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에스겔서와 스가랴서의 메시야비교

제6장 결 론-에스겔의 새언약

호리홀리 2015. 2. 20. 13:14

제6장 결 론

 


 

  지금까지 위에서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의 배경과 내용, 역사적․사회적․문학적․신학적 배경을 살펴보고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의 메시지 및 메시아 예언의 비교를 통하여 포로 전에 많이 있었던 에스겔 선지자의 책망과 심판을 알아보았다. 또한 포로 후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의 비젼과 위로에 대한 메시지 및 예언을 살펴보았다.

 

  포로전에는 책망, 경고, 심판의 메시지가 많았다면 포로후에는 위로, 비젼, 메시야예언과 메시아 득망사상이 많다. 포로전 그들이 실패한 이유는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이다. 이제 헤세드의 하나님은 메시야를 통한 새 언약을 선포하셨다.(에스겔, 예레미야) 스스로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기에 새 언약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역사상 인류와 맺었던 언약에선 아담 언약(에덴동산 언약),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시내산 언약(모세 언약), 다윗 언약, 레위 언약, 그리고 새 언약(평화의 언약)이 있다. 예레미야 33:20-21절에서 보듯이 열조와 맺은 언약 가운데 노아, 다윗, 레위 언약은 파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언약들은 약속 형태의 언약이기에 깨뜨릴 수 없는 것이다127).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의무 형태의 언약인 시내산 언약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있던 이 언약이 많은 현대 학자들은 앗수르와 헷 족속의 왕들이 그들의 봉신에게 부과한 고대의 종주권 조약이 모델이었다고 말한다.128) 이 종주권 언약은 6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군주를 소개하는 전문, 군주의 위대한 업적을 약술하는 역사적 서문(신 1:6-4:49), 조약 규정들(신 4:44-26:19), 신들을 부름(증인의 명단)(신 31:19-22; 31:38-32:45), 복과 저주의 선포(신 27:15-28:68), 조약의 영구화를 위한 조치. 신명기서는 이런 형태로 써졌다. 여러 언약의 구성요소가 있을지라도 언약의 본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그들은 그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맹세이다(출 19:5, 신 27:17).

 

  그리고 새 언약과 대조되고 있는 시내산 언약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낸 것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였기 때문이었다(출 2:24; 6:4; 학 2:5). 그리고 예레미야의 대조는 단순히 모세 언약과의 대조만은 아니다.129)

 

  모세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조약의 규정들인 율법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그것은 완전하고 선하고 흠이 없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이것을 마음에 두라고 하셨지만은 그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배교함으로 그들이 언약을 파기한다. 언약을 파기한 것은 율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받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었다.

 

  새 언약이 필요하게 되는 이유는 시내산 언약을 사람들이 단순히 깨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가 그들과 연합 했을지라도’, 즉 그렇게 사랑하고 친밀한 관계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언약을 깨었기 때문이다130). 결국 하나님은 이들에게 바빌론을 사용하여 선민으로 택한 백성을 훈련하게 하였다. 때문에 절체절명의 어려운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고 위로가 되며 회복을 위해서 메시아가 오기를 갈망 했으며 이전에 깨어졌던 새 언약이 필요했다. 그래서 새로운 성전이 회복되고, 새로운 예배가 회복이 되며, 새로운 나라가 회복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1. 새 언약

 


 

1). 새 언약의 4대 원리

 

  첫째, 렘 31:31-3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구약에서 ‘새 언약’이 언급되고 있는 곳은 오직 이곳뿐이다. 비록 짧은 내용이긴 하지만 본 절로부터 34절까지는 본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해당되며 구약 전체에서도 가장 심오한 부분에 해당되며 구약 전체에서도 가장 심오한 부분 중의 하나이다(렘 31:31). 훗날 쿰란(Qumran) 공동체는  여기에 근거해서 자신들을 새 언약의 사람들로 이해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새 언약은 강력한 율법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서 모세 언약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분명 본문은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의 피 언약에 대한 예언이라 할 수 있다(눅 22:20;고전 11:25;히 8:8-9:28).

 

  새 언약의 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여호와 간에 시작된 언약이 제시되고  있다(출 19:1-24:11). 언약의 계속적인 존속 여부는 여호와를 계속적으로 주로 인정하느냐 하는 문제, 곧 언약에 규정된 조항과 약속에 대한 계속적인 순종 문제에 달려 있었다(11:1-8). 이러한 율법에 순종하지 못하면 심판과 언약에 명시된 저주 조항의 가동이라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반면에 순종은 언약의 축복을 가져왔다. 그러나 모세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언약 규정 조항에 순종하는 데 언제나 실패했었음을 보여 준다. 여호와께서 강력한 구원의 능력으로써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 첫 번째 언약을 파기하고 말았기 때문에 이제 새로운 언약이 필요했다(렘 31:32). (Thompson, Bright).

 

  이제 여호와는 백성들의 내적인 성품의 변화를 주실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순종할 수 있도록 할 것임을 선언하신다. 즉 여호와는 그들의 마음에 그의 율법을 기록할 것인 바 이는 곧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도의 삶에 전인적이고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을 암시한다(롬 8:1-11). 한편 옛 언약은 돌 위, 혹은 책에 기록되었었다(출 24:7;31:18;신 4:13). 그리고 기록될 장소로서의 ‘마음’이란 표현은 렘 17:1에서는 죄와 관련되어 쓰이고 있다(렘 31:33). 여기에는 변화가 어느 정도까지 일어 날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즉 제사장이나 선지자 등이 ‘여호와를 알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을 정도까지 될 것이다. 이처럼 인간적 중보(仲保)가 필요 없이 작은 자에서 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다 여호와를 알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는 이사야 54:13에도  나온다. 이 말은 신약의 성도가 믿음의 선배로부터 전혀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체험적으로 교제하는 것이 외부의 지시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뜻한다. 즉 죄사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과 더불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신령한 은혜를 체험 함으로써,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Cunliffe-Jones). 한편, 여기서 ‘알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ע������י)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 두 당사자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깊고 친밀한 인격적 앎이라는 대단히 심오한 개념을 담고 있다(렘 31:34). 

 


 

  둘째, 겔 36:26-28절, 하나님의 이스라엘  회복 사역은 단순히 귀환과 죄사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 갱신까지 이르는 완전한 것임을 시사한다. 성경의 용례상 ‘영’(������������ר, 루아흐)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행위를 제어하는 내적 본질로(살전 5:23), ‘마음’(ב������ 레브)은 인간의 지, 정, 의를 포괄하는 인성의 좌소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이 두 단어는 인간의 전인격을 총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다(겔 36:26). 따라서 이 두 단어 앞에 ‘새’라는 형용사가 첨가된 것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온전한 영적 갱신을 예고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새 언약 백성의 반열에 들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렘 31:31).

 

  36:27절에 ‘내 신’은 하나님의 성령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현은 구약의 용례상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란 점에서(사 42:1;44:3;59:21;욜 2:28) 본 구절 또한 이스라엘의 회복이 메시아 시대의 시작임을 보여준다(37:14;39:29).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겔 36:28) 성경을 통해서 일관되게 제시되어온 하나님과 그에게 속한 백성 사이의 언약 체결의 주제가 다시금 반복된다.

 


 

  셋째, 마 26:26-28, 눅 22:20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눅 22:20절에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 여기 언급된 잔은 유월절 식사 중 마시게 되는 4잔 중 식사 후에 분배되는 마지막 잔으로 보인다. 잔은 단순한 그릇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잔 속에 담겨진 포도주를 가리킨다. 이 포도주가 예수의 피로 세운 언약이 된다는 묘사는 출 24:8과 비슷한 내용이다. 그러나 누가는 여기서 ‘새로운’(kainov, καινός 카이노스)이라는 표현으로 모세의 계약과 예수께서 세우시는 언약을 구분시키고 있다. 즉 더 이상 짐승의 피로 하나님과의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로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구원이 약속되는 새 계약이 성립되었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는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예수의 희생과 구원의 능력을 기념하고 기억하게 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이것이 성찬 예식의 시초가 된 것이다. 이 성찬 예식은 예수의 말씀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보여 준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기념하고 체험케하는 것이다.

 


 

  넷째, 히 7, 8, 9, 10장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18-22)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히7:28)

 


 

히브리서 8:4-8:13절에서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5절,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6절,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7절,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8절,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9절,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10절,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11절,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12절,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절,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9:15절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종말론적 구속을 성취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기로 약속하신 새 언약을 실현시키셨다(8:8-12;10;16,17;렘 31:31-34). 따라서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신 목적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첫 언약하에서 외형적인 면만 속죄한 불완전한 요소를 해결하여 온전한 속죄를 이루었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율법의 불완전성을 해결하여 양심까지 깨끗하게 속죄시킴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하여금 기업을 얻게 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녀들에게 주어질 ‘기업’은 죽은 사람의 유언에 따라 얻는 재산을 가리키는 것으로(Morris) 영원한 구원을 시사한다(1:14;5:9, Lane).

 

  히브리서 10:16-10:18절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예레미야 31:31-34이 본문 외에 이미 8:8-12에서 인용되었으나 8장의 인용은 옛 언약의 희생 제사가 효력을 발휘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반면에 본문의 인용은 그리스도인에게 미친 새 언약의 완전성을 강조한다(Bruce, Lane). 그래서 저자는 본문에서 예레미야 31:31-34절의 내용 중 31:33, 34절만 선별하여 인용하고 있다. 저자는 이 선별된 본문의 인용을 통해서 새 언약의 두 가지 약속에 대해 언급한다.

 


 

   (1)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 이것은 새 언약 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더 이상 외적인 율법에 의존할 필요가 없으며 율법을 이마나 팔에 기록할 필요가 없음을 시사한다(출 13:16;신 6:8).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결단과 의지를 나타내며 내적인 생활을 가리키는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기 때문이다(Behm, Lane).

 


 

   (2)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 옛 언약 하에 있던 희생제사는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어서 반복해서 제사를 드릴 수 밖에 없었지만 (3절) 새 언약 하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아니하시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더 이상 반복할 필요가 없는 영원한 제사임을 시사한다(Bruce, Lane).

 

앞서 인용된  예레미야 예언의 성취는 예수의 희생적인 죽음으로 인해 초래된 새로운 상황과 연결된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더 이상 속죄제사가 필요하지 않음을 시사하며 동시에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드려진 희생제사의 영원한 효력을 나타낸다(Peterson). 그 결과 새 언약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게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19-22절).

 


 

2). 예레미야 32:31-34절을 텍스트로 해서 새 언약의 4가지 원리

 


 

(1). Self-Evidence(자명성)

 

  예레미야 31:34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다 아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고민은 선민의식이었다. 우리는 과연 선민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는가? 아버지에 대한 상처였다. 왜 우리를 때리시는가? 나라를 망하게 하시고 흩으시고 포로로 끌고 가셨는가? 이 모든 것이 해결된 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이다.

 

  남성 성인 3,000명 이었으니 아이들과 부녀자들 까지 족히 1만명을 넘었을 것이다.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의 메시지는 요엘서로 시작된다. 사람들이 성령에 취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우리가 술 먹고 취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각 나라 방언으로 듣는 것은 요엘서의 성취”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날 설교의 서론에 불과했다. 본론은 시편 16, 시편 110이었다. 시 16편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예언되었다는 것과 시 110편에 예수그리스도의 승천과 통치에 관한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2:25-28절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베드로는 철저하게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다. 죽음, 부활, 승천, 통치까지....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바울의 설교논리와 베드로의 논리가 같다. 사도행전 13:34절에 시편 16:27절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설교하고 있다. 시편 16편은 2, 22, 34, 35, 89, 110편과 함께 유명한 메시아 예언이다.

 

  시편 22편은 십자가상에서 일어날 상황을 미리 예언한 것이다. 숨을 쉴때마다 조여드는 고통,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십자가형틀이었다. 요 19:28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시 22:7-8은 마 27:35, 요 19:23-24절의 예언이다. 사 53장은 3인칭 “그”로 시작하지만 시 22편은 메시아 자신의 이야기이기에 1인칭 “나”로 시작된다.

 

  행 2:26-27절의 베드로의 설교는 시 16:8-11절을 인용한다. 내 시신이 무덤에서 썩지 않는 것이 믿어지겠는가? 우리 옆에 마가의 다락방 아래 다윗의 무덤이 있는데, 베드로의 말이 이해가 되겠는가? 시편의 주인공이 다윗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그가 누구냐? 메시아라는 것이 베드로의 설교였다.

 

  시 16편은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다. 3절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다. 땅에 있는 연약하고 말썽 많고 부족한 우리를 향한 예수그리스도의 고백이다. 주께서 날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가 무슨 더 큰 은혜를 더 구할 수 있겠는가?

 


 

(2). Voluntarism(자발성)

 

  엘리야가 말하기를 하나님 한번만 기적을 보여주시면 저들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럴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Gentle Whisper로 말씀하셨다. 겔 36:26-27절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자발적으로 주의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이다. 못 이겨서 하거나 부탁해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조용히 오신 것처럼 부드러운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다. 눅 24:45절에 부활하신 후 자신을 적극적으로 증거 하거나, 빌라도나, 적을 멸하실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마음이 먼저 항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으로 엘리야의 말같이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Gentle Whisper, 부드러운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이 변화되었고 뜨거워진 것이다. 눅 24:32절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이다. 이것이 신약시대 부활 후 교회에서 하나님이 새 언약 백성들을 만나는 방법이다. 말씀을 풀어주시는 것.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진 것이다.

 

  시 16:9-10에서 예수님은 기쁘고 즐겁게 십자가 지셨다. 사랑하는 이땅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쁘고 즐겁게 십자가 지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헌신한들 십자가에 비교될 수는 없다.  불신자들이 우리를 향해 노예같이, 환자같이 산다고 할 때 우리가 기쁨으로 예배하고 섬길 수 있다면 그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기쁨으로 섬기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전도이다.

 


 

(3). Perfection(완전성)

 

  렘 31:31-34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1).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자녀관계도 되지만 결혼관계로 묘사한 것이 언약이다. 구약은 결혼관계로 신약은 결혼관계를 초월하는 관계를 보여주신다. 곧 완전한 용서인 것이다. 출 24:8-11절의 언약의 피는 이스라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 곧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최대의 명절 유월절에 먹는 어린양은 희생양이었다. 그런데 그가 나를 위해서 희생된 것이다. 어린양이 존귀하신 하나님인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어찌할꼬 하며 회개했다.

 

  신약시대는 유월절의식이 성만찬이 된 것이다(마 26:26-28) 그러므로 아직도 유월절을 지켜야한다는 것은 이단인 것이다. 당시 예수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는다는 말이 오해가 되어 핍박을 받게 되었다. 피와 살을 먹는 것은 상징이며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 즉 연합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제로 다루지 아니하신다. 이것이 새 언약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광야로 내 보내실 때, 나를 혹독하게 훈련시키실 때 힘들어도 이것을 안다면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4). Assurance(확실성, 히브리서 7-10장)

 

  히브리서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기업은 유업 즉 유산이다. 천국을 유산으로 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산은 부모가 죽을 때 받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죽을 수 있는냐는 것이 유대인의 생각이었다. 즉 신성모독인 것이다. 히브리서 9:16-17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죽으셨다. 인간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그분이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유대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하나의 의문은 예수님이 꼭 승천하셔야 했느냐는 것이다.

 

  십자가 부활로 말미암아 대제사장으로 준비되신 것이다. 대제사장직에 대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다. 원래 인간인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가지고 휘장을 지나 지성소로 들어가 언약궤에 피를 뿌리고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고 나온다. 그러나 인간 제사장은 완전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으로 돌아가셨으나 부활은 희생양으로 한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으로 하신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대제사장은 그 안에 들어가 계신다. 이 땅의 지성소를 폐하시고 하늘의 지성소에서 왕의 권위로, 여기서 왕으로서의 사역이 설명된다. 하나님께 중보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모두 원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더럽고 냄새나고 시기, 질투 등등 그때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중보자가 되셔서 나를 변호해주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의심은 다 풀어진 것이다. 그리고 녹아졌다. 그들은 도저히 헤어지지 못하고 남았다. 이렇게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초대교회가 이것을 경험했다.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충만해야한다. 억지로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억지로 하지 않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가 힘들다하면 안된다. 새 언약의 성도는 기쁨으로 감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성도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밝고 건강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이 모든 구속사는 하나로 귀결된다.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억지로 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는가?(뉴톤, C. S. 루이스) 루이스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의 차이는 오직 은혜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천사의 범죄는 용서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용서 하신다. 인간은 은혜로 사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예배 때 마다 찬양한다. 천국가면 요한계시록 7, 14장 같이 모두가 찬양대원이다. 구원의 은혜 앞에는 항상 찬양이다. 은혜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