라고 하신다(24). 백성들은 에스겔의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묻는다. 에스겔의 아내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그러나 여전히 외면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에스겔의 아내는 예루살렘을 비유한다. 예루살렘이 멸망해도 애도하지 않는 지금 포로 된 백성들, 그들의 완악함, 하나님은 에스겔의 가정까지 파괴하심으로 선지자를 사용하신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에스겔의 메시지에 반신반의 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의 죽음과 에스겔의 행위 메시지를 보고서야 믿을 것이다(27). 이제 에스겔의 메시지는 더욱 강력하게 선포된다. 그러나 그의 내면의 고통은 알아야한다.

 


 

5) 열방에 대한 심판(25-28장)

 

  열방에 대한 심판 신탁이 지니는 의미는 첫째로,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로 인해서 심판을 받고 멸망하지만 실제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들이 여호와의 심판의 도구로 쓰이게 된다. 이 상황을 잘못 해석하고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해 조롱하고 저주까지 하는 열방도 결국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된다. 둘째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축복하고 그 본을 받는 자들은 축복을 받을 것이지만, 그들을 저주하거나 그들의 본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축복을 받지 못하고 저주를 받을 것이다(창 12:2-3; 22:18). 셋째로, 열방에 대한 심판은 간접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주는 효과가 있다. 열방에 대한 심판의 신탁 직전에 있는 23:25-27과 신탁 사이에 끼어 있는 28:24-26에 암시되어 있다.열방나라는 이스라엘 동편에 암몬, 모압, 에돔이 있고 서쪽에 블레셋, 북쪽에는 해안도시 두로, 시돈, 남쪽에는 강국 애굽이 있다.

 


 

⑴. 암몬을 향한 심판(25:1-7)   

 

  암몬은 사사 입다(삿 10:6-11:33) 이후 이스라엘과 자주 적대 관계에 있었다. 사울은 암몬 족속과 싸워 길르앗 야베스를 구했고(삼상 11:1~11), 다윗은 암몬을 정벌했다(대상 19:1-20:3). 암몬은 분열 왕국 시대에 때로 독립을 얻기도 하고, 여호사밧의 통치 때 모압 및 에돔과 연합해 유다를 공격했다(대하20:1-30),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암몬은 영토적으로 이득을 얻었고 (렘 49:1), 여호와김의 통치 때 느부갓네살 연합군의 일부가 되어 유다를 공격했다(왕하 24:1-2). 주전 593년에 암몬은 바빌론에 반역하는 동맹에 가입하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주전 588년에는 바빌론에 대항하기 위해 유다 및 두로와 연합했다. 느부갓네살 왕이 암몬이 아닌 유다를 공격하기로 결정 했을 때(21:18-27), 암몬은 당시 동맹국이던 유다를 돕기보다 유다의 멸망으로 인한 영토적 이익을 바랐다.

 

  암몬족속의 죄명은 유다가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 되며(3절) 유다 민족이 포로로 잡혀갈 때 너무나 기뻐하면서 유다 민족을 조롱하고 멸시하며 저주까지 했다. 그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암몬에게 ‘동방 사람’에 노략과 멸망을 당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동방사람’이란 동쪽에 사는 유목 민족(아마도 아랍민족)을 말한다. 그들은 광활한 지역에서 약탈을 일삼았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바빌론의 손아귀에서 운 좋게 벗어난 암몬 족속을 정복하게 할 것이며, 암몬의 자부심인 수도 랍바를 짐승들이 쉬는 처소로 삼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때 암몬 족속은 여호와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5, 7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⑵. 모압을 향한 심판(25:8-11)

 

  모압과 이스라엘의 적대감은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에 대항하려 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민 22-24장). 사사시대 이스라엘은 모압 왕 에글론의 폭압을 겪었다(삿 3:12-30). 룻 시대 이후 두 나라는 관계가 좋아졌지만, 사울시대에 다시 악화된다. 모압은 다윗에 의해 정벌되었지만(삼하 8:2), 그 후 여호사밧의 통치 기간 중에 반역하며 암몬 및 에돔과 연합해 유다를 침공하기도 했다(왕하 3:4-27; 대하 20:1-23). 아마 모압은 주전 593년에 다른 나라들과 연합해 바빌론에 반역한 것으로 보이지만(참고 렘 27:17) 그 증거는 확실치 않다.

 

  모압의 죄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경멸한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 능력의 하나님과 맺은 독특한 관계를 부정한 것이다. 특히 유다가 바빌론에 의해 멸망할 때, 모압은 유다에게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교만 때문에 벌을 받았다고 조롱한 듯하다. ‘세일’은 에돔 땅의 다른 이름이다. 모압과 같이 에돔도 하나님의 백성을 조롱하는 죄를 지었다. 벧여시못, 바알므온, 기랴다임은 모압의 주요 세 성읍이다. 모압이  받을 형벌은 암몬의 형벌과 같다. 즉 동방 사람에게 정복당해 다시는 기억되지 않는 것이다.

 


 

⑶. 에돔을 향한 심판(25:12-14)

 

  에돔과 이스라엘의 오랜 원한 관계는 그들의 쌍둥이 조장(에서와 야곱)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에돔은 자신의 영토로 지나지 못하게 했다(민 20:14-21). 사울은 에돔과 싸웠고(삼상 14:47), 다윗은 에돔을 복속시켰다(삼하 8:13-14), 그러나 에돔은 솔로몬 통치 후기에 대적하고(왕상 11:14-18) 봉신 국가로 남았지만, 여호람 시대(주전 845년)에 독립을 되찾았다. 그 후 에돔과 이스라엘은 서로 영토를 뺏고 빼앗기길 반복했다.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의해 멸망당할 때, 에돔은 유다의 멸망을 돕고(시 137:7; 오바댜서) 이득을 취했던 것 같다. “네가 옛날부터 한을 품고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 때 곧 죄악의 마지막 때에 칼의 위력에 그들을 넘겼도다”(35:5). 유다의 한난 중에 에돔 족속은 정복 군대의 편에 있었던 것 같다(옵 1:11). 그리고 유다를 조롱하고(옵1:12), 재물을 약탈하며(옵1:13), 어려움에 처한 이스라엘을 오히려 대적에게 붙였다(옵 1:14), 다시 말해 그들은 유다의 멸망을 복수의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12절). 테일러는 유다의 포로 이후에 에돔이 유다의 남방을 점령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에돔은 황폐하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의 손에 의해 되갚음을 당할 것이다(25:13-14절) “비록 에돔이 현대 아랍인의 조상인 나바티아인들에 의해 황폐하게 되었지만, 에돔의 잔류자들은 유다 마카비우스에게 종속되었다가 나중에 요한 힐카누스에 의해 강제적인 할례로 유대 종족으로 합병되어다.” 그래서 에돔 사람들은 나라 잃은 민족으로서 고유성도 잃게 되었다(참 암9:11-12).

 


 

⑷ 블레셋을 향한 심판(25:15-17)

 

  앞서 세 민족과 달리, 블레셋은 이스라엘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 그들은 ‘바다로부터 온 민족’으로 생각된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정복할 때부터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적이었다(삿 3:1-4). 그 후 블레셋은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를 형성해 왔고 서로 전쟁을 계속했다. 다윗이 마침내 블레셋을 복속시켰고 솔로몬의 통치 기간에도 이런 상태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다윗 왕국이 분열되고 나서 유다와 블레셋의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고 서로 침략과 약탈을 일삼았다.

 

  블레셋의 죄는 ‘옛날부터 미워하여 멸시하는 마음으로 원수를 갚아 진멸코자’한 것인데, 그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멸망시킬 것이다. 즉 ‘그렛 사람’과 해변의 남은 자들을 진멸하실 것이다. 그렛 사람은 구약 시대에 ‘갑돌인’으로 알려진 ‘그레데사람’으로 이해된다(참고 신 2:33; 렘47:4; 암9:7; 창 10:14). 하나님께서 ‘그렛 사람’(크레티임)을 ‘끊으실’(히크라티)것이다. 그때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17절). 마카비 시대 이후 블레셋은 한 민족으로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고 그들의 성읍 이름만 남아 있다.

 


 

⑸. 두로에 대한 심판( 26:3-21)

 

  두로에 대한 심판은 25장의 네 나라에 대한 신탁의 기조를 이어간다. 낙심한 언약 백성과 하나님은 독특한 인격적 관계인데, 여기에 교만한 마음과 탐욕을 품고 오만하게 끼어든 두로는 심판을 받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깊은 섭리, 즉 언약 백성에 대한(이방 바빌론을 통한) 심판 계획과 궁극적 위로를 강한 세력인 두로도 막지 못할 것이고 오히려 심판마저 면치 못하게 된다.

 

  두로의 죄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기뻐하며 무역을 통한 이익을 늘리려는 교만한 자랑이었다. “만민의 문이 깨어져서 내게로 돌아 왔도다 그가 황무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26:2절). 두로는 해상 무역의 거점이었고 예루살렘은 육상 무역의 중심지였는데. 예루살렘이 멸망하면 자신의 무역으로 인한 이익이 늘어나리라는 계산에 기초한 자랑이었다. 이 심판은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통해 이뤄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백성들이 무참히 살육당하고, 성을 공격하기 위한 다양한 장비들이 동원되어 성을 함락시키며, 결국 성읍안의 주민들과 군인들이 살육을 당한다.

 


 

⑹ 두로 왕에 대한 심판(28:7-10)

 

  두로 왕은 자신이 어느 누구보다 지혜로워서 재물과 영예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그로 인해 자신을 신격화하는데 까지 교만해졌다. “그런즉”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두로의 왕을 쳐서 파멸시킬 것이다. 그때 두로의 통치자는 더 이상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된다. 두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할례를 행했기 때문에, 두로 왕이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처럼 죽는다는 것은 치욕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⑺ 시돈을 향한 심판 예언(28:20-23)

 

  시돈에 대한 심판의 이유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 에스겔은 시돈이 두로와 밀접하게 동맹을 맺고 있어서 비슷한 죄를 예시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시돈에 대해 염병과 칼로 심판하실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이 나타날 것이며 시돈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28:22하 , 23하).

 


 

6) 상한 팔과 이미 꺾인 팔(29-32장)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행위는 심판의 도구로 세워진 바빌론 느부갓네살 왕의 최대 강적인 애굽에 임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수호신이 아니라 열방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God of israel)이시며 열방의 하나님(God of nations))이심이시다. 따라서 애굽도 심판하신다.

 

  에스겔서는 일곱 개의 애굽 언약이 주전 587-571년 사이에 기록되었으며 두로의 함락(주전 571년)과 관련된 제2언약을 제외하고 모든 언약들은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로부터 포위당하고(주전 588년) 함락된(주전 586년 7월) 주전 587년-585년 사이에 예고 되었다. 애굽은 신왕국 시대(주전 1580-708년)이후 기울기 시작한 세팃 왕조(주전 663-525년)의 두 번째 왕 느고(주전 609-594년)가 므깃도 전쟁에서 유다의 요시아 왕을 죽이고 잠시 팔레스타인을 점령했지만, 주전 605년 유프라테스 강가 갈그미스 전쟁에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패해 애굽으로 후퇴한다(렘 46:2; 대하 35:20) 그 후 느고 왕의 손자 호프라(주전 588-560년)가 잠시 시드기야를 도와 유다에 영향을 미쳤지만(렘 37:5-7), 주전 566년에 그의 후계자 아마시스에게 살해당한다. 결국 애굽은 과거의 전성기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고 주변 세력으로 존속하다가 알렉산더에 의해 종말을 맞이한다.

 


 

제1예언(29:1-16)

 

  바로왕이 저주를 받을 것이고 과거의 전성기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과 애굽은 지정학적, 신앙적 여러 요소들로 인해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아브라함은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에 애굽으로 내려가(창 12:10), 그곳에서 광야 네게브를 거쳐(창 13:1), 가나안 헤브론으로 재 진입했다(창 13:18). 나중에 이스라엘도 족장 아브라함의 길과 유사한 지리적 병행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가 잠시 번영을 누렸지만 끝내 노예가 되어 광야를 거쳐 가나안을 정복하게 되었다. 그런 여정에서 애굽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누이로 속이면서까지 명예와 안전에 위협을 받았던 곳이며, 이스라엘이 종노릇하던 곳으로써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애굽은 죄악 된 곳이고 심판의 대상이며(사 19-20장), 영적으로 타락한 소돔과 비교된다(계 11:8).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눈에 가증한 우상 숭배를 배웠다(20:7).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통한 그들의 신음은 깊은 고통을 대변한다(출3:7; 6:5).

 

  그 반면에 애굽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복된 곳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애굽 땅에서 기근을 면하고 번식하며 창성해 심히 강대해졌다(출 1:7). 애굽은 나일강의 규칙적인 수량과 안정된 자연 환경으로 인해 먹을 것이 비교적 풍부했던 곳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과거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출 16:3)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애굽은 한 때 고대 근동의 문명을 지배하던 나라였고,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의 번영 과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대제국이었다. 또한 출애굽 과정을 통해 야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바로 왕과 애굽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과거의 전성기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심판을 예고 받는다. 애굽에 사는 사람들과 짐승들은 칼로 끊어질 것이고(29:8절), 믹돌에서 수에네까지(29:10절)1) 애굽의 모든 영토가 40년 동안 황폐해지고 전성기를 회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29:8-16). 이는 바빌론 제국이 바사에 의해 정복당한 때로 고레스에 의해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약 40여 년의 세월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심판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바로의 교만함 때문이다(29:3-5). 바로는 애굽의 번영을 상징하는 나일강을 스스로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29:3, 9)라고 말한다. 그러고 바로는 나일강의 생태계를 지배하는 ‘큰 악어’로 표시된다. 그러나 그는 그 강들 중에서 나오게 될 것이며, 애굽 백성들을 반영하는 강의 풍요로운 어류들은 갈고리에 꿰어 마른 땅에 던져져 들짐승과 공중 새들의 식물로 주어질 것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통해 경험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나일강의 이점을 의지하며 교만했던 바로와 그 백성들은 그곳에서 추방될 것이다.

 


 

  둘째, 바로와 애굽은 이스라엘이 기댈 때마다 나일강에 쉽게 부러지는 갈대 지팡이와 같이 이기적 행위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애굽과 여러번 동맹을 맺었으나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애굽에게 배신을 당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과 시드기야 시대의 유다는 갈대 같은 애굽과의 동맹 때문에 온 백성이 치명적인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자신의 이익만을 채우기 위한 약속과 갈대 같은 강대국들과의 동맹이 어떤 심판을 초래하는 지를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제2예언(29:17~21)

 

바빌론 느부갓네살 왕이 애굽을 정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을 통해 애굽뿐 아니라 두로도 심판하셨다(26:1-28:19). 느부갓네살 왕과 바빌론 군대는 섬이었던 두로를 육지에서 공격하기 위해 13년 동안 제방 공사를 벌이면서 흙과 돌들을 나르느라고 머리털과 어깨가 벗겨지는 큰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대에 부응하는 전리품들을 얻지 못했다(18절).

 

  두로는 그 시대에 국제적 주요 금융국가로써 그를 정복하면 큰 보수가 있을 것으로 여겨졌지만 보화의 대부분은 멀리 배로 운송된 상태였다. 여기서 에스겔서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섭리에 따라 수행한 바빌론 왕과 그의 군대에게 애굽의 전리품으로 보상하실 것임을 밝힌다(29:19-20).

 

  하나님께서 그분의 언약 백성뿐 아니라 바빌론도 그분의 선한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다. 나중에 바빌론이 심판을 받을 때 바사 왕 고레스가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은 것(사 45:1-8). 에스겔서에서 느부갓네살 왕은 애굽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등장한다.

 

  이런 하나님의 사역 선택은 뿔로 상징된 언약 백성의 힘을 키워 주고 에스겔의 말씀 사역을 회복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제적으로 작용하는 도구들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오히려 그 도구들을 사용하고 규제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심판의 궁극적인 기준은 도구(바빌론이나 바사의 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공의와 섭리에 있는 것이다.

 


 

제3예언(30:1-19)

 

  언약 백성(유대인들)을 포함해 애굽과 동맹한 모든 종족들이 심판받을 것이다. 첫 번째는 애굽이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그 칼에 의해 전멸된다. 나일강을 따라 펼쳐진 옥토를 박탈당할 것이고, 애굽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멤피스의 우상들이 파괴될 것이며, 신으로 여겨졌던 애굽의 왕자들이 끊어질 것이고, 애굽의 요새로 유명한 신과 한때 북쪽 수도였던 바드로스가 함락될 것이며, 애굽의 최대 신들인 태양 신과 고양이의 모습을 한 여신의 신전이 있던 아웬과 비메셋에서 풍요를 누리던 젊은이들이 전멸할 것을 예고한다. 특히 권력 구조뿐 아니라 종교 제도까지 모든 것들이 전멸할 것을 예고한다. 특히 6:18절은 종말론적 심판을 묘사함으로써2) 그 응징성의 심각성을 부각시킨다.

 

  두 번째로는 애굽을 붙들어 주던 모든 자들에 대한 심판이다. 본문에는 여섯 그룹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 그룹들은 아마 애굽 원정에 용병을 제공했던 동맹국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애굽과 함께 느부갓네살 왕의 칼에 엎드려질 것이다. 창세기 10:6 계보에 의하면, 구스와 붓(38:5; 렘 46:9)은 애굽 및 가나안과 함께 함의 아들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한때 애굽의 지배를 받기도 하고 독립적인 왕국으로 존속하기도 했다. 헤로도토스(Herodotus)에 의하면, 룻(27:10)과 굽(단 11:43)도 애굽에 용병을 지원했다. “모든 섞인 백성”은 아마 아랍인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출 12:38; 렘 50:37). 그러나 이 본문에서 이해하기 힘든 그룹은 ‘동맹한 땅의 백성들이다’이다. 히브리어 ‘브네에렛츠 하브리트’ ‘언약 땅의 백성들’로써, 이는 애굽에 거주 하던 유대인들보다 애굽 왕과 동맹을 맺은 유대 용병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공통적으로 이 그룹들은 애굽이 강성해지고 교만해지는데 동참했다는 점이다. 이로서 에스겔서는 하나님의 심판은 악을 행한 한 개인뿐 아니라 그와 연관된 모든 것들 그리고 그와 함께한 모든 자들을 포함한다는 경보를 울리고 있다.

 


 

제4예언(20:20-26)

 

  바로왕의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이 모두 꺾일 것이다. 본문은 애굽 왕의 팔이 칼을 잡지 못할 정도로 점진적으로 꺾이는(21절) 반면에, 바빌론 왕의 팔은 견고하게 되어 칼을 잡고 애굽을 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한다(30:24-25). 바로는 이미 꺾인 팔을 싸매지도, 약을 바르지도 못하는 상태이다. 아마 이는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는 바빌론 군대를 몰아내기 위한 원정(주전 588년)에서 실패해 타격을 입은 그의 약화된 군사력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3) 이런 바로의 파멸은 그의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이 모두 꺾이면서 완전히 와해된다.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은 바로의 호프라 왕의 말년 생활을 잘 반영한다. 호프라 왕(주전 588-560년)은 통치 초기에 유능한 행정력과 군사력으로 구브로와 시돈을 점령하고 페니키아와 팔레스타인을 자신의 영향권 안에 두기도 했다.

 

  그러나 리비아를 돕기 위한 원정에서 헬라인들에게 크게 패배함으로써 내란을 겪게 된다. 이를 잔인하게 진압하기 위해 그의 부하 마라시스를 파견하지만, 오히려 애굽 병사들은 아마시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반격을 가해 호프라는 부분적으로 영토를 상실하고 상부 애굽으로 밀려나 나머지 애굽 지역의 통치권을 아마시스에게 빼앗긴다. 이런 중앙 집권력과 군사력의 약화는 호프라의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을 잘 나타낸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왕은 이 틈을 타서 마마시스를 대리인으로 삼고 애굽의 전리품을 챙겨 귀국하게 된다. 마침내 애굽은 내분으로 인해 열국 중에 흩어지고 열방 중에 헤쳐졌으며, 바빌론 왕 앞에서 고통 하기를 상한 자가 고통 하듯이 하게 된다. 이는 애굽에서 도움을 얻고자 했던 유다의 기대를 억누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열방이 증언케 한다. 바로의 호프라 왕은 팔레스타인과 리비아 원정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교만을 떨쳐버리지 않는다.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민중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끝내 반란으로 나타난 그들의 목소리를 잔인하게 짓밟았다. 아직도 그의 한 팔이 성했을 때 그가 회개했더라면 심판의 진노를 면했을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그의 팔은 점진적으로 꺾이기 시작하고 남은 성한 팔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그가 의지하던 전략과 군사력은 지극히 미약한 것에 불과했다. 또한 유다는 이미 꺾인 팔을 가진 애굽을 의지하며 바빌론의 점령을 모면하려 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할 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다.

 

제5예언(31:1-18)

 

  예표로써 백향목과 같던 앗수르의 멸망은 애굽을 누구와 비교할 것인가? 그것은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던 옛 앗수르 제국이다. 이는 영광스러웠던 전성기에도 불구하고 이미 파멸된 앗수르 제국이 애굽의 과거와 미래를 비춰 주기 때문이다. 또한 느부갓네살 왕은 앗수르 제국을 진멸시킨 자로서(주전 609년) 20년 후에 애굽마저 정복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과거 앗수르는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았다. 대체로 메마르고 사막화된 고대 근동에서 레바논은 헤브론 산의 눈이 녹아 흘러내리면서 그 영양이 풍부하고 깨끗한 물로 인해 푸른 숲을 이뤘으며 각종 조류와 동물의 생태계를 이뤘다. 특히 강을 따라 25m나 높이 솟아 있던 백향목들은 레바논의 아름다움과 부를 창출해 주었다. “네 큰 위엄을 뉘게 비하랴”,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써 옛 앗수르 왕이 언급되며 그는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삼림의 그늘 같으며 키가 높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과 같았다. 그런 백향목의 그늘 아래 모든 큰 나라가 거하였고, 그 뿌리가 큰 물가에 있으며 그 나무가 크고 아름다우며 가지가 길어 “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우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아무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이 못하였도다”.

 

  여기서 ‘하나님의 동산’이란 인간적인 위대함이 모두 모인 곳이며 이는 하나님께 기원을 둔 것을 뜻한다. 즉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의 어떤 위대한 사람도 앗수르 왕의 권세와 위엄을 능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던 앗수르 왕이 파멸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교만한 마음이 구름에 닿았기 때문이다. 이는 애굽 왕이 교만했던 것과 유사하다. 본문 후반부는 결국 열국의 능한 자와 열국의 강포한 다른 민족으로 묘사된 바빌론에 의해 그 백향목이 찍힐 것을 예고한다. 그러면 생태계의 풍요로움과 그늘 아래 거했던 모든 것들이 떠나가며, 앗수르의 팔이 되었던 자들과 함께 음부에 내려가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들도 유사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앗수르는 영토의 크기와 정치적 세력에서 애굽을 능가했던 대제국이었다. 레바논의 물과 숲과 동물로 상징되던 풍부한 자원과 고대사에서 가장 잔인했던 것으로 알려진 강한 군사력과 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지 못할 정도로 이웃들의 부러움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꺾이지 않는 교만과 만연한 악행 그리고 동맹 관계의 상실은 끝내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고 말았다. 불행한 점은 이미 역사 속에서 그것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한 애굽의 파멸이었다.

 


 

제6예언(32:1-16)

 

  바로에 대한 애가 “이는 슬피 부를 노래이니 여러 나라 여자들이 이것을 슬피 부름이여 애굽과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이것을 슬피 부르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6절). 바로는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젊은 사자와 강을 난폭하게 더럽히는 큰 악어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바로의 종말은 하나님의 징벌로 완전히 끝이 난다. 그렇게 강대했던 애굽의 파멸을 보고 열방은 두려워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왕이라는 한 개인의 슬픔이 아니라 애굽 전체를 비극으로 몰고 간다. 그러므로 열국 여자들은 애굽과 모든 무리를 위해 애가를 부를 것이다

 


 

제7예언(32:17-32)

 

    본문은 강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심판 아래 곧 파멸할 애굽과 모든 나라들의 무덤 옆에서 장송곡을 부르는 것 같은 에스겔의 애가를 기록하고 있다. 그 무덤 깊은 곳에는 생존하던 세상에서 사람들을 두렵게 했던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던 앗수르가 있고, 군사력을 자랑했던 엘람이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며, 메섹과 두발과 모든 무리들이 세상을 두렵게 했던 병기를 가지고 음부에 내려가 자신의 칼을 베개 삼고, 강성했던 에돔과 시돈 사람들도 할례 받지 못하고 칼에 살육당한 자들과 함께 그 구덩이에 내려가 수욕을 당하고 있다.

 


 

  애굽의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가 역사 속에서 궁극적으로 전개되며 각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어떻게 이뤄 가시는지 우리 모두에게 큰 교훈을 준다. 도덕성을 배제한 번영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교만은 한 개인을 넘어 국가적으로 비참하고 치명적인 파멸을 초래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우리는 심판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항상 말씀을 통해 경고와 회개의 기회를 미리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강. 에스겔서의 메시아 예언

 


 

1. 하나님께서 행하신 여덟 가지 회복(34-48장)

 


 

여기서는 메시아시대와 메시아를 통한 회복을 다루고 있는데 여호와의 (목자 역할, 땅, 영광, 백성, 언약, 주권, 백성 가운데 임재, 땅에서 여호와의 임재)회복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서도 이방인인 에돔에 대한 심판과 마곡 땅에 있는 곡에 대한 심판이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런 심판에 대조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복이며, 하나님은 마른 뼈와 같은 백성들이 회복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특히 성령을 통한 회복은 회복의 핵심이다.신약은 메시아의 단독사역이 아닌 성령과 함께하시는 사역으로 에스겔은 성령과 메시아의 사역을 함께 예언한다.

 

 

 

1). 여호와의 목자 역할 회복(34장)

 

   34장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목자들로(1-16절), 백성들을 그 양으로 (17-24절) 비유해서 메시지를 주고 있다(25-31절). 목자 비유의 34장은 내용적으로 이스라엘의 목자들에 대한 심판 선포(1-10절), 여호와께서 목자로서 양들을 담당하시겠다는 약속(11-16절), 다윗을 목자로 세우시겠다는 약속(17-24절), 화평의 언약(25-31절)을 통한 회복을 말씀하신다.

 

 

 

(1) 목자들에 대한 심판 선포(1-10절)

 

  타락한 목자들의 행동에 대해서 심판한다. 백성들의 필요로 채워주지 않았을뿐  아니라 자신들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백성들을 악용했다. 또한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돌아보지도 않았고(4절), 영적 지도력과 도덕성도 부족했다(5-6절). 여기서 ‘목자’(로에)라는 단어는 ‘라아’(양을 치다)라는 동사에 명사형이다. 여호와를 ‘목자’로 은유하는 것은 고대 근동의 문헌뿐 아니라 성경에도 자주 나타난다(사 44:28; 렘 2:8; 10:21; 23:1-6; 25:34-38; 미 5:4-5; 슥 11:4-17).

 

  이런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화가 있음을 밝힌다. 양들을 먹여야 하는데, 오히려 이들이 양을 먹은 것이다(2절). 자신들을 위해서만 위해서 사역한 것이다. 4절에서는 거짓 목자들의 한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연약한’ 자를( 나헬레트) ‘강하게’(하자크) 아니하며 ‘병든 자를’(하롤라) ‘고치지’(라파) 아니하며 ‘상한 자를’(니세베레트) ‘싸매어’(하바쉬)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니다하트) ‘돌아오게’(슈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오베데트) ‘찾지’(바카쉬)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내 양떼를 즉, 내 백성들을 그들의 손에서 찾아 오시겠다는 것이다.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도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하리라”(10절) 

 


 

(2). 여호와는 양들의 참 목자(11-16절)

 

  하나님께서 목자 없는 양들에게 친히 목자가 되셔서 ‘내 양’을 찾고 찾으시는 분으로서, 양들에 대해 관심과 사랑을 갖고 그들을 구원하며 그들을 돌아보고 먹이신다(14-15절). 목자는 양떼를 ‘찾고’(바카르), 그들을 ‘건져 내며’(나찰), 만민 중에 ‘끌어내고’(호쩨), 열방 중에서 ‘모으며’( 카바츠),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고’(헤비), 그들을 ‘먹이며’( 라아), 좋은 꼴로 ‘먹이고’, 그들은 살진 꼴을 먹으며, 그들을 높은 산 위에 ‘두실 것이며’(하야), 그들은 좋은 우리에 ‘누울 것이다’(라바츠). 즉 구원, 인도와 보호, 먹이는 사역을 제대로 하는 참 목자의 사역을 감당하신다.

 


 

(3). 다윗을 목자로 세우시는 약속(17-24절)

 

  하나님께서는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 살찐 양과 파리한 양 사이를 심판하는 재판장이시다. 또 양 떼를 구원하는 분으로서 ‘한 목자’(로에 에하드)를 세워 양들을 먹이게 하실 것이다. 원어상 ‘하나’ 라는 뜻 외에 ‘유일한’이란 뜻도 함축한다. 이 뜻을 취할 경우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세우실 새로운 목자의 유일성을 강조하며 동시에 이전에 분열했던 왕국(유다, 이스라엘)의 통합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Delitzsch, Schroder). 그가 바로 ‘내 종 다윗’이고 그는 양들에게 참 목자가 되며,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백성들을 먹이도록 하신다.

 

(4). 화평의 언약(25-31절)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이는 새로운 이스라엘에 주어질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과 평안의 약속이다(사 54:10;55:3;행 3:25;롬 14:17;히 8:10).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과 ‘화평의 언약’(베리트 샬롬)을 맺으신다. 이 언약은 악한 짐승을 ‘그치게’(샤바트) 하고 그들로 하여금 안전히 거하게 하며, 잠을 자게 해주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나탄, “내리며”) ‘비를 내려 주신다’(야라드, 26절), 즉 ‘화평의 언약’은 말 그대로 ‘샬롬’임을 말해 주듯이 안녕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삶과 목자의 보호하심(25절), 복 주심(26절)이다. 또 이런 복은 열매와 소산을 맺는 풍성한 삶을 허락하고, 땅에서는 안전을 약속하신다. 이 복은 영적, 물질적 안정도 허락하신다(27절).

 


 

2).땅의 회복(35:1-36:15절)

 


 

(1). 세일산에 대한 심판(35장)

 

  하나님께서 세일 산에 대한 심판의 당위성을 설명 하신다. 그들이 심판을 받는 첫 번째 이유는 ‘옛날부터 가진 미움’(에이바) 때문이다. ‘에이바’는 ‘반감, 증오, 미움’이라는 뜻이다. 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이것은 창세기의 기록대로 리브가의 뱃속에서부터(창 25:22-23) 시작해 에서와 야곱의 갈등은 더욱 발전했다. 이것은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칠 때, 에서의 후손들이 지켜보면서 유다가 심판받음을 좋아했던 것을 의미한다(옵 1:1-14). 이런 잘못으로 인해 세일에게 피가 따르게 되며(6절), 황무지와 황폐가 있고(7절), 살육을 당하며(8절), 패망해 없어질 것이다(9절). 에돔이 즐겨한 피 흘리는 행위에 대한 심판적 결과가 언급 되는데, 이는 히브리인들의 동해 보복 사상에서 유추된 구절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의 피를 흘리게 한 자는 반드시 자신의 피를 흘리게 되는 심판적 형벌을 당하게 됨을 보여준다(창 9:6;출 21:23-25).

 

에서가 멸망하는 두 번째 이유(10-12상절)는 유다와 이스라엘이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교만 때문이었다(10절).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조롱한 행동이기도 하며 욕( 네아차)은 원어상 ‘경멸하다’, ‘신성 모독하다’란 뜻을 가지는 바, 에돔이 이스라엘을 멸시하고 그 멸망을 조소한 모든 행위들이 곧 하나님을 멸시하고 대적한 종교적 차원의 극악한 범죄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나 10절에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셨다’,(야웨 샴 하야). 이런 조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미움이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11절). 12-13절에는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표현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의 말과 생각을 들으시며 그 마음의 교만과 오만과 조롱을 아신다는 뜻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에서를 황무케 하실 것이다. 따라서 전반부의 전체 메시지는 에돔을 황폐시키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고 있다.

 


 

(2). 원수에 대한 심판 예언(36:1-15)

 

   하나님께서 대적으로 기업이 되게 하시고(3절), 이제 백성들에게 설명하신다(4절). 하나님께서 친히 백성들의 대적들을 대항하시고(5절), 백성들의 수욕 당함을 아시며(6절), 결국 이방인들로 하여금 수욕을 당케 하신다(7절). 8-15절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땅에 대해 응답하시는 내용이다. 땅은 다시 열매를 맺게 되고(8-9절). 모든 이스라엘은 땅으로 돌아와 번성하며(10-11절) 영원히 거하게 되고(12-14절), 다시는 욕을 당치 않게 될 것이다(15절).

 

  하나님께서는 “온 땅이 즐거워할 때에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되”(14절) 라고 하시지만 하나님께서 땅을 회복케 하시는데 그 땅과 함께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거하게 하시며, 번성케 하시고, ‘기업’이 되게 하신다. 즉, 산과 땅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업’이 되게 하심을 강조하신다.

 

 

 

3). 여호와의 영광의 회복(36:16-38)

 

  36:16-38은 이스라엘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크게 세 단락으로 회복의 도래(16-23절), 회복의 일곱 가지 요소(24-32절), 회복의 결과(33-38절)로 나눌 수 있다. 이 회복은 하나님의 이름을 회복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32절), 이런 면에서 ‘여호와의 명예’라는 주제로 전체를 이해할 수도 있다. 회복의 근거는 ‘거룩한 이름’(֑쉠 코드쉬) 때문이다. “거룩한 이름”은 20, 21, 22절에 각각 한 번씩 나타난다. 하나님의 회복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고, 포로로 잡혀간 열국에서 더럽혀졌다. 백성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이 땅을 더럽혔고,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더럽혔으므로 하나님께서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셨다. 즉 백성들은 땅을 더럽힘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큰 이름’( 쉐미 하가돌, 23절)이며, 열국 중에서 거룩해질 것이다(23절).

 

  하나님께서는 명예 회복을 위해 백성들을 회복시키신다.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 포로 귀환(24절), 용서와 속죄(25절),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심(26절), 성령님을 통해 말씀을 지키도록 도우심과 연관된다. 또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신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되고(28절), 주신 복으로 풍성함을 누리게 되며(29-30절), 죄를 싫어하게 된다(31절).

 

  이렇게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백성들을 회복시킨 결과로 성읍들은 다시 건축되고 백성들은 다시 거하게 되며(33절), 황무한 땅도 개간하게 된다. 민족들은 땅의 거민으로 거하고 에덴동산같이 되어(35절), 여호와께서 모든 것들을 회복케 하셨음을 알게 된다(36절). 이렇게 하나님의 명예는 이방인들의 생각이 바뀌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통해 회복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도 회복된다. 37절에서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는 말씀은 ‘내가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으로 그들을 위해 행하도록 구하여지게 할 것이라’는 뜻이다. 즉 포로에서 귀환하는 사람들의 수가 양 떼같이 많아지며, 수많은 사람들이 여호와를 알게 되어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케 한다는 약속이다(37-38절). 따라서 이스라엘의 자발적 헌신을 촉구하는 말로 비록 이스라엘의 회복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역사로 성취될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그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의 순종과 사역의 동참을 요구 하신다.

 

 

 

4). 여호와의 백성의 회복(37:1-14)

 

  유다 백성들의 절망적인 상태는 바빌론의 멸망(주전 586년)과 포로(주전 605년, 597년) 사건을 통해 생겨난 것이다. 국가적 멸망은 그들이 유지해 온 모든 확신과 신학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따라서 그들의 상황은 절망적이었고, 마치 마른 뼈들이 널려 있는 골짜기의 환상과도 같았다. 하나님께서 그런 절망 속에서 에스겔에게 ‘여호와의 손’이 임하게 하시고, 환상 가운데 그들의 실상이 마치 골짜기의 뼈와 같음을 보게 하신다. 그 골짜기에는 뼈들이 심히 많고 그 뼈는 매우 말라 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3절)라고 물으신다. 인간적인 안목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사건임을 반어법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에스겔의 대답은 “주께서 아시나이다”이다. 이것은 확신이 없이 인간적인 안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가능한 것이며 또한 오직 하나님만이 그 일을 가능케 하실 유일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묵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Delitzsch, Schroder). 즉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모든 백성들이 뼈들과 같이 많고 말라서 소망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에서도 에스겔에게 소망을 주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 소망이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부활을 경험케 하시고, 두 나라는 나뉘어 있지만 미래에 한 나라로 회복된다는 소망을 보여 주신다.

 

  먼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 뼈들에게 말씀을 예언하기를 명령하신다(4절). 이 예언을 통해 ‘영’이 들어가 그들을 살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명령에 에스겔은 순종한다.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에스겔이 예언 할 때 뼈들은 서로 맞아 들어간다(7절). 그러나 외형적 모습을 통해 회복은 되었지만. 내적 회복은 되지 않아 그 속에 ‘영’이 없다(9절). 즉 말씀을 대언하는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4-8절).

 

  하나님의 두 번째 명령은 사방에 있는 ‘생기’의 불어옴에 대한 간구이다. 이 예언을 통해 뼈들은 “큰 군대”(10절)가 되었다. 그리고 형태만 있는 게 아니라 실제 살아 생명력을 갖게 된다. 여기서 ‘일어나서 서는데’(야암 두 알 라글레헴)는 문자적으로 ‘그들의 발로 일어서서’란 뜻이다. 이는 곧 그들에게 주어진 생명이 그들 스스로 전인격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온전한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11-14절은 부활 환상에 대한 해석이다. 이 뼈들(아차모트)은 바로 이스라엘 족속이며, 그들은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의 뼈들은 말랐고, 우리의 소망은 없어졌으며, 우리는 모두 멸절되었다(11절).  문자적 의미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끊어버렸다’이다. ‘끊어버렸다’란 말이 여기서는 하나님의 관계 단절을 의미한다는 점에서(시 31:23; 86:6; 사 53:8) 이는 그러한 하나님의 영역에서 축출당한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자책과 회한을 반영한 말로 볼 수 있다. 자신들의 모습에 대한 인식과 절망 그리고 자포자기이다. 하나님께서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회복을 약속하시는데, 이 회복은 ‘무덤’( 케베르)을 열고 나오게 하시는 것이다. 이 회복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갖게 되며(13절), ‘내 신’(루아흐)즉 ‘성령님’을 통해 회복케 하신다. 말씀하고 행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14절하).

 

5). 여호와의 언약의 회복(37:15-28)

 

   막대기에 유다와 이스라엘의 자손 그리고 요셉 곧 에브라임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쓰고(16절), 이 둘을 하나가 되라고 명하신다(17절). 이것은 북 왕국 요셉과 남왕국 유다가 한 막대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19절). 그리고 한 왕(혹은 한 목자)을 통해 나라가 통치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18-22절). 이 나라는 다시 나뉘지 않으며(22절), 우상을 섬기지도 않게 된다(23하절).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이 단락에서 ‘한’( 에하드)이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다. 22-24절에서 ‘한’이라는 단어가 세 번 나타나는데, ‘한 나라’(고이 에하드), ‘한 임금’(멜렉 에하드), ‘한 목자’(로에 에하드, 24절)이다.

 

  전체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은 ①두 막대기가 외적 연합을 갖게 되며(15-17절), ②두 막대기가 연합하고(18-19절), ③하나님께서 정치적·영적 연합을 통해 두 왕국을 하나 되게 하시며(20-25절), ④화평의 영원한 언약 관계를 통해 한 나라가 되게 하신다(26-28절).4)

 

  우리는 두 막대기의 회복(15-28절)에 대한 말씀에서 열세 가지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할 수 있다. ①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열국에서 취하여 모으실 것이고(21절), ② 그분의 백성을 고토로 돌아가게 하시며, ③ 한 나라를 이루게 하시고(22절), ④ 한 왕을 세우실 것이며(22하, 24상절), ⑤ 회복된 나라는 결코 나눠지지 않을 것이고(22절), ⑥ 그 분의 백성들은 우상을 다시는 섬기지 않을 것이며(23절), ⑦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구원하고 정결케 하실 것이고, 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실 것이며(24절), ⑨ 백성들을 하나님의 땅에 영원히 두실 것이고(25절), ⑩ 새로운 화평의 언약을 세우시며(26상절; 34:25; 렘 31:31-34)), ⑪ 그 땅에서 견고하고 번성케 하실 것이고(26절), ⑫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영원히 거하실 것이며(27절), ⑬ 이스라엘로 열방의 증거가 되게 하실 것이다(28절).5)

 

  24-28절에서 말씀하시는 회복은 첫째로, 하나님과 백성들의 관계성 회복이다. 즉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땅을 회복케 하셔서 성소를 그들의 땅에 두신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고 약속하신다. “네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있으리니”(28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성소인 ‘내 성소’(미크다쉬)를 그들 중에 영원히 세우신다는 뜻이다(27절).

 


 

6). 여호와의 주권의 회복(38-39장)

 

  38-39장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대적인 마곡의 곡 및 그 수하 집단과 벌일 최후의 전쟁을 묘사하고 그 결과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선포한다. 따라서 에스겔은 전쟁의 위협이나 외부 및 경쟁이나 내부의 나쁜 지도력이 모두 제거되고 생존 환경이 잘 정리된 상태에서 새로운 성전 건설을 위한 청사진을 40-48장을 통해 선포한다. 이런 에스겔의 회복 프로그램은 그 과정의 주체가 이스라엘 공동체나 그들의 지도자가 아니라,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곡은 에스겔 38-39장과 요한계시록 20:8절에만 등장한다. 그리고 창세기 10:2과 역대상 1:5에서 마곡의 곡은 메섹 및 두발과 함께 야벳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에스겔에서는 마곡의 곡을 여호와 하나님이 멸망시킬 최후의 전쟁 상대자로 지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체가 더욱 궁금하다.

 

  본 구절에서 그 마곡 땅에서 온 ‘곡’이 뒤이은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에 의해 수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의 ‘마곡 땅’은 ‘로스와 메섹과 두발’을 포괄하는 명칭이다(Schroder). ‘곡’(고그)은 역대상 5:4에서 르우벤 지파의 후손으로 등장하기는 하나 개인적 명칭이기보다는 마곡이란 말에 대한 병행의 의도로 사용된 정치적 관료의 명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Schroder, Delitzsch). 곧 학자들은 ‘곡’의 어원을 ‘높다’, ‘장엄하다’, ‘오르다’란 뜻의 ‘게에’로 유추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 ‘곡’은 정치적 최고 권력자에 대한 명칭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곡’은 본장의 묵시 문학적 형태상 그 이름의 역사성보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의 수장을 상징한다는 점, 곧 종말론적으로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대변하는 사탄을 지칭한다는 점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실제로 ‘곡과 마곡’은 계 20:8에서 하나님을 연합하여 대적하는 자들로 나타난다.

 

  38-39장을 읽는 대상은 포로로 잡혀가 회복을 염원하는 유다의 지도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겔의 예언이 추구하는 목적은 마치 이사야 40-55장과 같다. 이사야는 고국으로 귀환하기를 두려워하는 바빌론의 유다 포로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면서 회복에 대한 희망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원수들을 불러내는 여호와 하나님(38:1-6절)

 

  에스겔은 여호와로부터 “마곡 땅에 있는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곧 곡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여”(2절)라는 말씀을 듣는다. 그 내용은 “너를 돌이켜 갈고리로 네 아가리를 꿰고 너와 말과 기마병 곧 네 온 군대를 끌어내되 완전한 갑옷을 입고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가지며 칼을 잡은 큰 무리와 그들과 함께 한 방패와 투구를 갖춘 바사와 구스와 붓과 고멜과 그 모든 떼와 북쪽 끝의 도갈마 족속과 그 모든 떼 곧 많은 백성의 무리를 너와 함께 끌어내리라”(4-6절)는 것이다.

 

  곡의 동맹군은 다섯 나라 즉 바사, 구스, 붓, 고멜, 도갈마를 포함하여 메섹, 두발의 일곱 족속으로 ‘7’은 전부 혹은 완전하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들의 위치는 구스와 붓이 남쪽 끝에서 오고, 고멜과 도갈마가 북쪽 끝에서 오기 때문에 곧 벌어질 전쟁은 세계적 규모의 마지막 전쟁이 될 것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 세계 전쟁을 주도한 세력은 일곱 동맹국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가시적으로 살벌하고 가공할 만한 원수들이 몰려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여호와의 손길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2). 전쟁의 시기와 장소(38:7-9절)

 

  전쟁이 일어날 시기는 본 예언의 종말론적 특성을 극명하게 드러낸 말로서  8절에 ‘여러 날 후’는 단순한 미래의 의미보다는 긴 시간의 축적으로 도래하는 최종적인 역사의 끝을 가리키는 말로 ‘해의 마지막 때’란 뜻의 ‘말년에’와 동격으로 쓰여진 것이다(Delitzsch, Schroder). 곧 여기서의 ‘말년’은 궁극적으로 도래할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때인 메시야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다(사 24:22;계 20:7 이하). 곡이 전쟁을 일으키는 뚜렷한 목적이나 명분은 설명되고 있지 않지만 전쟁의 위세를 보여주고 있다. “광풍같이 이르고 구름같이 땅을 덮으리라” 여기서 ‘광풍같이’는 ‘폭풍’이란 일차적 의미 외에 ‘파괴하다’, ‘황폐하게 하다’란 결과적 의미를 함축하는데, 엄청난 폭풍이 지나간 뒤처럼 철저한 파괴와 황폐의 정황을 상징한다. 그리고 ‘구름’이 성경의 용례상 종종 완전한 절망과  재앙의 도래를 상징한다는 점에서(30:3, 18;욜 2:2) 본 구절은 곡의 세력이 이렇듯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괴시키고 황폐화시킬 만큼 막강함을 강조 한다

 


 

(3). 전쟁의 목표(10-17절)

 

  10절은 곡이 심중으로 “악한 꾀를 내어” ‘악한 꾀’( 마하샤바 라아)란 ‘악한 생각을 품다’, ‘악한 계획을 도모하다’란 뜻으로 곡의 이스라엘 침략이 그들의 불의한 야심과 이기적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기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로 이러한 그들의 악의마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최후 심판을 위해 이용 하신다. 전쟁 대상자들은 “평온의 고을들”에 거주 하면서 “성벽도 없고 문이나 빗장이 없어도 염려 없이 다 평안히 거하는 백성”이다(11절). 전쟁을 통하여 얻으려는 것은 “은과 금을 빼앗으며 짐승과 재물을 빼앗으며 물건을 크게 약탈”(13절) 하는 일이다. 이와 같은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여호와의 주도적 역사로 인한 일이고 그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은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눈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이 다 나를 알게 하려 함”(16절)이다.

 

  마지막 날에 벌어질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이 오래전에 계획한 사건이 실현 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곡과 그의 동맹국 일곱 나라는 북쪽 끝과 남쪽 끝에서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사로잡혀 간 이방 나라에서 이스라엘의 산으로 귀환해 오랫동안 평안히 거주하는 백성이 재물을 약탈하려고 몰려들 것이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일어난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를 알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전쟁의 의사도 없이 평안히 살던 이스라엘 백성은 엄청난 위기에 빠질 것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간섭하는 전쟁이므로 결국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하심만을 기억하고 깨닫게 될 것이다.

 


 

(4). 곡을 멸망시키는 하나님(18-23절)

 

  여호와 하나님이 간섭하는 전쟁이므로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전쟁에 광분한 곡이 이스라엘 땅을 치러 오면 드디어 하나님의 ‘노여움’이 표출될 것이다. 그 노여움은 큰 지진(19절)과 같은 자연 재해, 여기서 ‘지진’으로 쓰인 ‘라아쉬’는 원어상 ‘지진’이란 의미 외에도 ‘진동’, ‘동요’, ‘소란’ 등의 의미를 통해 이스라엘 땅에 일어날 실제적인 지진(earthquake, NIV)으로 보며(Delitzsch) 또 다른 학자는 상징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권능의 임함을 통한 땅의 진동이나 소란(shaking, KJV, LB, RSV)으로 이해한다(출 19:16, Schroder). 그 어떤 해석을 취하든지 ‘지진’이 하나님의 극한 진노를 상징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전염병과 피, 쏟아지는 폭우, 비처럼 내리는 큰 우박덩이와 불 그리고 유황 같은 재난으로 나타날 것이다(22절). 여기서 심판의 요소들이 더욱 구체적으로 열거된다. 이 재앙들은 소돔과 고모라에 임한 재앙과 출애굽 당시 애굽에 임한 재앙 등 성경에 나타난 거의 모든 종류의 자연적 재앙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13:11, 13;창 19:24;출 7:14-25;9:8-35;수 10:11) 전우주적 심판의 종말론적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곡과 그 동맹국에게 내려지는 재난을 통해 그들은 패배할 것이다. 곡의 패배에 이스라엘은 전혀 기여하는 바가 없다. 곡을 이긴 여호와 하나님을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존대함과 내 거룩함”을 보여 주실 것이다(23절).  ‘내 존대함’이란 원어상으로 모든 측면에서의 '탁월함'을 의미하는 바, 곧 하나님의 전지전능 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대적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심으로써 그것을 목격한 대적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깨닫게 하신다. 이로써 하나님은 영적 이스라엘 된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변함없는 구원 의지를 드러내셨다.  

 

(5). 곡의 패배와 땅의 정화(1-20절)

 

  하나님은 곡의 왼손에 든 활과 오른손에 든 화살을 쳐서 떨어뜨린 후 이스라엘 산에서 쓰러뜨릴 것이다. 본 절은 일반적으로 활을 왼손에, 화살을 오른손에 들고 사용하는 모습에서 유추한 것으로 곧 하나님께서 곡 연합군의 모든 무기를 무력하게 만드시며 결과적으로 그를 철저한 패배와 멸망에 이르게 하시겠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문학적 표현이다(시 37:15;46:9).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독수리, 매, 까마귀와 같은 각종 사나운 새와 사자, 하이네나 ,표범과 같은 들짐승에게 먹힐 것이다(2-5절). 본 구절은 매장을 중요시 했던 고대 근동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죽어서까지 버려지는 극단적인 신적 저주의 정황을 암시하는 것으로, 패망한 곡의 군대가 매장조차 당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버려지게 되리란 예고이다(신 21:22, 23).

 

  이어서 하나님은 곡의 영토인 마곡과 섬에 평안히 거주하는 자들에게 불을 내릴 것이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불’은 일차적으로 38:22에 언급된 자연적 재앙의 하나인 동시에 이차적으로는 철저한 파멸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킨다(계 20:9, Schroder, Delitzsch). 그리고 “평안히 거주하는 자”는 지중해 연안의 해안국들과 섬나라들로서 곡과 동맹한 이방 국가들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는 특히 먼 지방이란 의미를 함축하는 바, 종말로 있을 적그리스도 세력의 전우주적 규합을 예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 절은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단지 이스라엘을 침공한 그의 군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곡의 고토와 그를 원조한 여타 이방 국가들에까지 미칠 것임을 가리킨다. 이는 또한 종말로 있을 심판의 엄중성과 적그리스도 세력의 철저한 소멸을 시사한다(계 20:7-10).

 

  그 다음에 곡의 패배로 인해 땅에 떨어진 무기들을 이스라엘 성읍 거주자들이 불살라 없애는데 7년이나 걸릴 것이라고 말한다. 또 전쟁 중 땅에 버려진 시체는 땅을 부정하게 하므로 거주민들이 일곱 달 동안 그 시체들을 매장할 것이고 그 장소는 ‘하몬곡의 골짜기’로 도시의 아름은 ‘하모나’(군대)로 부르게 될 것이라고 한다(11-16절). 여기서 ‘하모나’는 ‘많은 무리’, ‘소란’ 등의 뜻을 가진 ‘하몬’에서 유래된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죽어간 수많은 곡 군대의 사체가 매장된 곳이라는 사실을 잘 암시해주는 이름이다.

 

  17절부터는 매장되지 않은 시신 처리를 언급하고 있다. 특히 ‘잔치’(제바흐)는 구약에서 짐승을 잡아 드리는 희생 제사를 말한다. 흔히 제사에서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이 피와 기름은 여호와의 것으로 따로 드리고 나머지 살코기는 나눠 먹는다. 그런데 여기서 제사에 참여해 제물을 먹는 자들은 사람이 아닌 ‘각종 새와 들의 각종 짐승’이다. 그들이 먹는 것은 죽은 시신들의 피와 살이다. 이것은 아마 죽임을 당한 곡의 군대에 대한 또 다른 처리 방식을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패배를 다시 한 번 단정하고 자축하는 모습을 거듭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6). 회복된 하나님의 영광(39:21-29절)

 

   21-24절은 역사의 종말에 벌어질 전쟁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전쟁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는 자신들의 하나님인 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 날 이후에 이스라엘 족속은 내가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을 알겠고”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방인들과는 달리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그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보호와 구원의 원천이 되며 유일한 신앙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과거에 포로로 잡혀갔던 일은 여호와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께 심판 받은 것임을 여러 민족들이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혀 갔던 줄을 알지라 그들이 내게 범죄 하였으므로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고 그들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겨 다 칼에 엎드러지게 하였으되” 그리고 이스라엘의 몰락은 하나님이 그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더러움과 그들의 범죄한 대로 행하여 그들에게 내 얼굴을 가리웠었느니라”(겔 39:24) 여기서 성경의 용례상 하나님의 얼굴은 종종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지극한 관심과 긍휼을 상징한다(시 11:7; 사 54:8; 계 1:16). 또한 ‘가리웠다’( 사타르는 ‘숨기다’, ‘감추다’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숨기셨다는 것은 곧 그들의 죄악을 질책하시기 위해 철저하게 대적들의 수중에 그들을 버려두셨음을 뜻한다. 신앙 공동체는 언제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끝없는 은혜와 자비를 신앙 공동체에 베풀어 주셔야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 그 얼굴을 가리게 하는 일을 삼가라. 의롭고 바르며, 선하고 성실하게 살아라,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다.

 


 

7). 임재의 회복(40-46장)

 


 

(1). 새로운 성전 회복(40-43장)

 

  유다가 멸망하면서 수많은 유다백성이 포로로 붙잡혀 바빌론으로 “사로잡힌 지 25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14년 정월 10일 곧 그 날에” 이는 B.C. 573년으로 에스겔 선지자가 소명을 받을 때(B.C. 593)로 부터 약 22년이 경과한 시기이다(1:1, 2;33:21). 한편 본 구절은 원전상 ‘그 해의 시작’이란 구절이 두 문장 사이에 첨가되어 있는 바, 이 구절의 해석과 ‘새달’이란 문자적 의미의 ‘정월’(호데쉬)의 해석 여하에 따라 두 가지 견해로 대별된다. 먼저 첫 번째 견해는 ‘그 해의 시작’에 ‘정월’의 의미를 찾아, 이 ‘정월’을 이스라엘 종교력상의 첫 달인 ‘아빕 월’(민간력-7월)로 보는 것이다. 곧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유월절을 예비하던 날인(출 12:3, Havernick, Delitzsch, Schmieder) 동시에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첫 발을 내디딘 의미 있는 날이었다(수 4:19). 두 번째 견해는 본 구절의 연도를 B.C. 575년으로 보고, 그 해가 희년이라는 사실에 주안점을 두어 ‘그 해의 시작’을 ‘신년’ 곧 49년이 지난 후 오십 년째 되는 ‘희년’으로, ‘정월’을 1월이 아닌 종교력상의  ‘첫 달’이란 의미에서 희년을 시작하는 첫 달로서의 7월 10일인 ‘속죄일’(레 25:9)로 이해한다(Hitzig, Rdak). 곧 이 속죄일은 희년에 이루어질 자유와 회복을 위한 전제로서의 속죄가 행해지는 날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견해 중 어느 것을 취해야 할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본 구절에 특정하게 제시된 ‘그 날’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잘 알려진 날이었으며, 회개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함축하고 궁극적인 자유와 회복의 의미를 내포한 특별한 날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호와의 권능이 에스겔을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신다. 여기서 에스겔은 환상 중에 이스라엘 땅의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시는데”(40:2절) 여기서 ‘매우 높은 산’은 1장 이하에 언급된 에루살렘의 멸망과는 대조적으로 온전한 회복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들 거룩한 산 ‘시온’을 지시한다(17:22, 23;욜 2:32). 곧 시온산은 본래 기드론과 두로베온 골짜기 사이에 솟아있는 봉우리의 명칭이었으나, 후에 예루살렘 동남쪽에 위치한 ‘다윗 성’(왕상 8:1;대하 5:2)을 지칭했으며, 더 후대에는 예루살렘 전체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명칭으로 바뀌었다(사10:24). 따라서 이 ‘시온 산’은 곧 새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예루살렘을 이처럼 탁월하게 묘사한 것은 여기서의 새 성전이 궁극적으로 온전하게 회복될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 나라의 영광스런 위상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사 2:2;미 4:1;계 21:10, Michaelis, Delitzsch, Schroder).

 

  에스겔은 그곳 높은 산에서 산 아래로 펼쳐지는 한 성읍을 보게 된다.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이 회복된 후에 나타날 아름다운 성읍의 형상이다. 또한 놋같이 빛난 사람 곧 천사가 모시로 만든 끈과 척량하는 막대기를 손에 들고 성읍 입구에서 환상 중에 에스겔에게 말한 내용도 언약 백성의 회복에 관한 내용이다. ‘인자야 지금부터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모든 것들을 네 눈으로 자세히 주목하고 또 네 귀로 잘 듣고 마음에 깊이 새겨 두어라. 이것이 바로 너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가 보는 모든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라’(4절).

 

  4절에는 네 개의 중요한 명령형 동사가 나온다. ‘너는 보라’(레에), ‘너는 들으라’(쉐마), ‘그리고 너는 두라’(붸심), ‘는 말하라’(학게드). 이 단어들은 에스겔 선지자를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려 준다. 하나님이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장래의 일에 대해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비록 그들은 죄를 범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포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대로 징계의 기간이 끝나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실 것을 재확인하며 구원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주시는 것이다.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이스라엘 땅의 지극히 높은 한 산은 언약의 시온산이며 산 아래로 펼쳐지는 한 성읍은 예루살렘 성이다.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이 회복된 후에 나타날 아름다운 성읍의 형상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한 언약의 회복 곧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 사건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영적 회복을 의미한다. 따라서 새 성읍과 새 성전의 환상은 심판 중에도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을 보여 준다. 또한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신실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곧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야 비로소 회복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에스겔은 환상중에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을 본다. 놋같이 빛난 사람 곧 천사가 모시로 만든 끈과 척량 막대기로 재어 본 결과, 그 담의 두께와 높이는 척량 막대기 하나 정도(약 3.2m)였다. 또 제단을 지나 문의 입구를 척량하고 문지기들의 방도 재었다. 그리고 성전을 향하는 출입문의 현관도 재었다. 동쪽 문 안쪽에 크기가 같은 작은 방 세 개가 있고 그 방들의 크기도 재었다. 천사는 계속해 에스겔을 데리고 북쪽 문과 남쪽 문으로 가서 각각 그 문들과 주변 방들을 척량했다. 남쪽으로 난 문과 북쪽으로 난 문의 크기는 같고 주변의 방이나 창문의 크기도 같다. 이렇게 척량하는 모습을 자세히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성전의 회복이 반드시 이뤄짐을 의미한다. 성전의 회복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질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대한 그림자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파괴되었지만 지금 에스겔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성전의 동쪽, 북쪽, 남쪽으로 난 문들을 척량하는 모습은 장차 이스라엘의 회복과 함께 실제로 성전의 회복을 의미한다.  새 성전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한 영적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 곧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말한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성전 제도의 회복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를 뜻하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뜻하기도 한다.

 

  에스겔은 40-42장에서 성읍과 성전의 구조와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 43장부터 두 번째 탐사를 시작한다. 첫 번째 탐사를 마친 에스겔은 지금 바깥뜰에 있는데, 곧 동문 쪽으로 간다.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43:1).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43:2절) 본 구절은 성전의 구조적 측량에 이어 19년 전 이스라엘의 패역으로 그 동문을 통해 성전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 (10:18-22;11:22-24)이 그 동문을 통해 다시 완성된 성전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5절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의 회귀는 모세의 성막 봉헌식(출 40:33, 34)과 솔로몬 성전 봉헌식(왕상 8:11) 당시에도 보여진 바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와 새롭게 갱신된 교체의 회복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곧 성전 완공의 마지막 단계인 성전 봉헌식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Delitzsch). 에스겔도 성령에 이끌려 안뜰로 들어가서 여호와의 영광이 성소에 가득 찬 것을 보고(43:5), 거기서 성전과 동문 사이에 있는 제단을 보며(43:13-27)바깥뜰로 나온다.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있을 곳이라”(43:7)는 말씀은 선재적으로 성취된 에스겔 성전의 성격을 규정하는 구절이다. ‘내 보좌의 처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의 핵심이 되는 곳을, ‘내 발을 두는 처소’는 하나님의 안식처가 되는 곳을,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삶을 지배하시며 그들과 교제하시는 곳이란 의미를 각각 내포한다. 한편 여기에 언급된 ‘내 보좌 의 처소’와 ‘내 발을 두는 처소’(나의 발등 상-시 132:7;사 60:13;66:1)는 모두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를 지칭하는 말로 쓰여졌다(출 25:22;삼상 4:4;대상 28:2;시 132:7, 8). 여기서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언약궤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영원함( 레올람)의 적용 여부에 따른 것이며 (37:26, 28) 에스겔 성전의 영원성과 완전함을 암시한다. 곧 이전 성전에서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가 될 수 없었다는 점과 에스겔 성전의 완성 때인 메시야 시대에는 그 언약궤가 필요치 않다는 점, 궁극적인 의미에서 메시야 시대의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을’, ‘하나님의 발등상’은 ‘땅’을 상징한다는 점(사 66:1;마 5:35)에서 언약궤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므낫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을 쌓고 우상을 만들어 세웠다.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8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안뜰로 들어가는 북문에 우상을 세웠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니 제단 문어귀 북편에 그 투기의 우상이 있더라”(8:5). 이런 망령된 행동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성전과 예루살렘에서 떠나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귀가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짐케 하신다. 지금까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던 모든 행위들을 그만 두겠다고 약속케 하신다. 그럴 때 비로소 “내가 영원토록 그들이 가운데 거하리라”(9절)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성전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알려 주고 백성으로 하여금 성전법을 철저히 준행하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너는 이전의 제도와 식양과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11절). 하나님은 성전에서 행해야 할 일들 즉 제사와 관련된 규정뿐 아니라, 성전의 규모와 모양 그리고 성전 안에 있는 여러 물품들의 규격과 모양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기를 원하신다.

 


 

(2) 새로운 예배 회복(44장)

 

  44:4절에서 “북문을 통하여 성전 앞에 이르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한지라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 혹자는 이를 성벽에 위치한 바깥 북문으로 이해하나(Kliefoth) 43:5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곳이 안뜰로 제시된 점과 안 북문이 바깥 북문보다 약 4철이 더 높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선지자가 직접 그 영광의 현현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안쪽 북문임이 분명하다(Delitzsch, Schroder, Hitzig). 한편 이처럼 여호와의 영광의 현현을 재삼 언급한 것은 이하 전개될 내용에 비추어 함부로 근접 할 수 없는 새 성전의 거룩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Delitzsch).

 

 

8). 새 시대 새 생활 회복(45-46장)

 

 

 

  하나님은 통치자들에게 특별히 명령하신다. 포악과 겁탈을 일삼지 말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도록 촉구한다. 그래서 ‘내 백성’을 속여 빼앗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왕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천명하신다. 이것은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리는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내 백성’이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왕이 백성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는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내 백성’으로 칭하면서 군주에게 당부하는 것은 백성을 잘 다스리라는 것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백성을 억압하거나 겁탈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도량형을 정확하게 할 것을 명령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군주의 본분에 대해 말씀하신다. “왕은 본분대로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절기에 드릴지니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제물을 갖출지니라”(17절). 군주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각 절기마다 하나님께 제대로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본문은 군주의 정치적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그 역할을 제의적 차원에서 정의한다.

 

  하나님은 절기들을 제대로 지키라고 명령하신다(45:18-46:15). 군주가 지원해야 하는 절기들 중에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신정(1월 1일)인데, 이 날에 해야 할 일은 성소를 정결케 하는 것이다. 성소가 백성의 범죄로 인해 더럽혀졌기 때문에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성소를 정결케 해야 한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실수로 죄지은 사람들을 위해 속죄제를 드려 성소를 정결케 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신년 초하루를 성전 정결로 시작하는 것은 의미가 깊다. 이스라엘 백성이 1년 동안 죄짓지 않고, 성전을 정결케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언급되는 절기는 유월절이며, 일주일 동안 이 절기를 지키면서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으라고 한다(21절). 이것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동일시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로써 정월 14일에 지키고, 정월 15일부터 일주일 동안 무교절로 지킨다. 무교절은 보리를 거둬들이는 농사 절기인데, 바로 앞에 유월절이 있기 때문에 후대로 내려갈수록 무교절이 유월절화(化)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원래 유월절은 가족 중심으로 지키는 것이었는데, 본문에서 왕이 주관하고 있다. 이것은 요시야가 유월절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킨 것을 떠올리게 한다(대하 35:7-9). 유월절이 가족 절기에서 국가적 행사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원래 유월절의 제물은 양인데, 여기서 송아지를 제물로 삼는다. 유월절의 제물은 양(출 12:1-28)에서, 양을 예물로 드리고 나서 다시 소와 염소를 예물로 드리는 것(민 28:16-25, 대하 30:15-17)에서, 양과 소와 염소를 함께 드리는 것(대하 35:7-9)에서, 소를 드리는 것(겔 45:22)에서, 다시 양을 드리는 것으로 바뀌었다(스 6:17-22).

 

  7월 15일에는 일주일 동안 수장절을 지킨다(레 23:39-44, 신 16:13, 16). 그런데 절기 때에 드리는 제사는 대체로 속죄제이다. 그만큼 속죄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언급되는 절기는 안식일과 초하루이다. 이 절기들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동쪽 안문을 통제하는 것이다. 군주는 이 문을 통해 출입해야 하며(46:8), 다른 사람은 이 문을 사용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것은 매일 아침에 드리는 제사이다. 아침마다 일 년 된 양 한 마리를 드려야 하는데, 소제도 함께 드린다. 여기서는 저녁 제사에 대해선 말씀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은 통치자들도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신다(46:16-18). 본문은 통치자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언급하는데, 여기서 군주의 기업에 대해 말씀하신다. 즉 군주가 받은 기업도 다른 사람들처럼 보존되어야 한다. 그리고 왕이라고 해서 원래 받은 것 이상으로 기업을 늘리지 말아야 하며, 기업을 잘 유지해 후손들에게 그대로 전수해야 한다. 하나님은 왕이 기업을 늘리기 위해 백성의 기업을 뺏고, 삶의 터전을 잃은 백성으로 하여금 살 길을 찾아 어디론가 떠나게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당시에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음을 암시한다.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그 좋은 예이다. 따라서  왕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업을 잘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제사장과 왕에 대한 규정들이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것은 제사장과 왕이 동일한 책임과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9).(47-48장)-(새로운 나라의 회복)

 

  이제 40장부터 전개된 성전의 측량과 새로운 율법의 지침이 일단락되면서 새로운 내용 곧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을 중심으로 성취될 이스라엘의 축복이 생명수의 환상을 통해 12절까지 제시된다. 물과 기름짐, 축복 등은 구약에 있어서 서로간에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갖는 말인 바,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을 이루어 사해까지 흘러 들어가 황무하고 죽어있는 땅을 기름진 땅으로 변화시키는 본문(1-12절)의 회화적 묘사는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풍성한 축복을 상징한다(시 46:4;65:9;사 33:20). 한편 이 부분은 궁극적으로 구원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이심(계 22:1)과,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온 우주를 풍성하게 소생시킨다는 점을 보여준다(요 10:10).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역으로 성도들의 죄악을 담당하셨으며 친히 자신을 ‘생수의 강’으로 언급하셨다는 점에서(요 4:10;7:38) 이 ‘생명수의 강’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다 하겠다

 


 

(1). 생명을 주는 강(47:1-12절)

 

. 물이 강으로 됨(47:1-5절)

 

가. 스며 나오는 물(47:1-2절) 

 

  성전 둘러보기를 마친 에스겔은 이제 성전 건물의 문에 이른다. 거기서 동쪽을 향한 성전 건물의 문지방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본다. 원문에 있는 ‘히네’라는 단어는 에스겔의 발견에 극적 효과를 더한다. 이 단어는 독자들의 시선을 에스겔의 시선과 일치시킨다. 그 나오는 물을 카메라가 클로즈업해 보여 주는 것과 비슷한 장치이다. 문지방에서 나오는 물은 성전 안뜰에 있는 제단 쪽으로 흐른다. 그리고 제단을 지날 즈음에 제단의 남쪽을 둘러 흐른다(1절).

 

  물은 계속해 동쪽으로 흘러 그 물줄기가 동쪽 문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그 동쪽 문은 영광이 돌아온 이후 닫혀 있었다(43:1이하; 44:1-2). 이에 성전 안내자는 에스겔을 북쪽 문을 통해 성전 담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고, 성전담의 북동쪽 모서리를 돌아 동쪽 문의 바깥에 이르게 한다. 그곳에서 에스겔은 문을 통과해 스며 나오는 물을 다시 만난다. 1절에 사용된 ‘히네’가 여기에서 다시 사용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한 번 더 에스겔의 시선에 동참하도록 초대한다.

 

  ‘스며 나오다’라는 표현의 히브리어는(파카) - ‘쏟다’란 문자적 의미를 가지는 바, 이는 단순하게 물이 배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차게 솟구쳐 나오는 것을 묘사하는 말로서  1절의 ‘흘러 내리더라’와 비교해볼 때 그 물의 양이 성전 안에서 이미 상당하게 불어나 있음을 암시한다(Delitzsch, Neumann, Gesenius). ;

 


 

나. 넘쳐흐르는 강(47:3-5절)

 

  이제 안내자는 스며 나오는 물이 만드는 물줄기를 따라간다. 1,000척씩 즉 약 450m식 거리를 재며 동쪽으로 나아가는 그는 에스겔로 하여금 매번 그물을 건너게 한다. 처음에 발목, 다음에 무릎, 그다음에 허리까지 오는 물이었다(3-4절)

 

  이 단락의 마지막 장면인 5절을 개혁한글에 기초해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그가 1,000척을 척량했다. 내가 건너지 못할 강! 왜냐하면 그 물이 깊었다. 헤엄칠 만한 물! 건너지지 못할 강!’

 

  5절에서 물의 변화에 대해 최소한 두 가지 관찰을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물을 ‘강’(305 나할)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졸졸 흘러나온 물이 이제는 ‘강’이 된 것이다. 두 번째는 그 강의 깊이에 대해 ‘건너다’라는 동사를 한 번은 능동태(‘내가 건너지 못할 강’)로, 또 한 번은 수동태(‘건너지지 못할 강’)로 사용해 물의 깊이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스겔이 건너지 못할 만큼 깊은 강이 된 것이다.

 

  불어난 물의 양에 대한 강조는 그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표현한 3-4절의 묘사와 더불어 맨 처음 그 물의 근원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성전 문지방 밑에서 스며 나온 물이 조금씩 불어나더니, 마침내 큰 강으로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물의 양의 변화는 에스겔이 보게 될 성전 너머 세상의 변화에 대한 환상의 서곡에 불과하다.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47:5절)라는 말씀은 성소에서 발원한 물이 기적적으로 증가하여 이처럼 한길 이상되는 생수의 강으로 가득하게 된 사실은 여기서의 생수가 구원과 축복의 상징이란 점에서 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관심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②. 강이 가져올 변화(47:6-12절)

 

가. 강가의 많은 나무를 봄(6-7절)

 

  성전 안내자는 물이 강으로 변함에 대해 이미 놀랐을 에스겔에게 목격한 것을 확인한다(‘보았느냐? 인자야’). 아직 놀라기에 이르다. 에스겔에게 보여줄 것이 더 있다. 이편 저편에 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여기서도 ‘히네’(흔히 ‘보라’라고 번역하기도 한다)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놀람에 동참시킨다.

 

“나를 인도하여 강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6절) - 여기서 이 말은 생수의 강의 가장자리 곧 ‘뚝 위로’란 뜻으로서 선지자가 그 물 속에서 세 번째 측량 때까지 따라 내려갔다가 그 물 속에서 네 번째 측량을 목격하고 다시 뚝 위로 올라온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Schroder, Hengstenberg). “나무가 심히 많더라”(47:7) 여기서 ‘많더라’(리브)는 원어상 ‘(양이나 질에 있어서)풍성한’이란 뜻으로 단지 나무의 많음을 말한다기보다는 나무와 함께 그 열매의 풍성함까지도 내포한 말이다(Schroder). 따라서 본 구절은 새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축복으로서의 비옥함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 풍성한 생명을 가져오는 강물(8-12절)

 

  두 번째 부분은 그 강물이 가져올 풍성한 생명의  모습들에 대한 인도자의 설명으로 이뤄져 있다. 이 강물은 요단 계곡을 지칭하는 듯한 ‘아라바’를 내려가 지금의 사해로 생각되는 ‘바다’의 물을 되살릴 것이다(8절).

 

  또한 이 강물은 바다만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르는 모든 곳과 그 속의 ‘모든 생물’(네페쉬 하야)을 살릴 것이다. 물고기도 심히 많아질 것이다. ‘되살아나다’( 라파, 이 동사가 수동형으로 쓰였을 때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치료되다’)라는 동사는 8, 9절의 핵심 단어다.6) 이 강물은 치료와 회복을 의미한다.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물이 되살아나리라( 라파)는 ‘고치다’란 뜻인 바(왕하 2:22), 본 구절은 사해 곧 죽은 물이 성전에서 발원한 생수로 인해 모든 생명체가 살 수 있는(9, 10절), 살아있는 물로 고침을 받게 된다는 의미다. 이는 상징적으로 죽음의 자리에서 영생의 자리로 당신의 백성을 옮기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암시한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여기서 ‘강물’( 나할)은 원어상 복수형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혹자는 이를 그 강의 지류들이란 뜻으로 해석한다(Kliefoth). 그러나 이는 그 물의 창일함과 강한 흐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Hengstenberg, Delitzsch, Umbreit). 그러한 강의 강력함이 모든 죽음의 세력을 휩쓸어 버리고 생명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다가 강을 흡수하는 현상과는 달리 그 생수의 강은 죽음의 바다(사해)로 들어간 후 생명의 능력으로 죽음의 바다를 생명의 바다로 변환시킨다.

 

  이 강은 자연 세계를 넘어 사람들에게도 복이 될 것이다. ‘엔게디’(‘염소의 샘’)와 ‘에네글라임’(‘두 송아지의 샘’)은 각각 사해의 서편과 동편 해안 지역으로 보인다. 아무것도 살지 않는 죽음의 바다가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될 때 그 주변 지역들도 유익을 누리게 된다. 지중해를 의미하는 ‘큰 바다’처럼 각양각색의 물고기들이 사해에 많아지면 그것들을 잡고자 하는 어부들도 모여들 것이다.

 

  11절은 언뜻 보기에 강물의 능력의 한계를 묘사하는 부정적인 진술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구절을 그 강물의 ‘사려 깊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면 더욱 적절하다. 사해의 모든 부분이 되살아나면, 즉 염분이 없어지거나 옅어져 물고기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사해에서 더 이상 소금이 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당시 제사와 생활에 소금이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소금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라는 11절의 진술은 긍정적의미로 이해해야 하며 ‘소금 땅이 될 것’이라는 번역보다 ‘소금을 위해 남겨질 것이다’라는 번역이 긍정적 의미를 좀 더 잘 전달해 준다.

 

  생명을 가져오는 강물의 능력에 대한 마지막 부분의 관심은 6-7절에서 언급된 나무들로 다시 돌아간다. 그 대신에 이번엔 그 나무들과 열매와 잎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진술을 곁들이다. 생명을 주고 치유하는 강물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 그것이 자라게 한 나무의 열매와 잎조차 그런 강물의 능력을 여전히 소유할 것이다. 강물이 대단한 능력은 7, 9, 10절에서 강물이 만들어내는 각종 생명체들이 ‘심히 많다’라고 반복해 묘사된 점에서도 느낄 수 있다. 12절에서 ‘그 물이 성소를 통해 나옴이라’는 진술은 모든 생명들의 변화의 근원이 성소에 있음을 재확인한다.

 


 

(2). 다시 사람이 살게 될 땅(47:13-48:29)

 


 

①. 전체 땅의 외적 경계(47:13-23)

 

가. 땅 분배에 대한 원칙(47:13-14; 21-23절)

 

   땅의 분배하는 원칙에서 자주 나오는 ‘기업’이라는 단어와 그와 관련된 동사들은 이스라엘이 회복된 땅에서 살게 됨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옛 약속을 지키신 결과임을 보여준다. 14절의 “이 땅을 너희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하였나니”라는 옛 약속에 대한 재확인은 이런 사실을 더욱 강조한다.

 

  “공평하게 나누어 기업을 삼으라” ‘공평하게 나누어’란 어느 한 편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공평하게 분배하라는 말이다. 이 말은 가나안 땅 분배에서 보여지듯이

 

단순히 땅 넓이가 동일하게 분배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고려해서 서로가  아무런 불만이 없게 분배하라는 것이다. “이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되리라”(47:14) 이는 다음과 같은 삼중적 의미로 고찰해 볼 수 있다. (1) 여자적 해석으로 이스라엘이 바빌론의 포로 생활에서 벗어나 고토로 귀환하여 그 땅을 다시 소유하게 되리란 의미, (2) 언약적 해석으로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증표로 주신 약속의 땅이란 점에서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에 대한 회복은 곧 그 동안 그들의 죄로 인해 파기되었던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새롭게 갱신된다는 의미, (3) 종말론적 해석으로 가나안 땅이 하나님 나라의 예표였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의 의미(계 21:1) 등이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이상적 시대의 원칙을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평등(14절)과 보편성(22-23절)이다. 22절에서 타국인에 대한 분깃이 부가적으로 기술된다. 이러한 타국인에 대한 기업의 할당은 모세의 율법(레 24:22;민 15:29), 이사야의 교훈(사 56:3-8), 에스겔의 초기 예언(14:7;22:7)과도 일치한다.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타국인 곧 너희 가운데에서 자녀를 낳은 자의 기업이 되게 할지니” 여기서 ‘타국인’( 게르)은 이스라엘의 혈통이 아닌 일반적인 이방인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이방 신앙을 버리고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이는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 의해 더욱 분명 해진다. “너희 가운데서 자녀를 낳은 자” 이 구절은 앞 주절을 수식한다. 이스라엘 중에서 자손을 낳음으로써 그 땅에 영구히 거주할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 타국인을 본토에서 난 이스라엘 족속같이 여기고” 하나님의 기준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된 이방인의 구별을 상쇄시키는 말이다. 새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여호와 신앙으로 구원을 얻게 될 이방인들까지를 포괄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그러한 구원 사역의 구심점이자 매개가 되는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평등하게 나눠 갖는 주제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이다. ‘기업’과 더불어 자주 나오는 단어인 ‘지파’와 그것을 사용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는 표현은 남북 분열 왕국 이전에, 심지어 왕정 이전에 있었던 언약 백성의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합의를 가진 것으로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지파들의 체제에 ‘타국인’(게르)들도 포함될 것이다. 즉 지파간 평등의 범위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22절). 이스라엘 속에서 여러 계층으로 살아가던 타국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어느 정도 유사한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할례를 받으면 유월절 식사에도 참여할 수 있었고(출 12:48), 원한다면 제사와 같은 종교 행위에도 온전히 참여할 수 있었다(참고 레 22:18).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권리가 있었는데, 곧 땅에 관한 것이다. 타국인들은 땅을 차지할 수 없었다. 이 한계는 그들로 하여금 ‘이등 시민’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에스겔의 마지막 환상에서 이 제한마저 철폐된다. 이런 보편성 혹은 포괄성이 원칙이 이상적 기업 분배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음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나. 땅의 사방 경계(15-20절)

 

  땅의 사방 경계의 특징들은 첫째,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소유했던 땅의 최대 영역 혹은 좀 더 큰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특히 북쪽 경계에서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 본문은 ‘역사적 지리’가 아닌 ‘신학적 지리’로써 크기보다 여기에 나타난 경계들이 싸고 있는 곳(당연한 이야기 같지만)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땅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즉 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오래되고 빛바래지 않은 약속의 성취를 누리는 것이다.

 

  둘째, 요단강의 동쪽 지역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겔 47:18절 ‘동쪽은 하우란과 다메섹과 및 길르앗과 이스라엘 땅 사이에 있는 요단 강이니....’). 역사적으로 요단강의 동쪽 지역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치지했던 곳이다. 그런데 이 지역이 에스겔의 신학적 약속의 땅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 우상 숭배(참고 수 22장) 혹은 소돔과의 관련(참고 창 13장)을 통해 요단 동편의 부정적 함의를 찾아내는 설명들은 설득력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요단 동편은 원래 주어진 약속의 땅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에 제외되었다는 설명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조상들에게 약속한 전체의 맥락과 더 잘 어울린다. 즉 이 새로운 땅을 기업으로 회복하는 환상은 요단 동편을 포함하는 역사적 회복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언약과 연관된 신학적-상징적 회복에 관한 것이다(비교 수 14-21장). 실제로 바빌론의 포로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올 수 있는 지파로 유다 지파가 유일했다. 또한 포로 이후 이스라엘은 물리적으로 여기에 기록된 경계들로 이뤄진 땅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제부터 살펴볼 동서로 반듯한 경계로 각 지파들에게 땅을 나눠 주는 것도 지리적으로 불가능하고 역사적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 본문들을 신학적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땅의 내적 구획(48:1-29절)

 

①. 예물로 드릴 땅 북쪽과 남쪽의 지파들(1-7, 23-29절)

 

  각 지파들의 위치는 그들이 역사 속에서 차지했던 위치보다 야곱의 자손들의 지위를 반영한다는 원칙이 좀 더 지배적이다. “예물로 드릴 땅”(참고 48:8)에서 가장 먼 북쪽과 남쪽에는 야곱의 첩들인 실바와 빌하의 아들들의 지파(1-3; 27-28절)가 위치한다. 그리고 좀 더 중심에 가까이 야곱의 본처인 라헬과 레아의 아들들이 북쪽과 남쪽에 각각 네 지파씩(4-7, 23-26) 위치한다.

 

  여기서 ‘예물로 드릴 땅’에 가장 인접해 북쪽에는 유다 지파, 남쪽에는 베냐민 지파가 위치하는데 이는 그들의 역사적 위치와 반대이다(7, 23절). 즉 ‘남유다 왕국’으로 대표되던 유다 지파도 새로운 땅에서 ‘북쪽’에 위치할 것이다. 이런 새로운 배치는 다시 회복할 나라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눔이 없는 하나 될 것임을 상징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새 땅에 대한 이상은 왕국 시대 이전의 모습에 기초한다.

 

  48:7절에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유다의 몫이요”유다 지파가 야곱의 육적(肉的) 장자된 르우벤 대신 거룩한 땅에 연접 할 수 있었던 것은 야곱의 축복을 통해 메시야의 출생을 언약 받은 영적 장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창 49:8-12). 또한 유다 지파는 베냐민 지파와 함께 반역한 북이스라엘 왕국에 동참한 10지파를 대항해 이스라엘 왕국의 정통성을 이어갔다는 점에서 타지파 보다 신앙적, 역사적인 우월성을 가졌다. 한편 거룩한 땅을 분기점으로 북쪽과 남쪽의 지파 배열이 동등한 6:6의 비율로 정해지지 않고 7:5의 비율로 배분된 것은 완전수 ‘7’은 항상 대표적인 수로, ‘5’는 그 ‘7’의 보충적인 수로 여긴 히브리적 개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Hengstenberg). 따라서 이러한 배분은 북쪽 일곱 지파 중에서도 대표적인 유다의 탁월한 위상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

 


 

② ‘예물로 드릴 땅’

 

  ‘예물로 드릴 땅’의 위치도 회복될 땅의 새로움을 잘 보여 준다. 이 특별한 땅의 위치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라이트의 지도를 살펴보면 ‘특별 보류지’의 남쪽에 위치한 지파들의 땅의 폭이 북쪽에 위치한 지파들의 그것보다 좁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특별 보류지’의 위치를 역사적인 예루살렘의 위치와 동일시할 때 그려진다. 반면, 두굿의 지도는 각 지파들의 땅의 폭이 모두 동일한 반면에 ‘거룩한 땅’의 위치가 역사적인 예루살렘의 위치보다 북쪽으로 약 48km쯤 떨어진 곳으로 예루살렘 이전에 회막과 언약궤가 위치했던 예배의 중심지인 실로(참고 수 18:1; 삼상 1:3, 24; 4:3) 근처가 된다.

 

  예배 중심지의 새로운 위치는 예루살렘이 우상 숭배로 더러워졌던 것(참고 8-11장)을 생각해 볼 때, 그리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또한 새로운 땅의 기업 분배가 왕정 이전의 전통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 비춰 볼 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울 수 있다. 요컨대, 에스겔서는 좀 더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회복을 바라보고 있다.

 

  ‘예물로 드릴 땅’의 자세한 구획은 45:1-8에 이미 나와 있다. 45장의 기록과 비교해 48장이 좀 더 자세히 다루고 있는 부분은 ‘성읍의 기지’에 관한 것이다(45:6; 48:15-19). 이 성읍 기지의 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줄 땅들과 비교해 길이는 같고 폭은 그것들의 절반이다(라이트 507쪽: 참고 두굿 666쪽 그림). 이 성읍 기지는 그 중앙에 위치한 성읍(15-16절)과 그 둘레의 땅(성읍 사방의 남은 둘레7)와 성읍 양쪽에 남아 있는 땅, 17-18상절)으로 이뤄져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남아 있는 땅의 용도이다. 지파를 막론하고 성읍의 일하는 자들이 그 땅을 경작할 것이고 그 산물이 그들의 양식으로 된다(18하-19절), 즉 이 땅은 일상적 노동의 터전인 셈이다.

 

  “거룩히 구별할 땅과 연접하여 남아 있는 땅의 길이는 동쪽으로 만 척이요” 여기서 ‘남아 있는 땅’은 곧 성과 성의 들을 제외한 성읍을 가리키며 이만 오천 척 되는 총 장의 길이에서 성과 성의 들의 장의 길이인 오천 척을 제외하면 그 성을 중심으로 동 서편에 각각 장 일만 척의 성읍이 남게 된다. “그 땅의 소산을 성읍에서 일하는 자의 양식을 삼을지라” 이에 관해서는 몇 가지 다른 이견들이 제시된다. (1) 그 성읍이 이스라엘의 공동의 소유란 점에서(45:6) 열두 지파에서 선발된 사람들이 성읍을 건축하고 인근에 있는 성전 봉사자들을 위해 그 땅을 경작함을 가리킨다 (Havernick, Gesenius). (2) 이 땅이 성소가 있는 거룩한 땅과 연접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를 수비하기 위한 군인들을 가리킨다(Hengstenberg). (3) 그 성읍에 거주하는 일반적인 노동자를 가리킨다(Kliefoth, Delitzsch). 문맥상 (1)의 견해가 가장 적합한 듯하다.

 

  개역한글은 48:15에 있는 히브리어 단어 ‘홀’을 ‘속된 땅’ 혹은 ‘속된 지역’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한글의 ‘속되다’라는 표현은 뭔가 잘못된 듯한, 심할 경우에 죄와 관련된 듯한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표현으로써 히브리어 ‘홀’의 의미를 오해하게 만든다. NIV는 이 부분을 ‘성읍을 위한 일반적 용도’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일반적이다’라는 번역이 히브리어 ‘홀’에 더욱 적절하다. 개역한글에서도 같은 단어가 쓰인 사무엘상 21:4-5에서는 이 단어를 ‘보통’이라고 번역하고 있다(‘보통 떡’, ‘보통 여행’,). 여컨대, ‘속된’ 일상은 악하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다. 이런 일상적 노동의 터전이 비록 ‘거룩하게 구별할 땅’(트루마트 하코데쉬, 10, 18, 21절)과 구별되지만, ‘예물로 드릴 땅’(하트루마 아쉐르 타리무, 8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4). 여호와께서 계시는 성읍(48:30-35)

 

  에스겔서의 마지막 부분은 48:15-19에서 언급된 성읍에 관해 문들과 그 성읍 자체의 이름을 언급하며 마친다. 성읍 기지의 중앙에 위치한 성의 출입문들을 언급한다. 곧 이 출입문들은 성의 사면에 각각 3개씩 모두 12 개가 있게 되며 그 각각의 출입문에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명명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2대문에 12지파의 이름을 명명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 환상 기사가 수록된 계 21:12과 연관되어 있다(Delitzsch). 왜냐하면 본장의 새 성전의 성읍 역시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성취될 온전한 하나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성의 출입문들이 12지파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는 것은 곧 그 성읍이 온 이스라엘의 공동의 소유인 것을 암시하는데, 이러한 성읍이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로 명칭 되었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새 이스라엘 공동체와 항상 함께하시리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한편 에스겔의 사역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35절에서 “그 날 후로는”(욤) 여기서 ‘그 날’은 하나님의 모든 구원 사역이 완성되는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의 날인 동시에 본서에 기술된 모든 예언과 규정과 지침들이 완전하게 성취되는 때를 가리킨다.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원전상 본서는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란 뜻의 ‘여호와 삼마’라는 단어로 종결되는 바, 이는  에스겔 선지자의 전(全)사역을 함축하는 본서의 총괄적인 주제라고 말할 수 있다. 곧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 중에 목격한 여호와의 영광의 떠나심(10:18-22;11:22-24)과 다시 돌아오심(43:4)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새 성전에 거하시면서 다시는 당신의 백성을 떠나지 않으시리라 하신 약속으로 귀결되며(43:7) 결과적으로 그 모든 사역이 이 ‘여호와 삼마’로 종결되는 것이다. 이 성읍이 12지파, 곧 전 이스라엘의 공동 소유란 점에서, 단순하게 여호와의  처소를 지칭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새 이스라엘과 그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라는 보다 포괄적이고 궁극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이 성읍은 정사각형 모양이 상징하는 것처럼 완벽할 것이며(참고 계 21:16), 각 문의 이름이 보여 주는 것처럼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 되어 한 성읍을 위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성읍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가 될 것이다.

 


 

참 고 도서

 


 

1).강규성 외, 두란노 HOW주석(에스겔).(두란노아카데미, 2012)

 

2).강병도 편자, 『카리스종합주석-구약』(서울 : 기독지혜사, 2003)

 

3).박성문, 『위대한승리자들』(서울 : 도서출판 세줄, 2007)

 

4).원용국, 『성서고고학-구약편』(서울 : 호석출판사, 2011)

 

5).정규남, 『구약개론』(서울 : 개혁주의 신행협회, 2011)

 

6).차준희, 『구약성서의 신앙』(천안 : 한국신학연구소, 1997)

 

7).에드워드 J. 영, 『구약총론』오병세·홍반식 옮김 (서울 : 개혁출판사 )

 

8).브루스 M. 메쯔거 『사본학』강유중·장국원 공저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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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Charles 디어, 「에스겔,」Bible Knowledge Commentary 15, 김정림 옮김(서울: 두란노, 1988)

 

11).Cooper, L, E. Ezekiel. NAC Vol. 17. Nashville: Broadman Pess,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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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John B. Taylor, 『에스겔』틴델 구약주석 16, 정일오 옮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220

 

15).Jon McGregor,『에스겔』IVP 성경주석:구약, G.J. 웬함 등 편집(서울 IVP,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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