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에스겔서와 스가랴서의 메시야비교

제4장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의 메시아 예언 비교

호리홀리 2015. 2. 20. 13:08

4장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의 메시아 예언 비교

 


 

Ⅰ. 에스겔서의 메시아 예언

 


 

1. 하나님께서 행하신 여덟 가지 회복(34-48장)

 


 

하나님의 주권과 임재에 대한 것이며 여기서는 회복을 다루고 있는데 여호와의 (목자 역할, 땅, 영광, 백성, 언약, 주권. 백성 가운데 임재, 땅에서 여호와의 임재)회복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서도 이방인인 에돔에 대한 심판과 마곡 땅에 있는 곡에 대한 심판이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런 심판에 대조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복이며, 하나님은 마른 뼈와 같은 백성들이 회복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특히 성령을 통한 회복은 회복의 핵심이다.

 

 

 

1). 여호와의 목자 역할 회복(34장)

 

   34장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목자들로(1-16절), 백성들을 그 양으로 (17-24절) 비유해서 메시지를 주고 있다(25-31절). 목자 비유의 34장은 내용적으로 이스라엘의 목자들에 대한 심판 선포(1-10절), 여호와께서 목자로서 양들을 담당하시겠다는 약속(11-16절), 다윗을 목자로 세우시겠다는 약속(17-24절), 화평의 언약(25-31절)을 통한 회복을 말씀하신다.

 

 

 

(1) 목자들에 대한 심판 선포(1-10절)

 

  타락한 목자들의 행동에 대해서 심판한다. 백성들의 필요로 채워주지 않았을뿐 아니라 자신들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백성들을 악용했다. 또한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돌아보지도 않았고(4절), 영적 지도력과 도덕성도 부족했다(5-6절).

 

여기서 ‘목자’(ה������������ 로에)라는 단어는 ‘라아’(ה������������ 양을 치다)라는 동사에 명사형이다. 여호와를 ‘목자’로 은유하는 것은 고대 근동의 문헌뿐 아니라 성경에도 자주 나타난다(사 44:28; 렘 2:8; 10:21; 23:1-6; 25:34-38; 미 5:4-5; 슥 11:4-17).

 

  이런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화가 있음을 밝힌다. 양들을 먹여야 하는데, 오히려 이들이 양을 먹은 것이다(2절). 자신들을 위해서만 위해서 사역한 것이다. 4절에서는 거짓 목자들의 한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연약한’ 자를(לוֹת������������ 나헬레트) ‘강하게’(ק������������ 하자크) 아니하며 ‘병든 자를’(ה������חוֹ������ 하롤라) ‘고치지’(א������������ 라파) 아니하며 ‘상한 자를’(ת������������������������ 니세베레트) ‘싸매어’(שׁ������������ 하바쉬)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ת������������������  니다하트) ‘돌아오게’(שׁוּב 슈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ת������������א 오베데트) ‘찾지’(שׁ������������ 바카쉬)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내 양떼를 즉, 내 백성들을 그들의 손에서 찾아 오시겠다는 것이다.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도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하리라”(10절) 

 


 

(2). 여호와는 양들의 참 목자(11-16절)

 

  하나님께서 목자 없는 양들에게 친히 목자가 되셔서 ‘내 양’을 찾고 찾으시는 분으로서, 양들에 대해 관심과 사랑을 갖고 그들을 구원하며 그들을 돌아보고 먹이신다(14-15절). 목자는 양떼를 ‘찾고’(ר������������ 바카르), 그들을 ‘건져 내며’(ל������������ 나찰), 만민 중에 ‘끌어내고’(הועא 호쩨), 열방 중에서 ‘모으며’(ץ������������ 카바츠),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고’(הביא 헤비), 그들을 ‘먹이며’(ה������������ 라아), 좋은 꼴로 ‘먹이고’, 그들은 살진 꼴을 먹으며, 그들을 높은 산 위에 ‘두실 것이며’(ה������������ 하야), 그들은 좋은 우리에 ‘누울 것이다’(ץ������������ 라바츠). 즉 구원, 인도와 보호, 먹이는 사역을 제대로 하는 참 목자의 사역을 감당하신다.

 


 

(3). 다윗을 목자로 세우시는 약속(17-24절)

 

  하나님께서는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 살찐 양과 파리한 양 사이를 심판하는 재판장이시다. 또 양 떼를 구원하는 분으로서 ‘한 목자’(ד������������ ה������������ 로에 에하드)를 세워 양들을 먹이게 하실 것이다. 원어상 '하나' 라는 뜻 외에 '유일한'이란 뜻도 함축한다. 이 뜻을 취할 경우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세우실 새로운 목자의 유일성을 강조하며 동시에 이전에 분열했던 왕국(유다,  이스라엘)의 통합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Delitzsch, Schroder). 그가 바로 ‘내 종 다윗’이고 그는 양들에게 참 목자가 되며,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백성들을 먹이도록 하신다.

 


 

(4). 화평의 언약(25-31절)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이는 새로운 이스라엘에 주어질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과 평안의 약속이다(사 54:10;55:3;행 3:25;롬 14:17;히 8:10).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과 ‘화평의 언약’(לוֹם������ ית������������베리트 샬롬)을 맺으신다. 이 언약은 악한 짐승을 ‘그치게’(ת������������  샤바트) 하고 그들로 하여금 안전히 거하게 하며, 잠을 자게 해주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ן������������  나탄, “내리며”) ‘비를 내려 주신다’(ד������������ 야라드, 26절), 즉 ‘화평의 언약’은 말 그대로 ‘샬롬’임을 말해 주듯이 안녕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삶과 목자의 보호하심(25절), 복 주심(26절)이다. 또 이런 복은 열매와 소산을 맺는 풍성한 삶을 허락하고, 땅에서는 안전을 약속하신다. 이 복은 영적, 물질적 안정도 허락하신다(27절).

 


 

2). 여호와의 땅의 회복(35:1-36:15절)

 


 

(1). 세일산에 대한 심판(35장)

 

  하나님께서 세일 산에 대한 심판의 당위성을 들어 설명 하신다. 그들이 심판을 받는 첫 번째 이유는 ‘옛날부터 가진 미움’(ה������י������ 에이바) 때문이다. ‘에이바’는 ‘반감, 증오, 미움’이라는 뜻이다. 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이것은 창세기의 기록대로 리브가의 뱃속에서부터(창 25:22-23) 시작해 에서와 야곱의 갈등은 더욱 발전했다. 이것은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칠 때, 에서의 후손들이 지켜보면서 유다가 심판받음을 좋아했던 것을 의미한다(옵 1:1-14). 이런 잘못으로 인해 세일에게 피가 따르게 되며(6절), 황무지와 황폐가 있고(7절), 살육을 당하며(8절), 패망해 없어질 것이다(9절). 에돔이 즐겨한 피흘리는 행위에 대한 심판적 결과가 언급 되는데, 이는 히브리인들의 동해 보복 사상에서 유추된 구절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의 피를 흘리게 한 자는 반드시 자신의 피를 흘리게 되는 심판적 형벌을 당하게 됨을 보여준다(창 9:6;출 21:23-25).

 

그리고 에서가 멸망하는 두 번째 이유(10-12상절)는 유다와 이스라엘이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교만 때문이었다(10절).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조롱한 행동이기도 하며 욕(243, 네아차)은 원어상 ‘경멸하다’, ‘신성 모독하다’란 뜻을 가지는 바, 에돔이 이스라엘을 멸시하고 그 멸망을 조소한 모든 행위들이 곧 하나님을 멸시하고 대적한 종교적 차원의 극악한 범죄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나 10절에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셨다’,(ה������������ ם������ ה������יה 야웨 샴 하야). 이런 조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미움이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11절). 12-13절에는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표현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의 말과 생각을 들으시며 그 마음의 교만과 오만과 조롱을 아신다는 뜻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에서를 황무케 하실 것이다. 따라서 전반부의 전체 메시지는 에돔을 황폐시키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고 있다.

 


 

(2). 원수에 대한 심판 예언(36:1-15)

 

   하나님께서 대적으로 기업이 되게 하시고(3절), 이제 백성들에게 설명하신다(4절). 하나님께서 친히 백성들의 대적들을 대항하시고(5절), 백성들의 수욕 당함을 아시며(6절), 결국 이방인들로 하여금 수욕을 당케 하신다(7절).

 

  8-15절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땅에 대해 응답사시는 내용이다. 땅은 다시 열매를 맺게 디고(8-9절). 모든 이스라엘은 땅으로 돌아와 번성하며(10-11절) 영원히 거하게 되고(12-14절), 다시는 욕을 당치 않게 될 것이다(15절).

 

  하나님께서는 “온 땅이 즐거워할 때에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되”(14절) 라고 하시지만 하나님께서 땅을 회복케 하시는데 그 땅과 함께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거하게 하시며, 번성케 하시고, ‘기업’이 되게 하신다. 즉, 산과 땅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업’이 되게 하심을 강조하신다.

 

 

 

3). 여호와의 영광의 회복(36:16-38)

 

  36:16-38은 이스라엘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크게 세 단락으로 회복의 도래(16-23절), 회복의 일곱 가지 요소(24-32절), 회복의 결과(33-38절)로 나눌 수 있다. 이 회복은 하나님의 이름을 회복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32절), 이런 면에서 ‘여호와의 명예’라는 주제로 전체를 이해할 수도 있다. 회복의 근거는 ‘거룩한 이름’(֑י������������������ ם������������ 쉠 코드쉬) 때문이다. “거룩한 이름”은 20, 21, 22절에 각각 한 번씩 나타난다. 하나님의 회복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고, 포로로 잡혀간 열국에서 더럽혀졌다. 백성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이 땅을 더럽혔고,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더럽혔으므로 하나님께서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셨다. 즉 백성들은 땅을 더럽힘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큰 이름’(וֹל������������������ י������������ 쉐미 하가돌, 23절)이며, 열국 중에서 거룩해질 것이다(23절).

 

  하나님께서는 명예 회복을 위해 백성들을 회복시키신다.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 포로 귀환(24절), 용서와 속죄(25절),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심(26절), 성령님을 통해 말씀을 지키도록 도우심과 연관된다. 또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신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되고(28절), 주신 복으로 풍성함을 누리게 되며(29-30절), 죄를 싫어하게 된다(31절).

 

  이렇게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백성들을 회복시킨 결과로 성읍들은 다시 건축되고 백성들은 다시 거하게 되며(33절), 황무한 땅도 개간하게 된다. 민족들은 땅의 거민으로 거하고 에덴동산같이 되어(35절), 여호와께서 모든 것들을 회복케 하셨음을 알게 된다(36절). 이렇게 하나님의 명예는 이방인들의 생각이 바뀌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통해 회복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도 회복된다. 37절에서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는 말씀은 ‘내가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으로 그들을 위해 행하도록 구하여지게 할 것이라’는 뜻이다. 즉 포로에서 귀환하는 사람들의 수가 양 떼같이 많아지며, 수많은 사람들이 여호와를 알게 되어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케 한다는 약속이다(37-38절). 따라서 이스라엘의 자발적 헌신을 촉구하는 말로 비록 이스라엘의 회복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역사로 성취될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그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의 순종과 사역의 동참을 요구 하신다.

 

 

 

4). 여호와의 백성의 회복(37:1-14)

 

  유다 백성들의 절망적인 상태는 바빌론의 멸망(주전 586년)과 포로(주전 605년, 597년) 사건을 통해 생겨난 것이다. 국가적 멸망은 그들이 유지해 온 모든 확신과 신학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따라서 그들의 상황은 절망적이었고, 마치 마른 뼈들이 널려 있는 골짜기의 환상과도 같았다. 하나님께서 그런 절망 속에서 에스겔에게 ‘여호와의 손’이 임하게 하시고, 환상 가운데 그들의 실상이 마치 골짜기의 뼈와 같음을 보게 하신다. 그 골짜기에는 뼈들이 심히 많고 그 뼈는 매우 말라 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3절)라고 물으신다. 인간적인 안목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사건임을 반어법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에스겔의 대답은 “주께서 아시나이다”이다. 이것은 확신이 없이 인간적인 안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가능한 것이며 또한 오직 하나님만이 그 일을 가능케 하실 유일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묵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Delitzsch, Schroder). 즉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모든 백성들이 뼈들과 같이 많고 말라서 소망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에서도 에스겔에게 소망을 주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 소망이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부활을 경험케 하시고, 두 나라는 나뉘어 있지만 미래에 한 나라로 회복된다는 소망을 보여 주신다.

 

  먼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 뼈들에게 말씀을 예언하기를 명령하신다(4절). 이 예언을 통해 ‘영’이 들어가 그들을 살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명령에 에스겔은 순종한다.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에스겔이 예언 할 때 뼈들은 서로 맞아 들어간다(7절). 그러나 외형적 모습을 통해 회복은 되었지만. 내적 회복은 되지 않아 그 속에 ‘영’이 없다(9절). 즉 말씀을 대언하는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4-8절).

 

  하나님의 두 번째 명령은 사방에 있는 ‘생기’의 불어옴에 대한 간구이다. 이 예언을 통해 뼈들은 “큰 군대”(10절)가 되었다. 그리고 형태만 있는 게 아니라 실제 살아 생명력을 갖게 된다. 여기서 ‘일어나서 서는데’(원어: 야암 두 알 라글레헴)는 문자적으로 ‘그들의 발로 일어서서’란 뜻이다. 이는 곧 그들에게 주어진 생명이 그들 스스로 전인격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온전한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11-14절은 부활 환상에 대한 해석이다. 이 뼈들(וֹת������������������ 아차모트)은 바로 이스라엘 족속이며, 그들은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의 뼈들은 말랐고, 우리의 소망은 없어졌으며, 우리는 모두 멸절되었다(11절).  문자적 의미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끊어버렸다’이다. ‘끊어버렸다’란 말이 여기서는 하나님의 관계 단절을 의미한다는 점에서(시 31:23;86:6;사 53:8) 이는 그러한 하나님의 영역에서 축출당한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자책과 회한을 반영한 말로 볼 수 있다. 자신들의 모습에 대한 인식과 절망 그리고 자포자기이다. 하나님께서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회복을 약속하시는데, 이 회복은 ‘무덤’(ר������������ 케베르)을 열고 나오게 하시는 것이다. 이 회복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갖게 되며(13절), ‘내 신’(י������רוּ 루아흐)즉 ‘성령님’을 통해 회복케 하신다. 말씀하고 행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14절하).

 


 

5). 여호와의 언약의 회복(37:15-28)

 

   막대기에 유다와 이스라엘의 자손 그리고 요셉 곧 에브라임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쓰고(16절), 이 둘을 하나가 되라고 명하신다(17절). 이것은 북 왕국 요셉과 남왕국 유다가 한 막대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19절). 그리고 한 왕(혹은 한 목자)을 통해 나라가 통치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18-22절). 이 나라는 다시 나뉘지 않으며(22절), 우상을 섬기지도 않게 된다(23하절).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이 단락에서 ‘한’(ד������������ 에하드)이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다. 22-24절에서 ‘한’이라는 단어가 세 번 나타나는데, ‘한 나라’( ד������������ גוֹי 고이 에하드), ‘한 임금’(ד������������ ������������������ 멜렉 에하드), ‘한 목자’(ד������������ ה������������로에 에하드, 24절)이다.

 

  전체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은 ①두 막대기가 외적 연합을 갖게 되며(15-17절), ②두 막대기가 연합하고(18-19절), ③하나님께서 정치적·영적 연합을 통해 두 왕국을 하나 되게 하시며(20-25절), ④화평의 영원한 언약 관계를 통해 한 나라가 되게 하신다(26-28절).101)

 

 

 

  우리는 두 막대기의 회복(15-28절)에 대한 말씀에서 열세 가지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할 수 있다. ①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열국에서 취하여 모으실 것이고(21절), ② 그분의 백성을 고토로 돌아가게 하시며, ③ 한 나라를 이루게 하시고(22절), ④ 한 왕을 세우실 것이며(22하, 24상절), ⑤ 회복된 나라는 결코 나눠지지 않을 것이고(22절), ⑥ 그 분의 백성들은 우상을 다시는 섬기지 않을 것이며(23절), ⑦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구원하고 정결케 하실 것이고, 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실 것이며(24절), ⑨ 백성들을 하나님의 땅에 영원히 두실 것이고(25절), ⑩ 새로운 화평의 언약을 세우시며(26상절; 34:25; 렘 31:31-34)), ⑪ 그 땅에서 견고하고 번성케 하실 것이고(26절), ⑫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영원히 거하실 것이며(27절), ⑬ 이스라엘로 열방의 증거가 되게 하실 것이다(28절).102)

 

  24-28절에서 말씀하시는 회복은 첫째로, 하나님과 백성들의 관계성 회복이다. 즉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땅을 회복케 하셔서 성소를 그들의 땅에 두신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고 약속하신다. “네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있으리니”(28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성소인 ‘내 성소’(י������������������������ 미크다쉬)를 그들 중에 영원히 세우신다는 뜻이다(27절).

 


 

6). 여호와의 주권의 회복(38-39장)

 

  38-39장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대적인 마곡의 곡 및 그 수하 집단과 벌일 최후의 전쟁을 묘사하고 그 결과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선포한다. 따라서 에스겔은 전쟁의 위협이나 외부 및 경쟁이나 내부의 나쁜 지도력이 모두 제거되고 생존 환경이 잘 정리된 상태에서 새로운 성전 건설을 위한 청사진을 40-48장을 통해 선포한다. 이런 에스겔의 회복 프로그램은 그 과정의 주체가 이스라엘 공동체나 그들의 지도자가 아니라,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두 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마곡의 공과 벌이는 최후의 전쟁이 어떤 역사적 실체를 지시하는지 해석자들은 오랫동안 고심해 왔다. 특히 곡의 정체가 더욱 그렇다. 곡은 에스겔 38-39장과 요한계시록 20:8절에만 등장한다. 그리고 창세기 10:2과 역대상 1:5에서 마곡의 곡은 메섹 및 두발과 함께 야벳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에스겔에서는 마곡의 곡을 여호와 하나님이 멸망시킬 최후의 전쟁 상대자로 지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체가 더욱 궁금하다. 학자들에 따라서 해석이 다르다. 곡을 에티오피아나 고트족 혹은 유럽을 침공한 무슬림이나 몽고 족속 혹은 현대사에서 스탈린이나 히틀러로 볼 수 있다고 하고, 또는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간 일원이었음을 감안하면 바빌론이라고도 한다.

 

  본 구절에서 그 마곡 땅에서 온 ‘곡’이 뒤이은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에 의해 수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의 ‘마곡 땅'’은 ‘로스와 메섹과 두발’을 포괄하는 명칭이다(Schroder). ‘곡’(גּגוֹ 고그)은 역대상 5:4에서 르우벤 지파의 후손으로 등장하기는 하나 개인적 명칭이기보다는 마곡이란 말에 대한 병행의 의도로 사용된 정치적 관료의 명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Schroder, Delitzsch). 곧 학자들은 ‘곡’의 어원을 ‘높다’, ‘장엄하다’, ‘오르다’란 뜻의 ‘게에’로 유추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 ‘곡’은 정치적 최고 권력자에 대한  명칭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 그러한 ‘곡’이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① 리디아 왕의 기게스(Gyges)로서 그의 이름은 앗수르 바니팔 문헌에 나타난 대로 ‘구구’(Gugu)로 보는 견해, ② 라스 솽라(Ras Shamrah) 문헌에 나오는 ‘가가’(Gaga)라는 신의 이름으로 보는 견해, ③ 알렉산더나 그와 유사한 역사적  인물로 보는 견해, ④ 구약의 몇몇 왕들(민 24:7;신 3:1, 13;4:47)을 위한 보편적인  장소로 사용되어 있음을 근거로 하여 행정적인 이름으로 보는 견해(70인역)가 있다. 이중 ①의 견해가 어느 정도 타당한 듯하나 본절에서의 ‘곡’은 본장의 묵시 문학적 형태상 그 이름의 역사성보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의 수장을 상징한다는 점, 곧 종말론적으로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대변하는 사탄을 지칭한다는 점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실제로 ‘곡과 마곡’은 계 20:8에서 하나님을 연합하여 대적하는 자들로 나타난다.

 


 

  38-39장을 읽는 대상은 포로로 잡혀가 회복을 염원하는 유다의 지도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겔의 예언이 추구하는 목적은 마치 이사야 40-55장과 같다. 이사야는 고국으로 귀환하기를 두려워하는 바빌론의 유다 포로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면서 회복에 대한 희망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원수들을 불러내는 여호와 하나님(38:1-6절)

 

  에스겔은 여호와로부터 “마곡 땅에 있는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곧 곡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여”(2절)라는 말씀을 듣는다. 그 내용은 “너를 돌이켜 갈고리로 네 아가리를 꿰고 너와 말과 기마병 곧 네 온 군대를 끌어내되 완전한 갑옷을 입고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가지며 칼을 잡은 큰 무리와 그들과 함께 한 방패와 투구를 갖춘 바사와 구스와 붓과 고멜과 그 모든 떼와 북쪽 끝의 도갈마 족속과 그 모든 떼 곧 많은 백성의 무리를 너와 함께 끌어내리라”(4-6절)는 것이다.

 

  곡의 동맹군은 다섯 나라 즉 바사, 구스, 붓, 고멜, 도갈마를 포함하여 메섹, 두발의 일곱 족속으로 ‘7’은 전부 혹은 완전하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들의 위치는 구스와 붓이 남쪽 끝에서 오고, 고멜과 도갈마가 북쪽 끝에서 오기 때문에 곧 벌어질 전쟁은 세계적 규모의 마지막 전쟁이 될 것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 세계 전쟁을 주도한 세력은 일곱 동맹국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가시적으로 살벌하고 가공할 만한 원수들이 몰려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여호와의 손길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2). 전쟁의 시기와 장소(38:7-9절)

 

  전쟁이 일어날 시기는 본 예언의 종말론적 특성을 극명하게 드러낸 말로서 여기 서 8절에 ‘여러 날 후’는 단순한 미래의 의미보다는 긴 시간의 축적으로 도래하는 최종적인 역사의 끝을 가리키는 말로 ‘해의 마지막 때’란 듯의 ‘말년에’와 동격으로 쓰여진 것이다(Delitzsch, Schroder). 곧 여기서의 ‘말년’은 궁극적으로 도래할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때인 메시야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다(사 24:22;계 20:7 이하). 곡이 전쟁을 일으키는 뚜렷한 목적이나 명분은 설명되고 있지 않지만 전쟁의 위세를 보여주고 있다. “광풍같이 이르고 구름같이 땅을 덮으리라” 여기서 ‘광풍같이’는 ‘폭풍’이란 일차적 의미 외에 ‘파괴하다’, ‘황폐하게 하다’란 결과적 의미를 함축하는데, 엄청난 폭풍이 지나간 뒤처럼 철저한 파괴와 황폐의 정황을 상징한다. 그리고 ‘구름’이 성경의 용례상 종종 완전한 절망과  재앙의 도래를 상징한다는 점에서(30:3, 18;욜 2:2) 본 구절은 곡의 세력이 이렇듯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괴시키고 황폐화시킬 만큼 막강함을 강조 한다

 


 

(3). 전쟁의 목표(10-17절)

 

  10절은 곡이 심중으로 “악한 꾀를 내어” ‘악한 꾀’(ה������������������������ ע������, 마하샤바 라아)란 ‘악한 생각을 품다’, ‘악한 계획을 도모하다’란 뜻으로 곡의 이스라엘 침략이 그들의 불의한 야심과 이기적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기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로 이러한 그들의 악의마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최후 심판을 위해 이용 하신다. 전쟁 대상자들은 “평온의 고을들”에 거주 하면서 “성벽도 없고 문이나 빗장이 없어도 염려 없이 다 평안히 거하는 백성”이다(11절). 전쟁을 통하여 얻으려는 것은 “은과 금을 빼앗으며 짐승과 재물을 빼앗으며 물건을 크게 약탈”(13절) 하는 일이다. 이와 같은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여호와의 주도적 역사로 인한 일이고 그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은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눈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이 다 나를 알게 하려 함”(16절)이다.

 

  마지막 날에 벌어질 세계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이 오래전에 계획한 사건이 실현 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곡과 그의 동맹국 일곱 나라는 북쪽 끝과 남쪽 끝에서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사로잡혀 간 이방 나라에서 이스라엘의 산으로 귀환해 오랫동안 평안히 거주하는 백성이 재물을 약탈하려고 몰려들 것이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일어난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를 알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전쟁의 의사도 없이 평안히 살던 이스라엘 백성은 엄청난 위기에 빠질 것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간섭하는 전쟁이므로 결국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하심만을 기억하고 깨닫게 될 것이다.

 


 

(4). 곡을 멸망시키는 하나님(18-23절)

 

  여호와 하나님이 간섭하는 전쟁이므로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전쟁에 광분한 곡이 이스라엘 땅을 치러 오면 드디어 하나님의 ‘노여움’이 표출될 것이다. 그 노여움은 큰 지진(19절)과 같은 자연 재해, 여기서 ‘지진’으로 쓰인 ‘라아쉬’(שׁ������������)는 원어상 ‘지진’이란 의미 외에도 ‘진동’, ‘동요’, ‘소란’ 등의 의미를 통해 이스라엘 땅에 일어날 실제적인 지진(earthquake, NIV)으로 보며(Delitzsch) 또 다른 학자는 상징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권능의 임함을 통한 땅의 진동이나 소란(shaking, KJV, LB, RSV)으로 이해한다(출 19:16, Schroder). 그 어떤 해석을 취하든지 ‘지진’이 하나님의 극한 진노를 상징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전염병과 피, 쏟아지는 폭우, 비처럼 내리는 큰 우박덩이와 불 그리고 유황 같은 재난으로 나타날 것이다(22절). 여기서 심판의 요소들이 더욱 구체적으로 열거된다. 이 재앙들은 소돔과 고모라에 임한 재앙과 출애굽 당시 애굽에 임한 재앙 등 성경에 나타난 거의 모든 종류의 자연적 재앙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13:11, 13;창 19:24;출 7:14-25;9:8-35;수 10:11) 전우주적 심판의 종말론적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곡과 그 동맹국에게 내려지는 재난을 통해 그들은 패배할 것이다. 곡의 패배에 이스라엘은 전혀 기여하는 바가 없다. 곡을 이긴 여호와 하나님을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존대함과 내 거룩함”을 보여 주실 것이다(23절).  ‘내 존대함’이란 원어상으로 모든 측면에서의 '탁월함'을 의미하는 바, 곧 하나님의 전지 전능 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대적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심으로써 그것을 목격한 대적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깨닫게 하신다. 이로써 하나님은 영적 이스라엘 된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변함없는 구원 의지를 드러내셨다.  

 


 

(5). 곡의 패배와 땅의 정화(1-20절)

 

  하나님은 곡의 왼손에 든 활과 오른손에 든 화살을 쳐서 떨어뜨린 후 이스라엘 산에서 쓰러뜨릴 것이다. 본 절은 일반적으로 활을 왼손에, 화살을 오른손에 들고 사용하는 모습에서 유추한 것으로 곧 하나님께서 곡 연합군의 모든 무기를 무력하게 만드시며 결과적으로 그를 철저한 패배와 멸망에 이르게 하시겠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문학적 표현이다(시 37:15;46:9).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독수리, 매, 까마귀와 같은 각종 사나운 새와 사자, 하이네나 ,표범과 같은 들짐승에게 먹힐 것이다(2-5절). 본 구절은 매장을 중요시 했던 고대 근동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죽어서까지 버려지는 극단적인 신적 저주의 정황을 암시하는 것으로, 패망한 곡의 군대가 매장조차 당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버려지게 되리란 예고이다(신 21:22, 23).

 

  여기서 하나님의 명백한 승리와 피하고 싶은 패배를 단언하고 있다. 이어서 하나님은 곡의 영토인 마곡과 섬에 평안히 거주하는 자들에게 불을 내릴 것이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불'은 일차적으로 38:22에 언급된 자연적 재앙의 하나인 동시에 이차적으로는 철저한 파멸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킨다(계 20:9, Schroder, Delitzsch). 그리고 “평안히 거주하는 자”는 지중해 연안의 해안국들과 섬나라들로서 곡과 동맹한 이방 국가들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는 특히 먼 지방이란 의미를 함축하는 바, 종말로 있을 적그리스도 세력의 전우주적 규합을 예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 절은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단지 이스라엘을 침공한 그의 군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곡의 고토와 그를 원조한 여타 이방 국가들에까지 미칠 것임을 가리킨다. 이는 또한 종말로 있을 심판의 엄중성과 적그리스도 세력의 철저한 소멸을 시사한다(계 20:7-10).

 

  그 다음에 곡의 패배로 인해 땅에 떨어진 무기들을 이스라엘 성읍 거주자들이 불살라 없애는데 7년이나 걸릴 것이라고 말한다. 또 전쟁 중 땅에 버려진 시체는 땅을 부정하게 하므로 거주민들이 일곱 달 동안 그 시체들을 매장할 것이고 그 장소는 ‘하몬곡의 골짜기’로 도시의 아름은 ‘하모나’(군대)로 부르게 될 것이라고 한다(11-16절). 여기서 ‘하모나’(ה������המוֹ)는 ‘많은 무리’, ‘소란’ 등의 뜻을 가진 ‘하몬’(המוֹ )에서 유래된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죽어간 수많은 곡 군대의 사체가 매장된 곳이라는 사실을 잘 암시해주는 이름이다.

 

  17절부터는 매장되지 않은 시신 처리를 언급하고 있다. 특히 ‘잔치’(ח������������, 제바흐)는 구약에서 짐승을 잡아 드리는 희생 제사를 말한다. 흔히 제사에서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이 피와 기름은 여호와의 것으로 따로 드리고 나머지 살코기는 나눠 먹는다. 그런데 여기서 제사에 참여해 제물을 먹는 자들은 사람이 아닌 ‘각종 새와 들의 각종 짐승’이다. 그들이 먹는 것은 죽은 시신들의 피와 살이다. 이것은 아마 죽임을 당한 곡의 군대에 대한 또 다른 처리 방식을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패배를 다시 한 번 단정하고 자축하는 모습을 거듭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6). 회복된 하나님의 영광(39:21-29절)

 

   21-24절은 역사의 종말에 벌어질 전쟁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전쟁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는 자신들의 하나님인 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 날 이후에 이스라엘 족속은 내가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을 알겠고”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방인들과는 달리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그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보호와 구원의 원천이 되며 유일한 신앙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의 ‘알겠고’는 단순한 이론적, 학술적인 하나님 지식이 아니라 그들이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목격하고 경험함으로써 터득한 전인격적인 깨달음을 가리킨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과거에 포로로 잡혀갔던 일은 여호와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께 심판 받은 것임을 여러 민족들이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혀 갔던 줄을 알지라 그들이 내게 범죄 하였으므로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고 그들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겨 다 칼에 엎드러지게 하였으되” 그리고 이스라엘의 몰락은 하나님이 그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더러움과 그들의 범죄한 대로 행하여 그들에게 내 얼굴을 가리었었느니라”(겔 39:24) 여기서 성경의 용례상 하나님의 얼굴은 종종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지극한 관심과 긍휼을 상징한다(시 11:7; 사 54:8; 계 1:16). 또한 ‘가리웠다’( ר ������ס, 사타르는 ‘숨기다’, ‘감추다’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숨기셨다는 것은 곧 그들의 죄악을 징책 하시기 위해 철저하게 대적들의 수중에 그들을 버려두셨음을 뜻한다. 신앙 공동체는 언제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끝없는 은혜와 자비를 신앙 공동체에 베풀어 주셔야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 그 얼굴을 가리게 하는 일을 삼가라. 의롭고 바르며, 선하고 성실하게 살아라,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다.

 


 

7). 백성 가운데 임재의 회복(40-46장)

 


 

(1). 새로운 성전 회복(40-43장)

 

  유다가 멸망하면서 수많은 유다백성이 포로로 붙잡혀 바빌론으로 “사로잡힌 지 25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14년 정월 10일 곧 그 날에” 이는 B.C. 573년으로 에스겔 선지자가 소명을 받을 때(B.C. 593)로 부터 약 22년이 경과한 시기이다(1:1, 2;33:21). 한편 본 구절은 원전상 ‘그 해의 시작’이란 구절이 두 문장 사이에 첨가되어 있는 바, 이 구절의 해석과 ‘새달’이란 문자적 의미의 ‘정월’(שׁ������ח , 호데쉬)의 해석 여하에 따라 두 가지 견해로 대별된다. 먼저 첫 번째 견해는 ‘그 해의 시작’에 ‘정월’의 의미를 찾아, 이 ‘정월’을 이스라엘 종교력상의 첫 달인 ‘아빕 월’(민간력-7월)로 보는 것이다. 곧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유월절을 예비하던 날인(출 12:3, Havernick, Delitzsch, Schmieder) 동시에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첫 발을 내디딘 의미 있는 날이었다(수 4:19). 두 번째 견해는 본 구절의 연도를 B.C. 575년으로 보고, 그 해가 희년이라는 사실에 주안점을 두어 ‘그 해의 시작’을 ‘신년’ 곧 49년이 지난 후 오십 년째 되는 ‘희년’으로, ‘정월’을 1월이 아닌 종교력상의  ‘첫 달’이란 의미에서 희년을 시작하는 첫 달로서의 7월 10일인 ‘속죄일’(레 25:9)로 이해 한다(Hitzig, Rdak). 곧 이 속죄일은 희년에 이루어질 자유와 회복을 위한 전제로서의 속죄가 행해지는 날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견해 중 어느 것을 취해야 할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본 구절에 특정하게 제시된 ‘그 날’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잘 알려진 날이었으며, 회개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함축하고 궁극적인 자유와 회복의 의미를 내포한 특별한 날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호와의 권능이 에스겔을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신다. 여기서 에스겔은 환상 중에 이스라엘 땅의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시는데”(40:2절) 여기서 ‘매우 높은 산’은 1장 이하에 언급된 에루살렘의 멸망과는 대조적으로 온전한 회복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들 거룩한 산 ‘시온’을 지시한다(17:22, 23;욜 2:32). 곧 시온산은 본래 기드론과 두로베온 골짜기 사이에 솟아있는 봉우리의 명칭이었으나, 후에 예루살렘 동남쪽에 위치한 ‘다윗 성’(왕상 8:1;대하 5:2)을 지칭했으며, 더 후대에는 예루살렘 전체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명칭으로 바뀌었다(사10:24). 따라서 이 ‘시온 산’은 곧 새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예루살렘을 이처럼 탁월하게 묘사한 것은 여기서의 새 성전이 궁극적으로 온전하게 회복될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 나라의 영광스런 위상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사 2:2;미 4:1;계 21:10, Michaelis, Delitzsch, Schroder).

 


 

  에스겔은 그곳 높은 산에서 산 아래로 펼쳐지는 한 성읍을 보게 된다.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이 회복된 후에 나타날 아름다운 성읍의 형상이다. 또한 놋같이 빛난 사람 곧 천사가 모시로 만든 끈과 척량하는 막대기를 손에 들고 성읍 입구에서 환상 중에 에스겔에게 말한 내용도 언약 백성의 회복에 관한 내용이다. ‘인자야 지금부터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모든 것들을 네 눈으로 자세히 주목하고 또 네 귀로 잘 듣고 마음에 깊이 새겨 두어라. 이것이 바로 너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가 보는 모든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라’(4절).

 

  4절에는 네 개의 중요한 명령형 동사가 나온다. ‘너는 보라’(ה������������ 레에), ‘너는 들으라’(ע������������ 쉐마), ‘그리고 너는 두라’(ים������������������ 붸심), ‘는 말하라’(ד������������������ 학게드). 이 단어들은 에스겔 선지자를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려 준다. 하나님이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장래의 일에 대해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비록 그들은 죄를 범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포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대로 징계의 기간이 끝나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실 것을 재확인하며 구원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주시는 것이다.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이스라엘 땅의 지극히 높은 한 산은 언약의 시온산이며 산 아래로 펼쳐지는 한 성읍은 예루살렘 성이다.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이 회복된 후에 나타날 아름다운 성읍의 형상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한 언약의  회복 곧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 사건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영적 회복을 의미한다. 따라서 새 성읍과 새 성전의 환상은 심판 중에도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을 보여 준다. 또한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신실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곧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야 비로소 회복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에스겔은 환상중에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을 본다. 놋같이 빛난 사람 곧 천사가 모시로 만든 끈과 척량 막대기로 재어 본 결과, 그 담의 두께와 높이는 척량 막대기 하나 정도(약 3.2m)였다. 또 제단을 지나 문의 입구를 척량하고 문지기들의 방도 재었다. 그리고 성전을 향하는 출입문의 현관도 재었다. 동쪽 문 안쪽에 크기가 같은 작은 방 세 개가 있고 그 방들의 크기도 재었다. 천사는 계속해 에스겔을 데리고 북쪽 문과 남쪽 문으로 가서 각각 그 문들과 주변 방들을 척량했다. 남쪽으로 난 문과 북쪽으로 난 문의 크기는 같고 주변의 방이나 창문의 크기도 같다. 이렇게 척량하는 모습을 자세히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성전의 회복이 반드시 이뤄짐을 의미한다. 성전의 회복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질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대한 그림자이다.

 

  에스겔이 본 모든 환상들은 미래의 영적 실체인 교회에 대한 완전한 회복이 모형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파괴되었지만 지금 에스겔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성전의 동쪽, 북쪽, 남쪽으로 난 문들을 척량하는 모습은 장차 이스라엘의 회복과 함께 실제로 성전의 회복을 의미한다. 동시에 신약시대의 메시아로 인한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새 성전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한 영적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 곧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말한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성전 제도의 회복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를 뜻하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뜻하기도 한다.

 


 

  에스겔은 40-42장에서 성읍과 성전의 구조와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 43장부터 두 번째 탐사를 시작한다. 첫 번째 탐사를 마친 에스겔은 지금 바깥뜰에 있는데, 곧 동문 쪽으로 간다.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43:1).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43:2절) 본 구절은 성전의 구조적 측량에 이어 19년 전 이스라엘의 패역으로 그 동문을 통해 성전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 (10:18-22;11:22-24)이 그 동문을 통해 다시 완성된 성전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5절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의 회귀는 모세의 성막 봉헌식(출 40:33, 34)과 솔로몬 성전 봉헌식(왕상 8:11) 당시에도 보여진 바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와 새롭게 갱신된 교체의 회복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곧 성전 완공의 마지막 단계인 성전 봉헌식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Delitzsch). 에스겔도 성령에 이끌려 안뜰로 들어가서 여호와의 영광이 성소에 가득 찬 것을 보고(43:5), 거기서 성전과 동문 사이에 있는 제단을 보며(43:13-27)바깥뜰로 나온다.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있을 곳이라”(43:7)는 말씀은 선재적으로 성취된 에스겔 성전의 성격을 규정하는 구절이다. ‘내 보좌의 처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의 핵심이 되는 곳을, ‘내 발을 두는 처소’는 하나님의 안식처가 되는 곳을,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삶을 지배하시며 그들과 교제하시는 곳이란 의미를 각각 내포한다. 한편 여기에 언급된 ‘내 보좌 의 처소’와 ‘내 발을 두는 처소’(나의 발등 상-시 132:7;사 60:13;66:1)는 모두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를 지칭하는 말로 쓰여졌다(출 25:22;삼상 4:4;대상 28:2;시 132:7, 8). 여기서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언약궤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영원함( ם������עוֹ������, 레올람)의 적용 여부에 따른 것이며 (37:26, 28) 에스겔 성전의 영원성과 완전함을 암시한다. 곧 이전 성전에서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가 될 수 없었다는 점과 에스겔 성전의 완성 때인 메시야 시대에는 그 언약궤가 필요치 않다는 점, 궁극적인 의미에서 메시야 시대의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을’, ‘하나님의 발등상’은 ‘땅’을 상징한다는 점(사 66:1;마 5:35)에서 언약궤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는 범죄 하지 않을 것을 기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바로 곁에 산당들을 만들고, 거기서 하나님이 원치 않는 종교 행위를 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가?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그 부친 히스기야의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세우며 이스라엘 왕 아합의 소위를 본받아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하여 섬기며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의 단들을 샇고 또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단들을 쌓고 또 그 아들을 불 가운델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격발하였으며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전에 세웠더라”(왕하 21:2-7상).

 

  여기서 므낫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이방신을 섬기를 제단을 샇고 우상을 만들어 세웠다.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완전 무시하는 것이다. 8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안뜰로 들어가는 북문에 우상을 세웠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니 제단 문어귀 북편에 그 투기의 우상이 있더라”(8:5). 이런 망령된 행동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성전과 예루살렘에서 떠나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귀가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짐케 하신다. 지금까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던 모든 행위들을 그만 두겠다고 약속케 하신다. 그럴 때 비로소 “내가 영원토록 그들이 가운데 거하리라”(9절)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성전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알려 주고 백성으로 하여금 성전법을 철저히 준행하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너는 이전의 제도와 식양과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11절). 하나님은 성전에서 행해야 할 일들 즉 제사와 관련된 규정뿐 아니라, 성전의 규모와 모양 그리고 성전 안에 있는 여러 물품들의 규격과 모양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기를 원하신다.

 


 

(2) 새로운 예배 회복(44장)

 

  44:4절에서 “북문을 통하여 성전 앞에 이르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한지라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 혹자는 이를 성벽에 위치한 바깥 북문으로 이해하나(Kliefoth) 43:5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곳이 안뜰로 제시된 점과 안 북문이 바깥 북문보다 약 4철이 더 높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선지자가 직접 그 영광의 현현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안쪽 북문임이 분명하다(Delitzsch, Schroder, Hitzig). 한편 이처럼 여호와의 영과의 현현을 재삼 언급한 것은 이하 전개될 내용에 비추어 함부로 근접 할 수 없는 새 성전의 거룩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Delitzsch).

 

  이 구절부터 성전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자에 대한 규정이 9절까지 이어진다. 그들은 새 성전에 합당한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는 자들이다. 이러한  제 규정은 새로 회복될 이스라엘에서 그 백성들의 성결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며 학개(학 2:14), 에스라(스 4:1-3;10:10-44), 느헤미야(느 13:1-9) 등에 의해  계승된 사상이기도 하다.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내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성전을 더럽히므로”(7절)너희가 내 음식과 기름과 피를 제물로 바치며,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고, 육체에도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 사람들을, 내 성소 안에 데리고 들어옴으로써, 내 성전을 이렇게 더럽혀 놓았다. 너희가 저지른 온갖 역겨운 일들 때문에, 너희는 나와 세운 언약을 어겼다(44:7절). 또 너희가 나의 거룩한 물건들을 맡은 직분을 수행하지 않고, 그 일을 이방 사람들에게 맡겨서, 그들이 내 성소에서 너희 대신에 나를 섬기는 일을 하게 하였다(44:8). 그러므로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고 육체에도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 사람은 어느 누구도 내 성소에 들어올 수 없다.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사는 이방 사람도 들어올 수 없다(44:9). 하나님은 레위인들의 행동에 대해 몹시 불쾌하게 여기셨고 이방인들을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레위인들도 하나님 가까이 나아올 수 없도록 하셨다. 따라서 그들은 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소를 지키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그들이 비록 제사를 드리는 일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성전을 지키고 성전의 일들을 돕는 것은 여전히 맡게 된다.

 


 

  레위인들이 문책을 당해 제사를 담당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독의 자손들로 하여금 제사를 담당하게 하신다. 이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지켜야 할 규정도 많다. 17-31절에서 모두 일곱 가지 규정을 언급한다. 17-19절은 제사장이 성전에서 일할 때 입는 옷에 관한 규정이다. 제사장은 성소에서 나갈 때 입고 있던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42:14). 여기서 특이한 것은 성전에서 일할 때 땀이 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20절은 머리털에 관한 규정이다. 21절은 성전에서 일할 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는 규정인데, 이것은 나답과 아비후 사건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참고 레 10:8-11).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술을 마시고 성전에 들어가는 행동을 엄격하게 금하신다. 그렇게 할 경우에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하신다. 레위기 10:10-11에 기록된 것처럼, 23-24절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르게 가르치고 법도를 지키게 하는 직무에 대해 말씀 하신다(신 33:10애소 레위인의 직무를 이렇게 규정한다). 또 제사장들은 재판도 담당했다(신 17:8-13에서 사람들이 재판할 일이 생겼을 때 제사장과 재판장을 찾아가라고 한다).

 

  이 규정 앞에 나오는 22절은 제사장의 결혼 상대에 대한 규정이다(이것은 레 21:1-3, 11에도 나온다).

 

그리고 31절은 제사장이 먹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규정이다. 이 모든 규정들은 제사장들이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얼마나 신중해야 하며,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철저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와 달리, 28-30절은 제사장들이 받는 혜택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며, 그들은 백성이 제물로 드리는 것을 먹고 살게 된다. 백성은 제물들 중에 일부를 제사장들에게 줘야 한다(참고 민 18:8-20). 이렇게 백성이 제사장의 생계를 책임지면, 제사장은 백성에게 복을 빌어준다(참고 민 6:22-27)

 

  하나님은 성전 밖을 지키는 임무를 레위인들에게 계속 맡기셨지만, 성전 안에서 하는 일들(제사를 비롯한 중요한 일들)은 사독의 자손들에게 맡기셨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지켜야 할 여러 가지 법도를 일러 주신다. 그 법도들을 지켜야 정결함을 유지할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일러 주신 법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분명 은혜로운 일이지만 동시에 매우 위험한 일임을 알아야 한다. 부정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요구받고, 사소한 실수에도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따라서 제사장직이란 특권만이 결코 아니다.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요즘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조심성 없이 행동하는 것을 보게 된다. 매우 염려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외할 분이심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8). 새 시대 새 생활 회복(45-46장)

 

  새 시대는 땅 나누기부터(45:1-8) 잘 해야 한다. 제비를 뽑아 땅을 나누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오랜 전통이다. 이는 일종의 계획 국가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일정한 땅을 받아서 그것을 기업으로 삼아 살게 했다(참고 민 35:1-8). 땅 분배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48:8-35에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왕에게 땅을 주어 그 땅으로 왕가의 기업을 삼게 하라는 점이다. 즉 왕에게도 기업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왕들이 다시는 내 백성을 압제하지 아니하리라”(8중절)고 말씀하신다. 이는 왕이 백성을 압제하고 그들의 땅, 양도할 수 없는 ‘기업’을 빼앗은 것을 암시한다. 이 일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누리며 살 권리를 빼앗는 심각한 범죄 행위이다. 그런데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은 그런 행동을 끊임없이 저질렀다. 따라서 하나님은 왕이 백성을 압제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신 것이다.

 

  본문에는 왕에 대한 언급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비록 왕에 대한 기술이 부정적이긴 하지만 43:7, 9과 44:3에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45:7-8, 9-17, 22; 46:2, 4, 8, 10, 12, 16-18에서도 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런 빈번한 언급은 왕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본문은 왕의 현실적 권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왕이 탈법을 자행해도 무방한 무소불위의 권세를 갖는 것이 아님을 명시한다. 그들도 하나님 앞에서 백성에 불과하다.

 

  땅을 나누는 것은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생활 여건을 마련해 주는 동시에, 그들이 누릴 삶의 한계를 정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게 한다. 모든 땅을 지파별과 가족별로 나눠 주고 남은 땅이 없게 되었다. 따라서 자기 영역을 넘어서 더 가지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땅을 빼앗는 일이 된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삶을 파괴하는 범죄 행위에 해당한다. 이것을 특히 권력자들이 명심해야 한다(참고 46:18).

 

  그런데 땅을 나누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한 구역을 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거룩한 구역에 성소를 둔다. 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곳이다. 그곳을 중심으로 왕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나눠준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왕궁이 중앙에 있는 게 아니라, 성소가 중앙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통치자들에게 특별히 명령하신다. 포악과 겁탈을 일삼지 말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도록 촉구한다. 그래서 ‘내 백성’을 속여 빼앗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왕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천명하신다. 이것은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리는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내 백성’이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왕이 백성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는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내 백성’으로 칭하면서 군주에게 당부하는 것은 백성을 잘 다스리라는 것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백성을 억압하거나 겁탈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도량형을 정확하게 할 것을 명령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군주의 본분에 대해 말씀하신다. “왕은 본분대로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절기에 드릴지니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제물을 갖출지니라”(17절). 군주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각 절기마다 하나님께 제대로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본문은 군주의 정치적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그 역할을 제의적 차원에서 정의한다.

 


 

  하나님은 절기들을 제대로 지키라고 명령하신다(45:18-46:15). 군주가 지원해야 하는 절기들 중에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신정(1월 1일)인데, 이 날에 해야 할 일은 성소를 정결케 하는 것이다. 성소가 백성의 범죄로 인해 더럽혀졌기 때문에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성소를 정결케 해야 한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실수로 죄지은 사람들을 위해 속죄제를 드려 성소를 정결케 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신년 초하루를 성전 정결로 시작하는 것은 의미가 깊다. 이스라엘 백성이 1년 동안 죄짓지 않고, 성전을 정결케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언급되는 절기는 유월절이며, 일주일 동안 이 절기를 지키면서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으라고 한다(21절). 이것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동일시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로써 정월 14일에 지키고, 정월 15일부터 일주일 동안 무교절로 지킨다. 무교절은 보리를 거둬들이는 농사 절기인데, 바로 앞에 유월절이 있기 때문에 후대로 내려갈수록 무교절이 유월절화(化)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원래 유월절은 가족 중심으로 지키는 것이었는데, 본문에서 왕이 주관하고 있다. 이것은 요시야가 유월절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킨 것을 떠올리게 한다(대하 35:7-9). 유월절이 가족 절기에서 국가적 행사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원래 유월절의 제물은 양인데, 여기서 송아지를 제물로 삼는다. 유월절의 제물은 양(출 12:1-28)에서, 양을 예물로 드리고 나서 다시 소와 염소를 예물로 드리는 것(민 28:16-25, 대하 30:15-17)에서, 양과 소와 염소를 함께 드리는 것(대하 35:7-9)에서, 소를 드리는 것(겔 45:22)에서, 다시 양을 드리는 것으로 바뀌었다(스 6:17-22).

 

  7월 15일에는 일주일 동안 수장절을 지킨다(레 23:39-44, 신 16:13, 16). 그런데 절기 때에 드리는 제사는 대체로 속죄제이다. 그만큼 속죄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언급되는 절기는 안식일과 초하루이다. 이 절기들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동쪽 안문을 통제하는 것이다. 군주는 이 문을 통해 출입해야 하며(46:8), 다른 사람은 이 문을 사용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것은 매일 아침에 드리는 제사이다. 아침마다 일 년 된 양 한 마리를 드려야 하는데, 소제도 함께 드린다. 여기서는 저녁 제사에 대해선 말씀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은 통치자들도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신다(46:16-18). 본문은 통치자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언급하는데, 여기서 군주의 기업에 대해 말씀하신다. 즉 군주가 받은 기업도 다른 사람들처럼 보존되어야 한다. 그리고 왕이라고 해서 원래 받은 것 이상으로 기업을 늘리지 말아야 하며, 기업을 잘 유지해 후손들에게 그대로 전수해야 한다. 하나님은 왕이 기업을 늘리기 위해 백성의 기업을 뺏고, 삶의 터전을 잃은 백성으로 하여금 살 길을 찾아 어디론가 떠나게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당시에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음을 암시한다.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그 좋은 예이다. 따라서 본문 기자는 왕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업을 잘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왕이 일정한 땅을 소유하고 그것을 임의적으로 늘려갈 수 없는 상황에서, 신하에게 당을 선물로 주면 왕의 가업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에 희년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기업을 되돌려주면, 그것을 왕의 자손들에게 물려 줘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왕의 기업을 회복한다. 왕의 기업도 희년에 환수 대상이라는 게 아이러니다. 이것은 군주도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법 적용을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군주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죄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신 17:18-20).

 

  왕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이다. 그런데 제사장과 왕에 대한 규정들이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것은 제사장과 왕이 동일한 책임과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9). 땅에서 여호와의 임재의 회복(47-48장)-(새로운 나라의 회복)

 


 

  이제 40장부터 전개된 성전의 측량과 새로운 율법의 지침이 일단락되면서 새로운 내용 곧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을 중심으로 성취될 이스라엘의 축복이 생명수의 환상을 통해 12절까지 제시된다. 실로 물과 기름짐, 축복 등은 구약에 있어서 서로간에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갖는 말인 바,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을 이루어 사해까지 흘러 들어가 황무하고 죽어있는 땅을 기름진 땅으로 변화시키는 본문(1-12절)의 회화적 묘사는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풍성한 축복을 상징한다(시 46:4;65:9;사 33:20). 한편 이 부분은 궁극적으로 구원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이심(계 22:1)과,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온 우주를 풍성하게 소생시킨다는 점을 보여준다(요 10:10).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역으로 성도들의 죄악을 담당하셨으며 친히 자신을 ‘생수의 강’으로 언급하셨다는 점에서(요 4:10;7:38) 이 ‘생명수의 강’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다 하겠다

 


 

(1). 생명을 주는 강(47:1-12절)

 

. 물이 강으로 됨(47:1-5절)

 

가. 스며 나오는 물(47:1-2절) 

 

  성전 둘러보기를 마친 에스겔은 이제 성전 건물의 문에 이른다. 거기서 동쪽을 향한 성전 건물의 문지방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본다. 원문에 있는 ‘히네’(ה������ה)라는 단어는 에스겔의 발견에 극적 효과를 더한다. 이 단어는 독자들의 시선을 에스겔의 시선과 일치시킨다. 그 나오는 물을 카메라가 클로즈업해 보여 주는 것과 비슷한 장치이다. 문지방에서 나오는 물은 성전 안뜰에 있는 제단 쪽으로 흐른다. 그리고 제단을 지날 즈음에 제단의 남쪽을 둘러 흐른다(1절).

 

  물은 계속해 동쪽으로 흘러 그 물줄기가 동쪽 문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그 동쪽 문은 영광이 돌아온 이후 닫혀 있었다(43:1이하; 44:1-2). 이에 성전 안내자는 에스겔을 북쪽 문을 통해 성전 담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고, 성전담의 북동쪽 모서리를 돌아 동쪽 문의 바깥에 이르게 한다. 그곳에서 에스겔은 문을 통과해 스며 나오는 물을 다시 만난다. 1절에 사용된 ‘히네’가 여기에서 다시 사용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한 번 더 에스겔의 시선에 동참하도록 초대한다.

 

  ‘스며 나오다’라는 표현의 히브리어는 ( ה������������, 파카) - ‘쏟다’란 문자적 의미를 가지는 바, 이는 단순하게 물이 배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차게 솟구쳐 나오는 것을 묘사하는 말로서  1절의 ‘흘러 내리더라’와 비교해볼 때 그 물의 양이 성전 안에서 이미 상당하게 불어나 있음을 암시한다(Delitzsch, Neumann, Gesenius). ;

 

나. 넘쳐흐르는 강(47:3-5절)

 

  이제 안내자는 스며 나오는 물이 만드는 물줄기를 따라다. 1,000척씩 즉 약 450m식 거리를 재며 동쪽으로 나아가는 그는 에스겔로 하여금 매번 그물을 건너게 한다. 처음에 발목, 다음에 무릎, 그다음에 허리까지 오는 물이었다(3-4절)

 

  이 단락의 마지막 장면인 5절을 개혁한글에 기초해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그가 1,000척을 척량했다. 내가 건너지 못할 강! 왜냐하면 그 물이 깊었다. 헤엄칠 만한 물! 건너지지 못할 강!’

 

  5절에서 물의 변화에 대해 최소한 두 가지 관찰을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물을 ‘강’(305 나할)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졸졸 흘러나온 물이 이제는 ‘강’이 된 것이다. 두 번째는 그 강의 깊이에 대해 ‘건너다’라는 동사를 한 번은 능동태(‘내가 건너지 못할 강’)로, 또 한 번은 수동태(‘건너지지 못할 강’)로 사용해 물의 깊이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스겔이 건너지 못할 만큼 깊은 강이 된 것이다.

 

  불어난 물의 양에 대한 강조는 그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표현한 3-4절의 묘사와 더불어 맨 처음 그 물의 근원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성전 문지방 밑에서 스며 나온 물이 조금씩 불어나더니, 마침내 큰 강으로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물의 양의 변화는 에스겔이 보게 될 성전 너머 세상의 변화에 대한 환상의 서곡에 불과하다.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47:5절)라는 말씀은 성소에서 발원한 물이 기적적으로 증가하여 이처럼 한길 이상되는 생수의 강으로 가득하게 된 사실은 여기서의 생수가 구원과 축복의 상징이란 점에서 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관심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②. 강이 가져올 변화(47:6-12절)

 


 

가. 강가의 많은 나무를 봄(6-7절)

 

  성전 안내자는 물이 강으로 변함에 대해 이미 놀랐을 에스겔에게 목격한 것을 확인한다(‘보았느냐? 인자야’). 아직은 놀라기에 이르다. 에스겔에게 보여줄 것이 더 있다. 그가 이편저편에 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여기서도 ‘히네’(ה������������, 흔히 ‘보라’라고 번역하기도 한다)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에스겔의 시선에 독자들을 초청함 그의 놀람에 동참시킨다.

 

“나를 인도하여 강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6절) - 여기서 이 말은 생수의 강의 가장자리 곧 '뚝 위로'란 뜻으로서 선지자가 그 물 속에서 세 번째 측량때까지 따라 내려갔다가 그 물 속에서 네 번째 측량을 목격하고 다시 뚝 위로 올라온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Schroder, Hengstenberg). “나무가 심히 많더라”(47:7) 여기서 ‘많더라’( רב, 리브)는 원어상 ‘(양이나 질에 있어서)풍성한’이란 뜻으로 단지 나무의 많음을 말한다기보다는 나무와 함께 그 열매의 풍성함까지도 내포한 말이다(Schroder). 따라서 본 구절은 새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축복으로서의 비옥함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 풍성한 생명을 가져오는 강물(8-12절)

 

  두 번째 부분은 그 강물이 가져올 풍성한 생명의  모습들에 대한 인도자의 설명으로 이뤄져 있다. 이 강물은 요단 계곡을 지칭하는 듯한 ‘아라바’를 내려가 지금의 사해로 생각되는 ‘바다’의 물을 되살릴 것이다(8절).103)

 

  또한 이 강물은 바다만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르는 모든 곳과 그 속의 ‘모든 생물’(שׁ������������ ה������������ 네페쉬 하야)을 살릴 것이다. 물고기도 심히 많아질 것이다. ‘되살아나다’(א������������ 라파, 이 동사가 수동형으로 쓰였을 때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치료되다’)라는 동사는 8, 9절의 핵심 단어다.104) 이 강물은 치료와 회복을 의미한다.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물이 되살아나리라(א������������ , 라파)는 '고치다'란 뜻인 바(왕하 2:22), 본 구절은 사해 곧 죽은 물이 성전에서 발원한  생수로 인해 모든 생명체가 살 수 있는(9, 10절), 살아있는 물로 고침을 받게 된다는 의미다. 이는 상징적으로 죽음의 자리에서 영생의 자리로 당신의 백성을 옮기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암시한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여기서 ‘강물’(ל������נ, 나할)은 원어상 복수형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혹자는 이를 그 강의 지류들이란 뜻으로 해석한다(Kliefoth). 그러나 이는 그 물의 창일함과 강한 흐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Hengstenberg, Delitzsch, Umbreit). 그러한 강의 강력함이 모든 죽음의 세력을 휩쓸어 버리고 생명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다가 강을 흡수하는 현상과는 달리 그 생수의 강은 죽음의 바다(사해)로 들어간 후 생명의 능력으로 죽음의 바다를 생명의 바다로 변환시킨다.

 

 

 

  이 강은 자연 세계를 넘어 사람들에게도 복이 될 것이다. ‘엔게디’(‘염소의 샘’)와 ‘에네글라임’(‘두 송아지의 샘’)은 각각 사해의 서편과 동편 해안 지역으로 보인다. 아무것도 살지 않는 죽음의 바다가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될 때 그 주변 지역들도 유익을 누리게 된다. 지중해를 의미하는 ‘큰 바다’처럼 각양각색의 물고기들이 사해에 많아지면 그것들을 잡고자 하는 어부들도 모여들 것이다.

 

  11절은 언뜻 보기에 강물의 능력의 한계를 묘사하는 부정적인 진술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구절을 그 강물의 ‘사려 깊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면 더욱 적절하다. 사해의 모든 부분이 되살아나면, 즉 염분이 없어지거나 옅어져 물고기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사해에서 더 이상 소금이 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당시 제사와 생활에 소금이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소금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라는 11절의 진술은 긍정적의미로 이해해야 하며 ‘소금 땅이 될 것’이라는 번역보다 ‘소금을 위해 남겨질 것이다’라는 번역이 긍정적 의미를 좀 더 잘 전달해 준다.

 

  생명을 가져오는 강물의 능력에 대한 마지막 부분의 관심은 6-7절에서 언급된 나무들로 다시 돌아간다. 그 대신에 이번엔 그 나무들과 열매와 잎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진술을 곁들이다. 생명을 주고 치유하는 강물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 그것이 자라게 한 나무의 열매와 잎조차 그런 강물의 능력을 여전히 소유할 것이다. 강물이 대단한 능력은 7, 9, 10절에서 강물이 만들어내는 각종 생명체들이 ‘심히 많다’라고 반복해 묘사된 점에서도 느낄 수 있다. 12절에서 ‘그 물이 성소를 통해 나옴이라’는 진술은 모든 생명들의 변화의 근원이 성소에 있음을 재확인한다.

 


 

(2). 다시 사람이 살게 될 땅(47:13-48:29)

 


 

①. 전체 땅의 외적 경계(47:13-23)

 


 

가. 땅 분배에 대한 원칙(47:13-14; 21-23절)

 

   땅의 분배하는 원칙에서 자주 나오는 ‘기업’이라는 단어와 그와 관련된 동사들은 이스라엘이 회복된 땅에서 살게 됨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옛 약속을 지키신 결과임을 보여준다.105) 14절의 “이 땅을 너희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하였나니”라는 옛 약속에 대한 재확인은 이런 사실을 더욱 강조한다.

 

  “공평하게 나누어 기업을 삼으라” ‘공평하게 나누어’란 어느 한 편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공평하게 분배하라는 말이다. 이 말은 가나안 땅 분배에서 보여지듯이

 

단순히 땅 넓이가 동일하게 분배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고려해서 서로가  아무런 불만이 없게 분배하라는 것이다. “이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되리라”(47:14) 이는 다음과 같은 삼중적 의미로 고찰해 볼 수 있다. (1) 여자적 해석으로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벗어나 고토로 귀환하여 그 땅을 다시 소유하게 되리란 의미, (2) 신앙적 해석으로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증표로 주신 약속의 땅이란 점에서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에 대한 회복은 곧 그 동안 그들의 죄로 인해 파기되었던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새롭게 갱신된다는 의미, (3) 궁극적이고 종말론적 해석으로 가나안 땅이 하나님 나라의 예표였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의 의미(계 21:1) 등이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이상적 시대의 원칙을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평등(14절)과 보편성(22-23절)이다. 22절에서 타국인에 대한 분깃이 부가적으로 기술된다. 이러한 타국인에 대한 기업의 할당은 모세의 율법(레 24:22;민 15:29), 이사야의 교훈(사 56:3-8), 에스겔의 초기 예언(14:7;22:7)과도 일치한다.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타국인 곧 너희 가운데에서 자녀를 낳은 자의 기업이 되게 할지니” 여기서 ‘타국인’(ר������ 게르)은 이스라엘의 혈통이 아닌 일반적인 이방인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이방 신앙을 버리고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이는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 의해 더욱 분명 해진다. “너희 가운데서 자녀를 낳은 자” 이 구절은 앞 주절을 수식한다. 이스라엘 중에서 자손을 낳음으로써 그 땅에 영구히 거주할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 타국인을 본토에서 난 이스라엘 족속같이 여기고” 하나님의 기준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된 이방인의 구별을 상쇄시키는 말이다. 실로 새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여호와 신앙으로 구원을 얻게 될 이방인들까지를 포괄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그러한 구원 사역의 구심점이자 매개가 되는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평등하게 나눠 갖는 주제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이다.106) ‘기업’과 더불어 자주 나오는 단어인 ‘지파’와 그것을 사용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는 표현은 남북 분열 왕국 이전에, 심지어 왕정 이전에 있었던 언약 백성의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합의를 가진 것으로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지파들의 체제에 ‘타국인’(ר������ 게르)들도 포함될 것이다. 즉 지파간 평등의 범위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22절). 이스라엘 속에서 여러 계층으로 살아가던 타국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어느 정도 유사한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할례를 받으면 유월절 식사에도 참여할 수 있었고(출 12:48), 원한다면 제사와 같은 종교 행위에도 온전히 참여할 수 있었다(참고 레 22:18).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권리가 있었는데, 곧 땅에 관한 것이다. 타국인들은 땅을 차지할 수 없었다. 이 한계는 그들로 하여금 ‘이등 시민’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에스겔의 마지막 환상에서 이 제한마저 철폐된다. 이런 보편성 혹은 포괄성이 원칙이 이상적 기업 분배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음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나. 땅의 사방 경계(15-20절)

 

  땅의 사방 경계의 특징들은 첫째,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소유했던 땅의 최대 영역 혹은 좀 더 큰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특히 북쪽 경계에서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 본문은 ‘역사적 지리’가 아닌 ‘신학적 지리’로써 크기보다 여기에 나타난 경계들이 싸고 있는 곳(당연한 이야기 같지만)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땅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즉 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오래되고 빛바래지 않은 약속의 성취를 누리는 것이다.

 

  둘째, 요단강의 동쪽 지역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겔 47:18절 ‘동쪽은 하우란과 다메섹과 및 길르앗과 이스라엘 땅 사이에 있는 요단 강이니....’). 역사적으로 요단강의 동쪽 지역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비파가 치지했던 곳이다. 그런데 이 지역이 에스겔의 신학적 약속의 땅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 우상 숭배(참고 수 22장) 혹은 소돔과의 관련(참고 창 13장)을 통해 요단 동편의 부정적 함의를 찾아내는 설명들107)은 설득력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요단 동편은 원래 주어진 약속의 땅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에 제외되었다는 설명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조상들에게 약속한 전체의 맥락과 더 잘 어울린다. 즉 이 새로운 땅을 기업으로 회복하는 환상은 요단 동편을 포함하는 역사적 회복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언약과 연관된 신학적-상징적 회복에 관한 것이다(비교 수 14-21장). 실제로 바빌론의 포로에서 이스라엘 당으로 돌아올 수 있는 지파로 유다 지파가 유일했다. 또한 포로 이후 이스라엘은 물리적으로 여기에 기록된 경계들로 이뤄진 땅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제부터 살펴볼 동서로 반듯한 경계로 각 지파들에게 땅을 나눠 주는 것도 지리적 불가능하고 역사적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 본문들을 신학적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땅의 내적 구획(48:1-29절)

 


 

①. 예물로 드릴 땅 북쪽과 남쪽의 지파들(1-7, 23-29절)

 

  각 지파들의 위치는 그들이 역사 속에서 차지했던 위치보다 야곱의 자손들의 지위를 반영한다는 원칙이 좀 더 지배적이다. “예물로 드릴 땅”(참고 48:8)에서 가장 먼 북쪽과 남쪽에는 야곱의 첩들인 실바와 빌하의 아들들의 지파(1-3; 27-28절)가 위치한다. 그리고 좀 더 중심에 가까이 야곱의 본처인 라헬과 레아의 아들들이 북쪽과 남쪽에 각각 네 지파씩(4-7, 23-26) 위치한다.

 

  여기서 ‘예물로 드릴 땅’에 가장 인접해 북쪽에는 유다 지파, 남쪽에는 베냐민 지파가 위치하는데 이는 그들의 역사적 위치와 반대이다(7, 23절). 즉 ‘남유다 왕국’으로 대표되던 유다 지파도 새로운 땅에서 ‘북쪽’에 위치할 것이다. 이런 새로운 배치는 다시 회복할 나라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눔이 없는 하나 될 것임을 상징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새 땅에 대한 이상은 왕국 시대 이전의 모습에 기초한다.

 

  48:7절에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유다의 몫이요”유다 지파가 야곱의 肉的 장자된   르우벤 대신 거룩한 땅에 연접 할 수 있었던 것은 야곱의 축복을 통해 메시야의 출생을 언약 받은 영적 장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창 49:8-12). 또한 유다 지파는 베냐민 지파와 함께 반역한 북이스라엘 왕국에 동참한 10지파를 대항해 이스라엘 왕국의 정통성을 이어갔다는 점에서 타지파 보다 신앙적, 역사적인 우월성을 가졌다. 한편 거룩한 땅을 분기점으로 북쪽과 남쪽의 지파 배열이 동등한 6:6의 비율로 정해지지 않고 7:5의 비율로 배분된 것은 완전수 ‘7’은 항상 대표저긴 수로, ‘5’는 그 ‘7’의 보충적인 수로 여긴 히브리적 개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Hengstenberg). 따라서 이러한 배분은 북쪽 일곱 지파 중에서도 대표적인 유다의 탁월한 위상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

 


 

② ‘예물로 드릴 땅’

 

  ‘예물로 드릴 땅’의 위치도 회복될 땅의 새로움을 잘 보여 준다. 이 특별한 땅의 위치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라이트의 지도를 살펴보면 ‘특별 보류지’의 남쪽에 위치한 지파들의 땅의 폭이 북쪽에 위치한 지파들의 그것보다 좁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특별 보류지’의 위치를 역사적인 예루살렘의 위치와 동일시할 때 그려진다. 반면, 두굿의 지도는 각 지파들의 땅의 폭이 모두 동일한 반면에 ‘거룩한 땅’의 위치가 역사적인 예루살렘의 위치보다 북쪽으로 약 48km쯤 떨어진 곳으로 예루살렘 이전에 회막과 언약궤가 위치했던 예배의 중심지인 실로(참고 수 18:1; 삼상 1:3, 24; 4:3) 근처가 된다.

 

  예배 중심지의 새로운 위치는 예루살렘이 우상 숭배로 더러워졌던 것(참고 8-11장)을 생각해 볼 때, 그리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또한 새로운 땅의 기업 분배가 왕정 이전의 전통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 비춰 볼 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울 수 있다. 요컨대, 에스겔서는 좀 더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회복을 바라보고 있다.

 

  ‘예물로 드릴 땅’의 자세한 구획은 45:1-8에 이미 나와 있다. 45장의 기록과 비교해 48장이 좀 더 자세히 다루고 있는 부분은 ‘성읍의 기지’에 관한 것이다(45:6; 48:15-19). 이 성읍 기지의 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줄 땅들과 비교해 길이는 같고 폭은 그것들의 절반이다(라이트 507쪽: 참고 두굿 666쪽 그림). 이 성읍 기지는 그 중앙에 위치한 성읍(15-16절)과 그 둘레의 땅(성읍 사방의 남은 둘레108)와 성읍 양쪽에 남아 있는 땅, 17-18상절)으로 이뤄져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남아 있는 땅의 용도이다. 지파를 막론하고 성읍의 일하는 자들이 그 땅을 경작할 것이고 그 산물이 그들의 양식으로 된다(18하-19절), 즉 이 땅은 일상적 노동의 터전인 셈이다.

 

  “거룩히 구별할 땅과 연접하여 남아 있는 땅의 길이는 동쪽으로 만 척이요” 여기서 ‘남아 있는 땅’은 곧 성과 성의 들을 제외한 성읍을 가리키며 이만 오천 척 되는 총 장의 길이에서 성과 성의 들의 장의 길이인 오천 척을 제외하면 그 성을 중심으로 동 서편에 각각 장 일만 척의 성읍이 남게 된다. “그 땅의 소산을 성읍에서 일하는 자의 양식을 삼을지라” 이에 관해서는 몇 가지 다른 이견들이 제시된다. (1) 그 성읍이 이스라엘의 공동의 소유란 점에서(45:6) 열두 지파에서 선발된 사람들이 성읍을 건축하고 인근에 있는 성전 봉사자들을 위해 그 땅을 경작함을 가리킨다 (Havernick, Gesenius). (2) 이 땅이 성소가 있는 거룩한 땅과 연접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를 수비하기 위한 군인들을 가리킨다(Hengstenberg). (3) 그 성읍에 거주하는 일반적인 노동자를 가리킨다(Kliefoth, Delitzsch). 문맥상 (1)의 견해가 가장 적합한 듯하다.

 


 

  개역한글은 48:15에 있는 히브리어 단어 ‘홀’(ל������)109)을 ‘속된 땅’ 혹은 ‘속된 지역’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한글의 ‘속되다’라는 표현은 뭔가 잘못된 듯한, 심할 경우에 죄와 관련된 듯한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표현으로써 히브리어 ‘홀’의 의미를 오해하게 만든다. NIV는 이 부분을 ‘성읍을 위한 일반적 용도’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일반적이다’라는 번역이 히브리어 ‘홀’에 더욱 적절하다. 개역한글에서도 같은 단어가 쓰인 사무엘상 21:4-5에서는 이 단어를 ‘보통’이라고 번역하고 있다(‘보통 떡’, ‘보통 여행’,). 여컨대, ‘속된’ 일상은 악하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다.110) 이런 일상적 노동의 터전이 비록 ‘거룩하게 구별할 땅’( שׁ������������������  ת������������������ר������ 트루마트 하코데쉬, 10, 18, 21절)과 구별되지만, ‘예물로 드릴 땅’(������ימ������������ ר������������  ה������������������ר������������ 하트루마 아쉐르 타리무, 8잘)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4). 여호와께서 계시는 성읍(48:30-35)

 

  에스겔서의 마지막 부분은 48:15-19에서 언급된 성읍에 관해 문들과 그 성읍 자체의 이름을 언급하며 마친다. 성읍 기지의 중앙에 위치한 성의 출입문들을 언급한다. 곧 이 출입문들은 성의 사면에 각각 3개씩 모두 12 개가 있게 되며 그 각각의 출입문에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명명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2대문에 12지파의 이름을 명명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 환상 기사가 수록된 계 21:12과 연관되어 있다(Delitzsch). 왜냐하면 본장의 새 성전의 성읍 역시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성취될 온전한 하나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성의 출입문들이 12지파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는 것은 곧 그 성읍이 온 이스라엘의 공동의 소유인 것을 암시하는데, 이러한 성읍이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로 명칭 되었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새 이스라엘 공동체와 항상 함께하시리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한편 에스겔의 사역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35절에서 “그 날 후로는”(יוֹם, 미욤) 여기서 ‘그 날’은 하나님의 모든 구원 사역이 완성되는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의 날인 동시에 본서에 기술된 모든 예언과 규정과 지침들이 완전하게 성취되는 때를 가리킨다.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원전상 본서는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란 뜻의 ‘여호와 삼마’(ה������������  ה������יה)라는 단어로 종결되는 바, 이는  에스겔 선지자의 全사역을 함축하는 본서의 총괄적인 주제라고 말할 수 있다. 곧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 중에 목격한 여호와의 영광의 떠나심(10:18-22;11:22-24)과 다시 돌아오심(43:4)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새 성전에 거하시면서 다시는 당신의 백성을 떠나지 않으시리라 하신 약속으로 귀결되며(43:7) 결과적으로 그 모든 사역이 이 '여호와 삼마'로 종결되는 것이다. 이 성읍이 12지파, 곧 전 이스라엘의 공동 소유란 점에서, 단순하게 여호와의  처소를 지칭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새 이스라엘과 그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라는 보다 포괄적이고 궁극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이 성읍은 정사각형 모양이 상징하는 것처럼 완벽할 것이며(참고 계 21:16), 각 문의 이름이 보여 주는 것처럼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 되어 한 성읍을 위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성읍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가 될 것이다.

 


 


 

Ⅱ. 스가랴의 메시아 예언

 


 

1. 에스겔서와의 연결성 속에서 살펴본 스가랴의 메시아 예언

 


 

  제롬은 스가랴서를 구약성경 중 가장 모호한 책이라 부르며 해석의 어려움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 중의 하나가 스가랴가 전하는 메시아 예언들이다. 구약의 예언서 자체가 주는 어려움과 더불어 메시아 본문 해석의 난제는 해석자에게 메시아 본문을 다룸에서 주저함을 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에도 스가랴서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중요한 예언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신약의 기록들에서 스가랴 9-14장은 구약성경 중 가장 자주 인용되는 본문이며, 메시아의 재림을 기록한 계시록에 미친 영향 또한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가랴서에서 제시하는 메시아 신탁을 다루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전 구약성경의 저자들이 선포하는 메시아 예언을 재해석하여 새롭게 적용하면서 이를 포로 후기의 정황 속에서 보다 구체화한다. 그러므로 스가랴서에 나타난 메시아 예언을 다룸에서 스가랴가 이미 선포된 메시아 신탁을 어떻게 수용하고 재해석하는지를 살피면서 스가랴의 메시아 예언을 고려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본 글에서는 특히 에스겔서와 연결성을 중심으로 스가랴서의 메시아 예언을 분석하고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의 시대적 연결성을 언급한 후, 이 두 예언서간의 신학적 관점의 연결성을 다룰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에스겔의 신탁을 포로 후기의 정황 속에서 재해석하고 발전시키는 스가랴의 메시아 신탁을 이해하는 데 준비 과정이 된다. 이를 바탕으로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에 나타난 메시아 예언의 연결성을 논하면서 스가랴 선지자가 선포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추적해 볼 것이다.

 


 

1).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의 시대적 연결성

 

  에스겔은 주전 597년경에 여호야긴 왕과 더불어 바벨론으로 끌려간 지 5년이 되는 해에 수레를 타고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을 본 이상으로 그의 신탁을 시작한다. 에스겔서에서 언급하는 연도들에 따르면 에스겔 선지자가 593년(겔1:2)에서 571년(겔 29:17)까지 여호와의 신탁을 받고 선포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 포로지로 끌려갔으며 포로지에서 예루살렘의 멸망 소식을 접하게 된다(겔 24:25-27; 33:21-22). 예루살렘 멸망이 있기 전(586년)까지 에스겔의 메시지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심판에 집중하다가 예루살렘 멸망을 계기로 그의 메시지는 예루살렘의 회복으로 전환된다. 에스겔이 지적하는 유다의 죄악은 여호와께 대한 배교와 패역으로 요약 될 수 있다(참고 겔 20:1-44). 유다의 배교와 패역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 그리고 바벨론 포로라는 심판의 결과를 낳게 되었고 이를 경험하는 유다 백성은 심각한 신학적 충격에 빠지게 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지는 가증한 행위들로 여호와의 영광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게 되고(겔 8-11장), 이것은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가능하게 하였고 유다 백성을 약속의 땅에서 추방하여 열국 속으로 흩어지게 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이것은 바벨론의 신인 마둑(Marduk)에 의해 예루살렘의 신인 여호와가 패배한 모습으로 보이게 되고 여호와의 명예가 실추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유다 백성에게 다윗 왕조의 멸망과 함께 심각한 신학적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심판이 성취된 후 에스겔은 이 백성에게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신탁을 본격적으로 선포한다(겔 34-48장). 포로 기간 동안 신실한 이스라엘 백성은 에스겔의 회복 신탁의 성취를 갈망하며 포로기를 감당하게 된다.

 

  고레스 왕 원년인 주전 538년에 고국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왕의 칙령이 내려지자 백성은 많은 수는 아니지만 성전건축에 대한 소망을 갖고 고국을 돌아온다. 돌아온 이들은 에스겔의 회복 신탁의 성취를 갈망하였겠지만 실제 그들의 정황은 쉽게 성취를 경험하지 못하게 한다(참고, 에스라 4장). 이들이 귀환 초기에 시작하였던 회복 사역은 중단되고 회복의 때가 그들의 세대에 속하지 않았다는 결론 속에 지내게 된다(참고, 학 1:2). 이러한 정황 속에서 등장하여 회복 신탁의 성취를 선포하는 선지자가 학개와 스가랴다. 이들은 회복신탁이 성취되는 시기인 포로기 이후의 시대를 맞이하여 이미 선포된 회복신탁의 성취적 측면을 다루게 된다. 하지만 고레스의 칙령과 함께 이스라엘의 회복이 시작되었는데도 완전한 회복을 경험하지 못하는 포로 후기 백성의 문제와 실패에 직면하게 된다. 이 정황 속에서 학개와 스가랴는 백성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길과 보다 구체적인 여호와의 회복 계획을 선포하게 되며 이 계획은 성전건축의 중요성과 메시아 신탁을 중심으로 전달된다. 회복은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포로기와 같은 정황을 그대로 이어가는 백성에게 회복에 대한 소망을 선포해야 하기에 스가랴는 에스겔 선지자와 밀접한 신학적 연결성을 갖고 그의 회복 메시지를 전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스가랴와 에스겔 사이에 나타나는 신학적 연결성을 살펴보는 것은 스가랴서의 메시아 신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2).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의 신학적 관점의 연결성

 

  에스겔의 신학적 관점은 스가랴의 회복 신탁의 틀을 제공하며 이러한 연관성은 스가랴의 메시아 예언에서 구체적으로 발견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선포되는 신탁의 내용 중 중요한 주제는 그의 백성 중에서뿐만 아니라 열국 중에서 실추된 여호와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에스겔서에는 여호와께서 “나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표현과 함께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회복을 이루실 것을 선포한다. 즉,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사용한 열국을 친히 심판하여 그의 백성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모으실 것이며, 그들을 정결케 해 신정 통치가 실현될 그의 나라를 친히 세우실 것이다. 따라서 에스겔 선지자가 제시하는 회복에 대한 신학적 관점은 이 중심 주제를 통하여 드러난다. 에스겔이 선포하는 메시아 예언 역시 이러한 신학적 관점 속에서 그 특징을 나타낸다.

 

  포로기의 정황 속에서 선포하는 에스겔의 메시아 예언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에스겔이 예언하는 메시아는 여호와의 강력한 왕권과 권위 아래에 있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둘째, 이 인물은 이스라엘의 회복 사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회복의 주도권은 여호와께 있으며 에스겔의 메시아는 우주적 통치나 권력을 행사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루는 인물로 묘사되지 않는다. 셋째, 그런데도 이 인물의 임재는 여호와의 신실하심과 통치를 확언해 주며, 특히 여호와의 임재를 보증하는 역할을 한다. 넷째, 에스겔의 메시아 인물은 과거의 잘못과 실패를 역전시키는 과정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즉, 과거 지도자의 실패를 회복시키고 역전시키는 대체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다섯째, 에스겔이 예언하는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제사장들과 협력하여 올바른 예배를 회복할 인물이다. 에스겔서 40-48장에서 메시아의 제의적 위치와 역할이 구체적으로 표시되며 제의에 필요한 제물을 제공하고 예배 의식을 주도하는, 예배 회복의 중요한 인물로 제시되고 있다. 포로기에 에스겔이 예언하였던 메시아의 모습은 부분적인 성취만을 경험하는 포로 후기 선지자들의 메시아 예언에서도 여전히 발견되고, 이러한 연결성이 스가랴의 메시아 예언 분석에서 구체적으로 지적될 것이다.

 

  에스겔은 회복 사역에서 여호와의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하면서 또한 이에 축을 이루는 여호와의 약속과 인간의 책임과 의무 사이의 긴장을 강조한다. 후자의 측면에서 인간의 소홀함이 심판의 근거가 되었으며(참고 겔 18장), 회복의 성취에서 인간 책임과 의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에스겔의 성전 환상의 내용이다(참고 겔 40-48장), 성전 환상에서 에스겔은 이미 세워진 성전을 둘러보는 것을 통해 여호와의 약속의 성취를 드러내 주며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와 제사 규정을 통해 인간의 책임과 의무의 중요성을 지적해 준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갖고 있는 계획의 이러한 신학적 관점(여호와의 주도적 사역과 인간의 책임과 의무)은 포로 후기 선지자들의 회복 신탁에서도 여전히 반영되고 있다.

 

  에스겔이 바라보는 이스라엘 회복 공동체는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공동체다. 성전과 예배의 회복은 이스라엘의 회복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에스겔이 전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복 신탁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예배와 성전의 회복이다(참고, 겔 20;39-44; 36:24-31; 37:26-28; 40-48장).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보는 에스겔의 이러한 신학적 관점은 포로 후기의 학개와 스가랴의 신탁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성전건축과 회복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학개와 스가랴서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연결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스가랴가 14장의 신탁에서 회복 공동체가 예배 공동체임을 확연히 선포하는 것은 에스겔이 그의 신탁을 성전 환상으로 마무리하면서 회복 공동체가 예배 공동체임을 선포하는 것과 유사하다.

 


 

3)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에 나타난 메시아 예언의 연결성

 

  스가랴 1-14장은 두 개의 큰 단락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단락인 스가랴 1-8장은 보다 임박한 미래의 회복 공동체를 이상과 환상의 신탁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이 단락의 주제는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우주적 심판을 통한 열방의 심판과 예루살렘의 회복(슥 1:7-21; 6:1-8), 두 번째로, 하나님의 개입과 예루살렘의 정결(학 2:1-13; 5:1-11), 세 번째로, 대제사장과 지도자의 회복(슥 3:1-10; 4:1-14; 6:9-15), 네 번째로, 정의와 다가올 축복(슥 7:1-8:23).

 

  두 번째 단락인 스가랴 9-14장은 미래적, 묵시적 신탁을 통해 마지막 날(“그날”)에 성취 될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한다. 스가랴서 전체를 볼 때 신탁은 포로 후기의 이스라엘 회복과 더불어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를 함께 그려 주고 있다. 따라서 이 흐름과 함께 등장하는 메시아 예언은 자연스럽게 메시아의 초림과 재림에 대한 신탁을 함께 담게 된다.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오실 메시아를 두 가지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다. 하나는 직분의 측면이며 다른 하나는 사역의 측면이다. 직분의 측면에서 스가랴가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은 제사장, 왕과 목자다. 사역의 측면에서 스가랴는 메시아가 직분과 관련된 사역을 감당할 것을 선포하지만 사역을 감당하는 모습은 일반적인 기대와는 다르게 제시되고 있다.

 


 

⑴ 제사장과 왕이신 메시아(슥 3:8-10; 4:11-14; 6:9-15)

 

  스가랴는 6:9-15에서 메시아를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통합하는 다윗의 후손으로 예언한다. 스가랴는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가서 바벨론에서 온 자들에게서 금과 은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든다(6:9-11). 그리고 이 관을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운 후, ‘순’에 대한 신탁을 전하면서 메시아 예언을 선포한다(12-13절). 성전을 건축하는 인물이 바로 이 ‘순’이며 이 신탁은 오실 메시아의 정체성과 사역을 다룬다. 스가랴가 선포하는 ‘순’은 다윗의 후손을 의미 하며(슥 6:12, 참고 사 4:2; 렘 23:3-5; 33:14-26; 겔 17:22-24), 그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이며, 영광을 얻고 왕의 보좌에 앉아 통치권을 행사할 것이다(슥 6:13). 이 신탁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내용은 이 메시아 왕이 제사장으로 그의 위에 앉아 왕권과 제사장직을 통합한다는 것이다. 즉, 오실 메시아가 제사장-왕임을 예언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번역상의 논의가 있다. 개역한글 성경은 13절 마지막 문장(“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을 고려하여 제사장과 왕이라는 두 인물이 언급되는 것으로 번역한다(“또 제사장이 자기 위(자기자리: 개역개정)에 있으리니”). 이 번역을 따르면, 제사장이라는 또 다른 인물이 “그 자신의 위”에 있을 것이며 이 제사장은 왕권을 상징하는 ‘순’과 더불어 평화의 의논을 나눌 것으로 이해된다.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은 “그리고 제사장이 그의 오른편에 있을 것이다”라고 의역하면서, ‘순’이라는 인물 안에서 제사장직과 왕권이 통합되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해석을 피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개역한글 성경이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라고 번역하고 있는 문장은 히브리어 문법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이 ‘제사장’이라는 단어를 주어로 보지 않고 부사구나 서술어로 번역할 수 있다. 이 문장의 동사는 완료 연계형(perfect consecutive)을 앞의 ‘순’을 주어로 하는 동사 연계형의 흐름과도 일치한다. 이 경우 ‘그가(‘순’) 그의 보좌에 앉아 제사장이 될 것이다‘ 또는 ’그가 제사장으로 그의 보좌에 있을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다. 뒤따르는 마지막 문장을 메시아 안에서 통합된 제사장과 왕의 모습간의 조화(샬롬)를 의미하게 된다. 메시아 안에서 제사장직과 왕권이 통합되는 것은 스가랴만의 독특한 신탁이 아니다. 시편 110:4은 이미 메시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 될 것을 선포하였다.

 

  스가랴 6장의 “순” 라고 불리는 다윗 후손이 제사장직과 왕권을 왕의 보좌에 앉아 통합하리라는 해석은 스가랴 3-4장의 신탁과 함께 살필 때 더욱 분명해진다. 스가랴 3장은 사탄(“고소자”)이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여호와 앞에서 대적하는 장면을 스가랴가 목격하는 것으로 신탁을 시작한다(1절). 여호와의 명령에 의해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벗어 버리고 대신에 아름다운 옷을 입고 정한 관을 쓰게 된다(4-5절). 여호수아가 정결케 되는 사건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결케 됨에 대한 전조다. 여호와의 도와 율례를 준행할 때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집(“내 집”)과 여호와의 뜰(“내 뜰”)을 지킬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더 나아가 죄 사함을 입어 정결하게 된 여호수아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예표의 사람들이 되어 여호와의 종(“내 종”)인 “순”이 날 것을 보증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9절에서 언급하는 돌은 성전이 세워질 기초석이라기보다는 4:7에 나오는 머릿돌과 연관하여 고려할 수 있다. 즉, 이 돌은 성전건축의 완성을 확증하는 증표가 되는 머릿돌을 의미하며 성전완성을 통한 죄 사함과 평안을 이루는 데 정결케 된 제사장과 여호와의 종 ‘순’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가랴는 3장에서 이미 제사장과 다윗의 후손으로 올 메시아(“순”)의 중요한 관계를 언급하면서 6장에서의 통합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과정은 4장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순금 등대와 이 등대 곁에 있는 두 감람나무의 이상을 통해 스가랴는 성전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축될 것(4:6)과 이 성전건축에서 다윗의 후손인 스룹바벨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4:9)을 선포한다. 스가랴의 이상에 등장하는 순금 등대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이것이 성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때 이 등대가 계속 불을 밝힐 수 있도록 금 기름을 내는 두 감람나무의 역할은 성전과 관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두 감람나무가 “기름 발리운 자 둘”이라는 14절의 설명을 볼 때 이 감람나무 중 하나는 성전 예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로 해석 될 수 있다. 두 감람나무는 순금 등대  (“성전”)에 금 기름을 제공하며 “온 세상의 주”를 섬기는 사역을 감당한다. 즉, 정치적 지도자와 종교적 지도자가 같은 위치에서 성전건축 과업과 성전을 이끌어 갈 하나님의 원동력을 공급하는 통로가 되리라는 것이다. 이들은 여호와의 신에 의해 건축된 성전(슥 4:6)을 유지하고 섬기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과 성전의 회복에서 여호와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는 에스겔의 신학적 관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또한 성전 건축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약속으로 완성을 보증하는 학개의 신탁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참고, 학 2:5). 성전을 중심으로 한 이들의 상호 보완적 역할이 6장에서는 메시아 안에서 통합되는 것으로 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스가랴서의 신탁 흐름에 따라 제사장과 왕인 메시아 예언을 정리하면, 정결하게 된 대제사장이 여호와에 의해 세워지고, 이것은 성전 예배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한다(3장). 이 대제사장은 왕과 함께 성전 예배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며(4장), 결국 왕의 보좌에 앉게 되는 다윗의 후손(“순”)안에서 제사장직과 왕권이 통합될 것이다. 스가랴는 이 메시아를 통해 이스라엘 회복 공동체가 종교적, 정치적 질서를 새롭게 갖출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회복 공동체에서 왕과 제사장의 협력 및 중요한 역할은 이미 예레미야의 신탁(렘 33:14-18)에서 강조되었다.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서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렘 33:15)과 여호와 앞에서 제사를 항상 드릴 레위사람 제사장들도 끊어지지 않을 것(렘(33:18)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포로기 이전에 선포하였다. 포로기가 되어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그의 성전 환상(겔 40-48장)에 이들의 역할과 중요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같은 맥락에서 포로 후기에 스가랴는 제사장과 왕의 역할을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메시아 안에서 이 두 직분이 통합될 것을 예언한다. 신약의 히브리서 저자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논증한다(참고 히 7:1-28; 8:1).

 

  스가랴는 9:9-10에서 왕이신 메시아의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왕은 시온과 예루살렘의 기쁨의 근거가 된다(슥 9:9, 참고 마 21:1-11; 막 11:1-11; 눅 19:28-40; 요 12:12-19). 겸손한 왕의 모습이지만 이 왕은 우주적 평화를 선포하고 우주적 정권을 가진다.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10). 두굿(Duguid)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시편 72편을 이 신탁의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라”(시 72:8). 이 통치의 특징은 공의(슥 9:9; 시 72:3)이며 그 결과는 우주적 평화와 구원이다(슥 9:9; 시 72:4)

 

  그러나 스가랴 9:10-11과 시편 72편 사이에 드러나는 한 가지 차이점은 스가랴서 본문은 하나님이 전면에서 적극적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 시편의 본문은 다윗 왕이 적극적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가랴서에서는 이 왕조차도 구원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개역한글 성경에서 “구원을 베풀며”라고 번역하고 있는 원어는 수동태 분사로 능동적 의미로 구원을 베푸는 것으로 해석되기보다는 구원을 받게 되는 수동적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여기서 묘사되는 왕은 승리를 얻어서 등장하게 되는 왕의모습이 된다. 같은 동사가 시편 72편에서는 다윗 왕이 구원을 베푸는 장면에 능동형 동사를 사용하면서 다윗 왕의 적극적인 역할을 보여 준다.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시 72:4). 이러한 차이는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회복에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사역을 강조하는 에스겔의 신학적 관점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포로 후기의 백성이 여전히 완전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에 스가랴는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전적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대적을 멸하시며 친히 그의 집을 지키는 자가 되실 것이다(슥 9:1-8). 또한 여호와께서 친히 에브라임과 예루살렘의 병거와 마병과 활을 끊으실 것이며(슥9:10), 사로잡힌 자들을 구원하여 약속의 땅으로 모르시는 분도 여호와이시다(슥 9:11-17, 참고 10:6-12). 스가랴 9장에서 언급하는 시온과 예루살렘의 왕은 회복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바가 없다.

 

  결과적으로 스가랴서에서 언급되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의 몫이 되며 9:9에서 언급되는 왕도 역시 하나님의 이러한 개입을 누리게 되는 자로 묘사되는 것이다. 이것은 에스겔 34장에서 여호와께서 적극적으로 양떼를 회복하는 사역에 관여하면서 다윗 목자를 세우시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하지만 스가랴는 에스겔의 신학적 관점과도 한 가지 차이를 나타낸다. 에스겔이 바라보는 회복이 이스라엘 안에만 한정되는 반면 스가랴는 우주적 회복의 소망 속에서 왕이신 메시아의 모습을 예언하고 있다. 겸손한 모습을 하고 구원을 얻어 등장하는 메시아지만 그는 이방인들과 열방에 화평을 전하게 된다. 이러한 메시아 사역의 우주적 측면을 6:15의 성전건축에 관한 신탁에서 이미 암시된 바다(“먼 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참고 슥 4:14; 8:20-23).

 

  결론적으로 스가랴가 3장, 4장, 6장, 9장에서 제시하는 메시아는 제사장직과 왕권을 통합하는 다윗의 후손이며, 그의 위치와 역할은 예배 공동체 회복에 집중하고 있는 포로기와 포로 후기 선지자들의 신학적 관점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이 메시아 왕이 하나님 백성의 회복 사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지만 그의 임재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증하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하며, 더 나아가 예배 공동체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⑵ 선한 목자이신 메시야(슥 10:1-12; 11:4-17)

 

  목자의 이미지로 메시아를 예언하는 것은 스가랴에게서 처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이 주제는 이미 이전 선지자들을 통해 언급되었던 것이며 구약의 메시지에서 자주 등장하는 비유다. 목자의 이미지가 지도자를 비유적으로 묘사하는 것임을 구약성경과 고대 근동의 문헌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바다. 특히 에스겔 34장은 스가랴가 전하는 목자이신 메시아 신탁의 배경이 된다.

 

  스가랴 10:2는 목자가 없어서 백성이 양떼와 같이 유리하며 곤고를 당하고 있음을 묘사한다. 이는 실제적으로 목자의 부재 문제가 아니라 목자는 있지만 양떼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실신한 목자의 부재 문제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친히 실신하지 못한 목자들과 숫염소들에게 책임을 묻고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슥 10:3), 여호와께서 친히 그의 백성을 돌보실 것이다(슥 10:6-12). 스가랴 10:4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그의 양떼를 위해 불의한 목자들을 대신할 지도자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는데, 이 지도자가 모퉁이 돌, 말뚝, 싸우는 활, 권세 잡은 자로 묘사되고 있다. 불의한 목자들을 대체할 지도자가 여호와 때문에 세움을 얻게 되리라는 사실이 “그에게로”라는 표현의 계속적인 반복을 통해 강조된다. 이러한 문제와 해결 패턴은 에스겔 34장이 이미 선포하고 있는 바다. ①목자들의 실패, ②여호와의 심판, ③여호와의 회복 사역, ④선한 목자를 세우심. 에스겔 34:1-6은 불의한 목자들로 인한 백성의 고통을 서술하며 7-16절은 여호와께서 친히 그의 백성의 목자가 되어 돌보실 것을 약속한다. 불의한 목자들은 결국 여호와의 심판 대상이 된다(겔 34:18-22).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친히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더 나아가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후손을 목자로 세워 그의 회복 약속을 보증하신다(겔 34:23-24).

 

  스가랴는 10장에서 언급한 선한 목자의 공급을 11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어 주고 있다. 하지만 11장의 목자 비유를 통해 에스겔 34장과 상반되는 신탁을 추가하면서 12장과 13장에 등장하는 찌름을 당하여 죽음을 겪게 되는 목자에 대한 신탁을 예비한다. 스가랴 11장에서 여호와가 양떼를 위해 두 목자를 세우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여호와는 죽임을 당할 양떼를 먹일 목자를 세우신다(슥 11:4). 스가랴 선지자가 이 목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그들의 양떼를 불쌍히 여기거나 돌보지 않는 정황이다(11:5). 또한 여호와께서도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지 않고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붙이신다(11:6). 이 정황 속에서 스가랴는 목자가 되어 “은총”이라는 막대기와 “연락”이라는 막대기로 양떼를 먹이며 양떼 안에 은총과 연합이 있기를 기대한다(11:7). 그러나 목자는 양떼를 싫어하게 되고 양떼도 이 목자를 미워하게 된다(11:8). 목자는 양떼를 그들의 불행 가운데 그대로 방치하면서 여호와께서 양떼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음을 반영한다. 결국 목자는 두 막대기를 자르고, 양떼는 그의 고가 은 삼십을 주고 목자의 관계를 세우시는데, 이 목자는 양떼를 돌보기보다는 강포를 행한다(11:15-17). 이 목자가 실패한 목자들의 행위를 그대로 행하므로 양떼가 고통을 당하게 되겠지만, 결국 양떼를 버린 이 못된 목자는 심판 대상이 된다. 이 못된 목자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선언은 스가랴 10장과 에스겔 34장에서 선포하는 선한 목자의 등장을 다시 소망하게 한다. 하지만 이 소망은 찌름을 당하여 죽게 되는 목자를 통해서 성취된다(슥 12:10; 13:7-9). 스가랴는 12장과 13장을 통해 10장과 11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선한 목자가 고난 받는 종 메시아임을 분명히 드러내 준다.

 


 

⑶ 찌름과 칼로 침략을 당하는 메시아(슥 12:10; 13:7-9)

 

  스가랴 12:1-9는 열국이 미래의 한 날에 예루살렘을 파괴하려고 모일 때 여호와께서 친히 그 대적들을 물리치시고 예루살렘을 보호하실 것을 선포한다. 이날에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실 것을 약속한다(12:10). 결과는 대대적인 애통과 통곡이다(12:11-14). 이것은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개혁한글)” 그를 찌른 행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애통과 통곡으로 보인다(12:10). 이들이 찌른 행위를 묘사는 동사[������������������ (다카르)]는 칼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상처를 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개역한글 성경에서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로 번역하고 있는 맛소라 히브리어 원문(BHS)을 직역하면 “그들이 그 찌는바 나를 바라보고”라고 번역된다. 이와 같이 맛소라 본문을 따라 번역할 경우, 그들이 찌른 자는 여호와(“나를”)를 의미하게 된다. 즉, 그들은 여호와께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것(이것은 추상적이거나 비유적이라기보다는 실제적인 상처를 의미함)에 애통하며 용서를 구하는 회개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친히 이 고통을 경험하심으로써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들은 그들의 행위에 대해 회개하고 죄 사함에 이르게 된다(참고, 슥 13:1). 여기서 언급하는 찌름을 당한 자는 스가랴서의 흐름을 고려할 때, 11:4-14에 나타나는 양떼에게 거절당하는 목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여호와와 목자가 동일시되는 대목이다. 이 목자가 13:7에서는 칼로 침을 당하는 자로 묘사되며 여호와의 짝된 자(“내짝된 자”)로 불린다. 따라서 여호와는 이 목자의 거절당함(11:4-14), 찌름을 당함(12:10), 또한 칼로 침을 당함(13:7)을 통하여 이 고통에 참여하기에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민이 찌른 자가 여호와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다. 같은 맥락에서 이사야 53장에서 말하는 고난 받는 종을 통해 여호와는 이 고통에 참여하시며, 스가랴 12:10의 찌름을 당한 자의 모습을 신약의 저자들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을 맞이한 예수님께 적용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참고 요 19:37; 1:7). 스가랴 12장에서 언급하는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의 애통과 통곡은 단순한 괴로움의 표현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애통과 통곡이 13:1에서 죄 사함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족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스가랴 12:10에서 언급하는 찌름을 당한 자는 13:7에서는 칼로 침을 당하는 목자로 묘사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치는 행위가 여호와에 의해 행하여진다. 즉, 여호와께서 칼을 휘두르시고 이 칼로 그의 목자(“내 목자”)를 치신다. 이것은 이사야 53;10에서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라는 표현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내 짝 된 자”라는 표현은 이 목자가 신성을 여호와와 함께 나누고 있는 자를 암시하며 “내 종”이라는 표현(참고, 슥 3;8)과도 평행을 이룬다. 이 목자가 칼로 침을 당할 때 양떼가 흩어짐과 심판을 경험하게 된다(슥 13:7-8, 참고 단 9:26). 그러나 삼분의 일은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여호와를 그들의 하나님(“내 하나님”)이라고 부를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목자의 죽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호와와 그의 백성 간의 언약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내 백성”과 “내 하나님”). 마태복음 26:31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를 버리게 되는 것을 이 예언의 성취로 해석한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라 기록된바 내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스가랴는 에스겔의 선한 목자이시며 제의적 역할을 감당하시는 메시아의 이미지(겔 34:23-31; 37:24; 40-48장)를 이사야의 고난 받는 종의 이미지(사 53장)와 하나로 묶어 찌름과 칼로 침을 당하는 목자(슥 12:10; 13:7)로 묵시적 신탁을 통해 전하고 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그의 백성과의 언약 관계를 회복하시는 방법이며 창세기 3:15에서 언급하는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신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히브리서 저자를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증거 한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 8:27). 또한 복음서 저자들은 스가랴의 메시아 신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았던 것이다. 요한복음 19:34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창에 옆구리를 찔리셨을 때 물과 피가 흐른 것을 기록하며 예수님의 확실한 죽음을 전한다. 하지만 같은 장 37절에서 저자가 스가랴 12:10을 인용하는 것을 볼 때 이 물과 피는 아마도 두굿이 지적한 것처럼 스가랴 13:1에서 언급하는 속죄하는 물과 칼로 침을 당하여 죽음에 이를 때 흘리게 되는 피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속죄와 언약 관계 회복이 동시에 이루어졌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가랴 10-13장의 흐름을 목자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10장에서 여호와는 불의한 목자들을 대체할 그의 목자를 제공하실 것을 약속하시고, 실제로 제공하시는데, 양떼는 이 목자를 거부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슥 11:4-14). 하지만 여호와는 이들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그들의 행위에 대해 애곡하고 회개에 이르게 한다(슥 12:10). 양떼가(칼로) 찌른 목자(슥 12:10)는 여호와께서 의도하신 칼로 치심(슥 13:7)의 대상이며, 이 목자의 죽음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남은 자들(“삼분지 일”)의 언약 관계가 회복되며 죄 사함이 이루어진다(참고 슥 13:1). 여호와와 그의 백성 간에 위치하여 백성의 죄 사함과 언약 관계를 회복하는 목자의 중재자적 역할은 에스겔의 성전 환상에서 왕의 역할 속에서 이미 그려진 바다. 에스겔의 성전 환상에 따르면, 왕은 자신과 백성의 속죄를 위한 제물을 제공하는 제의적 책임을 감당하는 인물이다(참고, 겔 45;15, 20, 22) 왕이 속죄를 위한 제물을 제공하지 않으면 성전에서 제사장들은 속죄제를 드릴 수가 없게 된다. 다라서 백성의 속죄를 위해 왕의 제의적 역할은 중요하다. 에스겔 선지자가 그려 주는, 속죄 제물을 제공하는 메시아적 왕의 중재적 역할이 양떼로부터 버림을 받고 찌름을 당하고 여호와의 칼에 죽게 됨으로 성취될 것임을 스가랴 선지자는 선포하는 것이다. 스가랴서에 제시되는 메시아 신탁의 배경이 에스겔서에만 제한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시간적, 신학적 관점의 연결성을 고려할 때 이들간의 밀접한 관계를 또한 부인할 수 없다.

 


 

(4) 에스겔서와의 연결성 속에서 살펴본 스가랴의 메시아 예언 결론

 

  스가랴 선지자가 선포하는 메시아 신탁은 이전의 선지자들이 선포한 메시아 신탁에 기초하며, 이를 발전시켜 신약의 메시아 예언 성취의 구체적인 근간을 마련해 준다. 신약의 저자들도 스가랴의 신탁을 근거로 해 재림하실 메시아의 모습을 발전시키고 구체화한다. 따라서 메시아의 모든 특성을 일부 선지자의 신탁에 제한하여 설명하거나 한 이미지로 다 대변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선지자들은 그들의 시대에 적절하게 주어진 메시아 신탁을 선포하며 뒤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은 이 신탁을 그들의 시대에 재적용하며 메시아를 통한 여호와의 구속사를 보다 구체적으로 전개한다.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의 연결성 속에서 선포되는 메시아 신탁은 이러한 측면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포로기의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포로지의 백성에게 에스겔 선지자는 새로운 다윗인 선한 목자가 등장하여 여호와의 임재와 성전회복을 보증할 것을 선포하였으며 여호와께서 세우신 성전에서 예배 공동체가 메시아 인물과 제사장의 협력을 통해 유지될 것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의 회복 신탁을 신뢰하고 돌아온 백성은 그들이 처한 상황 때문에 회복에 대한 소망을 잃고 자신들의 삶에만 열중하며 온전한 회복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에 스가랴 선지자는 회복을 위한 여호와의 적극적인 개입과 사역을 강조하고 에스겔 선지자의 메시아 신탁이 언급하는 메시아 이미지와 사역을 반복하면서 에스겔의 회복 신탁이 그들에게 여전히 유효함을 일깨워 준다. 여호와께서 회복의 길을 마련하셨지만 이를 거부하고 배척한 백성이 신실하지 못한 목자 아래에서 심판의 시기를 겪게 되지만 결국 여호와께서는 그가 세우신 목자를 통하여 죽음의 고통을 감당하시어 그의 우주적 나라를 온전히 이루실 것(슥 14:8-11)과 열국이 그를 경배할 것을 약속하신다(슥 14:16-21). 스가랴가 회복을 위한 여호와의 적극적인 개입과 사역을 여전히 강조하는 것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회복이 여호와께만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여호와의 약속에 대해 백성이 취하여야 할 반응은 그들의 악한 행위를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2-3). 스가랴의 권면을 듣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자는 그가 세우신 목자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실 영원한 나라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자들은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경험할 것이다(슥 14:17-19). 에스겔 선지자가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강조하면서 포로기의 백성에게 소망과 기대를 갖게한 반면, 스가랴 선지자는 회복의 때를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회복의 길을 찾지 못하는 자들에게 확실한 선택의 도전을 전하는 것이다. 이는 회복의 때를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회복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도전의 메시지다.

 


 

2.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9장, 심판과 구원)

 


 

   환상(1장-6장)이 과거적이었다면 말씀(7-8장)은 현재적이고 예언은 미래적이다. 이제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하신다. 이미 8:22-23절은 예고편으로 메시야의 종말론을 선포하고 있다. 9장은 전체적으로 이방에 대한 심판(1-8절)과 이스라엘의 구원(9-17절)이라는 구약 예언의 일반적인 패턴을 따른다. 그러나 이방에 대한 예언에는 심판만 나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방이 이스라엘에 편입될 것이라는 예언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실 것이란 예언과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예언의 첫 부분은(1-8절) 수리아, 베니게 그리고 불레셋으로 나누는 것은 지리적인 측면에서나 신학적인 차원에서 타당해 보인다. 이 세 지역은 모두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경계 안에 위치하고 있는 점에서는 일치한다(신 1:7; 수 1:3-4), 1절-8절은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경고를(1) 듣지 않는 그들에 대한 심판이 진행된다.

 


 

1) 수리아에 대한 심판(1-2상절): 하드락, 다메섹, 하맛

 


 

  이스라엘의 북방 시리아 지역에 위치한 나라들에 대한 심판의 예언을 담고 있다. 하드락 땅, 다메섹, 그리고 하맛에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좁게는 이방에 대한 적대적인 심판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블레셋에 대한 호의적인 예언(7절)과 맞물려 하나님의 은혜로운 취급을 바라보게 한다.  “하드락”은 수리아의 지명 혹은 수리아 나라를 가리킨다. “다메섹”도 역시 수리아에 속한다. 이 말씀이 거기에 머무른다 함은, 수리아 나라가 아주 망하기까지 그 말씀의 내용이 실시될 것을 가리킨다.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본다” 함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함을 의미한다고 한다(Calvin). 이 해석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회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 수리아와 기타 나라들을 멸망시키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보편적인 통치 수단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역사를 제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 나라에 대한 예언의 기술에서 강조되는 것은 심판의 구체적인 내용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차례로 임하는 사실에 있다. 하드락 땅에서 출발한 여호와의 말씀이 다메섹에 머물다가 인접한 하맛에 이르고 마지막으로 지혜롭기로 이름난 두로와 시돈에 이른다. 이러한 말씀의 행군은 통상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루트를 예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베니게에 대한 심판(2하-4절): 두로, 시돈

 


 

  두로와 시돈이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로 암시된 두 도시의 특징은 그들의 지혜로움이다. 이 지혜는 17절에 나온 하나님의 축복과 대비되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지혜를 가리킨다. 난공불락의 요새로 대변되는 막강한 방어(군사)력과 활발한 해상 교역을 통해 얻은 엄청난 국가 경제력이 두로가 가진 지혜의 증거다. 그러나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철통같은 방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조롱거리만 될 뿐이다. 영원한 보장이신 여호와와 지혜의 근본인 그분의 말씀에게로 피하는 것만이 최상의 안전책이다.

 

  시돈과 두로를 심판(4절)하시는 하나님이 단호한 의지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두로가 자랑하던 모든 재산을 빼앗을 것이다. 그들의 재산(권세)은 그 근원인 바다(해상무역)에 던져지고, 남은 것은 불살라짐으로써 (비교 암1:10), 세상적인 지혜가 이룩한 모든 일이 철저히 파괴 될 것이다. 세상나라가 아무리 강하고 부요하고 지혜롭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서지 못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나라의 영원성과 비교된다. 과연 두로는 주님의 의로우신 심판의 결과로서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더에게 정복당한 후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신약은 이러한 두로와 시돈에도 메시아로 말미암아 소망의 빛이 비추고 있음을 보여 준다(막 3:8 등).

 


 

3) 블레셋의 심판과 구원(5-8절): 아스글론, 에그론, 아스돗

 


 

  블레셋은 수리아와 베니게 지역 국가들의 패망, 특히 다메섹과 두로가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서 크게 놀랐을 것이다. 5-8절에 기록된 지리적으로 불규칙하게 배열된 도시들의 순서는 아마도 이들의 당혹감을 반영하는 듯하다. 블레셋 다석 도시 중 갓이 제외된 것은 유다의 웃시야에 의해 멸망당했기 때문일 것이다(대하 26:6).

 

  아스글론, 가사, 에그론, 아스돗에 대한 심판을 보면(8:5-6상절), 가장 남단에 위치한 아스글론도 두로와 시돈이 망한 이후 시시각각 조여오는 말씀의 진군을 보면서 크게 두려워한다. 블레셋 도시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에그론은 침략을 막아 줄 것으로 믿었던 다메섹이나 두로가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블레셋에 대한 다른 선지자들의 예언(암 1:6-8; 습 2:4)은 스가랴의 예언이 각 도시의 운명에 대한 상세한 보고보다는 심판과 구원의 전체적인 그림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임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을 정치, 경제적으로 괴롭히고 신앙적으로 타락시킨 블레셋 도시들은 결국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블레셋에 대한 심판이 그들을 정결케 하는 목적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블레셋의 교만을 끊는 것은 죄에 대한 심판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그들을 깨끗하게 하는 정결 과정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의 가증한 우상 제의를 제거한 결과(7절), 블레셋의 남은 자는 다윗 시대의 여부스(참고 삼하 5:6-10)처럼 정치, 종교적으로 이스라엘의 당당한 일원으로 편입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누릴 것이다. 놀랍게도 남은 자 사상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뛰어넘어 이방인 블레셋에게 적용되고 있다. 한때 이스라엘의 최대 적이었던 그들이 여호와의 남은 자,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나아가서 이들은 종교적으로 통합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다윗 시대에 시작된 이 통합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교회를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갈 3:28).

 

  8절에서 하나님이 보호하실 ‘내 집’은 일차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나아가서 예루살렘 도시나 유다의 주민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둘러 진 치신 대상을 해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 이 예언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적군, 포악한 자)는 하나님이 어떤 적에게서도 그들을 보호해 주실 것을 확약한다. 특히 “포악한 자”(애굽의 간역자 또는 감독과 같은 말)에 대한 언급은 “보신다”(비교 출 3:7)는 표현과 아울러 하나님의 보호가 출애굽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고통당하는 자기 백성을 보시는 것은 곧 그들의 구원을 의미한다.

 


 

3. 구원자 메시아의 도래(9:9-17절)

 


 

  메시아 예언을 담고 있는 후반부(9-17절)는 메시아의 도래를 맞이하는 기쁨과 환희, 용사이신 여호와, 추수의 기쁨, 양을 구원하는 목자의 이미지 등을 사용하여 메시아와 더불어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 메시아의 도래와 더불어 그분의 성품과 사역을 보여 주는 이 놀라운 예언은 이방에 대한 심판과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은 다윗의 자손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메시아는 이방 왕과는 달리 의로운 구원자다, 겸손한 왕, 평화의 왕이시다.

 


 

1) 메시아의 도래(9 -10절)

 


 

  왕의 도래와 통치의 선포는 이스라엘에게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를 가져다 줄 것이다. 왕을 빼앗긴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다윗 왕이 오는 것처럼 ‘기쁜 소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 처럼 메시아는 그 백성에게 기쁨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이 사실을 기뻐하고 외치게 된다.

 

  메시아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모습은 다윗 왕의 예루살렘 입성을 상기시킨다(삼하 19장). 신약 기자는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사실을 자세히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이 바로 다윗의 후손이요, 스가랴서에 예언된 메시아이신 사실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마 21장; 막 11장; 눅 19장; 요 12장). 나아가서 메시아는 의로운 왕, 곧 이상적인 왕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서 블레셋의 왕은 끊어지고 그 백성은 보호를 받지 못할 것이며(5-6절), 이스라엘에 임하시는 의로운 왕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또한 그는 평화의 왕이시다(10절). 메시아의 통치는 병거와 병마와 화살을 제거하는 일로 대표되는 바와 같이 온갖 종류의 무기를 철저하게 파괴하심으로써 그들의 무장을 완전히 해제하실 것이다. 그때 평화의 왕 메시아가 열방에 평화를 선포하시면 이 땅에 보편적인 평화가 확립될 것이다. 메시아가 통치하시는 영역(10절, “바다에서 바다,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영토(창 15:18, “애굽 강에서 큰 강 유브라데까지”)가 포함된다는 사실은 메시아가 이룩하실 평화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인 것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써 구체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메시아의 도래와 그 사역을 통하여 결실을 보게 된다.

 


 

2) 해방자이신 하나님(11-12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기쁘게 구원하시는 것은 피로 맺은 언약 때문이다. 이 피는 언약의 영원한 유효성을 가리키는 표지인바, 이 영원성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역을 통하여 확보된다(11절). 12절에서 포로 해방이 하나님의 구원 행동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포로된 자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그들의 해방을 위해서는 순종이 요청된다는 사실이다.

 


 

3) 용사이신 하나님(13-17절)

 


 

  이 단락에서 소개된 ‘여호와의 그날’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더 이상 심판의 날이 아니라 회복된 구원의 날이다. 이날은 여호와의 역전 드라마가 다시 펼쳐지는 종말론적 시기다. 이 종말론적인 사건을 규정짓는 일들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 자신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신종 무기’가 된다는 점이다(13절). 유다와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활, 화살, 그리고 용사의 칼이 됨으로써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전쟁의 도구가 된다.

 

  하나님이 무장하신 새로운 종류의 무기는 종말론적 전쟁이 새로운 종류의 전쟁임을 보여 준다.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무장 해제를 당한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무기가 된다.

 

  드디어 여호와의 강림으로 여호와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14). “그날”(16절) 곧 ‘여호와의 날’의 종말론적인 전망이 네 가지 그림을 통하여 강력하게 제시, 보완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승리가 용사이신 여호와의 강림과 활약 통하여 묘사된다(14-15), 여호와의 시내산 강림을 상기시키는 신현의 장면은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전능한 용사이심을 잘 보여 준다. 15절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군대의 연회 장면을 강한 터치로 그리고 있다.

 

  둘째,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양과 목자의 이미지를 통하여 강화된다(16절). 이 오래된 비유 또한 하나님과 백성 간의 언약 관계를 나타낸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승리가 왕과 백성의 비유를 통하여 나타난다(16하절). 하나님의 왕 되심은 왕관을 통하여 상징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영광된 자리는 적군의 짓밟힌 물맷돌과 대조되는, 왕관에 박힌 보석, 곧 귀한 돌로 표현된다. 하나님이 구원은 그 백성을 치처럼 영화롭게 하신다.

 

  셋째, 하나님의 구원이 추수 때의 풍성함으로 대표된다(17절). 하나님의 군대가 승리한 결과로 약속의 땅에서 누리는 축복과 평화와 번영이 청년과 처녀, 곡식과 새 포도주를 통하여 잘 나타난다.

 


 

4. 여호와께서 구원을 약속하신다(10:1-12)

 


 

  1) 불순종한 목자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10:1-3상절)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을 통해서 우상숭배에 대한 값을 치르고 돌아왔는데도 이스라엘 배성의 우상숭배(2절, 드라빔, 복술자)에 대해서 선지자 스가랴가 아직도 이야기하는 것은 우선 이상하게 들린다.111) 그러나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 왔다고 해도 그들이 여전히 주변 국가의 거짓 신들에게 기원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본문에서 역사적 배경을 유추하자면 아마도 성전재건축이 완성 되고나서 수년이 지난 후, 즉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같은 의로운 지도자들이 이미 죽고 그들의 자리를 다른 의롭지 못한 지도자들이 차지하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봄비”는 다가오는 시대에 하나님의 축복이 뒤따르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추수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봄비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게 구하라고 한다. 그러나 기원 대상이 드라빔(휴대용 우상)이나 복술자(점쟁이)에게 구하는 우상숭배자들은 하나님께 기원하지 않고 거짓 신들에게 의존한 결과로 백성이 그들에게 의로운 지도자가 없어서 목자 없는 양처럼 헤매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백성이 거짓 신들을 추종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의로운 지도자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스가랴 선지자는 말한다(10:2하절). 그 결과 그들이 고생만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응하실 것인가를 3-12절은 요약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목자”들(ם������������������ 하로임)에게 화를 쏟고 “수염소”들( ים������������������������������������ 하아투딤)을 벌하리라는 것이다(10:3상). “수염소”들(하아투딤)은 비유적으로 양떼의 선두 무리를 의미한다. “목자”들이나 “양”떼 모두가 다른 거짓 신들을 추종하여 하나님에게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2) 유다/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나올 메시아(10:3하-4)

 


 

  저악한 지도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천대하며 상해하기를 나귀나 소를 때려 몰듯 하였으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취급하실 때에 전쟁의 준마같이 하시겠다고 한다. 그가 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을  승리케하여 왕이 타고 승전한 좋은 말을 대우하듯 하시겠다는 것이다. 곧 유대에서  구속 운동이 나와서 하나님의 집(천국운동)을 견고히 할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목자가 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4절은 하나님께서 유다/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이끌어 내어 성취하실 네가지 구체적인 것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인 유다 족속에게서 “모퉁이 돌”112), “말뚝”113), “싸우는 활”114),과 “권세 잡은 자”115)가 나올 것이다. 이 네 가지 특징은 메시아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다 백성에게서 그러한 완벽한 자가 나온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참으로 성취돌 수 있을 것이다.

 


 

3) 이스라엘의 회복(10:5-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키는 근거가 되는 것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이는 전적으로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약속에 근거한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 이는 출애굽 언약의 연속이다.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출 6:7-8).116)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원래의 형태로 완벽하게 회복시키리라고 말씀하신다. “내게 내어 버리움이 없었음같이 그들이 되리라.”

 


 


 

4) 제2출애굽(10:7-12)

 


 

  8-12절까지는 1인칭 형식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형식을 취한다. 이 예언의 초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의 포로들을 앗수르와 애굽에서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에 있다. “흐트려 트림”(9절)과 “모음”(8절)의 이미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열방”, 즉 많은 민족 사이에 그리고 “원방”, 곧 먼 곳에 포로로 끌려 갔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이다.

 

  한때는 비참한 처지에 있던 포로들이 다시 강해져서 귀환한다. 그들이 “애굽 땅에서 돌아오게 하며 그들을 앗수르에서부터 모으며”(10절)라는 표현은 특정 국명으로서가 아니라, “애굽”과 “앗수르”로서 표현되는 “이 세상 모든 곳, 모든 나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귀환시키리라는 하나님의 계획의 범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여기서 “애굽에서”와 “앗수르에서” 돌아온다는 것은 모든 시대에 걸쳐 흩어진 모든 포로를 귀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117)

 

  “길르앗 땅과 레바논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리니 그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10절)는 구절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길르앗 땅과 레바논”으로 포로들을 귀환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편이며, 레바논은 악속의 땅의 북쪽 경계 밖이다. 따라서 이 어느 곳도 약속의 땅이 아니다(창 15:18-21; 민 34:2-12; 겔 47:15-20). 포로들을 귀환시켜 이스라엘 온 땅을 가득 채우고 길르앗과 레바논까지 넘쳐 흐르도록 많은 포로를 귀환시키리라는 하나님의 계획의 범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11절에 “고난의 바다(해협, 여울목)를 지나갈 때에 바다 물결을 치리니(가라 앉히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등의 표현은 홍해를 건널 때의 상황을 묘사는 표현들이다.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규가 없어지리라”라는 표현도 역시 애굽과 앗스르의 왕권이 끝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강한 두 제국을 망하게 하신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권세를 제압하시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자신의 주권을 취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왕래하는 모든 곳이 하나님의 속권하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귀환(구원)하신다는 스가랴의 전체적인 주제를 잘 나타낸다.

 


 


 

5. 하나님을 잊자 말라(11:1-17) : 요단이 쓰러지다

 


 

1) 권력자의 파멸을 노래한 예언적 조롱(1-3)

 


 

  몰락하는 정치적 적대자는 지상의 어떤 세계적 권력자다. 그의 거창한 세력과 이로 인한 거드름 피우는 모습은 레바논의 백향목(히말라야 삼나무)118)이나 다른 화려한 나무들 또는 바산의 상수리나무에 비유되지만 이제는 자신을 파멸시킬 불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야 한다. 바산의 상수리나무는 그의 저항적인 힘으로 유명하다(참고 사 2:13; 겔 27:5). 그러나 그도 비슷한 운명에 놓이게 된다.

 

  세계적 권력자의 욕망과 착취의 모습은(특징상 동물 비유로 바뀌어)요르단 숲의 사자에 비유했다(3절). 목자와 사자의 비유는 예례미야 25:34-38(특히 36절)을 연상시킨다. 레바논의 백향목이나 바산의 상수리나무는 그들의 호화로움으로 자랑거리가 되었으나, 창조주의 뜻과 의도에 어울리지 않는 거만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몰락하게 된다. 그들이 몰락할 때 비참함은 그들이 화려함과 맞물려 더욱 처참하다(11:1-3). 세계의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징계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사명이 다한 다음에는 그들 역시 하나님에 의해 뽑히게 된다.119)

 


 

2) 은총과 연합 막대기의 파손(4-16)

 


 

  양떼와 그들의 목자들과 하나님께서 파송하신 목자와의 관계를 예언자의 상징적 행동을 통하여 메시지를 전달한다.

 


 

(1) 메시아적 목자의 파송(4-6절)

 

  하나님은 ‘너’라고 지칭하는 어떤 목자에게 양떼를 먹이라 명령하신다.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 여기에서 너는 ‘메시아적 목자’라 칭한다. 이 이름 없는 메시아적 목자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졌다. 그는 잡아먹힐 양떼120)를 목양해야 한다. 그는 선한 목자121)와 같이 잡아먹힐 양떼의 가련한 상태를 직시하고 불쌍히 여긴다. 대개 양떼는 살아서는 그의 주인에게 우유와 양털을 선물하며, 죽어서는 고기와 가죽을 선물한다. 따라서 그의 주인이 그를 도살할 때 특별한 죄의식을 갖지 않는 것은 당연하며, 돈을 받고 그들을 팔아서 그 소득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5절에서는 목자들이 양떼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양떼는 실제 동물인 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상징된 인간을 의미한다. 그들을 잡는다는 것은 지독하게 착취하고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의 소득(불의한 이익)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거리다. 따라서 죄의식이 없다는 것은 도덕적 양심의 마비를 의미한다.

 

  양떼는 이스라엘 백성, 즉 유대 민족(10, 14절)이며 양떼의 소유자들은 예레미야 23:1-2와 에스겔 34장의 목자들과 같이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층 인물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 메시아적 목자는 “내가 다시는 이 땅 주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6절)고 말한다. 이 말씀은 이미 하나님께서 파송하신 목자의 활동이 실패로 끝났기에 양떼에게 처벌을 내리고 그 후에 비참한 상황이 전개되자, 하나님 자신이 내린 처벌을 돌이키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결의를 천명하신다. 결코 치유될 수 없는 황폐함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이셨으나, 이제는 그들의 안전이 하나님에게 관심 밖의 일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2) 메시아적 목자의 하나님 명령 수용(7절)

 

   메시아적 목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였다(7절). 이스라엘 백성은 잡혀 죽을 양떼처럼 비참한 처지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야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목양하여 잘 되게 하려고 막대기 둘을 취하여 그들의 목자로서 활동하셨다. 이 두 막대기 중 “은총”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를 은혜의 관계라고 가르치는 것을 대표하고, 다른 막대기 곧, “연합”이라는 것은 유대인과 유대인 사이에 형제적 연합을 배양하려는 사역을 상징한다.

 


 

(3) 메시아적 목자의 직무 포기(8-9절)

 

 

 

  생각이 깊고 선한 주인은 자기의 양떼를 잘 돌보지 않고 게으르며 책임을 다하지 못한 목자를 마땅히 교체할 것이다.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여호와 하나님은 목자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목자를 한 달 동안 세 목자를 제거했다. 이유는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대리인의 실패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으며, 양떼도 그의 보호에 싫증을 느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목자의 직분을 감당하실 준비가 되어 있었고, 자기를 낮추어 그 백성을 자신의 양떼로서 돌보셨으며, 모든 주의를 기울이셨는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 했고 심지어는 조롱까지 했다. 8하절의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 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는 이유 설명으로 7절에서 말한 (메시아적)목자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음을 알 수 있다.

 


 

(4) 직무 포기의 결과 : 은총막대기의 파손(10-11절)

 

  목자는 더 이상 그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을 것이며(9상절).122)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는 막대기는 부러졌다(10상절), 뿐만 아니라 메시아적 목자가 더 이상 그들과 상관하지 않겠다(9상절)는 설명에서 이제 무엇이 초래될 것인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하는 자는 망하는 대로, 나머지는 서로 살을 먹는 대로 두리라”(9하절). 그가 그의 직무를 포기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그는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꺾어 버렸다(10상절).123) 이러한 결과가 직무 포기로 나타난 것이다. 은총 막대기의 파괴가 ‘나의 언약이 파기되었다’(10하절).은총의 막대기는 하나님께서 백성을 모든 민족에게서 지켜 주심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는 외부에서의 침략 없이 평화로이 살 수 있었으며, 국가의 방어를 위해 어떤 무기도 필요치 않았으나, 이제는 사방에서 몰려올 수 있는 민족들의 침략의 공포 속에 살아가야 하며, 화평의 언약과 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124)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무력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들의 지도자가 되시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증거한 것으로 보인다.

 


 

(5) 또 다른 죄악의 지적(12-13절)

 

  직무를 포기한 메시아적 목자가 깨달아 참회(돌이킴)하지 않음으로서 또 다른 죄악이 이어진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목자의 직무에 상응하는 품삵을 달라고 했다. 이것은 돈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품삯을 주지 않겠다고 하지는 않았으나, 품삯을 은 삼십 개로 정했다.125) 그들은 하나님께서 위임하신(메시아적) 목자의 직무를 천한 노예 값으로 본 것이다. 느헤미야 시절 총독이 하루 생활비로 지불받는 금액이 은 사십개다(느 5:15). 총독의 하루 생활비보다 못한 것으로 취급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모든 수고를 무가치하고 하찮은 것으로 간주했다.

 

목자이신 여호와 곧, 메시야께서 그의 사역에 대한 유대인들의 평가를 너무 낮은 것으로 보셨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토기장이 에게 던지라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그 평가를 잘못된 것으로 알아 업신여긴  뜻이다126).

 


 

(6) 다른 죄악의 결과(14절)

 

  “내가 또 연합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꺾었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리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더욱 심각히 내어 버리리라는 행동을 보여준다. “연합”이란 것은 유대인들끼리 서로 연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호와께서 연합의 “막대기를 꺾었으니”라는 것은, 저희들의 서로 합하는 은혜를 걷우셨다는 뜻이다. 이 예언과 같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뒤에 저들의 국운은 날로 쇠하고 저들 사이에 불화와 충돌이 심각하여졌다. 이미 귀향 직후에 학개는 북쪽 사람이 성전재건에 참여하는 계획에 반대했으며(학 2:10이하), 기원전 4-3세기경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역대기 역사서에서는 전적으로 반사마리아적인 경향을 띠었다.

 


 

(7) 무익한 목자에 대한 상징적 행동(15-16절)

 

  여호와께서는 메시아적 목자에게 명령하여 “어리석은 목자(쓸모없는 목자)로 분장하고 그 구실을 하라”(15절)고 하셨다. 이러한 위임은 참된 목자의 희화된 상으로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해야 할 것은 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함으로 4-5절에서 묘사된 양떼의 소유주를 훨씬 능가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는 무익한 목자, 이름만 목자라는 칭호를 갖고 그의 의무는 대충 무시해 버리는 ‘겉 모양 목자’라 불렸다.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압제를 전적으로 받게 되어 필경 멸망하게 되었다. 우리 본문에 “한 목자”는 로마 정권을 가리켰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여기 “한 목자”를 로마 정권에 국한시키지 않고 교회의 일군으로서 선한 목자의 책임을 하지 않는 자로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새 목자의 양태에 대하여 본문은 여러 가지로 설명한다. 그는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한다.’ 세심한 목자는 양떼에게서 떨어지거나 길을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 목자를 따라다니는 데 익숙하지 않은 연약한 어린 양들은 양떼를 떠나 헤매는 일이 많고, 쉽게 사방으로 흩어진다. 이런 양들을 찾는 것이 선한 목자의 의무 가운데 하나다. 또 하나님께서 세우신 어리석은 목자의 몇 가지 악덕은 다음과 같다. 없어진 양을 기억도 하지 않으며, 흩어진 자들을 찾아오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않으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않으며, 살찐 자의 고기를 착취하며, 잔인하게 양떼를 취급하여 그 발굽을 찢는 것이다. 선한목자가 되려면, 위에서 기록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바꿔야 할 것이다. 곧, 없어진 신자를 찾아 올 것, 상심한 신자들을 치료하여 줄 것, 강건한 신자들을 먹여서 끝까지 강건하도록 하여 줄 것, 잔인하게 행하지 말고 언제나 선량하게 행할 것이다(16절).

 


 

(8) 저주의 선언(17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패역함을 응징하시며 보응의 도구로 사용하신 목자에게 일정 기간 권력을 허용하시고, 때가 지난 다음에는 권력을 다시 빼앗아 버리신다. 단순한 욕망과 탐욕과 포악성에 사로잡힌 이들을 하나님은 사명감도 없고 무지한 자들에게 봉사하는 도구로 쓰시기로 하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도구는 불경건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때 하나님은 그를 혹독하게 처벌한다. 칼로써 그의 기관들을 잘라내 버리신다. “팔도, 오른쪽 눈도 칼에 맞아서 팔은 오그라들고 눈은 아주 멀어 버려라.” 이는 시드기야가 겪었던 운명과 같다(참고 렘 39:4,7).   

 


 

6. 예루살렘의 구원(12:1-13:6)

 


 

1)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보호하실 것이다(12:1-9)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이 말씀에서 ‘이스라엘’은 북 왕국 이스라엘을 뜻하지 않고 포로 귀환 후 새롭게 형성된 이스라엘 사회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경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맛사’는 흔히 동사 ‘나사’(א������������ 들어 올리다, 지고 가다)에서 유래한 명사로 간주되며, ‘짐’(burden)으로 번역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전해 받아서 백성에게 가져가 선포해야 한다는 점에서 선지자가 지고 가는 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R. L. Smith). 그러나 성경에서 “선지자의 짐”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는 반면, “바벨론의 짐”(사 13:1) 혹은 “니느웨의 짐”(나 1:1)과 같은 표현이 사용되는 것을 볼 때, ‘맛사’는 선지자가 지고 가야 하는 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에게 지우시는 ‘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들을 때 듣는 자에게 짐을 벗게 하는 능력이 있게 하기도 하고 듣는 자에게 그 말씀이 선언하는 책망과 심판으로 짐을 지듯 지고 가야 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시는 ‘맛사’는 경솔히 대할 수 없는 엄중한 말씀이며, 우리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경고가 된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어지지만 침공하는 열국의 눈에는 누구나 쉽게 마실 수 있는 술잔, 쉽게 정복할 수 있는 약한 성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은 작은 성이며, 이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는 민족들은 그 수와 힘에서 예루살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강하다. 하지만 전쟁의 결과는 작고 연약한 예루살렘이 크고 강한 열국 군대를 이길 것이다. 이 약한 예루살렘이 열국들에게 그들이 마시고 취해서 비틀거릴 술잔이 된다. 예루살렘이 어느 정도 파괴되며, 그 백성이 고난당하는 것은 사실이다. 예루살렘이 먼저 여호와로부터 분노의 잔을 마실 것이기 때문이다(사 51:17). 하지만 예루살렘은 더 이상 그 잔을 마시지 아니할 것이며, 잔은 열국 백성에게로 옮겨질 것이다(사 51:22-23; 렘25:15), 열국이 마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은 곧 예루살렘이다. 열국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힘으로써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 이 예루살렘이라는 돌을 들겠지만, 돌을 든자가 그 돌의 무게 때문에 크게 상할 것이다. 열국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셨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하셨다. 예루살렘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싸우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자기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인하여 힘을 얻게 된다(슥 12:5). 유다는 불이 되어서 자기를 공격하는 열국을 태울 것이다(슥 12:6). 유다의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열국을 멸하시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이다(슥 12:9). 사람의 결심은 바뀔 수 있고, 결심을 굳게 지키더라도 사람은 자기가 결심한 대로 이룰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세상을 존재하게 하셨고, 세상의 역사를 만드시는 전능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포로 이후 사회는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의 세 집단으로 구분 될 수 있다(슥 12:7). 다윗의 집은 왕족이며, 예루살렘 거민은 관료와 제사장을 비롯한 지도층이 주된 구성원이며, 유다는 평민 계층을 말한다.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만 구원하실 것이 아니라, 유다는 구원하시며, 유다의 영광을 예루살렘의 영광보다 못하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스가랴서는 왕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실 것이다(슥 14:9). 예루살렘으로 오는 열국의 백성은 다윗과 솔로몬을 만나려고 오는 것이 아니며, 여호와를 경배하고 그에게 예물을 드릴 것이다. 후에 형성될 새로운 사회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과 유다 족속을 똑같이 귀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선언한다(슥 12:7). 메시아로서의 왕이 예루살렘에 임할 것이고(슥9:9) 그 왕은 공의로우며 그가 구원을 베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귀를 타는 겸손한 왕이며 직무와 책임은 있으나, 특권은 배제된 왕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새로운 시대에 맞게 정치 조직에도 변화가 생겨나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다.

 


 

2) 배반했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회개하고 애통할 것이다(12:10-14)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혜를 구하며 용서를 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슥 12:10), 독자를 잃은 것처럼 통곡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심령을 조금씩 주시는 것이 아니라, 넘치도록 부어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건설하시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들의 심령이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잠겨 철저하게 변화하는 것을 경험한다.

 

  하나님께서 돌아오셔서 자기 백성을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것이 용서라고 한다면 스가랴서이 주제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돌아 오셔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건설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그렇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성도의 긷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회개는 므깃도 골짜기에서 요시야 왕이 죽었을 때, 유다 온 백성이 통곡하였던 것처럼 큰 통곡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슥 12:11).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루살렘에 돌아오셨다. 이제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자기에게로 부르셔야 한다. 예루살렘 주민, 곧 교회는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휘파람”에 응답해야 한다(슥 10:8). 그 첫 단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마음으로 무장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간구하는 것이다.

 


 

3) 모든 우상과 우상의 예언자들이 사라질 것이다(13:1-6)(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하리라)

 


 

   “그날에”라는 구약의 묵시적이며 종말론적인 예언의 중심 주제인 ‘야훼의 날’( ה������������������ יוֹם 욤 야웨)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죄악과 모순을 해결하시고 야훼 하나님이 통치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날, 그날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직접 강림하시는 날이다. “그 날”은 이 땅의 죄악을 모두 씻고, 인간이 통치하는 이 세상의 모든 모순을 해결하시며,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하는 날이다.

 

  13:1절에 ‘샘’은 히브리어로 ‘마코르’(קוֹר������)로서 구약에서 자주 생명의 근원에 대한 비유로(렘 2:13; 17:13; 시 36:9; 잠 10:11; 14:27; 16:22) , 그리고 기쁨의 근원에 대한 비유로(참 5:18) 사용한다. 생수의 샘(마코르)이 되시는 야훼를 버리고, 우상숭배죄에 해당되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에 대해서 스가랴 13:1에서는 야훼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들의 죄, 특히 야훼를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진 모든 자의 죄를 씻어 주시는 샘을 열어 주시겠다는 복음을 선포한다.

 

  하나님은 ‘그날에’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하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며,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을 영원히 열어 주시는 야훼 하나님에 의한 것이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인간 원죄의 가장 악한 열매다. 여기서 ‘우상의 이름’은 우상의 실재와 본질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는 것은 우상 그 존재 자체를 완전히 소멸하겠다는 것이다. ‘우상숭배’와 함께 ‘거짓 선지자들’과 ‘더러운 사귀’( אָה������������������ ������רוּ 루아흐 하투므아, 그 더러움의 영)를 이 땅에서 제거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종말의 때에 하나님께서 우상과 거짓 예언자와 더러운 영을 제거하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전히’ 거짓 예언을 하면, 이제는 그 낳은 부모가 그 낳은 자식을 먼저 칼로 찔러 악을 제거할 것이다(3절). 또 거짓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환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4절), 이제 자신의 실체를 감추기에만 급급해진 그들은 ‘나는 선지자가 아니라 농부’라고 말할 것이다(5절). 거짓말을 통해 백성을 미혹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려 하지만 그들의 운명은 비참함과 비굴한 존재가 될 것이다.

 

  거짓 예언자들 또는 우상숭배자들이 종교 의식 중 황홀경 속에서 예언하면서 자해함으로써 생긴 상처들로, 자신이 우상숭배자 또는 거짓예언자임을 나타내는 표시가 되는데 그 상처를 ‘내 사랑하는 자들의 집에서 얻어맞은 것’(6절)이라고 말함으로써 여전히 구차스러운 변명을 할 것이다.

 

 

7. 하나님의 백성의 연단: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의 2/3는 멸망하고 오직 1/3만 남아서 여호와의 백성이 될 것이다.(13:7-9)

 


 

  선한 목자가 수난을 당하고 양떼 역시 흩어져 환난을 당할 것이지만 이로써 연단을 받아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큰 구원에 이를 것을 예언하는 내용이다. 13:7은 신약의 복음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종말론적 해석에 의해 인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스가랴 13:7의 두들겨 맞은 목자로 보았으며, 자신의 사명을 그 구절의 문맥에 따라 해석했다(막 14:27; 마 26:31).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여기서도 강조된 형태인 ( ם������������ יהוה  ������������ 네움 야웨 차바), 즉 ‘만군의 야훼의 선포다’로 시작된다. 야훼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스가랴 11:1-7에 언급된 무가치한 목자와 대조되는 본문의 “내 목자, 내 짝 된 자”는 참 목자 되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11:17에서는 “칼이 임하리니”에 “칼”이 여성 명사이므로 동사가 여성형으로 쓰였다. 본문 13:7 중 동사인 “칼아 깨어라”에서는 명령이 ‘우리’(י������עוּ)로서 여성형으로 쓰였으나, “치라”는 명령에서는 ‘하크’(ך������)로서 남성형 명령으로 쓰였다. 이는 그 ‘침’의 주체가 칼 자체라기보다는 야훼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더 강조점을 두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사 53:4, 10; 행 2:23). 따라서 여기서 선한 목자의 수난은 곧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결과란  사실이 강조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여기서 “내 목자”는 ‘내 짝 된 자’( י������י������������ ������������������ 게베르 아미티), 즉 ‘나와 교제하는 남자’, ‘나와 친분 있는 남자’로서, 하나님과 동등된 위격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리키는 것이다(요 1:1, 2; 10:30; 14:9). 여기서 또한 “드리운다”는 것은 ‘돌아오다’( שׁוּב 슈브)라는 동사가 쓰인 ‘와하쉬보티’(י������������������������������)로서 ‘또한 내가(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뜻이다(참고 사 1:25).

 

  이제 잠자던 칼한테 깨어나라고 한다. 그리고 그를 치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아끼시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다. 완전한 구원의 시작일 뿐이다. 목자를 치면 양떼가 흩어지지만, 목자를 친 손을 ‘그 작은 자들’(ים������������������������ 하초아림), 즉 ‘그 보잘것없는 자들’위에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긍휼하심으로 그 백성을 바라보시면서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말씀하셨으며(막 6:34; 마9:36), 그 목자 없는 양들을 향하여 위로 하셨다.

 


 

  13:8-9절의 문맥상 이는 세상 종말의 때에 최종적인 성취를 기다리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본문이 이러한 연단사건이 ‘그 땅에서’( ץ������אָ������- ל������������ 베콜 하아레츠) 일어나는 전 세계적 사건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네움 야웨’( ה������ה������- ם������������)가 다시 반복된다. 야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도 비장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하나님의 백성의 연단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에서 비장함 가운데 이루어진다. 이 하나님의 백성의 고난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함께 당하는 수난이라고 볼 수 있다(13:7). 그리스도의 수난은 일회적이지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수난 중에 자랐다. 주님 오실 때가지 수난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근거한 하나님의 교회의 수난은 하나님의 교회의 정결을 이루며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정결함을 증명해 줄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교회는 궁극적인 승리를 맛볼 것이다.  왜냐하면 연단하며 시험하시는  분은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작은 자들에게 그의 손을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삼분의 이’와 ‘삼분의 일’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 예언이 언급하는 것은 초대교회에서 핍박받으며 연단과 시험 가운데 ‘남은 자’다. 이들이 그리스-로마 세계를 복음화 시켰듯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가 당하는 고난 중에도 그 고난과 함께 믿음을 지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그래서  ‘불에 들어가게 하며, 은을 불태우듯이 태우며, 금을 시험하듯이 시험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들을 것이다. 아직은 끝이 아니다. 마지막에 고난을 통과해야 된다. 그러나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무리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걸러 내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정결케 하심이다. 그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남은 자’들 위에 성취된다. 정결한 믿음을 가지게 된 남은 자들은 그 고난 중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새 약속의 성취를 생명같이 귀하게 여기며, 그들이 바라보았던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올 것이다. 이 종말이 가까운 오늘에 믿음의 고난  중에 있는 이 남은 자들에게 들려오는 거룩한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이것이다.

 


 

8. 야훼의 날, 그날에(슥 14:1-21)

 


 

1) 열국과 예루살렘 사이에 전쟁이 있어서 예루살렘 백성에게 큰 환난이 있을 것이다(14:1-8)

 


 

  여호와의 날에 그 심판은 이방 민족들을 도구(2상절)로 사용하여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백성에서부터 시작된다(참고 암 5:18; 사 22:5; 습 1:2-18; 계 16:14-16). 그날에는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백성 중 절반이나 사로잡혀 갈 것이나 남은 자들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한편 스가랴 14:3 이하에서는 야훼의 날에 있을 구원을 묘사한다. 야훼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치러온 이방 민족들에게 거룩한 전쟁을 선포하시고, 친히 감람산에 임재하여 서시며 지진과 같은 자연계의 현상도 사용하셔서(참고 웃시야 왕 때 지진에 관해서는 암 1:1)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기 백성, 즉 구원받은 성도 및 천군천사와 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피할 길을 내주신다(참고 마 25:31; 살후 1:7 등).

 

  야훼의 날, 그날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왕국과 구원의 완성을 묘사하고 있다. 먼저 6-7절에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 질서의 변화가 있을 것을 말한다. 지금 우리가 보는 해와 달과 같은 세상의 빛들은 사라지고 야훼 하나님의 빛이 영원히 빛나는 세계가 온다는 말씀이다(참고 사 60:19-20; 계 21:25). 그날이 언제인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벧후 3:8-13; 행 1:6-7; 마 24:36) 이어서 8절에서는 그날에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솟아나 계절에 상관없이 동해와 서해로 흘러간다는 것이다(참고 계 22:1-5). 여기서 예루살렘은 종말에 나타날 새 예루살렘이며(계 3:12; 21:2 등), 동해와 서해도 각각 염해(사해)나 지중해로 축소할 이유가 없다.

 


 

2) 여호와께서 온 세상의 왕이 되시고 예루살렘을 영화롭게 하신다(14:9-21)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왕권을 배척한 것은, 그들이 사람을 왕으로 세우던 그 때 부터이다(삼상 8:7). 그 후에 그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의지하지 않고, 어떤 때에는 수리아에게, 어떤 때에는 애굽에게, 어떤 때에는 앗수로에게 의뢰하였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왕권을 무시한 행동 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필경 바벨론에 잡혀 갔고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당하였으니 하나님의 왕적 보호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함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이 세상의 대종말에 하나님께서만 왕으로 나타나실 터인데,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오직 참된 것 하나만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현세에는 하나님을 잘못 깨달은 미신도 많고, 그릇된 종파들도 많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 이후에는, 사람들이 모두 다 하나님을 참되이 알기 때문에 그를 부르는 이름이 하나 뿐이다.

 

  여기 10절에 “아라바”는 “평지”를 의미 한다. 이 귀절의 주요한 뜻은, 예루살렘이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드러나게 되리라는 것, 두 번째로는 그것(예루살렘)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되리라는 것이다(Calvin). “게바”는 베냐민 지경의 북쪽에 있었고, “림몬”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었다. 그러면 게바에서 림몬까지가 “아라바” 곧, 평지 같이 됨은, 성전이 있는 지점을 높이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다.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라는 말씀은, 이사야가 말한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이다(사 2:2).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여호와의 종교가 이방나라에 주도권을 가지게 됨을 비유한다.

 

“그 본처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사로 잡혀 갈 때에 훼파 되었던 성전이 이제 스가랴 시대에 재건되어 원상회복 될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선지자는 그것으로써, 주님의 재림시에 신도 혹은 천국이 완성될 것을 가리킨다.

 

  “베냐민 문”은 예루살렘 북쪽에 있었고, “첫문”은 그 서북편 구석에 있었고, “모퉁 이 문”은 그 동북편 구석에 있었다. 그리고 “하나넬 망대”는 예루살렘 북편에 있었고, “왕의 포도주 짜는 곳”은 그 남편에 있었다(W.C. Erdman).

 

  선지자가 위의 모든 지점의 이름들을 들어서 예루살렘의 한계를 가리킨 목적은, 앞으로 재건될 예루살렘의 영광이 본래의 그것과 같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겸하여 이 묘사는, 주님의 재림시에 나타날 천국의 영광을 예표하는 것이다.

 

 

  스가랴 14:12-15절에서는 예루살렘을 공격한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다.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요”(슥14:12).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던 원수들의 비참한 정경을 보여준다. 곧, 그들은 신벌을 받아서 살이 썩는 전염병에 걸리게 된다는 것이다. 또 그 날에 하나님의 백성을 치려던 원수들이 서로끼리 원수 되어 공격하므로 자멸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원수들 중에 종종 있었다(삿 7:22; 삼상 14:20; 대하 20:23). 13절 역시 원수들이 겪을 지중지란의 혼란상을 말한다(참고 겔 38:18-23; 삿 7:22; 삼상 14:20). 14절엔 유다가 예루살렘 전쟁에 참가하여 원수들에게서 전리품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이다(참고 대하 20:25; 겔 39:10). 15절은 적군이 사용하던 군용 가축(말과 노새와 낙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가축)들에게 미칠 재앙을 말한다.

 

  마지막 14:16-21절은 스가랴서의 총 결론인 동시에 묵시적 종말론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과 그 보편성을 강조하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16절 말씀에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이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재림하신 뒤에 만국은 주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보호 받은 것

 

을 감사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만국의 민족들이 이와 같은 것을 지키는 목적은, 저

 

들도 세상에 살던 동안 하나님이 보호하여 주신(특별히 영혼이 망하지 않게 해 주신) 은혜를 회고하며 감사하려는 것이다. 여기 “초막절” 이라는 것은 반드시 옛날 유대인이 지킨 절기와 같은 시기라고 할 것은 없다. 이것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행위를 중점으로 말하는 것이다.  17-19절에 있는 말씀은, 천국에는 이방 국민이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올라감”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참된 신앙 행위를 구약적 표현으로 말함이다. “비를 내리지 아니함”은, 사람이 살 수 없도록 된 자연계의 재앙이다. 이런 재앙 아래서는 생명이 근절될 것이다. “창일함이”라고 쓴 소자의 어귀는, 히브리 원문에 없고, 그저 “(그들에게) 있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이는 곧 “비가 있지 않으리라”는 뜻이다. 번역자들이 “창일함이” 라는 말을 가지고 보역한 것은 애굽에서는 농사를 비에 의지하지 않고 나일 강수의 창일함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굽에도 비가 전연 내리지 않으면 못산다. 이 귀절들이 여호와의 세계적 왕권을 말하는 것은, 그 때 곧, 선지자 시대의 유대인들로 하여금 여호와 경외를 강화하게 한다. 유대인들은, 그 때에 자기들만이 여호와를 섬기고 있었으므로, 여호와 종교의 절대성을 아직 실감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선지자가 이렇게 장차 만국이 여호와께 돌아올 것을 말할 때에, 그들(유대인들) 은 더욱 여호와에게 대한 신앙을 힘 있게 가지게 될 것이었다.

 


 

  야훼께 경배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세 번씩(16, 18, 19절)이나 “초막절” 축제(참고 레 23:34; 민 29:12 이하 등)를 지키는 것과 연관시키는데, 구약 전통에서 초막절은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구원하신 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종말론적으로  초막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예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애굽이나 이방 민족들이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을 거절한다면, 재앙(슥 14:12, 15)과 벌(가뭄, 18절)을 받게 된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이것은, 주님의 재림 후에는 만물이 모두 다 거룩 되어, 성별 제도가 전연 없을 것을 가리킨다(계 21: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참조). 속된 것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말 방울”과 또는 “하나님 전에 모든 솥”도 다 거룩할 것이다. 하나님 전에 모든 솥은 제단 앞 주발만큼 거룩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 이후에는 그 구분이 폐지된다.

 

“말 방울”이나 “솥”이나 “제단 앞 주발”은, 구약적 표현이니, 선지자는 구약 시대에 살았으니 만큼 말할 때에 이런 표현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런 표현들을 가지고, 그가 나타내는 것은, 주님의 재림 이후 세계는 만물이 마찬가지로 거룩할 터이니 성별 제도가 전연 없으리라는 뜻이다.

 

스가랴서 14:21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도 거룩하다는 뜻으로 말한다. “고기를 삶”는다 함은, 제사의 소용으로 고기를 삶음이다. 이것은, 역시 전에는 속되다고 하던 것이 이때에 와서는 거룩 되어지리라는 뜻이다. 이것도 구약식 표현이니, 우리는 그 표현의 형식에 착안하지 말고 그 내용을 취하여야 한다. 그 내용은, 주님의 재림 이후에는 모든 것이 다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는 실제에 있어서 구약식 성전 제도나 제사 제도가 없다. (계 21:22 참조).

 

“그 날에는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여기 이른바 “가나안 사람”이라는 말은, 죄와 저주 아래 있는 자를 가리킨다(창 9:25; 레 18:24; 신7:2, 9:4). 이는 혈통적으로 가나안 사람을 이름이 아니고, 마음으로 가나안 사람됨을 의미하나니 주님의 재림으로 세우신 영광 세계에는 그런 사람은 전연 없다는 것이다(계 21:22,27). 위의 모든 말씀은, 천국이 영광으로 완성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