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

창세기22:11~24,여호와의 사자

호리홀리 2015. 2. 4. 13:43

* 여호와의 사자

 

족장시대 계시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형태는 ‘여호와의 사자’, 또는 ‘하나님의 사자’를 통한 계시이다. 창세기 16:7, 22:11,15, 24:7,40, 31:11, 48:16(창 32:24ff과 관련하여 호세아 12:4 또한 참조하라) 등에 그 언급이 있다.

 

이 모든 경우에 특수성은, 한편으로는 사자가 스스로 여호와와는 구별(distinguish)된 것으로 말하여 여호와를 3인칭으로 언급하나, 또 한편으로는 같은 문맥에서 하나님을 1인칭을 사용해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현상에 대해서 여러 설명들이 주어졌다. 설명하자면, 두 비판적인 견해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말락)이란 말을 추상명사인 사명(embassy or mission)으로 번역하여 여호와께서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보내셨다(Jehovah despatched from Himself after an impersonal fashion) 라고 하자고 제의한다. 이런 개념은 시내(Sinai)에 거하시는 여호와께서는 인격적으로 그곳을 떠날 수 없으시고, 다만 그의 백성이 가나안으로 가는 여행로와 그 거룩한 땅에서 사는 동안 동행하기를 원하시어, 그가 인격적인 임재(personal presence)로서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일종의 힘(influence)을 보내실 수 있다는 고대적인 신앙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그 개념은 적어도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랜 것이다.

 

둘째 견해로서는, 사자의 형성을 하나님을 높이는 후기 유대사상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원래의 옛 이야기들이 하나님께 연관시키고 있듯이, 지상의 피조물과 하나님께서 그렇게 깊고 밀접하게 연관되고,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맞지 않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들은 이런 반이신론적인 관점에서 다시 쓰여졌는데, 이런 종류의 모든 특징과 행동들은 천사계층의 중재에 의해 수행되고 나타나는 것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자는 아주 후기의 기원을 가지고 있는데, 여호와에 대한 이신론적인 사고의 형성만큼이나 늦은 것이다.

 

이 두 이론 모두 같은 근거에서 반박될 수 있다. 그것은, 만일 이런 현상이 시내로부터의 부동성을 견지하기 위해서나, 피조물과의 교섭의 부적절성에 의한 것이었다면, 작가나 편수자들은 그 반대현상이 나타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틀리지 않게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인즉, 사자에 의한 고상한 형태의 계시와 함께 이전에 사라졌어야 할 신현들이 계속해서 기사들 가운데 발견되고 있다. 그런 인물의 형성을 한 교정의 성격을 지닌 것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그 외에도 둘째 이론에서는 ‘여호와의 그 사자’(the Angel of Jehovah) 대신에 ‘여호와의 사자들’(an Angel of Jehovah)이란 말을 기대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고유명사 앞에서 선행하는 명사는 한정적이기 마련이라는, 환언하면 비록 그런 의도를 가졌다 할지라도, ‘여호와의 사자’는 부정관사를 붙어 쓸 수 없다는 반론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다. 히브리말에는 ‘여호와의 사자(들)’이란 관용어귀가 있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사자(Angel)와 여호와 사이에 전치사  (라메드)를 삽입하는 것이다 - 여호와에의 사자(an Angel to Jehovah). 그러나 만일 문제가 하나님과의 피조물의 거리를 유지하는데 있었다면 그 때에는 그 사자가 여호와처럼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소기의 목적을 흐리게 하는 것이 되겠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두 견해 중에서 하나는 하나님과 사자의 차이를, 또 다른 하나는 그 동일성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이냐 하는 데에 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해석은 하나 뿐이다. 즉, 이 두 표상 뒤에는 신성의 참 계시가 있다는 것이다(Behind the twofold representation there lies a real manifoldness in the inner life of the Deity). 만일 이 보내신 사자가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Himself partaker of Godhead)이라면,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도, 동시에 하나님으로서도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며, 그 두 경우 모두가 참인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삼위일체라 부르는 것 중에 많은 것이 비실재적이며 환상적인 것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것으로부터 이런 계시방식의 정확한 목적이 삼위일체의 진리를 계시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실재적인 것은 그것 없이 일어날 수 없으나, 여기서는 일단 다른 진리를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랬다가 오랜 후에 이 간접적인 방법으로 이 사자로서의 신현(Angel theophanies)이 삼위일체를 계실하게 될 수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처음 나타났을 때는 이를 알 수 없음은, 그 당시의 최고의 목적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식에 하나님의 단일성을 확고히 해주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일찍 삼위신을 계시하는 것은 다신론에의 유혹이 될 가능성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오랫 동안 메시야의 신성과 성령의 인격성은 다소간 뒷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즉 삼위일체의 계시가 아니었다면, 이 새로운 계시양식의 도입 목적은 무엇인가? 그 목적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고, 또 하나는 아주 새로운 것이다. 전자로서는 ‘성례전적인 것’(the sacramental)을, 후자로서는 ‘영적인 목적’(the spiritualizing intent)을 뜻한다. ‘성례전적인 목적’이란, 하나님께서 가장 그의 의도가 잘 드러나는 방법으로, 그들과 함께 하심을 확신케 하기 위해 당신의 백성에게 가까이 하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이 성례전적인 의도는 처음부터의 모든 신현에도 있었던 것이다. 즉, 이런 의도의 신현이 여호와의 사자의 출현을 통해서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출현이 없었다면 또 하나의 원칙, 즉 신성의 영적 성질의 원칙을 모호하게 하는 옛 방식 속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니시고, 먹고 마실 때, 육체적인 방법(bodily fashion)으로 말씀하시고 들으시며,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마치 하나님의 본성의 당연한 귀결인양 생각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것은 당신의 본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고, 다만 당신 편에서 스스로 성례전적으로 낮추신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육체적인 방법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하나님의 영적 성질이 그 배후에 있음 또한 필연적인 것이다. 이것이 사자가 하나님으로서 말하는 것 배후의 것을 전달하는데서 성취된다. 즉, 그 사자는 연약성과 제한을 지닌 사람을 만나시는 하나님의 오든 낮추심을 체현한 분이며, 동시에 그런 물질적인 방식으로 뵈옵거나 받을 수 없는, 그 사자가 3인칭으로 언급하는 바로 그 하나님의 또 다른 분(aspect)으로서 계시는 분이신 것이다. 하나님과 당신의 사자 사이의 이 업무분담에서 이 신현의 불가결한 핵심이 살아난다. 이 영적인 의도는 저 성례전적인 것을 돕는 것이다. 이 사자는 참 신이심에 분명한 것이, 만일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확신하게 되는 성례전적인 기능을 담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만남의 필요는 하나님의 본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 그것도 주로 죄된 본성이 이를 필요로 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성육신에서 이 기본적 뜻의 최고의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성육신은 하나님 편에서의 본래적인 필요의 결과가 아니다. 이에 반하는 것은 그것이 많은 이의 지지를 받는다 해도 범신론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구속을 필요로 하는 우리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함한 전체 성육신은 하나의 큰 구속의 성례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의 성질(인성, 인간성을 말함)을 위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영성(spirituality, 신성이라해도 좋음)을 신자들에게 말하기 위한 특별한 배려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원칙은 요한복음 1:18절에서 그 고전적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사자출현의 전체 사실이 처음부터 구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구속의 중요한 일의 수행이 그에게 부여되어야 함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언약이 체결된 직후에 드디어 그가 등장한다(창 16:7). 델리취는 이를 잘 파악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사자) 출현들의 목표와 궁극 목적은 그 시작에서 판단될 수 있다” 모세 시대에 그 언약의 수행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자에게 맡겨져 있음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특별히 이 언약과 밀접히 관련된 자들의 삶과 사역을 보호하신다. 야곱은 말하기를(창 48:15f)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라고 하였다. 또한 말라기 3:1절의 “언약의 사자”를 참고하라. 그 성질로서 뿐만 아니라 그 기능에 있어서도 여호와의 사자는 일반 천사들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그 사자는 잠시 동안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가는, 다시 나타날 때까지는 다시 형체를 갖지 않는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서 나타난다. 사자가 구약시대에는 계속해서 그런 동일한 출현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출현되는 곳에서의 형태의 다양성(variableness)과는 모순되는 생각이다. 이것은 물론 항상 하나님이신 신성의 둘째 위가 형태를 띠고 나타나신 성육신의 선취일 수 있다(요 1:14). 그러나 영원 전부터 이 위는 자신에게 적합한 육체적인 형태를 가지고 계셨다는 생각은 더 큰 오류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성과 맞지 않고, 사자를 통한 계시가 원래 의도한 바를 봉쇄하는 오해를 일으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주 제기되는 질문으로서 이 사자는 피조되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는 위(the Person)와 출현 모습을 명확히 구분함으로 충분히 대답할 수 있다. 만일 위에서 시사한대로 사자 개념이 신성 자체의 차이를 지시할 수 있다면, 즉 그 사자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예상형(또는 선취형, prefiguration)이라면, 그 계시에 나타난 위(Person)는 분명히 피조된 분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반면, 사자란 말로서, 이 위(Preson)가 취하신 표현 형태를 지시하는 것이라면, 사자는 피조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즉, 그리스도의 신적 위(Divine Person)는 피조될 수 없는 것이다. 신성과 피조성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인성에 관한 한, 예수는 피조된 것이다. 그와 사자 사이의 차이점이 있다면, 구약엔 피조된 형태가 단명하지만 성육신의 경우엔 영원하다는 것 뿐이다.

 

모세시대에 있어서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첫 언급은 출애굽기 3:2절에서, 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났을 때이다. 그와 하나님이 동일시 됨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떨기나무 불꽃 중에서 불러내셨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다음으로는 출 14:19절에서 그가 이스라엘 진 앞서 행하다가 구름기둥과 함께 뒤쪽으로 옮겼다는 기록에서 그에의 언급을 볼 수 있다. 23:20,21절에서는 그에 대한 공식적인 약속이 주어진다. 그는 이스라엘과 동행하게 될 것이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이 구절의 전체 구조는 바록 본문에 사자(an angel)라고만 되어 있어도 단지 일반적인 천사로만 생각할 수 없게 한다. 70인경의 ‘내 사자’라는 독법에서 원래 히브리말이 이 형태(접미사와 함께)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사자의 기능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포괄적인 것임을 이 구절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그에 대하여 죄를 짓는다는 말로부터 그가 하나님과 동일시 됨을 배울 수 있다. 반면 출애굽기 32:34절에서는 ‘내 사자’(my angel), 출애굽기 33:2절에서는 ‘한 사자’(one angel)란 언급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상황이 이를 요청하는 것이다. 즉, 사자를 보냄은 여호와 당신께서 백성과 함께 가실 것이란 원래의 약속의 철회로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 33:3-5).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를 보냄은 여호와 자신이 동행하심과 다르지 않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원래의 약속대로 함께 하시리라는 다른 제안은 모세의 간곡한 청원이 있고서야 나타나기 때문이다 - “내가 친히 가리니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출 33:14).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의 역사에서도 나타난다(민 22장). 여기서 그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발락의 도모를 좌절시키시는 것이다. 이는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하는 그의 일반적 사역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예이다(민 20: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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