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에스겔서와 스가랴서의 메시야비교

제3장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의 메시지 비교

호리홀리 2015. 2. 20. 13:00

제3장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의 메시지 비교

 


 

Ⅰ. 에스겔서의 메시지

 


 

1. 에스겔서의 특징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에게, 그들이 왜 국가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고 앞으로 어떻게 회복될 것인지에 대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통해 해답을 주는 것이 에스겔서의 목적이다. 주로 포로기 및 후기 선지서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겪는 갈등을 말씀으로 해결하는 메시지에 관심이 있다.

 

 

 

  에스겔서는 포로기와 후기 선지서들과 절망 속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로 시작해(1장), 마지막에 회복될 하나님의 임재인 ‘여호와 삼마’로 끝을 맺는다(48:35). 또한 그들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불손종과 죄악 때문이고(8-11장), 하나님의 백성뿐(1-24장)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한 이방 민족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며(25-32장), 유다 백성을 위한 회복의 계획도 나타난다(33-39), 그리고 미래에 새로운 성전(40-48)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완전히 회복될 것임이 드러난다.57)

 

 

에스겔서에 나타난 특징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그리고 ‘영’에 대한 관심이다. ‘영’( ������������ר 루아흐)이라는 단어는 ‘바람, 마음’등 여러 가지 뜻이 있으며, 구약 성경에서 총 389회 나타나는데 아람어로 11회, 히브리어로는 378회 사용되었다. 그런데 통계적으로 보면, 구약성경 중 에스겔서에서 ‘영’이라는 단어가 무려 52회나 사용되고 있어 다른 어느 성경보다도 강조되고 있다.58) 그뿐 아니라 영이라는 단어가 주는 자연에 대한 현상으로 6회, 사람들의 영의 개념으로 8회, 하나님의 영으로 16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자연적 용례로 22회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임재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의 회복을 위해 우주적 ․ 역동적으로 역사하심을 강조하고 있다.59)

 

  이렇게 하나님의 영 즉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내면적으로 완전히 변화시키시며(36:26-28), 하나님의 백성을 살아 있는 군대로 회복시키신다(37:9-10). 하나님의 영으로 유다 백성을 회복시키신다고 에스겔이 강조하는 것은, 에스겔보다 20세가 많은 예레미야가 내면적 말씀을 통해 변화를 강조한 것과도 균형을 이룬다(렘31:33).60)

 


 

2. 에스겔서의 메시지

 


 

  지금부터 2600년 전에 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바빌론 땅에 끌려온 유다인들, 그들이 살아가던 땅 ‘델아빕’(Telabiv), 홍수로 폐허가 된 곳이다. 이곳은 홍수의 언덕 그발 강가에 있는 지방으로써 유다인 포로들이 살고 있었다. 그 이름만큼이나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포로들, 그런데 그들 중에 영적 상상력이 탁월한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메마른 그 시대를 놀라운 영적 상상력으로 꽃 피웠고, 그 시대를 상징하는 표상이었다. 지금 그는 바빌론 땅 그발강가에 서 있다. 그는 그곳에서 희한한 일을 경험하면서,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고 있다.61)

 


 

  이스라엘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선포하는 에스겔 예언자는 상징 행위와 말씀이라는 두 가지 방법으로 표현한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상징적 행위에 담아 전함으로써 청중으로 하여금 참여케 하고, 그 메시지를 해석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절실하게 듣게 만든다.

 


 

1). 유다와 예루살렘 멸망을 상징적 행위메시지로 선포한다.

 

  주전 597년에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고 에스겔은 주전 593년에 예언자로 부름 받았다. 에스겔의 메시지는 두 단계로 구분되는데 주전 586년 이전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예루살렘의 완전한 함락을 선포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된 후에 유다 백성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전하는 것이다.

 

  주전 593년에 예루살렘과 백성은 완전 함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적들에게 그냥 내어 줄 리 없다고 생각하고 곧 회복이 이뤄지리라는 낙관적인 생각으로 멸망 직전까지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한다. 이 선포를 하나님은 행위메시지로 선포한다.

 


 

⑴ 벽돌의 상징적 행동(4:1-3)

 

 

 

  에스겔은 이 징조를 통해 심판의 첫 단계가 이뤄질 것을 예언한다. 주위에 포위된 벽과 요새와 성벽 그리고 수직으로 만나는 축대를 쌓는다. 또 성벽을 허무는 데 필요한 쇳덩이를 설치한다. 그리고 자신과 모형 사이에 철벽을 설치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가혹하게 다스리실 의지를 표현한다.

 


 

⑵ 좌우편으로 눕는 상징적 행동(4:4-8)

 

  여기에서 상징행위는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이 얼마동안 포위를 당하여 멸망을 기다리는 모습을 상징한다. 상징의 내용은 예언자 자신이 좌편과 우편으로 눕는 행위를 보여주는데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해야 한다. 예언자가 하는 행동은 대속의 의미가 아니라 유다백성이 겪어야 할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에스겔로 하여금 좌편으로 눕게 하시고, 다시 우편으로 눕게 하신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면서 우편은 남쪽을 뜻하고, 죄편은 북쪽을 뜻한다. 따라서 이스라엘 족속은 남유다와 구별되는 북왕국을 의미한다. 390일 동안 왼편으로 눕는 것은 북왕국이 390년 동안 지은 죄악을 계산하고 있다. 유다의 40년은 앞으로 닥칠 처벌의 기간을 상징한다. 390년과 40년을 합하면 430년이고 이는 애굽에서 포로 기간과 동일함으로 귀환이 있을 때까지 그들이 값을 치러야 하는 상징적 포로  기간으로 묘사된다.

 

 

 

⑶ 부정한 양식의 상징적 행동(4:9-17)

 

  포위 기간 390일 동안 예루살렘 백성이 비참한 상황을 보여 준다. 남은 곡식을 모두 모아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 즉 극심한 기근을 표현하고 있으며 식량이 모자라는 이때에 하루 할당되는 음식이 빵 이십 세겔(228g)과 물 힌 육분 일(0.6ℓ)이라는 사실에서 강조된다. 이 말씀은 포위된 상황에서 양식이 부족한 그들의 삶을 더욱 악화 시키는 야훼의 명령이다. 이 명령은 멸망 우에 다가올 포로 시대까지 예견하고 있다. 12절에 인분 불에 구워먹으라는 명령에도 수행하는데 부정한 떡임을 의미한다. 예언자의 간구로 인분이 아니고 쇠똥으로 대신하였지만 포로기에는 부정한 떡을 먹게 됨으로써 상황이 더욱 악화됨을 예언한다. 포위당함과 식량 부족 후에는 식량과 물이 점점 더 줄어들고 마침내 완전히 고갈되고 만다.

 


 

⑷ 털을 깎는 상징적 행동(5:1-4)

 

  면도의 비유는 이방 정복자들에 의해 팔레스타인이 학살되고 황폐화되는 것을 의미한다(사 7:20). 면도를 하는 것은 슬픔의 표시이기도 하고(렘 41:5), 수치의 상징이기도 하며(삼하 10:하), 동시에 전쟁의 선포이기도 하다. 에스겔은 이런 주제들을 더욱 발전시켜 면도칼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심판의 도구인 이방 국가의 검으로 상징한다. 에스겔은 면도칼로 자신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음으로써 멸망하는 예루살렘의 수치를 표현하다.

 

  이어서 머리카락과 수염을 대충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저울에 달아 셋으로 나누는데, 무게를 달아 세며 나누는 것은 심판의 행위를 뜻한다. 머리카락과 수염을 날려 보낸다고 하는 것은 칼로 멸망당하는 유다 백성의 운명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일이다. 성읍 안에서 불사른 3분의 1은 포위 기간 동안 기근과 질병으로 멸망당함을 의미하고,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는 자는 함락되는 과정에서 방어하거나 도망하다가 죽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바람에 흩어진 나머지 3분의 1은 멸망당한 후에 남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거나 도망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이웃 나라로 가서 포로가 되어 사로잡히곤 한다(렘 40:1; 41:15; 43:5-7)

 


 

2). 하나님을 아는 은혜(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라)

 


 

  에스겔서는 다른 예언서들과 마찬가지로 ‘종말론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린 심판’(겔 1-24장)과 ‘이방 민족들에게 내린 심판’(겔 25-32장)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에 내린 구원’(겔 33-4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언서에 나타난 ‘종말론적 구조’는 궁극적으로 심판을 통해 구원을 이룬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처벌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혹독한 심판을 내리시는 중에도 새 역사와 정의의 공동체를 바라보신다고 에스겔은 메시지로 선포한다.

 


 

(1) 이스라엘 산하에 내린 심판(6:1-7)

 

  6장에서 ‘이스라엘 산’이라는 표현은 주로 에스겔에서만 사용되고 있으며 이스라엘 전역에 있는 산하(山河) 즉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말한다(3절). ‘이스라엘 산’이라는 표현은 단숙히 ‘팔레스타인의 땅’이나 정치적 단위인 ‘이스라엘’ 그 이상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주신 그 땅의 귀중함을 나타낸 것이다.

 

  에스겔 예언자는 ‘이스라엘 산’들을 청취를 잘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전국의 산하를 하나님의 말씀의 청취자로 삼은 것은 그곳에 ‘산당’( ם ������י������ וֹ������������ 바모테켐 너희의 산당들)이 있기 때문이다(3절). 칼은 ‘전쟁’ 또는 ‘적의 침입’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기도 하며, 바빌론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스겔 예언자는 바빌론을 하나님의 심판의도구로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바빌론을 들어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묻는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일으켜 이스라엘 산하에 놓인 산당들을 모두 철폐시키겠다고 선언한다. 

 


 

(2) 이스라엘 백성에게 칼, 기근, 전염병으로 내린 심판(6:11-14 )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을 선언한다. 하나님께서 명령을 받은 예언자는 매우 안타까운 심정으로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이스라엘의 멸망’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스라엘의 범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모든 가증한 악’이라고 지칭하며 심판하신다. 심판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의 수단으로 이스라엘을 멸망에 이르게 한다(11절). 심판의 내용으로는 먼 곳에 있는 자들을 ‘전염병’으로 심판하시고,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을 칼로 심판 하신다. 그리고 포위를 당해 에워싸인 자들을 기근으로 심판하신다. 이로써 하나님의 분노를 모두 표현하신다.

 

  이스라엘의 전역에 우상을 위한 성소들이 널려있다. 성소마다 우상과 제단과 분향단이 즐비하다. 산과 언덕마다 우상을 위한 성소들이 있으며, 푸른 나무 아래와 무성한 상수리나무 아래에도 우상을 위한 성소들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곳을 신성하고 거룩한 곳으로 여겼으나 하나님께서는 우상이 있는 곳을 부정한 것으로 만드신다.  하나님께서 권능의 손으로 그들을 심판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전 국토는 황폐해지며 사람이 사는 도시는 부서지고 불에 타서 황량하게 된다.

 


 

(3) 이스라엘의 모든 폭력과 교만에 대한 심판(7:10-13)

 


 

  몽둥이는 원래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의 상징적 표현이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자기 자랑으로 가득 찬 교만으로 바뀔 때, 몽둥이는 포악하고 폭격적인 행동의 상징적 표현으로 다시금 바뀐다. 이런 폭력과 교만에 찬 몽둥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며, 따라서 모든 삶을 종결시키는 파멸로 이어진다.

 


 

(4) 전쟁 준비에 대한 심판(7:14-16)

 

  

 

  예언서의 여러 곳에서 전장에 배치할 수 있는 군사력에 대한 신뢰를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거절로 간주하고 불경스럽게 보고 있다(사 2:7; 3:25). 여기서 여호와의 분노는 모든 전쟁 준비의 행동을 마비시킨다. 전쟁을 피해 산 위로 도망하더라도 각자의 죄악에 따라 처벌될 것을 강조한다(7:16).

 


 

(5) 축적한 재산에 대한 심판(7:17-21)

 

 

 

  하나님을 동한시하는 자들의 행동 양식 중에 두드러진 특징은 맘몬에 대한 믿음이다. 그들은 맘몬의 도움을 받아 위험을 모면하고자 한다. 그들은 욕심 사납게 맘몬을 추구하고 마구 끌어 모은다. 하지만 자신들의 배를 다 채우지 못하면서 욕심은 끝이 없다. 더욱이 그들은 화려한 장식으로 교만을 드러낸다. 또한 가증한 우상과 미운 물건으로 자신들을 자랑하지만 모든 것들은 오물이 되고 만다.

 


 

(6) 성전에 대한 심판(7:22-24)

 


 

  하나님의 신성한 구역인 성전을 더럽혔다고 고발하며 더럽힘의 내용을 소개한다. 그들은 온갖 폭행을 일삼는 피에 굶주린 자들이다. 그들은 계약 백성 상호간의 연대를 흉악하게 파괴하는 자들이다(7:22). 힘 있는 자들의 폭행 모습과 쇠사슬에 묶여 포로로 끌려가는 자들의 모습을 중첩해 유비시키고 있다(7:23). 여기서 에스겔 예언자는 제의상의 불결함보다 형제적 연대를 우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찾더라도 하나님의 자애로운 얼굴은 그들에게서 돌이킬 수밖에 없다. 악한 이방인들을 데려 와서 그들을 치게 하신다. 따라서 악한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집들을 점령하고 또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성전도 짓밟는다. 이런 파멸은 스스로 강하게 여기고 교만했던 자들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7:24).62)

 


 

3) 신앙적 탈선과 심판 그리고 구원

 


 

  주전 597년의 제1차 바빌론 포로에서 살아남은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징계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8:17; 9:9등). 전체가 환상에 해당하는 8-11장은 포로로 잡혀 바빌론에 있던 유다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처음과 마지막, 즉 8:1상과 11:25절은 실제 현실에 속한 내용이다.  그 중간의 환상은 여호와의 손(권능)이 임하시는 것으로 시작하며(8:1하), 환상이 떠나 ‘올라가는 것’으로 끝맺는다(11:24). 예언자는 야웨의 영에 의해 옮겨지며(8:3), 다시 본래 자리로 되돌아온다(11:24). 환상 자체는 8:3-11:23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8장의 환상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견되는 빗나간 네 개의 우상숭배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고(3-6, 7-13, 14-15, 16-18절), 9장은 성소에서부터 시작되는 심판을 다루며(1-2, 3-7, 8-11절의 세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면은 하나님의 외침이나 ‘부르심’( א������������ 카라) 또는 예언자의 ‘외침’(ק������������ 자아크)으로 시작한다.

 

  10-11장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시는 모습을 네 단계에 걸쳐 묘사하고 있다. 첫째로, 지성소에 있는 법궤 위의 보과에서 성전 문지방으로(10:4 참고 9:3), 둘째, 그룹들이 이끄는 움직이는 보좌로(10:18), 셋째, 성전 안뜰의 동문으로(10:19), 넷째, 성읍을 벗어나 감람산으로(11:23) 옮겨가신다.여호와의 떠나심은 곧 파멸을 의미한다.

 


 

(1) 성전을 더럽히는 온갖 우상 숭배 행위들(8장)

 

  에스겔은 제사장이면서 선지자였기에 포로로 끌려온 장로들이 자주 찾아와 질문을 던질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8:1, 14:1, 20:1) 포로가 된지 6년째 주전592년 6월5일 장로들의 방문을 받는다. 8장부터 11장-24절까지 장로들에게 들려주는 대답이 환상의 내용으로 되어있다. 11:24, 25절에 나오는 ‘사로잡힌 자’는 장로들을 가리키고 있다.

 


 

  장로들의 방문을 받은 에스겔은 여호와의 권능에 이끌려 긴 환상을 체험한다. 에스겔은 성령에 이끌려 예루살렘성전으로 가는 환상을 체험한다. 성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눈에 뛴 것은 ‘투기의 우상’이다. = 하나님을 너무 화나게 한 우상은 바알 신상이다. =성전 입구에 바알 신상이 세워져 있었다. 이것은 므낫세 왕이 세워졌으나 요시야 왕에 의해 파괴된 바알의 우상이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임재)을 보게 된다. 성의 주인은 하나님인 것을 보이시는 것이다. 이제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본다. 성전 문어귀에 ‘투기의 우상’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로 인해 성전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이 차지하고 있으니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전 뜰의 문으로 인도함을 받은 에스겔은 성전 담벼락의 구멍을 발견한다.(7)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 담을 헐자 한 개의 문이 나타난다. 성소 안에 밀의 종교라고 하는 비밀의 우상 숭배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가증하고 악한 일 곧 사방 벽에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우상들을 그려놓고 그 앞에서 분향하는 모습이 보인다.(8-11)

 

 

 

  에스겔이 본 우상숭배자들은 놀랍게도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70명의 장로들이었다. 그 중에는 요시아 왕의 서기관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 사반은 경건한 신앙인이었는데 그 아들과 70장로들이 은밀하게 우상숭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향연이 오르는 향료를 들고 있었다. 분향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데 장로들이 더구나 우상 앞에 분향하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예전에 웃시야가 분향하다 문둥병에 걸렸는데 이것은 그 이상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은밀하게 자행되고 있었던 우상숭배를 보여주심으로 심판의 당위성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돌보지 않고 버렸다고 불평한다.(12) 우상숭배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더 가증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북문어귀로 데려가신다.(14) 그곳에선 여인들이 앉아서 ‘담무스’신을 애도하고 있었다. ‘담무스’는 ‘이난나’의 남편 신으로 바벨론의 신이다. 당시 사람들은 6-7개월 지하세계로 내려간 담무스를 위해서 애곡하는 의식을 행했다.=이것은 음행의 신이다. 발가벗고 성행위를 하는 음행의 종교를 섬기고 있었다.

 


 

성전 안에 들어서니 더 가증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25명이 성전을 등지고 얼굴을 동쪽으로 향해 태양에게 경배하는 장면을 목격한다.=고관 대작들의 이 모습에 더 이상 희망을 없어 보인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떠나시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제 하나님은 종교적 탈선에서 사회적 불의를 지적하신다.(17) 그들은 그 땅을 폭력으로 가득 채움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있을 뿐 아니라 나뭇가지를 코에 두는 새로운 우상숭배에 빠지기도 했다. 이는 우상에게 입을 맞추는 행위(욥31:27)와 같은 우상에게 경배하는 행위이다. 이에 하나님은 긍휼도 자비도 없는 그리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분노의 심판이 있을 것을 보여주고 있다.

 


 

(2) 성소에서 시작되는 심판(9장)

 

  하나님의 심판은 성전 앞에서 시작 된다. 심판을 명하시는 분노에 찬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떨어진다. 무기를 들고 나아오라. 놋제단 옆에 6명이 서있었다. 심판의 첫 단계는 지성소에 있던 하나님의 영광을 거두시어 성전 문지방으로 옮기신다. 성전을 떠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먹 그릇을 찬 심판자에게 예루살렘을 다니며 우상숭배에 탄식하는 자들에게 이마에 표하라 하신다. 그 후 심판자에게 그들을 긍휼이 여기지 말고 우상숭배의 진원지인 성소부터 치되 이마에 표가 있는 이들은 살려두라 하신다. 심판자들은 성전 앞에 있는 장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한다. 그런 후에 우상숭배자들을 죽여 성전 뜰에 채우라하신다.

 

  이를 본 에스겔은 엎드려 기도한다. 재난을 피해 살아남은 자들 마저 죽이려 하십니까? 라고 항변한다.(8) 에스겔의 중재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의 죄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3) 성전을 떠나시는 하나님(10장)

 

  1장에서 본 것과 비슷한 수레바퀴들로 하나님이 떠나시는 장면이 구체적으로 보여 진다.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 문지방을 떠나 그룹들 위에 머문다. 이것은 4절에서 이어지는 것으로 심판을 집행하기 위해서 성전을 떠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어 하나님의 영광은 그룹들과 성전 동문으로 옮겨가신다. 이 장면은 다시 11:23절로 이어진다.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에서 동편산(감람산)에 머물고 심판을 집행하신다.

 


 

(4) 우상숭배자들에게 임할 심판(11장)

 

  10:19절의 장면을 이어간다. 성전 동문으로 여호와의 영광이 옮겨가는데 그곳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25명이 보인다. 고관들( ם������������ י������������������ 싸레하암)이다. 그들은 불의를 꾀한 자들이다. 부동산을 탈취하며 불의를 행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진다. ‘그들을 쳐서 예언하고 예언할지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 것을 보여 주며 5절 마음(������������ר 루아흐)속에 있는 것을 모두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가마 솥 안에 우리가 들어 있다고 한다. 자기들은 보호를 받는다고 한다. 그 속에 고기들이 자기들이라는 것이다. 이미 가마솥에 불이 당겨 졌는데 아직도 모르고 있다.

 


 

  14절부터는 회복을 보여주신다. 예루살렘 성전의 심판은 예배의 회복을 위함이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 한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부어 주셔서 돌 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셔서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것이다.(19) 하여 하나님의 뜻(토라)을 기쁨으로 행하게 하실 것이다.(20) 그리고 언약관계를 회복할 것이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4)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려질 심판(12-15장)-비유로 예언한다

 

  12-15장은 크게 두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이고(12-14장), 둘째는 비유와 표상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으로써(15장) 이스라엘은 쓸모없는 포도나무의 첫 비유이다.

 


 

(1) 포로가 될 것을 나타내는 상징행위 메시지(12장)

 

  유다의 멸망을 예고하는 에스겔의 행위 메시지는 이사 가는 것(3-5)과 공포 속에서 먹고 마시는 것(17-20)이다. 짐을 싸서 배에 오르는 이유는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2). 이미 이사야 6:9에 나오는 말씀이다.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유배라는 것이다.

 


 

  10절의 왕은 시드기야이다. 시드기야는 밤에 어깨에 짐을 지고 나갈 것이며 사람들은 그를 위해 벽을 뚫지만 그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붙잡혀서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이다.(실제로 시드기야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도망치다 체포된다.그리고 보는 데서 두 아들이 칼에 맞아 죽고 자신은 두 눈을 뽑힌채로 끌려가다가 죽는다. 도착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16절에서 희망을 보여 주신다. 그 때 사람들은 여호와가 하나님인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인 말둑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유다의 잘못인 것을 지적하고 있다.

 


 

  두 번째 행위 메시지는 황폐한 땅에 남아서 음식을 먹는 행위를 통해서 예루살렘이 포위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 모든 것이 속히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2) 거짓 예언자의 종말(13장)

 

  거짓 선지자들이 성의 무너진 곳에  올라가지 않았다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족속의 파멸된 영적 상태를 치유하기 위해 진단해 보지도 않고 그들을 바르게 고치거나 인도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된  것을 진실인 것처럼 왜곡하는 죄를 범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을 거짓된 말로 속이고 헛된 길로 가도록 미혹했으며, 그들은 자신을 속이면서 하나님을 떠나 악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바로 이러한 죄악들을 범한 거짓 선지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심판을 선포하신 것이다(5-8).

 


 

(3)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심판하신다(14장)

 

  다른 신을 버리고 오직 여호와뿐이라는 신앙 고백을 요구하신다. 우상을 숭배한 자들을 하나님 백성의 명단에서 제하신다고 언급한다(8). 거짓 예언자에게도(9-11) 심판하신다. 심판은 양식이 떨어져 굶주림이 있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가장 아끼시는 의인(노아, 다니엘, 욥)이 있다할지라도 그 의인만 심판을 면할 것이다.(12-14).

 


 

(4) 쓸모없는 포도나무

 

  15장은 산문이 아니라 운문으로 된 글이다. 포도나무의 소명은 열매 맺는 것이다.  열매를 맺지 않는 포도나무는 아무 쓸모없고 오직 땔감으로 아궁이에 들어갈 뿐이다. 농부와 포도나무의 관계는 사5:1-7, 렘2:21, 겔17:6, 호10:1, 시80:9-17, 마20:1, 요15장에 나온다.

 


 

1-8절은 이스라엘을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로 비유한다.(호10:1) 에스겔은 2-5절에서 그림언어로 6-8절은 그 뜻을 설명한다. 즉 포도나무는 열매가 없어 아궁이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뜻이다.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심판이다. 포도나무만 화목으로 쓰시는 것이 아니다 그 땅까지 징계하신다. 하나님의 진노는 무서울 정도로 내려치고 있지만 그 속에서 회복을 선포하고 있다.

 


 


 

(5) 영원한 언약(16장)

 

  예루살렘을 여성으로 의인화하여 은유적으로 말씀을 선포한다.(사5:1, 렘47:6, 암5:19)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부정한 태생임을 선언한다. 즉 예루살렘이 태어난 곳은 가나안이고 그의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고 어머니는 헷 사람이다. 모두 가나안 7족속이며 음란하고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다. 이런 예루살렘을 택하셔서 거룩한 다윗의 도성으로 만드셨다. 예루살렘은 여부스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다윗은 가나안 땅을 200년 동안 차지하지 못한 성을 정복한다. 다윗 성이라고 불렀다. 출생은 우상의 산지인데 화려하게 만들고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유배지역의 아나돗 출신의 선지자로 모압언약을 강조했다면 에스겔은 사독계열의 제사장으로서 다윗언약을 강조한다. 성경은 이렇게 균형을 맞추고 있다. 다윗언약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다윗왕조를 세우신 것과 하나님께서 자기이름을 두시려고 예루살렘을 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예루살렘에 대한 애정을 갖고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부스족에게 속해있던 예루살렘을 택하신 것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버려진 아기를 양육하셔서 아름다운 왕비로 만드셨다. 존귀한 자가 되어 이방에까지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행음하여(언약파기) 창기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예루살렘을 택하시고 성전을 세우신 것은 신명기 말씀대로 국가의 중앙 성소로서의 기능이다. 광야에서 성소가 진의 중앙에 자리한 것같이 말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산당을 꾸미고 그곳에서 음행한다(16). 더구나 이방 종교를 받아들여 자녀를 재물로 드리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집트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분노케 한다.(26) 북쪽의 호세아왕도 앗수르의 침략에 이집트를 의지했다가 망하고 말았다. 이것 역시 음란이라고 지적한다. 그 후 예루살렘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우상까지 끌어들여 섬겼다. 이 모든 행위는 돈을 받고 음행하는 것보다 그들은 돈을 주고 음행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심판뿐이다.

 


 

  북쪽의 마지막 왕 호세아왕은 애굽만 바라보다가 망한다. 그리고 시드기야도 마지막까지 애굽만 바라보다가 망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을 심판한다. 언약 백성들을 혼란하게 한 죄다. 이는 죽은 우상이다. 힘이 없는 것을 의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시며 다시 언약을 세우는 이유는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이다(16:60절).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깨닫게 해서 다시 시작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다.(새 하늘과 새 땅)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조건적이 아닌 회개를 전재로 하는 용서와 회복이다.

 


 

(6)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17장)

 

  17장은 독수리와 두 나무 비유의 예언으로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행위를 묘사한다. 유다왕국은 요시야(주전639-609)가 므깃도 전투에서 죽으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를 데려가신 이유는 비참함을 피하게 해 준 것이다. 이후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를 끝으로 망하고 망한다. 이런 배경으로 15절,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 유다가 이집트의 왕에게 외교사절단을 보낸 시점에 선포된 예언이다.

 


 

1-2절은 도입부로 17장 전체의 서론이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수수께끼(히다)와 비유(마샬)로 말하라 명하신다. 예언의 이중적구조이다. 수수께끼와 비유는 평행적으로 사용되었다. 비유의 이중적 구조는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비유로 말하지만 모두가 다 아는 것은 아닌 것이다. 독수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로 쓰여지지만 여기서는 힘세고 재빠르며 적대적인 정복자 바벨론에 대한 상징으로 쓰였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나무의 왕으로 일컫는다. 독수리가 레바논에서 높은 가지를 꺽어 교역의 땅(가나안)상인들의 도시에 둔 것은 느브갓네살이 유다를 침공해서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그곳에 포로로 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독수리는 그 땅의 씨앗을 가져다가 물 많은 종자의 땅에 심었더니 포도나무가 자라서 독수리의 보호아래 있게 된다.

 


 

  이것은 여호야긴 대신 시드기야를 왕으로 삼아 유다를 다스리게 한 것이다. 여기서 유다의 두 왕은 백향목과 포도나무로 나오는데 이것은 시드기야가 여호야긴에서 스룹바벨로 이어지는 합법적인 왕조가 아닌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7-10절은 포도나무의 배반과 그 결과가 서술된다. 여기의 다른 독수리는 애굽의 왕을 가리킨다.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는 독수리 아래 머물면서 많은 열매를 맺어야했다. 즉 바벨론왕의 영향아래 있어야 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독수리를 배반한다. 즉 느브갓네살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애굽과 동맹을 맺는다. 이것은 당시를 기준으로 100년 전 이사야 때와 같고 따라서 에스겔도  책망한다. 하여 포도나무에 대한 심판은 당연하다.

 


 

  9-10절의 심판은 이중으로 진행된다. 독수리가 포도나무의 뿌리를 뽑아 마르게 하며 또 동풍이 그 나무를 마르게 한다. 유다의 멸망은 언약파기에 있음을 계속 반복 경고한다.

 

 

 

  19-21절에서 바벨론 왕과의 언약파기는 ‘내 언약’ ‘내 맹세’를 깨트린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한 언약이기에 깨트린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파기이며 멸망은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7)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와 회복(20장)

 

  15-19장은 비유였으나 20장에서는 실제적사실로 시작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패역과 배교로 인한 실패의 역사임을 묘사한다. 그들의 패역은 불순종으로 나타났으며 배교는 우상숭배를 뜻한다. 그러나 메시지는 포로시대와 회복에 두고 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실패가 반복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거룩한 백성이라 칭하시며(의인 삼아주심) 언약백성으로 삼아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인도되지 못하고 징계를 받게 된다. 40년간 광야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패역(ה������������ 마라)을 계속 반복 사용하심으로 그들의 반역이 고질적이고 지속적임을 강조한다.

 

  그들의 실패는 광야에서 뿐 아니라 약속의 땅에서도 여전히 지속되며 포로 징계 후에도 계속된다. 하여 하나님은 장로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을 약속하신다. 37절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징계는 있으나 언약은 영원하다는 것을 확인 하신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언약의 하나님은 끝까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실 것이다.

 


 

(8) 여호와 칼에 비유된 심판(21장)

 

예루살렘 심판의 상징, 마광된 칼을 갈고 계시는 하나님: (그칼이 바벨론이였다. 19절 바벨론 왕이 두 길 사이에서 점을 친다. 암몬 랍바와 유다의 예루살렘 길 사이에서=이들의 점은 짐승을 잡아 활에 묻혀 통에 넣고 어디로 갈까 해서 활이 넘어지는 곳으로 간다. 하나님이 현장을 목격하게 한 것을 받아 쓰고 있다.) (21-24)

 


 

(9) 피의 도성 예루살렘(22장)

 

  도성과 그 거민들의 타락상을 적나라하게 규탄하고 있다. 백성들이 부모를 업신여기고, 나그네 고아, 과부를 학대하며, 성물과 안식일을 범하고, 산 위에서 제물을 먹으며, 부모와 동침, 이웃의 아내와 며느리, 딸을 범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피를 흘리며, 고리대금을 받고, 토색하며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 지도자들은 약탈하는 이리 같이 권세를 가지고 백성의 피를 흘리게 하며, 선지자는 사자가 식물을 움키듯, 허탄한 이상을 보고, 거짓 복술 행하며, 하나님께서 말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 사람의 영혼을 삼키며, 재물과 보물을 탈취하고, 과부를 많게 만든다. 제사장은 율법을 무시하며, 성물을 더럽히고,  거룩하고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분별하지 않고, 안식일을 돌아보지 않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더럽힘을 받으시게 한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는데 주민을 이방 사람들 속에 흩으며, 여러 나라로 흩뿌려서, 더러운 것을 소멸시키겠다고 언급 하신다. 또한 이스라엘 지도층의 죄악상으로 분노가 치솟아 격노의 불길로 그들을 멸절시키겠다고 한다.

 


 

(10)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죄(23장)

 

오홀라(북 이스라엘)는 앗수르를 의지하다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를 지켜 본 동생 오홀리바(유다)는 그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또 다시 앗수르와 바벨론을 의지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다.

 


 

(11) 씻어도 소용없는 솥 예루살렘(24장)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예고한 대로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한다. 주전588년 1월이다. 에스겔은 이 사건을 끓는 가마로 비유한다. 하나님께서 패역한 족속에게 이 비유를 전하라고 명령하신다.(3) 예루살렘을 가마로 비유하고 그 안에 사는 백성들을 양고기로 비유한다. 침략자들은 양고기를 요리해서 먹을 것이다.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거기서 빠져나올 사람은 아무도 없고 방법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 녹슨 가마가 첨부된다. 녹슨 가마는 녹을 없애지 않은 가마로서 패역한 백성들을 가리킨다. 바벨론 군대가 닥치는 대로 백성들을 살상 할 것이다. 하나님은 가마의 녹을 제거하려 계속 애쓰지만 녹은 없어지지 않는다. 결국 가마가 깨끗해야 하나님의 진노는 그친다.

 


 

  예루살렘 멸망을 선언한다. 이제 하나님은 극단의 조치를 행위 메시지로 취하시는데 에스겔의 아내를 죽이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에 애도도 하지 말 것을 명하신다. 이 예언은 아침에 선포되고 저녁에 아내가 죽는다. 네 눈의 기쁨인 아내를 빼앗을 것이나 곡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에스겔의 아내가 죽었지만 이 일로 인해 슬퍼하지도 못하고 눈물도 흘리지 못한다. 에스겔 아내의 죽음이 하나님의 마음의 표징이라고 하신다(24). 백성들은 에스겔의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묻는다. 에스겔의 아내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그러나 여전히 외면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에스겔의 아내는 예루살렘을 비유한다. 예루살렘이 멸망해도 애도하지 않는 지금 포로 된 백성들, 그들의 완악함, 하나님은 에스겔의 가정까지 파괴하심으로 선지자를 사용하신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에스겔의 메시지에 반신반의 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의 죽음과 에스겔의 행위 메시지를 보고서야 믿을 것이다(27). 이제 에스겔의 메시지는 더욱 강력하게 선포된다. 그러나 그의 내면의 고통은 알아야한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풍토병으로 많이 죽어 갔다. 그들의 가정의 희생된 아이들과 가족들의 대가로 우리가 그 열매를 먹는 것이다.

 


 

5) 열방에 대한 심판(25-28장)

 

  열방에 대한 심판 신탁이 지니는 의미는 첫째로,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로 인해서 심판을 받고 멸망하지만 실제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들이 여호와의 심판의 도구로 쓰이게 된다. 이 상황을 잘못 해석하고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해 조롱하고 저주까지 하는 열방도 결국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된다. 둘째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축복하고 그 본을 받는 자들은 축복을 받을 것이지만, 그들을 저주하거나 그들의 본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축복을 받지 못하고 저주를 받을 것이다(창 12:2-3; 22:18).63) 셋째로, 열방에 대한 심판은 간접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주는 효과가 있다. 열방에 대한 심판의 신탁 직전에 있는 23:25-27과 신탁 사이에 끼어 있는 28:24-26에 암시되어 있다.64) 열방나라는 이스라엘 동편에 암몬, 모압, 에돔이 있고 서쪽에 블레셋, 북쪽에는 해안도시 두로, 시돈, 남쪽에는 강국 애굽이 있다.

 


 

⑴. 암몬을 향한 심판(25:1-7)

 

   

 

  암몬은 사사 입다(삿 10:6-11:33) 이후 이스라엘과 자주 적대 관계에 있었다. 사울은 암몬 족속과 사워 길르앗 야베스를 구했고(삼상 11:1~11), 다윗은 암몬을 정벌했다(대상 19:1-20:3). 암몬은 분열 왕국 시대에 때로 독립을 얻기도 하고, 여호사밧의 통치 때 모압 및 에돔과 연합해 유다를 공격했다(대하20:1-30),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암몬은 영토적으로 이득을 얻었고 (렘 49:1), 여호와김의 통치 때 느부갓네살 연합군의 일부가 되어 유다를 공격했다(왕하 24:1-2). 주전 593년에 암몬은 바빌론에 반역하는 동맹에 가입하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주전 588년에는 바빌론에 대항하기 위해 유다 및 두로와 연합했다. 느부갓네살 왕이 암몬이 아닌 유다를 공격하기로 결정 했을때(21:18-27), 암몬은 당시 동맹국이던 유다를 돕기보다 유다의 멸망으로 인한 영토적 이익을 바랐다.65)

 

 

 

  암몬족속의 죄명은 유다가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 되며(3절) 유다 민족이 포로로 잡혀갈 때 너무나 기뻐하면서 유다 민족을 조롱하고 멸시하며 저주까지 했다. 그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암몬에게 ‘동방 사람’에 노략과 멸망을 당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동방사람’이란 동쪽에 사는 유목 민족(아마도 아랍민족)을 말한다.66)

 


 

  그들은 광활한 지역에서 약탈을 일삼았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바빌론의 손아귀에서 운 좋게 벗어난 암몬 족속을 정복하게 할 것이며, 암몬의 자부심인 수도 랍바를 짐승들이 쉬는 처소로 삼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67) 그때 암몬 족속은 여호와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5, 7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⑵. 모압을 향한 심판(25:8-11)

 

 

 

  모압과 이스라엘의 적대감은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에 대항하려 했을 때 부터 시작되었다(민 22-24장). 사사시대 이스라엘은 모압 왕 에글론의 폭압을 겪었다(삿 3:12-30). 룻 시대 이후 두 나라는 관계가 좋아졌지만, 사울시대에 다시 악화된다. 모압은 다윗에 의해 정벌되었지만(삼하 8:2), 그 후 여호사밧의 통치 기간 중에 반역하며 암몬 및 에돔과 연합해 유다를 침공하기도 했다(왕하 3:4-27; 대하 20:1-23). 아마 모압은 주전 593년에 다른 나라들과 연합해 바빌론에 반역한 것으로 보이지만(참고 렘 27:17) 그 증거는 확실치 않다.68)

 


 

  모압의 죄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경멸한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 능력의 하나님과 맺은 독특한 관계를 부정한 것이다. 특히 유다가 바빌론에 의해 멸망할 때, 모압은 유다에게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교만 때문에 벌을 받았다고 조롱한 듯하다.

 

  ‘세일’은 에돔 땅의 다른 이름이다. 모압과 같이 에돔도 하나님의 백성을 조롱하는 죄를 지었다. 벧여시못, 바알므온, 기랴다임은 모압의 주요 세 성읍이다. 모압이  받을 형벌은 암몬의 형벌과 같다. 즉 동방 사람에게 정복당해 다시는 기억되지 않는 것이다.69)

 


 

⑶. 에돔을 향한 심판(25:12-14)

 

 

 

  에돔과 이스라엘의 오랜 원한 관계는 그들의 쌍둥이 조장(에서와 야곱)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에돔은 자신의 영토로 지나지 못하게 했다(민 20:14-21). 사울은 에돔과 싸웠고(삼상 14:47), 다윗은 에돔을 복속시켰다(삼하 8:13~14), 그러나 에돔은 솔로몬 통치 후기에 대적하고(왕상 11:14-18) 봉신 국가로 남았지만, 여호람 시대(주전 845년)에 독립을 되찾았다. 그 후 에돔과 이스라엘은 서로 영토를 뺏고 빼앗기길 반복했다.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의해 멸망당할 때, 에돔은 유다의 멸망을 돕고(시 137:7; 오바댜서) 이득을 취했던 것 같다. “네가 옛날부터 한을 품고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 때 곧 죄악의 긑 때에 칼의 권능에 그들을 붙였도다”(35:5). 유다의 한난 중에 에돔 족속은 정복 군대의 편에 있었던 것 같다(옵 1:11). 그리고 유다를 조롱하고(옵1:12), 재물을 약탈하며(옵1:13), 어려움에 처한 이스라엘을 오히려 대적에게 붙였다(옵 1:14), 다시 말해 그들은 유다의 멸망을 복수의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12절).70) 테일러는 유다의 포로 이후에 에돔이 유다의 남방을 점령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에돔은 황폐하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의 손에 의해 되갚음을 당할 것이다(25:13-14절) “비록 에돔이 현대 아랍인의 조상인 나바티아인들에 의해 황폐하게 되었지만, 에돔의 잔류자들은 유다 마카비우스에게 종속되었다가 나중에 요한 힐카누스에 의해 강제적인 할례로 유대 종족으로 합병되어다.”71) 그래서 에돔 사람들은 나라 잃은 민족으로서 고유성도 잃게 되었다(참 암9:11-12).72)

 


 

⑷ 블레셋을 향한 심판(25:15-17)

 


 

  앞서 세 민족과 달리, 블레셋은 이스라엘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 그들은 ‘바다로부터 온 민족’으로 생각된다.73)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정복할 대부터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적이었다(삿 3:1-4). 그 후 블레셋은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를 형성해 왔고 서로 전쟁을 계속했다. 다윗이 마침내 블레셋을 복속시켰고 솔로몬의 통치 기간에도 이런 상태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다윗 왕국이 분열되고 나서 유다와 블레셋의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고 서로 침략과 약탈을 일삼았다. 이런 상태는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두 나라를 지배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블레셋의 죄는 ‘옛날부터 미워하여 멸시하는 마음으로 원수를 갚아 진멸코자’한 것인데, 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멸망시킬 것이다. 즉 ‘그렛 사람’과 해변의 남은 자들을 진멸하실 것이다. 그렛 사람은 구약 시대에 ‘갑돌인’으로 알려진 ‘그레데사람’으로 이해된다(참고 신 2:33; 렘47:4; 암9:7; 창 10:14). 하나님께서 ‘그렛 사람’( ים������������������ 크레티임)을 ‘끊으실’(   י������������������������히크라티)것이다. 그대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17절). 마카비 시대 이후 블레셋은 한 민족으로서 완전히 자취를 갖추었고 그들의 성읍 이름만 남아 있다.74)

 


 

⑸. 두로에 대한 심판( 26:3-21)

 


 

  두로에 대한 심판 신탁은 25장의 네 나라에 대한 신탁의 기조를 이어간다. 낙심한 언약 백성과 하나님은 독특한 인격적 관계인데, 여기에 교만한 마음과 탐욕을 품고 오만하게 끼어든 두로는 심판을 받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깊은 섭리, 즉 언약 백성에 대한(이방 바빌론을 통한) 심판 계획과 궁극적 위로를 강한 세력인 두로도 막지 못할 것이고 오히려 심판마저 면치 못하게 된다.

 

  두로의 죄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기뻐하며 무역을 통한 이익을 늘리려는 교만한 자랑이었다. “만민의 문이 깨어져서 내게로 돌아 왔도다 그가 황무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26:2절). 두로는 해상 무역의 거점이었고 예루살렘은 육상 무역의 중심지였는데. 예루살렘이 멸망하면 자신의 무역으로 인한 이익이 늘어나리라는 계산에 기초한 자랑이었다. 이 심판은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통해 이뤄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백성들이 무참히 살육당하고, 성을 공격하기 위한 다양한 장비들이 동원되어 성을 함락시키며, 결국 성읍안의 주민들과 군인들이 살육을 당한다.

 


 

⑹ 두로 왕에 대한 심판(28:7-10)

 

 

  두로 왕은 자신이 어느 누구보다 지혜로워서 재물과 영예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그로 인해 자신을 신격화하는데 까지 교만해졌다. “그런즉”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두로의 왕을 쳐서 파멸시킬 것이다. 그때 두로의 통치자는 더 이상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된다. 두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할례를 행했기 때문에, 두로 왕이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처럼 죽는다는 것은 치욕적인 죽음을 가리킨다.75)

 


 

⑺ 시돈을 향한 심판 예언(28:20-23)

 


 

  시돈에 대한 심판의 이유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 에스겔은 시돈이 두로와 밀접하게 동맹을 맺고 있어서 비슷한 되를 예시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시돈에 대해 염병과 칼로 심판하실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이 나타날 것이며 시돈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28:22하 , 23하).

 


 

6) 상한 팔과 이미 꺾인 팔(29-32장)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행위는 심판의 도구로 세워진 바빌론 느부갓네살 왕의 최대 강적인 애굽에 임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수호신이 아니라 열방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God of israel)이시며 열방의 하나님(God of nations))이심이시다. 따라서 애굽도 심판하신다.

 

  에스겔서는 일곱 개의 애굽 신탁이 주전 587-571년 사이에 기록되었으며 두로의 함락(주전 571년)과 관련된 제2신탁을 제외하고 모든 신탁들은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로부터 포위당하고(주전 588년) 함락된(주전 586년 7월) 주전 587년-585년 사이에 예고 되었다. 애굽은 신왕국 시대(주전 1580-708년)이후 기울기 시작한 세팃 왕조(주전 663-525년)의 두 번째 왕 느고(주전 609-594년)가 므깃도 전쟁에서 유다의 요시아 왕을 죽이고 잠시 팔레스타인을 점령했지만, 주전 605년 유프라테스 강가 갈그미스 전쟁에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패해 애굽으로 후퇴한다(렘 46:2; 대하 35:20) 그 후 느고 왕의 손자 호프라(주전 588-560년)가 잠시 시드기야를 도와 유다에 영향을 미쳤지만(렘 37:5-7), 주전 566년에 그의 후계자 아마시스에게 살해당한다. 결국 애굽은 과거의 전성기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고 주변 세력으로 존속하다가 알렉산더에 의해 종말을 맞이한다. 이에 존 위버(John W. Weaver)는 에스겔의 애굽 신탁이 호프라 왕(주전 588-560년)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주장한다.76)

 


 

제1예언(29:1-16)

 

  바로왕이 저주를 받을 것이고 과거의 전성기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과 애굽은 지정학적, 신앙적 여러 요소들로 인해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아브라함은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에 애굽으로 내려가(창 12:10), 그곳에서 광야 네게브를 거쳐(창 13:1), 가나안 헤브론으로 재 진입했다(창 13:18). 나중에 이스라엘도 족장 아브라함의 길과 유사한 지리적 병행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가 잠시 번영을 누렸지만 긑내 노예가 되어 광야를 거쳐 가나안을 정복하게 되었다. 그런 여정에서 애굽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누이로 속이면서까지 명예와 안전에 위협을 받았던 곳이며, 이스라엘이 종노릇하던 곳으로써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애굽은 죄악 된 곳이고 심판의 대상이며(사 19-20장), 영적으로 타락한 소돔과 비교된다(계 11:8).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눈에 가증한 우상 숭배를 배웠다(20:7).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통한 그들의 신음은 깊은 고통을 대변한다(출3:7; 6:5).

 

  그 반면에 애굽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복된 곳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애굽 땅에서 기근을 면하고 번식하며 창성해 심히 강대해졌다(출 1:7). 애굽은 나일강의 규칙적인 수량과 안정된 자연 환경으로 인해 먹을 것이 비교적 풍부했던 곳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과거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출 16:3)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애굽은 한 대 고대 근동의 문명을 지배하던 나라였고,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의 번영 과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대제국이었다. 또한 출애굽 과정을 통해 야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바로 왕과 애굽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과거의 전성기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심판을 예고 받는다. 애굽에 사는 사람들과 짐승들은 칼로 끊어질 것이고(29:8절), 믹돌에서 수에네까지(29:10절)77) 애굽의 모든 영토가 40년 동안 황패해지고 전성기를 회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29:8-16). 이는 바빌론 제국이 바사에 의해 정복당한 때로 고레스에 의해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약 40여 년의 세월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심판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바로의 교만함 때문이다(29:3-5). 바로는 애굽의 번영을 상징하는 나일강을 스스로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29:3, 9)라고 말한다. 그러고 바로는 나일강의 생태계를 지배하는 ‘큰 악어’78)로 표시된다. 그러나 그는 그 강들 중에서 나오게 될 것이며, 애굽 백성들을 반영하는 강의 풍요로운 어류들은 갈고리에 꿰어 마른 땅에 던져져 들짐승과 공중 새들의 식물로 주어질 것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통해 경험한 야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나일강의 이점을 의지하며 교만했던 바로와 그 백성들은 그곳에서 추방될 것이다.

 

  둘째, 바로와 애굽은 이스라엘이 기댈 때마다 나일강에 무수한 쉽게 부러지는 갈대 지팡이와 같이 이기적 행위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애굽과 여러 번 동맹을 맺었으나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애굽에게 배신을 당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과 시드기야 시대의 유다는 갈대 같은 애굽과의 동맹 때문에 온 백성이 치명적인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자신의 이익만을 채우기 위한 약속과 갈대 같은 강대국들과의 동맹이 어떤 심판을 초래하는 지를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제2예언(29:17~21)

 

바빌론 느부갓네살 왕이 애굽을 정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을 통해 애굽뿐 아니라 두로도 심판하셨다(26:1-28:19). 느부갓네살 왕과 바빌론 군대는 섬이었던 두로를 육지에서 공격하기 위해 13년 동안 제방 공사를 벌이면서 흙과 돌들을 나르느라고 머리털과 어깨가 벗겨지는 큰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대에 부응하는 전리품들을 얻지 못했다(18절).

 

  두로는 그 시대에 국제적 주요 금융국가로써 그를 정복하면 큰 보수가 있을 것으로 여겨졌지만 보화의 대부분은 멀리 배로 운송된 상태였다. 여기서 에스겔서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섭리에 따라 수행한 바빌론 왕과 그의 군대에게 애굽의 전리품으로 보상하실 것임을 밝힌다(29:19-20).

 

  하나님께서 그분의 언약 백성뿐 아니라 바빌론도 그분의 선한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다. 나중에 바빌론이 심판을 받을 때 바사 왕 고레스가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은 것(사 45:1-8). 에스겔서에서 느부갓네살 왕은 애굽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등장한다.

 

  이런 하나님의 사역 선택은 뿔로 상징된 언약 백성의 힘을 키워 주고 에스겔의 말씀 사역을 회복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제적으로 작용하는 도구들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오히려 그 도구들을 사용하고 규제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79) 심판의 궁극적인 기준은 도구(바빌론이나 바사의 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공의와 섭리에 있는 것이다.

 


 

제3예언(30:1-19)

 

  언약 백성(유대인들)을 포함해 애굽과 동맹한 모든 종족들이 심판받을 것이다. 첫 번째는 애굽이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그 칼에 의해 전멸된다. 나일강을 따라 펼쳐진 옥토를 박탈당할 것이고, 애굽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멤피스의 우상들이 파괴될 것이며, 신으로 여겨졌던 애굽의 왕자들이 끊어질 것이고, 애굽의 요새로 유명한 신과 한때 북쪽 수도였던 바드로스가 함락될 것이며, 애굽의 최대 신들인 태양 신과 고양이의 모습을 한 여신의 신전이 있던 아웬과 비메셋에서 풍요를 누리던 젊은이들이 전멸할 것을 예고한다. 특히 권력 구조뿐 아니라 종교 제도까지 모든 것들이 전멸할 것을 예고한다. 특히 6:18절은 종말론적 심판을 묘사함으로써80) 그 응징성의 심각성을 부각시킨다.

 

  두 번째로는 애굽을 붙들어 주던 모든 자들에 대한 심판이다. 본문에는 여섯 그룹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 그룹들은 아마 애굽 원정에 용병을 제공했던 동맹국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애굽과 함께 느부갓네살 왕의 칼에 엎드려질 것이다. 창세기 10:6 계보에 의하면, 구스와 붓(38:5; 렘 46:9)은 애굽 및 가나안과 함께 함의 아들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한때 애굽의 지배를 받기도 하고 독립적인 왕국으로 존속하기도 했다. 헤로도토스(Herodotus)에 의하면, 룻(27:10)과 굽(단 11:43)도 애굽에 용병을 지원했다.81) “모든 섞인 백성”은 아마 아랍인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출 12:38; 렘 50:37). 그러나 이 본문에서 이해하기 힘든 그룹은 ‘동맹한 땅의 백성들이다’이다. 히브리어 ‘브네에렛츠 하브리트’( ית,������������������ ץ������������ י������������) ‘언약 땅의 백성들’로써, 이는 애굽에 거주 하던 유대인들보다 애굽 왕과 동맹을 맺은 유대 용병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공통적으로 이 그룹들은 애굽이 강성해지고 교만해지는 데 동참햇다는 점이다. 이로서 에스겔서는 하나님의 심판은 악을 행한 한 개인뿐 아니라 그와 연관된 모든 것들 그리고 그와 함께한 모든 자들을 포함한다는 경보를 울리고 있다.

 


 

제4예언(20:20~26)

 

  바로왕의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이 모두 꺾일 것이다. 본문은 애굽 왕의 팔이 칼을 잡지 못할 정도로 점진적으로 꺾이는(21절) 반면에, 바빌론 왕의 팔은 견고하게 되어 칼을 잡고 애굽을 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한다(30:24-25). 바로는 이미 꺾인 팔을 싸매지도, 약을 바르지도 못하는 상태이다. 아마 이는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는 바빌론 군대를 몰아내기 위한 원정(주전 588젼)에서 실패해 타격을 입은 그의 약화된 군사력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82) 이런 바로의 파멸은 그의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이 모두 꺾이면서 완전히 와해된다.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은 바로의 호프라 왕의 말년 생활을 잘 반영한다. 호프라 왕(주전 588-560년)은 통치 초기에 유능한 행정력과 군사력으로 구브로와 시돈을 점령하고 페니키아와 팔레스타인을 자신의 영향권 안에 두기도 했다.

 

  그러나 리비아를 돕기 위한 원정에서 헬라인들에게 크게 패배함으로써 내란을 겪게 된다. 이를 잔인하게 진압하기 위해 그의 부하 마라시스를 파견하지만, 오히려 애굽 병사들은 아마시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반격을 가해 호프라는 부분적으로 영토를 상실하고 상부 애굽으로 밀려나 나머지 애굽 지역의 통치권을 아마시스에게 빼앗긴다. 이런 중앙 집권력과 군사력의 약화는 호프라의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을 잘 나타낸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왕은 이 틈을 타서 마마시스를 대리인으로 삼고 애굽의 전리품을 챙겨 귀국하게 된다. 마침내 애굽은 내분으로 인해 열국 중에 흩어지고 열방 중에 헤쳐졌으며, 바빌론 왕 앞에서 고통 하기를 상한 자가 고통 하듯이 하게 된다. 이는 애굽에서 도움을 얻고자 했던 유다의 기대를 억누르고 야훼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열방이 증언케 한다. 바로의 호프라 왕은 팔레스타인과 리비아 원정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교만을 떨쳐버리지 않는다. 공통을 견디지 못하는 민중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끝내 반란으로 나타난 그들의 목소리를 잔인하게 짓밟았다. 아직도 그의 한 팔이 성했을 때 그가 회개했더라면 심판의 진노를 면했을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그의 팔은 점진적으로 꺾이기 시작하고 남은 성한 팔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그가 의지하던 전략과 군사력은 지극히 미약한 것에 불가했다. 또한 유다는 이미 꺾인 팔을 가진 애굽을 의지하며 바빌론의 점령을 모면하려 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할 자는 오직 야훼 하나님뿐이시다.

 


 

제5예언(31:1-18)

 

  예표로써 백향목과 같던 앗수르의 멸망은 애굽을 누구와 비교할 것인가? 그것은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던 옛 앗수르 제국이다. 이는 영광스러웠던 전성기에도 불구하고 이미 파멸된 앗수르 제국이 애굽의 과거와 미래를 비춰 주기 때문이다. 또한 느부갓네살 왕은 앗수르 제국을 진멸시킨 자로서(주전 609년) 20년 후에 애굽마저 정복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과거 앗수르는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았다. 대체로 메마르고 사막화된 고대 근동에서 레바논은 헤브론 산의 눈이 녹아 흘러내리면서 그 영양이 풍부하고 깨끗한 물로 인해 푸른 숲을 이뤘으며 각종 조류와 동물의 생태계를 이뤘다. 특히 강을 따라 25m나 높이 솟아 있던 백향목들은 레바논의 아름다움과 부를 창출해 주었다. “네 큰 위엄을 뉘게 비하랴”,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써 옛 앗수르 왕이 언급되며 그는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삼림의 그늘 같으며 키가 높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과 같았다. 그런 백향목의 그늘 아래 모든 큰 나라가 거하였고, 그 뿌리가 큰 물가에 있으며 그 나무가 크고 아름다우며 가지가 길어 “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우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아무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이 못하였도다”.

 

  여기서 ‘하나님의 동산’이란 인간적인 위대함이 모두 모인 곳이며 이는 하나님께 기원을 둔 것을 뜻한다.83) 즉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의 어떤 위대한 사람도 앗수르 왕의 권세와 위엄을 능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던 앗수르 왕이 파멸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교만한 마음이 구름에 닿았기 때문이다. 이는 애굽 왕이 교만했던 것과 유사하다. 본문 후반부는 결국 열국의 능한 자와 열국의 강포한 다른 민족으로 묘사된 바빌론에 의해 그 백향목이 찍힐 것을 예고한다. 그러면 생태계의 풍요로움과 그늘 아래 거했던 모든 것들이 떠나가며, 앗수르의 팔이 되었던 자들과 함께 음부에 내려가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들도 유사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앗수르는 영토의 크기와 정치적 세력에서 애굽을 능가했던 대제국이었다. 레바논의 물과 숲과 동물로 상징되던 풍부한 자원과 고대사에서 가장 잔인했던 것으로 알려진 강한 군사력과 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지 못할 정도로 이웃들의 부러움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꺾이지 않는 교만과 만연한 악행 그리고 동맹 관계의 상실은 끝내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고 말았다. 불행한 점은 이미 역사 속에서 그것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한 애굽의 파멸이었다.

 


 

제6예언(32:1-16)

 

  바로에 대한 애가 “이는 슬피 부를 노래이니 여러 나라 여자들이 이것을 슬피 부름이여 애굽과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이것을 슬피 부르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6절). 바로는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젊은 사자와 강을 난폭하게 더럽히는 큰 악어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바로의 종말은 하나님의 징벌로 완전히 끝이 난다. 그렇게 강대했던 애굽의 파멸을 보고 열방은 두려워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왕이라는 한 개인의 슬픔이 아니라 애굽 전체를 비극으로 몰고 간다. 그러므로 열국 여자들은 애굽과 모든 무리를 위해 애가를 부를 것이다

 


 

제7예언(32:17-32)

 

    본문은 강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심판 아래 곧 파멸할 애굽과 모든 나라들의 무덤 옆에서 장송곡을 부르는 것 같은 에스겔의 애가를 기록하고 있다. 그 무덤 깊은 곳에는 생존하던 세상에서 사람들을 두렵게 했던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던 앗수르가 있고, 군사력을 자랑했던 엘람이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며, 메섹과 두발과 모든 무리들이 세상을 두렵게 했던 병기를 가지고 음부에 내려가 자신의 칼을 베개 삼고, 강성했던 에돔과 시돈 사람들도 할례 받지 못하고 칼에 살육당한 자들과 함께 그 구덩이에 내려가 수욕을 당하고 있다.

 

  무덤은 강한 자들을 약한 자들과 구별하지 않는다. 무덤은 모든 권력과 야망이 헛됨을 보여 준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아마 이런 전도자의 마음으로 에스겔 선지자를 이 애가에서 깊은 연민과 슬픔을 나타냈을 것이다. 바로는 오랫동안 절대적이고 오만한 권력으로 인해 세상에서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무덤에서 모든 무리로 더불어 할례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살육당한 자들과 함께 큰 두려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애굽의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가 역사 속에서 궁극적으로 전개되며 각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어떻게 이뤄 가시는지 우리 모두에게 큰 교훈을 준다. 도덕성을 배제한 번영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교만을 한 개인을 넘어 국가적으로 비참하고 치명적인 파멸을 초래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우리는 징벌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항상 말씀을 통해 경고와 회개의 기회를 미리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Ⅱ.스가랴서의 메시지

 


 

1.스가랴 선지자가 소명 받을 즈음의 분위기

 


 

  잇도의 손자이자 베레갸의 아들인 스가랴는 다리오 통치 2년 8월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1절). 이때가 주전 520년경이다. 다리오 1세가 페르시아 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한 것은 주전 521년이었으며 이후 잠시 페르시아 제국이 여러 민족과 속국의 반역에 의하여 많은 혼란에 빠진 듯했으나 스가랴가 소명을 받을 즈음에는 모두 평안을 되찾고 다리오의 왕권은 더욱더 굳건하게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 제국은 평안을 찾았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추구하던 유다 사람들의 삶은 평안하지 못한 시대였다. 그들의 메시아 왕국의 시작에 대한 기대는 날이 갈수록 비현실적으로만 생각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대에 의하면 메시아 왕국이 도래하기 전에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세상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해야 했다. 그러므로 가우타마의 반역과 캠비스 자살로 비롯된 페르시아 제국의 혼란은 잠시나마 그들이 학수고대하던 여호와의 열방에 대한 심판이 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소망을 불어넣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리오가 왕권을 장악한 다음 모든 반역이 진압되고 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시 잠잠히 여호와를 바라보며 다른 때를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이 다시 평안을 되찾았다는 것은 단순히 메시아 시대의 도래가 미래로 지연되었다는 결론만으로 끝날 상황이 아니었다. 포로시대 이전에 사역했던 선지자들과 심지어는 포로시대 때 활약했던 선지자들이 한결 같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했던 것 중의 하나는 머지않아 이스라엘은 바빌론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제2의 출애굽을 맞이할 것이며, 이 일이 있은 다음에 시온에 메시아가 오셔서 그의 백성을 회복하시고 새 날을 건설해 나갈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이들이 그 약속을 믿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20년이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메시아 왕국은 도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초조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도 조금은 흔들렸던 것이다. 이처럼 기다림은 때로는 우리를 지치게 하며 심지어는 절망의 늪에 빠지게 한다. 이렇게 사람들의 믿음이 퇴색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때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결코 내 백성을 포기하시지 않았고, 오히려 사랑이 날이 갈수록 진해져 간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신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학수고대하던 메시아 왕국의 도래에 대한 청사진을 선지자에게 보여 주심으로써 소망을 절대 포기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주의 백성이 가장 절망적이라고 느끼는 순간이 가장 적합한 하나님의 때라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것이다.

 


 

2. 여호와께 돌아오라(1:1-6)

 


 

  스가랴서는 어둠 속을 헤매며 이제나 저제나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임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살다고 지쳐 버린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지난날의 침묵이 결코 무관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적절한 때를 기다려 온 것임을 밝히시며 머지않아 서광의 빛이 그들의 발길을 밝혀 줄 것임을 선언하신다.

 

  스가랴서 1장 초두에서는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말씀이 임하는 내용이다. 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2절), 현세대를 향한 회개의 촉구(슥 3-4절), 사람은 유한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사실의 선포(5-6절)를 하신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의 말씀이 선포되었으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고, 결국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다. 이제 현세대도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회개하지 않으면 그와 같은 운명에 처해진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스가랴는 주님의 말씀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에 순종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충성하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는 예언적 경고를 선포한다(슥 1:3-4, 암 5:10-27; 4:1-15; 호 6:1-3; 14:1-3; 사 1:18-31; 42:18-25). 이것만이 축복과 형통의 길이며(신 6:4-9; 7:12; 11:13-23, 28; 암 5:10-27; 4:1-15; 호 6:1-3; 14:1-3; 사 1:18; 시 1:1-6), 사탄에게서 승리할 수 있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벧전 2:2). 특히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도는 말씀임을 강조한다(슥 1:6; 사 40:6-8; 55:10-11; 57:19). 여기에서 예언적 명령(슥 1:3-4절, 불의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명령)은 스가랴서의 중간 단원인 스가랴 7:1-8:23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7:9-12; 8:16-17).

 


 

3. 스가랴가 가장 먼저 백성에게 전한 메시지

 


 

  이스라엘의 과거에 대한 회고였다(2절). 그들의 선조들이 여호와와 그의 말씀을 꾸준히 거역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서 분노하셨던 것이다(4하절). 하나님의 분노는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체험했던 모든 재앙과 환난을 통해서 드러났다(5절). 스가랴가 4절에서 옛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회고하며 기록하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모든 선지자의 가르침을 요약하는 말이며 “너희는 각기 악한 길과 너희 악행에서 돌이키라”(렘 25:5, 참고 겔 24:14)는 말씀을 회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울러 6절의 “내가 종 선지자들에게 명한 내 말과 내 전례들이 어찌 네 열조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라는 수사학적인 질문은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언약적 저주들을 연상케 한다. 심지어는 ‘임하다’, ‘명하다’, ‘전례’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들은 신명기 28장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이다(참고 신 28:2, 15). 백성의 응답에 사용되는  “여호와께서(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우리에게) 행하셨도다”(6하절) 역시 예레미야애가 2:17, 예레미야 24:8, 51:12 등을 배경으로 하는 말씀이다.

 

  자신의 사역에 대한 정당성과 역사성을 옛적 말씀과 연결하여 정리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역의 능력은 5-6상절에 제시된 수사학적인 질문들에서 비롯된다. “너희 열조가 어디 있느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그들의 선조들은 모두 죽었다.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들도 모두 죽은 지 오래다. 그러나 폐허가 되어 버린 예루살렘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확실하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 주는 증거로서 그들과 함께한다. 여호와의 말씀과 전례들은 아직도 건재한 것이다. 스가랴는 자신을 바로 이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 보았던 것이다. 이 영원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스가랴의 능력과 권위다.

 


 

4. 스가랴서의 환상을 통해서 전하는 메시지

 


 

  성전을 건축하러 조상의 땅에 돌아온 백성들은 재난과 박해를 당하여 성전 건축을 중단하였다. 이때에 스가랴는 성전의 중요성과 성전이 필히 완공될 것을 환상을 통하여 보여 주며, 백성들을 격려하였다. 또한 앞으로 있을 완전한 성전을 건축할 자인 '순'을 기다리게 하고. 먼데 이방 사람들까지 와서 성전 건축을 도울 미래의 때가 있을 것을 예언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만방에 퍼질 것에 대한 예언이다. 이러한 환상과 예언들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다. 그 분은 인류 역사의 주권자이시며 천지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여덟 개의 환상이 교차대구법으로 구성 되었다. 첫 번째 환상과 여덟 번째 환상은 “땅 위를 살펴보는 다양한 색깔의 말들”을 중심으로 병행을 이룬다. 첫 번째 환상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초점을 맞춘 데 반해(1:12, 17), 여덟 번째 환상은 죄 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에 초점을 맞춘다(6:8). 첫 번째 환상에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전체적’으로 선포된 후 이어서, 두 번째 환상에서는 특히 이방 민족들의 죄악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구체화한다. 세 번째 환상은 두 번째 환상과 마찬가지로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포괄적으로 전개한다. 특별히 여기에서 바벨론이 명시되어 나온다(2:7-9, 두 번째 환상에서는 간접적 언급(1:21)). 이 바벨론은 일곱 번째에서 시날로 표기된다(5:11). 네 번째 환상과 다섯 번째 환상은 새로운 메시아 시대의 영적,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한다. 여섯 번째 환상과 일곱 번째 환상은 죄악의 땅과 죄인들을 징벌하는 문제를 다루며 서로 병행을 이룬다. 특히 바벨론으로 대표되는 죄악의 세력을 언급한다. 이 여덟 개의 환상은 교차대구적 구조체로 되어 있는데, 그중 가장 명백한 면모는 첫 번째 환상과 여덟 번째의 환상과 네 번째와 다섯 번째 환상의 병행이다.

 


 

1) 첫 번째 환상(1:7-17)-여호와께서 돌아오심

 

  환상의 내용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이 도성의 종교와 삶이 다시 풍요롭고 거룩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스가랴가 상상하는 예루살렘의 회복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의 안정을 위한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가 예언하는 시온의 회복은 곧 하늘과 세상이 만나는 거룩한 공간의 회복이요, 재창조다. 스가랴가 상상하는 예루살렘의 회복은 이처럼 성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이 환상들의 구조와 범위에서 역력하게 드러난다. 선지자는 모두 어덟 개의 환상을 같은 날 밤에 받았거나, 며칠 내에 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환상이 시작되면서 끝날 때까지 선지자는 천사의 설명을 통해 환상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스가랴의 처음 세 환상(1:7-17; 18-21; 2:1-13)은 여덟 개 중 공통점을 지니는 첫 번째 부류의 환상들이다. 이 환상들의 공통적인 테마는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예루살렘/유다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다. 첫 번째 환상에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약속하며 세 번째 환상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이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기 시작 하는가를 보여 준다. 스가랴가 본 환상들은 모두 같은 날이나 비슷한 때에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참고 1:7), 모두 밤에 임한 것이다(참고 1:8). 스가랴가 본 날짜는 그의 첫 메시지가 선포된지 3개월이 지났던(참고 1:1)다리오 왕 2년 11월 곧 스밧월 24일로 밝히고 있다. 24일은 중요한 날짜다. 백성이 정확히 이날에서 5개월 전이었던 다리오 왕 6월 24일에 성전재건을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다.(학 1:14-15). 오늘날의 달력에 의하면 스가랴는 주전 519년 2월 15일 첫 환상을 보았다. 환상 속에서 선지자는 빨간 말을 탄 한 사람을 보았다. 그는 화석류나무 혹은 소귀나무 사이에 서 있었으며 그 뒤에 여러 말이 서 있었다. 말을 탄 사람은 여호와께서 보내신 천사였다. 말이 몇 마리이며 말을 탄 사람은 몇 명인지는 모른다. 다만 11절에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천사에게 말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 하더이다”에서 말들이 천사에게 구도로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그 말들 위에 탄 자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올 뿐이다.

 

  이 말들이 사방(四方)을 두루 둘러보고 오는점을 염두에 둘 때 각 색깔별, 즉 빨간색, 밤색, 흰색의 말에 타고 있었을 것이다. 천사가 타고 있던 빨간 말 뒤에 여러 말이 보인 것으로 보아 총 4마리였던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스가랴서 안에 4라는 숫자가 지니는 중요성을 염두에 둘 때, 천사가 탄 말 역시 넷으로 구성된 조의 한 일원임을 짐작할 수 있다. 넷은 환전함을 상징하는 숫자다.

 

  세상을 둘러보고 온 기마병들이 천사에게 온 세상이 “조용하고 평안하였다”고 보고했다(11절). 그러자 천사는 만족해 하기는커녕 오히려 실망에 찬 어투로 곧바로 하나님께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을 폐허로 버려두실 것인지 물었다. 천사는 온 세상이 조용하고 평안하게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성읍들을 보살피시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12절). 열방이 평안한 것은 곧 주의 백성이 아직도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하여 버림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유다의 현실을 예레미야가 선언했던 70년의 심판이 지속되는 것으로 간주한다(참고 렘 25:11). 예레미야의 70년은 이사야의 70년(사 23:15-17)처럼 오랜 세월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스가랴는 이 70년을 자신의 시대에 문자적으로 적여한다. 이 경우 70년은 바벨론의 손에 유다가 멸망했던 587년에서 시작해서 스가랴가 이 예언을 받았던 520년까지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천사의 탄식어린 질문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위로와 좋은 말로 그에게 말씀하셨다(13절). 천사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 백성을 버리시지도, 저주 아래 두시지도 않았다는 점을 역설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반응은 여러 면에서 천사의 염려를 완전히 불식시킨다. 하나님의 긍휼이 주의 백성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천사의 탄식이 하나님의 긍휼로 대치되며(16절),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의 어려운 형편을 풍요로운 모습이 대신한다(16-17절). 뿐만 아니라 열방의 평안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을 것이 확고히 예고되고 있다(15절). 저자는 다시( 161쪽 오드)라는 말을 17절에서만 네차례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확고한 회복을 예언한다. 이처럼 지연되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하여 실망에 가득 찬 사람들에게 14-17절은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을 노래한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지칠줄 모르는 하나님의 열심,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은혜와 자비로 충만한 여호와의 예루살렘 귀성, 성전재건, 파괴된 도시의 무궁무진한 발전, 시온과 예루살렘에 임할 위로 등 주의 백성이 갈망할 만한 모든 것을 약속한다.

 

  스가랴 선지자는 혼란과 비관으로 가득한 세상에 좌절하지 않고 현실에 대치되는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선지자가 환상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외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의 백성을 버리시지 않는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은혜와 관심이 주의 백성에게서 멀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보내셔서 온 세상을 관찰하고 둘러보고 계셨다. 뿐만 아니라 하아님의 자비는 끊임없이 주의 백성을 감쌀 것이다.

 

  스가랴 선지자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며, 그분의 은혜는 바로 그 순간에도 계속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선지자들은 대체적으로 평안과 조용함을 지향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스가랴의 선배들은 한결같이  전쟁을 문제 삼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본문에서처럼 때로는 세상의 평안과 조용함이 주의 백성에게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불안한 미래에 대한 예고일 수도 있다.

 


 

2) 둘 째 환상(1:18-21)-네 뿔을 깨는 네 공장(이방민족들에 대한 심판)

 

  본절에서 21절까지는 두 번째 환상으로, 네 뿔과 네 명의 공장이 등장한다. 두 번째 환상에서는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열방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크게 진노하심으로 이 약속이 실현될 것을 말하고 있다. 네 뿔을 보았다. 네 뿔은 묵시문학적 표현에서 세상이다. 4를 뜻하는 의미이다. 주의 백성들을 괴롭혔던 네 뿔(열방)이 대장장이에 의해서 부셔진다. 하나님의 심판이다.

 

  “내가...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 이곳의 네 뿔은 유다와 이스라엘, 그리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그 백성들을 다 흩어버렸던 열방들을 뜻한다. 세계의 네 제국, 곧 바벧론, 메대바사, 그리스, 로마, 혹은 앗수르, 애굽, 바벧론,  메대-바사등으로 보기도 한다(K. L. Baker, Feinberg)

 

  이 뿔들이 한때는 전혀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약탈 하고 온 세상에 흩Em렸지만, 때가 되면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행했던 만행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네명의 공장/대장장이가 뿔들 뒤에 등장했다. 한 사람당 뿔 하나를 맡아서 망치질을 해댈 것이다. 뿔이 제아무리 당하고 단단하다 해도 대장장이의 손이 휘두르는 망치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나라들이 앞으로 당할 운명이 마치 대장장이의 망치에 부서지는 뿔과 같을 것이라는 것이다.

 

  포로시대 이전에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조건적인 성향을 띠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미래는 백성의 반응에 의하여 결정될 것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스가랴는 어떠한 조건도 연결되지 않은 회복을 예고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눈에 보이는 것만을 판단하지 말고 그 분을 신뢰할 것을 강조하신다.

 

  하나님은 첫 번째 환상에서 온 세상의 평온은 주의 백성과 천사를 실망시키고 잇었지만 두 번째 환상에서는 첫 번째 환상에서 열방이 평온함이 전부가 아님이 드러나고 있다. 그들의 평온함은 잠시 동안만 유지될 것이다.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그들을 박살 낼 대장장이들을 보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새 역사가 일어나는 장소인 새 예루살렘을 지키시는 것이다.

 


 

3) 셋 째 환상(2:1-5)-척량줄을 손에 잡은 자 (성곽이 없는 새 예루살렘)

 


 

  척량 줄 환상(에스겔-스가랴-요한계시록)은 아모스서(7:7-9)에서는 심판으로 나타나지만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구원과 회복을 상징한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에스겔서와 관계가 깊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하나님이 세우실 새로운 도성을 측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스가랴서는 에스겔서를 이어서 읽으면 더욱 이해가 빠를 것이다.(겔40:3,5)

 

  스가랴가 보는 아름다운 환상은 “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이라는 관용구로 시작한다. 우리를 먼저 주목케 하는 것은 ‘척량줄’( ה������������ ל������������ 헤벨 밋다). 척량줄은 광간을 측량하기 위한 도구인데, 척량줄은 어떤 경우에는 심판상황에서 나타나지만(아모스 7:7-9),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구원과 회복을 상징한다. 이런 점에서 에스겔서와 연관이 깊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회복이야기로서 새로운 도성을 측량하는 것(겔 40:3)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척량줄 환상은 바벨론 포로기의 에스겔에서 시작해서 바벨론 포로이후 스가랴로 이어진다. 그리고 600년이 지난 다음, 척량줄 전승은 다시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진다. 척량줄을 손에 든 이유는 새 도시의 크기를 측량하기 위해서다. 새 도시의 규모를 단순하게 잰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도시의 규모를 일정한 크기로 한정시키는 의미도 있다.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고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스가랴에게 말하는 천사는 나가고 다른 천사가 예루살렘을 측량하지 말라고 한다. 앞으로 예루살렘이 사람과 가축으로 가득 차서 ‘성곽 없는 촌락’처럼 될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새 도시 측량이 필요 없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로 보았을 때 예루살렘의 회복 정도를 극대화한다.

 

  하나님이 새 역사를 일으키시는 중심지인 예루살렘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 도시가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개별 성읍으로 존재하지 않고, 주변에 여러 위성도시를 포함하는 거대 도시가 될 것이다. 심판은 예루살렘을 텅 비게 만들고 황폐하게 만들었지만 4절에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라는 말에서 장광을 측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거대한 도시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성벽 없는 예루살렘을 불의 성곽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새 예루살렘을 새로운 에덴동산처럼 여기시고 그렇게 강력하게 지키셔서 아무도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을 나타낸다. 물론 그런 세상이 오면 예루살렘을 침략할 나라도 없겠지만, 하나님이 새 예루살렘을 온전히 지켜주셔서 다시는 예루살렘이 침략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 주신다.

 

  스가랴서의 핵심 주제는 ‘만군의 주, 온 세상의 왕께서 일으키시는 새로운 역사’다. 1-2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회복하시는 일, 즉 새 도시,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성벽 없는 거대 도시를 만드시고 그곳을 눈동자처럼 아끼시고 직접 돌보신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시지 않고 언제나 그 안에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나라와 민족도 불러 모으시고 그들을 날개 아래 품어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스가랴에게 보여 주시는 세상은 ‘모두가 어우러지는 평화로운 세상’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일으키실 온전한 새 역사다. 스가랴는 환상을 통해 이 말씀을 들으면서, 새 시대에 대한 명확한 소망을 가졌을 것이다.

 

  에스겔에서 스가랴를 거쳐 요한에게로 700여 년 동안 끈질기게도 이어진 척량줄 전승은 다시 2천여 년 장구한 세월을 흘러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다. 척량줄은 구원과 회복의 상징이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다시 척량줄 환상을 보여 주시면서, 하나님이 구원과 회복의 주인이심을 드러내신다. 예루살렘 재건으로 이스라엘 회복을 시작하셨던 하나님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진정 아름다운 곳으로 재건하실 것이다. 그리고 온 세상 만물의 주인이신 우리 하나님이 미움과 갈등으로 총성이 멎을 날 없고, 살육이 그치지 않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자녀로 삼으셔서, 이 땅에 평화를 가져다주실 것이다.

 


 

4) 네 번째 환상(3:1-7)-이스라엘의 정결과 회복

 


 

  네 번째 환상은 새로운 시대에 다가올 영적, 정치적인 지도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84) 즉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3장에서는 환상의 내용(3:1-7)과 이에 뒤따르는 예언(3:8-10)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85) 전반부는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천사 앞에서 더러운 옷을 입고 있으며, 사탄은 오른편에서 그를 정죄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3:1). 이에 여호와는 사탄을 책망하고, 2절에 “천사” 혹 “여호와”는 여호수아에 끼어들어 “정결한 관을 씌워 달라”고 하자 대제사장은 정결한 관과 옷을 입는다(3:5).86) 여호와의 천사는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길대로 걸으며, 말씀을 지키면 성전을 담당할 것이라고 말한다(3:6-7). 또한 뒤따르는 예언으로 여호수아와 제사장들에게 주는 것이다. 이 예언은 미래에 일어날 것으로 ‘내 종 순’과 ‘일곱 눈을 가진 돌’에 관한 것이다(3:8-10). 이 수행자를 통하여 죄악을 해결하고(3:9)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사람을 초대할 것이다(3:10).

 

 

 

  이 3장은 제사장적인 나라로서 이스라엘의 미래적 회복의 예언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출애굽기 19:6에서 언급하는 것같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러한 제사장직의 회복, 성전의 회복은 미래의 메시아의 오심으로 성취될 것이다(슥 14장).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3:1, 4). 이 여호수아는 바로 죄를 지은 이스라엘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87). 이런 면에서 실제로 사탄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백성의 상징)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의 고소자다(욥 1-2; 계 21:10). 또한 Ralph L. Smith는 ‘사탄’이라는 단어가 개인의 이름인 악의 제1인자, 우두머리로서 고유명사‘사탄’이 아니라, 일반적인 ‘고소자’라는 일반적인 형태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88).

 

  피고측 변호인은 여호와 자신이시다. 고소자 사탄이 피고측 변호인 여호와 앞에서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죄인 백성의 대표 여호수아를 책망한다. 근거는 하나님의 택하심 때문이다. 여기서 ‘택하다’(ר������������ 바하르 to choose)라는 의미는 ‘선택하다’라는 선택적 개념을 반영하고 있다(엡 1:4). 하나님의 택하신 ‘예루살렘’이며 백성을 대표하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는 것을 하나님은 받아들이실 수 없기 때문이다.

 

  2절에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은 바벨론의 포로를 의미하기도 하며 ‘이’는 ‘이것’ 혹은 ‘이 사람’(������ה 제 this)은 먼저 구원받은 사람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의미하며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3절의 ‘더러운 옷’  (베가딤 쪼임)을 입고 있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연결시킨다면 이것은 이스라엘의 부정함을 보여 주기도 한다. 즉 거룩하신 하나님이 부정한 이스라엘과 관계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더럽다’(אּי������ 쪼이)라는 단어는 ‘더럽다’를 표현하는 히브리어 단어 중에서 가장 더러운 개념을 갖는 단어라고 이해한다. 즉,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일 뿐만아니라 정결하지 못한 옷을 입고 있었다.

 

  4절에 “더러운 옷을 벗는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이 경우는 제사장직을 박탈당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백성을 위해서 대제사장으로서 구원 사역을 직접 하신다는 것이다. 즉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제사장직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 하시는 죄의 용서하심을 통한 사역이며 예복을 새롭게 입히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신학적으로 ‘칭의’(Justification)와 유사한 형태를 통하여 대제사장은 ‘예복’(וֹת������������������������ 마할라쪼트 robe of state)을 입게 된다. 이 하나님의 사역은 ‘죄 용서’뿐만 아니라, ‘칭의’적인 새로운 ‘예복을 입혀 주심’으로 약속된다(3:4). 여기에서 스가랴는 이러한 장면을 보고 직접 끼어들어 어러운 옷뿐만 아니라 깨끗한 관(יף������������ 짜니프 turban, headband)을 쓰게 해 달라고 요청하여 예복뿐만 아니라 머리에 정결한 관까지 쓰게 된다(5절).

 

  여호와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직접 증언한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서있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7절). 즉 “나의 길을 걸으며”, “나의 명령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절이 ‘만약’(אּם 임 if)이라는 구절로 증언한다. 이러한 말씀 순종에 대한 결과로 세 가지의 결과를 약속하시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릴 것”이며, 둘째로 “하나님의 뜰을 맡길 것”이며, 셋째로 “하나님께 자유롭게 왕래할 것”이다. “하나님의 집을 다스릴 것”은 그분의 성전을 다스리며,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통치된다는 것이다.89) 이것은 영적인 권위를 갖고 제사장직 사명을 지속적으로 다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뜰을 맡게 된다”는 것은 성전이 수상숭배와 죄에서 전염되는 것을 막도록 사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이러한 사명을 받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자유롭게 왕래”라는 것은 제사장의 특권을 보여 준다. 대제사장은 1년에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갔고, 제사장들은 성소에 왕래할 수 있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8-10절에서 종말론적인 사건을 약속하신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메시아를 지칭하는 ‘새싹’, ‘한 돌’과 같은 표현들의 단어들이 나타난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위한 ‘한 돌’과 같다. 실제로 메시아는 그를 대적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걸림 돌’이 되거나 ‘거치는 돌’이 되었다(사 8:13-15; 시 118:22-23; 마 21:42; 벧전 2:7-8). 그러나 그를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피난처’가 되셨다(사 28:16; 벧전 2:6). 그리고 지금은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셨다.(엡 2:20). 이 메시아 사역은 “이 땅의 죄악을 하루 만에 제거 하겠다”(9하절). 는 약속과 연관된다. 이 돌에는 ‘일곱 눈’이 있다. ‘일곱 눈’은 주로 성령의 충만한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즉, 무한하고 전지 전능하신 그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10절에서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평화롭고 아주 잘사는 나라를 상징하는 표현인데 그날에는 바로 이스라엘의 정결함과 회복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에서 ‘초대한다’(א������������ 카라 invite)라는 단어를 혹자들은 단순히 사람들을 초대해서 잘산다는 개념뿐 아니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여 앉아서 ‘율법을 공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주장 한다90). 약속한 하나님의 회복을 통하여, 사람들을 초대하여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들을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연구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3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영적인 지도자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제사장적인 사역을 감당하도록 택함을 받았으나, 정결하지 못함으로 이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며, 장차 오실 새 싹이신 종이 하루에 이 모든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는 내용이라고 볼수 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습이나 우리를 대표하는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의 역할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이 보내실 종을 통해서만 이러한 사역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5) 다섯 번째 환상((4:1-14))-일곱 촛대의 순금 등대와 감람나무 두 그루(성전의 재건)

 


 

  4장은 스가랴가 본 환상(4:1-5, 11-14)과 두 개의 신탁(4:6-10)으로 구성 되어 있다. 그 환상은 순금등대와 이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다. 스가랴가 본 순금 등대는 등의 대 위에 기름 그릇이 있고 이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다. 각 등잔에 심지를 놓을 수 있는 일곱 개의 관이 있는 등대의 모습은 출애굽기 25:31-40과 37:17-24에서 묘사하는 성막의 등대와는 다른 형태다.

 

  순금등대는 이스라엘백성, 즉, 언약백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신약의 교회를 상징한다91). 그들의 사명은 세상을 밝히는 것이다. 기름은 성령이다. 성령의 공급으로만이 세상에 빛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빛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공급되어야만 가능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스룹바벨이 성령으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것을 보여준다. 스가랴 4:6-7절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지도자인 스룹바벨에게 주어진 첫 번째 신탁의 내용이다. 천사는 스가랴가 본 이상의 전체적 의미를 선포하는데, 바로 스룹바벨이 사람의 힘과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영으로 성전건축을 마무리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즉 순금 등대에 계속해서 기름을 공급하는 이상은 성전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계속 공급하여 주심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때 하나님께서 공급하실 것은 곧 “하나님의 영”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힘’이란 대부분 육체적 힘을 의미하며, 발전된 의미로 “보화”(스가랴 14:14)를 의미하기도 하고, 에스겔 17:17에서처럼 “군대”로 번역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성전건축을 완성하는 것이 인간의 육체적 힘, 재력 또는 군사력이 아님을 선포하는 것이다. “능” 또한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 두 표현을 함께 사용하면서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성전이 완성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단어 ‘루아흐’(������רוֹ)는 하나님의 인격을 의미하는바, 이는 그의 뜻을 알리고 인간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성전건축에서 하나님의 임재롸 개입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결국 4:6절은 하나님의 임재와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서만 성전건축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성전건축이 확실히 이루어지게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성전건축이 연약한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성전건축의 장애 또는 방해는 스룹바벨 앞에 놓여 있는 큰 산으로 표현된다.(참고 스 4:2-4, 24). 큰 산이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어 제거될 것을 약속한다.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 앞에서는 어떠한 장애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리가 은총을 외치는 가운데 스룹바벨이 건축을 마무리하는 머릿돌을 놓게 된다.

 


 

  두 번째 신탁의 내용은 4:9절에 스룹바벨이 성전건축을 마무리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전한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성전건축을 이루실 것이지만 이것은 인간의 관여를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인간 에이전트를 사용하여 성전건축을 이루신다. 즉 스룹바벨을 통하여 성전의 기초를 놓으시고 그를 통해 성전건축을 완성하실 것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이 약속의 성취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백성에게 보내신 것을 스가랴가 알게 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10절에 보면 스가랴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와 다시 건축하는 성전을 이전 솔로몬의 성전과 비교하여 그들의 성전건축 사역을 "작은 일의 날"이라고 쓰고 있다. 이것을 학개서에서는 “보잘것없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학 2:3). 그리고 그때의 성전 재건이 원수들의 방해로 인하여 미천(微賤)해 보였다. 그러나 스룹바벨이 다림줄을 갖고 건축을 진행하는 것을 볼 때 이를 멸시하는 사람들이 모두 기뻐할 것을 그린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더러 이런 미천해 보이는 시기(時期)를 멸시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일은 처음에는 미천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이 역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천한 것이다.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 공사가 그때에 미약해 보였으나  필경 완성될 이유는,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 곧, 모르심이 없으신  성령께서 그 일을 성사 (成事)시켰기 때문이다. "일곱"은 완전을 의미하는 수(數)이니, "일곱 눈"은 무소부지(無所不知)하신 성령을 비유한다.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 곧,

 

"일곱 눈"이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 공사를 위한 다림줄을 기뻐 하신다는 뜻이다.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완성되는 것이다. “큰 산”이 외부에서 오는 방해를 의미한다면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태도는 내적 어려움을 나타낸다. 즉, 스룹바벨은 외부와 내부에서 오는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하나님의 신으로 성전건축을 마무리하게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이다.92) 이 말씀대로 성전은 이 신탁이 주어진 후, 다리오 왕 6년 아달 월 3일에 완성된다(참고 스 6:15).

 


 

11절의 “등잔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이다. 다시 12절에서  “기름을 흘리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기름 발리운 자(또는 부음을 받은 자) 둘”을 의미한다. 이들은 순금 등대에 금 기름을 풍부하게 공급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금 기름은 6절과 연관하여 해석할 때 풍부하게 공급되는 하나님의 영/힘을 의미한다. 즉, 대제사장과 정치적 지도자가 같은 위치에서 성전건축 과업과 성전을 이끌어 갈 하나님의 원동력을 공급하는 통로가 되리라는 것이다.

 

  스가랴 선지자를 구약에서 왕과 제사장이 그름 부음을 받을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히브리어 ‘사만’(ן������������)이 아닌 ‘이츠하르’(ר������������י)라는 단어를 4:14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이 단어를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와는 다른 표현인 “기름 발리운 자”로 해석하기도 한다.93) 이 단어의 사용은 기름 부음 받는 사실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기름을 공급하는 그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의도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스가랴 4:14에서 천사는 성전건축의 원동력이 되는 하나님의 신의 공급과 임재를 나타내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기름 발리운 자 둘”에 대한 언급은 제사장과 지도자의 상호보완적 역할을 강조된다. 결론적으로 본문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성전건축 사역이 인간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며, 그러므로 성전건축이 필히 마무리될 것임을 예언하는 것이다. 스가랴 4장에서 제시하는 이상의 중요한 목적은 성전건축의 완성을 확언하여 주는 것이며 회복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6) 여섯 번째 환상(5:1-4)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죄인의 심판)

 

   5장에서는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죄가 여전히 그들 가운데 있음을 보여 주었으며, 스가랴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덕적으로 바른 삶을 살도록 촉구하였다. 스가랴 선지자에게 보여준 환상은 전반부(1-4절)에서 날아가는 두루마리94) 환상을 보여 주고, 후반부(5-11절)는 에바  속에 있는 여인에 대한 환상을 기술하고 있다.

 

 

 

  전반부는 “내가 다시 눈을 들어 본즉”이라는 말로 시작하였고, 스가랴의 환상은 천사가 무엇을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환상으로 보았다고 답한다. 이어서 천사의 설명이 이어지는데,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5:3)는 말씀이었다. 환상에서 “이쪽 글”과 “저쪽 글”이라고 함은 요한계시록 5:1절에 나오는 두루마리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의 두 판에 기록하였던 율법의 두 돌판을 연상시킨다(출 32:15). 스가랴가 본 두루마리에 적혀 있는 율법은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된 십계명 전체를 대표한다. 이 율법이 이스라엘 전체와 깊숙이 관련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단순히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를 담는다고 할 수 있겠다. 본문에서 ‘저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알라’(ה������אָ������)에 특정한 ‘저주’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는 정관사가 붙었다고 하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두루마리의 ‘도적질하는 자에 대한 저주’와 ‘맹세하는 자에 대한 저주’는 신명기 27장에 언급된 대로 십계명을 어긴 자들에게 임하는 저주를 의미한다(신 27:15-26)

 

  2절에서 두루마리의 크기가 매우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10규빗”이라는 것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이 장이 60규빗, 광이 20규빗, 그 성소의 앞의 낭실((porch)의 크기가 장이 20규빗, 광이 10규빗이라고 하니 두루마리의 크기가 제사장들이 항상 여호와의 율법을 읽었던 장소, 낭실의 크기와 동일 하였음을 보여준다(왕상6:2-3). 매우 컸던 두루마리의 환상은 두루마리에 쓰인 내용이 변경할 수 없는 절대적 권위를 갖고 있음과 심판에 대한 주체가 하나님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의 정도나 범위를 보여 주는데, 하나님으로 시작한 저주의 말씀을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크고 엄격하여 극에 달할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두루마리가 본래는 날아다니는 물건이 아닌데도 두루마리가 “날아가는”(5:2)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은, 도둑과 거짓 증거자들의 집(이스라엘)에 임박한 심판을 용이하게 해 준다는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두루마리가 날아다니는 것은 여호와께서 내리신 저주의 말씀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서 죄인을 심판하기 위한 것임을 상징하였다. 저주의 말씀이 그들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5:4)고 한 것은 저주의 말씀이 떠나지 않고 완전히 망할 때까지 나무와 돌을 불사르는 심판의 철저함에 대한 언급이다. 심판의 범위는 “온 지면”(5:3), “시날 땅”(5:11), “이 땅”(3:9), “온 세상”(4:10)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이지만, 이는 이스라엘의 죄악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죄악을 심판하시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스가랴 선지자는 두루마리 환상을 통해서 이스라엘 전체에 걸친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의 불가피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저주의 대상은 계약백성의 삶에서 가장 중심이 되었던 십계명을 어긴 자들이었는데, 이를테면 탐심을 갖고 물질에 눈이 어두워 남의 것은 물론 하나님께 바쳐진 것까지 도적질한 자들이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에게서 매우 비난받던 죄였다(말 3:8; 느 13:10). 또한 거짓 증언을 함으로써 의를 벗어나게 하는 자들, 즉 ‘거짓 맹세하는 자’들과 도적질과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간악한 세대들에 대한 저주였다. 이는 도적질과 망령된 맹세에 대하여 각각 ‘고네브’(ב������������ 도적질하고 있다 5:3)와 ‘니쉬바아’(ע������������������ 맹세하고 있다, 5:3)와 같이 ‘계속적 행동과 반복적 행위를 뜻하는 분사형’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은 두루마리에 회개하지 않고 계속하여 죄를 짓는 자에 대한 저주를 기록하여 이들을 벌하실 것임을 밝히시고 있는 것이다.

 

  

 

7) 일곱 번째 환상(5:5-11)-시날 땅에 옮겨지는 바구니 속의 여인

 

   무엇을 보고 있느냐는 천사의 질문에 스가랴는 일곱 번째 환상 중에 공중에 떠다니는 측량 바구니, 곧 에바95)를 보았다고 답한다(5:6). 그 에바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의죄의 분량을 상징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부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착취하고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의 악을 상징하였다고 본다. 에바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배성은 저울을 속이고 되와 같은 도량형을 속임으로써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속임수의 도구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어서 스가랴 선지자는 그 덮개 안에 한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5:7), 이는 천사가 언급하였듯이 에바 속에 앉아 있는 여인은 ‘악’을 상징하였다(5:8). 여인을 악으로 표현하는 이유에 대하여는 히브리어로 ‘악’(ע������ 라아) 이라고 하는 용어가 여성형이기 때문에 악을 의인화하였다는 견해(K. L. Baker, J. Baldwin)와 ‘악’이 우상숭배를 뜻하는 것으로 ‘행음’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여인’으로 묘사하였다고 주장하는 견해(H. G. Mitchell), 그리고 구약에서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음란한 여인으로 취급했던 것처럼 악한 이스라엘을 뜻한다는 견해(Lange)가 있다. 위의 세 가지 모두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고 있다. 이 악은 하와가 유혹을 받아 범한 그 악과 동일한 악이다. 즉, 물질에 마음이 빼앗겨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악을 범한 것이다. 또한 ‘악’을 상징하는 ‘여인’을 에바 속에 던져 넣어 납으로 된 뚜껑으로 덮었다는 것은 악을 감금시켜 놓았음을 의미한다.

 

  9절에서 ‘학의 날개와 같은 날개’를 가진 정체불명의 두 여인이 나와서 에바를 바빌론, 즉 시날 땅으로 옮겨갔다. 두 여인은 하나님께서 악을 제거하시는 모습을 묘사한 점으로 보아 에바를 옮기는 ‘두 여인’은 ‘하나님의 사자’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두 여인에게서 볼 수 있는 ‘학의 날개와 같은 날개’는 단순히 악을 상징하는 여인이 담긴 에바를 옮길 수 있는 능력이 두 여인에게 있었음을 보여 준다. 두  인이 에바를 옮긴 장소는 바빌론의 옛 이름이기도 한 시날 땅이었다. 앗수르인은 이 땅을 ‘수메르Sumer)라고 불렀다. 이 땅은 니므롯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인간의 왕국, 즉 바벨론탑을 쌓았던 곳이다(창 10:10-11). 또한 이스라엘이 유배 갔던 곳이기도 하며, 우상숭배와 죄악 그리고 반역의 땅에 대한 대명사였다(계 17:3-5). 귀신과 영들이 거하는 처소이기도 하였다(계 18:2). 그래서 70인역은 ‘시날 땅으로’를 ‘바빌론 땅으로’(to the contry of Babylonia)라고 번역하였다. 즉, 에바를 옮겨간다고 하는 것은 악이 제거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곳과 분리되어 이스라엘에서 악을 제거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들이 거할 ‘집’과 ‘제 처소’는 에바가 우상으로서 산당이나 신전에 세워질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K. L. Baker). 바빌론의 우상들은 ‘무력함’의 상징으로, 이는 이사야의 풍자에 자주 나타나기도 하였다(사 44:9-30; 46:1-2). 즉, 스가랴는 이스라엘에서 악이 제거된 거룩한 나라에 대한 환상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8) 여덟 번째 환상(6:1-8)-네 병거 환상

 

  스가랴의 마지막 환상은 네 병거 환상이다. 홍마, 흑마, 백마, 어룽진 말들이 이끄는 병거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온 땅을 두루 다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스가랴가 보는 환상 가운데 네 경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오는 것을 본다. 여기서 두 산은 하나님께로 통하는 ‘하늘의 문들’(doors of heaven)을 가리킨다.96) 두 산은 높은 산이었다. 여기서 놋산은 놋으로 만들어진 산이라기보다는 새벽 여명에 반사되어 산의 색깔이 놋빛을 띤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 번째 환상에서는 시각이 어두운 계곡의 그늘 속 화석류나무가 강조된 한밤중인 반면에(슥 1:8) 마지막 환상은 여명이 밝아오는 놋산을 강조함으로써 그 시각이 새벽녘을 알 수 있다.97)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두움의 역사에서 벗어나 희망의 새 시대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98)

 

  병거란 구약성경에서 보통 ‘전쟁용 병거’를 말한다. 당시에 병거는 전쟁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였으며 때로는 강력한 통치력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네 병거는 각기 서로 다른 말들이 끌고 있었다. 첫째 병거는 홍마, 둘째 병거는 흑마, 셋째 병거는 백마, 넷째 병거는 어룽진 말들이 매여 있었다.

 

  스가랴는 네 병거에 네가지 서로 다른 색깔의 말들이 매여 있는 것을 보고 해석 천사에게 이것들의 의미에 대하여 질문한다(4절). 하나님의 해석 천사는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5절)고 그 의미를 풀어 주고 있다. 여기서 바람은 히브리어로 ‘루아흐’다. 히브리어 ‘루아흐’는 열다섯 종류의 의미로 세분된다99). 크게 자연적 현상으로서의 ‘바람’(wind), 사람 안에 내주하는 ‘숨/호흡’(breath), ‘하나님의 영’(spirit)의 세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따라서 ‘루아흐’의 의미는 ‘네 영’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 네 바람은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하나님의 천상 회의에서 온 세상을 향하여 가도록 지시 받았다(시 104:4 참고 렘 49:36; 7:2). 그들의 임무는 첫 번째 환상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 땅을 정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낸 자들 가운데 북쪽으로 나간 자들의 보고만 기록되어 있는것(8절)으로 보아, 스가랴가 본 네 병거 환상의 주된 관심은 북쪽의 일이다. 아마도 바벨론 지역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한 곳이었기 때문에 북쪽 지역이 주된 관심으로 부각 되었을 것이다.

 

  북쪽으로 나간 자들의 임무 수행에 대하여 “북쪽으로 나간 자들이 북쪽에서 내 영을 쉬게 하였느니라”(8하절)는 평가가 내려진다. ‘내 영’은 히브리어로 ‘루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보면 ‘나의 영’ 즉 ‘하나님의 영’을 말한다. 또한 ‘쉬게 하였느니라’는 히브리오로는 ‘머문다’(to settle down on)를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이 북쪽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북쪽은 바벨론을 가리킨다. 사실 바벨론에 머물러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그곳에 어렵게 정착하여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었고(참고 렘 29:1-7), 그동안 삭막해진 고국에서 맞이할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워서 본국으로의 귀환에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병거는 바벨론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노를 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지역에 유배된 이스라엘 사람들을 귀향시키거나 이방인들이 이스라엘과 결합할 수 있도록 그들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북방에 여호와의 영을 내리는 것이었다(참고 슥 2:6-13; 8:7-8, 20절 이하).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진노’가 아니라 ‘한님의 창조적인 영향력’(겔 37:1-14)을 뜻한다.100)

 

   스가랴는 최근 바벨론에서 귀환한 세 사람, 즉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를 만나서 그들에게서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고 그것을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다(11-12절). 이것은, 선지자 스가랴를 시켜 상징적 행동을 취하도록 하여, 메시아 예언을  대신케 한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자들 중 위에 지명된 세 사람이(14절에는 스바냐의 아들 헨까지 4명) 성전 건축을 위하여 바벧론에 남아 있는 동포 들에게서 금품을 모집해 온 듯하다. 선지자는, 이제 그들을 찾아가서 그 금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도록 명령을 받았다.

 

  스가랴에게 금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도록 명령하는 이유는. 그들은, 귀환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높은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예루살렘 재건 약속을 불신앙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귀정시켜 신앙으로 많은 유대인들을 바로 인도하도록 하시려고, 그들에게 스가랴를 보내어 이 일을 하게 하셨다(Calvin).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의 이와 같은 상징적 행위로써 여호수아의 대제사장 직분 실행(성전 재건)의 확실성을, 그들에게 보여주시어 그들의 신앙을 강화시키신다. "헬대"는 주님의 세계라는 뜻이고, "도비야"는 나의 좋은 것이 주님이라는 뜻이며, "여다야"는 하나님이 아신다는 뜻, "요시야"는 하나님이 지지하신다는 뜻이다. 이 이름 뜻들이 여기 스가랴를 통한 행동 계시에 협조하는 의의를 가지기도 한다. 곧,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통하여 성전 재건하는 것을 이 이름들의 지시함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지지에 의하여 이룬다는 것이다

 


 

  여호수아에게서 예표된 사람은, "순"(가지, Branch) 곧, 메시아라는  의미에서(3:8 해석 참조), 선지자로 예언케 하신다. 사 11:1 참조. “자기 곳에서”라는 것은 “자기의  아래로부터”라고 직역되나 실상 자기의 고향(메시야가 나시기로 약속된 곳이니 베들레헴)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겸하여, 아래로부터 (미천한 데서부터) 자라남을 암시하기도 한다(Keil and Delitzsch).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므로 교회를 세우실 것을 예언한다.

 

  ‘순’에 대한 예언과 ‘순’의 임무(6:9-15) ‘순’은 현재의 성전에서 미래의 성전으로 옮기고 그것을 지을 자를 가리킨다. 12절의 ‘순’은 메시야의 예표인 스룹바벨이다. 성령의 사역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의 일을 역동적으로 진행시키신다. 또한 성령의 사역은 다양성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동시에 사용하신다. 또한 성령의 사역은 메시야의 오심을 보여주신다.

 

  ‘순’의 임무 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12), 왕위에 앉아서 다스리고(정치 지도자) 제사장으로 위에 있을 것(종교 지도자)이며(13절)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데 돕는다(15)

 


 


 

5. 말씀으로 임하시는 하나님(7장-8장)

 


 

  포로 해방 이후 스가랴와 학개(주전 520년)는 동시대의 선지자로서 신앙 쇄신을 위해 성전의 재건과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세워 질 것을  같이 외친다. 그러나 스가랴는 선민의 사회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며, 동시에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에 참여 할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한다. 이제까지는 환상으로 보여주셨다면 7장부터는 말씀으로 들려주신다.

 


 

1) 헛된 의식 배격하라(7:1-7)

 

  귀환공동체의 대표들은 518년 스가랴를 찾아와서 금식에 대한 질문을 한다. 3절에서 매년 오월에 하는 금식을 계속해야 합니까? 그들은 금식을 나타내는 직접적인 단어인 ‘쫌’(צוֹם fasting)을 쓰지 않고, “울며 재계하다”(ה������������바카 to weep, ר������������ 나자르 separate oneself, to fast)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들은 금식은 애곡하고 재계하며 회개하는 것을 의미하였다(삼하 12:16; 레 16장), 레위기 16장에서는 금식을 가리키는 말로 ‘아나’(ה������������ afflict one's soul, 스스로 괴롭게 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레 16:29, 31).

 

  하나님은 직접적인 대답을 주시는 대신에 질문 자체를 바꾸어 문제의 본질을 가르치신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는 그 금식이 누구를 위해서냐? 즉 금식의 시기가 문제가 아니라 금식의 정신(동기와 목적)이라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헌신의 삶 자체가 중요 하다고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금식은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신앙생활을 위해 필요하고,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필요하며, 영적 능력을 키우는 데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원칙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다른 행동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근본적인 목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 윤리적 삶의 실천이 전제되는 행동양식이다(사 58:1-9; 욜 2:12-13; 렘 14:12; 눅 18:9-14; 마 25:44-46; 요일 4:19-21). 이것이 스가랴 이전 예언의 본질이기도 한 것이며 이에 청종하는 복된 삶의 조건임을 선포한다(7절)

 


 

2) 과거 불순종을 기억하라(7:8-14)

 

  스가랴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7:8-10)은 스가랴 이전 예언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다. 사회 윤리의 실천 명령이다. 그리고 12절하-14절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역사를 선포한다.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금식의 온전한 자세와 선민의 바른 삶의 모습을 포괄적으로 선포한다. 또한 이 사회 윤리의 실천 명령은 “만군의 하나님”, 즉 “절대적 능력의 하나님”의 명령이다(7:9, 참고 슥 :1, 9).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고 하나님은 명령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형제들과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들을 보호하고 도우라는 이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고, 징벌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선민에게 온전한 삶의 변화를 동반한 회개를 원하신 것이다. 이것이 예언적 명령의 본질적 요소다(호 4:1-10; 8:11-14; 암 2:6-7; 5:10-15; 24; 6:4-8; 8:4; 미 6:8; 사 1:17; 65:1-7; 렘 9:1-9; 17:10-11; 22:13-17).

 

  7장 10절에서 사회적 죄악의 근원인 마음의 문제를 다룬다. 행동은 마음의 외적 표현임이 전제되어 있고 마음을 온전히 다스리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다(미 2:1-3; 잠 4:23; 렘 17:9-10;막 12:28-31; 마 15:18; 눅 6:43-45). 따라서 사회적 문제 해결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사탄에 대한 해방에서부터 시작 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명령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다(슥 1:3-4). 인류를 사탄의 지배에서 구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셨고, 영광의 성령으로 오셔서 성도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다(욜 2:28-29; 렘 31:33; 겔 36:24-27). 7장 11절의 “등으로 돌리며”라는 표현은 등을 돌려 거역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미지는 느헤미야 9:29에 나오는 표현으로 목에 멍에를 쓰지 않으려고 완강히 버티는 소의 이미지에서 온 표현이다(호 4:16).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는 이사야 6:10의 내용과 같은 표현으로서 그들의 돌처럼 굳은 강퍅한 심령을 나타낸다.

 

  애굽의 바로의 마음도 이와 같았다(출 7:14; 9:7, 34; 10:1; 14:17-18).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첫 반응은 완강히 버티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사탄의 강력한 사주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회개하지 않는 하나님의 대적자는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하여 패망을 자초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적들이 강퍅해지고 더욱 완강히 반항하는 것을 허용하시는 데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 있다. 그것은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많은 이적을 행하시고 이 이적을 통하여(징벌과 구원의 역사) 하나님이 주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사 5:16; 겔 7:25-27; 37:13-14; 출 7:3-5; 10:1-2; 14:15-18; 사 6:8-13).

 

  7:12-14절에서 이러한 거역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특별히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남을 증거 한다. 첫 번째,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포로로 끌려가게 하실 것이다. 세 번째로 아름다운 땅을 폐허로 만들 것이다

 


 

3) 예루살렘 위로와 회복에 대한 약속(8:1-17)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백성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말씀을 선포한다[8:7, 8, 9, 13, 15, 특히 “두려워 말지니라”8:9, 13, 15절)]. 하나님은 인간의 냐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도 역시 드러났던 나약함이었다(출 6:9). 출애굽기 13:17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는 가장 짧은 길 대신에 막강한 불레셋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광야로 향하게 하신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만나 불평할 때, 모세는 “두려워 말라, 하나님의 역사를 보기만 하라, 하나님이 싸우시니 진정하라”고 말한다(출 14:13). 담대한 믿음으로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미래를 향해 전진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절대적 권능을 가지시고 자유하신 성령이시다. 그분이 그의 백성과 함께하실 것과 스스로 계신 절대주이시며 살아서 역사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다.(출 3:12-17). 여호수아에게도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이니 강하고 담대하며 주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명하신다(수 1:9). 이사야도 제2의 출애굽인 바벨론에서의 귀환을 예언하며 바벨론 포로들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고 선포 한다(사 41:10).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마지막 대사명을 주시면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요 14:18; 16:7-8)라고 선포하셨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절대적 주권자이시며 전쟁의 주관자요, 권능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8:1). 그리고 2절에서는 그의 선민들을 강렬하게 사랑하시며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선포한다. 질투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카나’(א������������)의 어원적 의미는 격렬한 감정으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말한다(become red or black). 그의 사랑하는 백성이 언약을 파기하고 하나님을 떠날 때 하나님의 격렬한 사랑은 이스라엘을 징벌하는 역사로 나타난다(신 29:20-28; 수 24:19; 겔 5:13; 16:38, 42; 23:25). 여기에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강한 사랑으로 표출된다(사 54:7-8; 55:6-7). 하나님은 열정의 하나님이시며 열정으로 충성하기를 원하신다(신 4:23-24; 6:4-5; 11:13-21; 26:16-19; 30:2 계 3:16-16).

 

  “진리의 성읍”과 “성산”(8:3)이라는 새 이름을 얻을 것이라는 것은 예루살렘이 신실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새로운 도성, 정화된 도성, 거룩하게 구별된 도성이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선포하는 것이다. 여기에 “진리”라고 번역되어 있는 히브리어 ‘에메트’(ת������������)는 견고하여 흔들림 없는 믿음(to be firm, dependable, truthful)을 의미한다. 충성스러운 믿음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성산에서의 ‘성’(שׁ������������ 코데쉬 거룩)이라는 말은 본래 ‘구별하다’(שׁ������������ 카다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구별된 도성이 될 것임이 선포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도성에 임재하시어 역사하실 것을 선포하신다.

 

  예루살렘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소년이나 노인이 함께 상생할 수 있는 복된 세상이 될 것임을 약속하신다(8:4-5절).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6절) “기이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이팔레’(232쪽 be too difficult, 너무 어렵다)인데 “여호와께서 불가능한 일이 있겠느냐”(창 18:14)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온 세상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도성에 살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그들과 새로운 언약 관계를 맺으실 것이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성실과 공의로 그들을 다스리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들의 축복은 영원히 보장된 것이다. 7절에서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낸다”는 표현은 히브리어로는 ‘히넨니 모쉬아’(������י������מוֹ י������������������)인데, 이 표현은 ‘보라’(י������������������ 히넨니)와 ‘구원한다’(������מוֹשׁי 모쉬아 히필형 분사)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 표현은 특히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확실성과 임박성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하시어 그들로 세상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것이다(창 12:3; 사 49:6; 고전 15:58; 살전 3:5; 렘31:16; 대하 15:7).

 

 

  하나님의 백성이 품삯을 받을 수 없고, 적 때문에 안전한 생활도 없었다(8:10).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풍요를 누릴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8:11-12). 그래서 전에 이스라엘은 저주받는 사람의 표본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어 복 받는 사람의 표본이 되게 하실 것임을 약속하신다(8:13). 두려워 말고 힘을 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진노하셨을 때,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시기로 결정하시고 이를 돌이키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제 다시 유대와 예루살렘 백성에게 복을 주기로 작정하셨음을 선포하신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두려워 말고 힘을 내라고 말씀하신다(8:14-15). 하나님의 징벌이 확실하였듯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도 확실하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다(사 40:8)

 

  8:15절의 “은혜를 베풀기도 뜻하였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레헤이팁’[יב������י������������ to do good: ב������������, 야타브(going well)의 히필형 부정사]인데, 이 말은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되어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수 24:20; 사 1:17; 암 5:6, 14; 습 1:12; 겔 36:11). 이것은 하나님이 언약의 수여자임을 나타내는 말로서, 이스라엘 편에서는 하나님이 하사하신 언약의 수혜자로서 이 언약에 충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선포된다.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이니라”(8:16-17).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미워하신다고 선포하신다. 이것이 주전 8-7세기의 예언 명령이었다. 이것은 모세 율법의 정신이며(출 20:1-17; 23:1-13; 레 19장; 신 10:18; 14:29; 16:11, 14, 18-22; 24:17-20).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마 5:13-16; 25:40-46; 막 9:50).

 

  이 명령은 8:16절 서두의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는 표현과, 말미의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8:17)로 강조 된다. 이 예언 명령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가시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다(요일 4:20-21; 마 7:21-23; 25:45-46). 이 8장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8:17절에서는 스가랴 7:10과 마찬가지로, 특히 마음의 문제를 다루면서 우리의 모든 죄 된 행위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강조한다(출 20:17; 사 1:19;렘 31:33; 겔 36:26-27; 시 51:17; 84:1-2; 잠 4:23; 16:32; 마 5:3; 12:34; 15:11, 17; 눅 6:43-45; 고전 13:6; 엡 4:30-32).

 


 

4) 유다의 회복된 즐거움(8:18-23)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되면, 고통스러운 금식이 기쁨이 될 것임을 선포한다. 이제 더 이상 패배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기념하는 즐거운 절기가 될 것임을 선포한다. 이 주님의 은혜의 때 성도들의 금식은 감사와 기쁨과 승리와 축복의 금식이 될 것이다(마 6:16-18).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이 이 세상에 재림하심으로 성도들의 누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금식조차도 필요 없는 평강의 때가 될 것이다(계 21:1-4; 히 12:10-11). 그러나 이 영원한 은혜의 복을 약속받은 선민들에게는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의 방식이 요구된다. 그것은 ‘성실’(에메트)을 사랑하고 ‘평화’(샬롬)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언적 명령이요, 영원한 축복을 풍족히 누리는 진리의 길이다(슥 1:6). 성실은 하나님에 대한 충실을 의미하며, 평화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 사이의 온전한 관계를 의미한다. 이 예언적 명령은 8:16-17의 내용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스가랴 선지자는 세상 만민이 주께 기도하고 은혜를 얻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일 것임을 선포한다(슥 2:10-11; 6:15: 8:20-23; 9:7; 13:8-9; 14:16-17).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한 이방 민족들을 징벌 하신다(슥 1:15, 18-21; 2:9; 사 13:17-19; 14:24-27; 21:2; 8-9; 렘 50:29; 51:24-25). 그러나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그들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사 2:1-4: 19:23-25; 49:22-23; 60:1-3; 미 4:1-5; 렘 4:1-2). 이것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이유다9창 12:1-3; 시 47:9; 갈 3:8). 23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베푸신 축복과 은혜에 감동하여 그들도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고 고백할 것임을 선포한다. 하나님은 그의 선민에게 복을 주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 그러나 여기에 의무도 있다. 선민은 그들이 받은 은혜를 간증하며 진리를 증거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에 동참하여야 하는 것이다(사 49:6; 41:8-10). 이를 위해 능력을 주신다(행 1:8; 요 14:12-14; 막 16:15-18; 딤전 1:12; 엡 6:10-18). 메시아를 보내 주셔서 사탄의 권세도 물리치셨다(눅10:17-20; 요 16:33; 골 2:13-15). 이제 인내하며 기도하는 것이 성도의 도리인 것이다(약 1:12; 5:7-11). 끝까지 견디는 성도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진다. 23절에서, “말이 다른 이방 사람 열 명이 유다 사람”에게 와서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을 고백할 때가 올 것임을 선포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