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

창세기22장,아브라함언약의 완성

호리홀리 2015. 2. 4. 13:39

22장은 그 일 후에 하나님께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았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것’으로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곳이다. 이는 윤리적 살인행위가 종교적 경건의 극치로 보는 것으로 이것이 어떻게 조화가 가능한가? 키에르 케고르의 「Fear and trambling」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여기에는 하나의 단절이 있다. 이 단절을 신앙과 인식에까지 적용하고 있다. 유대인 랍비들도 이 문제를 고민하였다. 22장의 시험은 아브라함의 생애를 마감하는 대단원이라 할 수 있다. 성경 진술이 23, 24, 25장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죽음, 이삭과 리브가의 이야기로서 세대교체를 보여주는 것을 보면 이 시험은 아브라함의 생애의 절정 or 대단원, 아브라함의 생애를 마감하는 대단원이라 할 수 있다. 22장의 이 사건의 성격을 나타내주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הסנ(나사)   시험이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에 있어 하나의 시험이었다. 이 시험의 구체적 형태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다. 22:2의 번제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에서 번제의 의미를 정확히, 분명히 나타낸 곳은 없다. 문맥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는 구절은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22장 번제에 빛을 던져주는 말씀이 창 22:12절이다.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셨을 때 하나님이 진정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ךדיחי(예히데카) = μονογενης(모노게네스; 요한일서에서 독생자)

 

네가 사랑하는,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을 취하여 번제로 드리라. 이것은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 목숨과 같은(보다 귀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 가장 사랑하는 그것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않고 바쳐라. 이것은 철저하고도 온전한 헌신을 하나님께서는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 남겨놓은 부분이 없이 전체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바치라는 의미이다. 번제 = 전체를 몽땅 태워버림.

 

신약의 부자 청년에게 너의 가장 중요한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부자 청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재물이었다. 세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인데 삭개오는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할 줄 알았다.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나?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떤 존재였는가? ‘네가 사랑하는 아들’. 아브라함이 육정적인 애정으로 이삭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이삭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의 이삭이다. 앞으로 건설하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갈 사람이다. 육정적 애정과 집착의 대상으로서의 이삭의 포기가 아니었다. 믿음과 소망의 유일한 토대로서의 이삭이었다. 따라서 이삭의 포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전체를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전체의 삶을 바쳐서 지켜왔던 믿음과 소망에 대한 포기였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네게 이 땅을 주고 네 자손으로 큰 백성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믿는 삶이었다. 이러한 요구는 자신의 삶 전체를 바치게 했던 믿음과 소망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하나님 약속의 포기였다. 이 시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부정하고 불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믿음, 소망, 경건의 삶 전체가 결부된 그리고 신앙적 차원의 흐름 속에서 볼 때 아브라함에게 가장 크고 심각한 시험이었다.

 

이것에 대한 근거로 히 11장을 들 수 있다. 약속을 받은 자인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명령이 주어진다. 이삭을 통해 네 후손이 번성하리라. 이삭을 통해 약속이 성취되리라는(이루어져 갈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명령이었다. 다 주어놓고 다 무효화시키는 하나님이라는 의심쪽으로 갔다면 하나님의 불신실하심의 근거가 되는 명령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아브라함의 반응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를 준비하고 모리아산으로 간다. 번제의 장작을 준비하고 이삭을 죽이려 한다. 아브라함은 범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만 주어진 아브라함의 독특한 위치를 생각하여 독특하게 주어진 시험으로 본다. 이삭 대신 양을 죽임으로 하나님께서는 인신제사를 원치 않으심을 보여주신다. 오히려 인신제사 드리는 것을 원치 않으심을 반대로 보여주신다. 성경은 인신제사를 가증한 죄악으로 여긴다.

 

히브리서, 야고보서에서도 이 사건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혹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로 죽이려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오해했다고 말한다. 번제는 전체를 드리는 것임을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험의 의도는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아브라함이 몰랐다고 말한다. 번제의 진정한 의미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제사가 아니라 좀더 높은 차원의 의미였는데 그것을 아브라함이 몰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좀 단순한 생각이라고 본다. 22장을 자세히 보면 아브라함이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올라갔던 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었다고 본다. 아브라함이 어떤 믿음의 자세로 올라가서 칼을 잡고 죽이려 했을까? 이에 대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이삭과 아브라함의 대화이다.

 

השׂה ול הארי םיהלא(엘로힘 이르에 로 하세)에서 열쇠는 האר(라아)의 inpf. 이다.

 

God will see for him sheep

 

= God will take care of it

 

= 하나님께서 그 일을 처리하실 것이다. 준비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조처가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도 살리실 수 있는 능력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었다고 히브리서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일부이지 아브라함의 믿음의 전체를 표현하는 내용은 아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은 더욱 포괄적이고 넓은 것일 것이다. 이 구절은 이제까지 성경해석자를 당황케한 구절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살려내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겠지만 단순히 이 믿음만으로 아들을 죽이려고 칼을 잡았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욱 포괄적이고 넓은 내용이 아니었을까?

 

하나님께서 마련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에 그대로 응답하셔서 이삭을 죽이지 말라 하시고 수양을 마련하셨다. 성경 기자도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수양을 마련하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הארי(이르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수양을 보았다.

 

이는 הארי와 같은 맥락에서 대비시킬 수 있다.

 

아브라함이 이 장소를 여호와 이레 = 여호와께서 보신다(살피신다).

 

= 하나님이 준비하신다. 마련하셨다.

 

즉 수양을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으로 본다.

 

14절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 모리아산 = 시온산

 

여호와의 산에서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임재하셔서) 마련하시리라.

 


 

* 여호와께서 임재하셔서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산의 의미.

 

모리아산    성전이 세워질 곳

 

↓        양들이 대대로 희생되기 위해 키워지는 곳

 

↓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죽게 될 곳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려 돌아가신 사건까지 연결되고 있다.

 

16절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케 하신 양을 마련하시고 양이 대신 죽은 의미는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자기 독자도 아끼지 않고, 하나도 남김없이 전체를 바치는 아브라함의 헌신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친아들을 인간의 죄를 위해 희생케 하실 것을 예표하는 것과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독자라도 아낌없이 바친 사건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피흘려 죽게하심을 유발시켰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칼을 손에 잡음으로 이삭을 드린 것이요, 그의 믿음의 헌신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야고보서에서 아브라함의 행위에 의해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한다. 야고보서는 믿음의 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진정한 의미를 말하려는 것이다. 믿음은 죽은 믿음도 있다. 산 믿음도 있다. 믿음은 생명이므로 생명의 열매인 행위가 반드시 따른다. 아브라함의 헌신은 믿음을 증명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처럼 남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간 처럼 하나님 말에 숨기운 것도 없이, 자신의 전부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으므로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바친다는 믿음의 헌신을 보여준 것이다.

 

ינממ ךדיהי תכשׁה = spare) אל(로 하사크타 예히데카 밈메니)

 

자신의 것으로 남겨둔 것(움켜쥔 것) 없이 하나님께 전부를 바쳤다. 창세기 22장은 할례 언약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행한 경건한 헌신의 삶의 절정이요, 헌신의 믿음을 증명해 보이는 사건이다. 이 시험 후에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의 경건을 확인한 삶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살피시리라는 믿음이다. 이삭 대신 양을 마련하신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내 아들 내 기뻐하는 아들’ :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아브라함의 독자=이삭, 하나님의 독생자=예수 그리스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은 철저한 자기 헌신이요, 자기 부정의 의미라면 자신의 모든 것 전체를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바친 것이다. 이삭은 나를 위해 남겨질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바쳐야할 존재이다. 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바쳐져야 할 존재 대신 양이 바쳐졌다는 것의 의미는 이삭이 바쳐졌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진정한 상속자, 하나님 나라의 헌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삭이 하나님 나라 상속자의 완전한 실체가 아니라 완전한 상속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한다. 이삭이 아니라 완전한 상속자가 따로 있다. 기다려야 함을 말한다.

 

번제 속에 번제가 속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한 이삭이 그 속죄를 이룰 수 없었다. 이삭 대신 양을 잡게 하신 것은 이삭이 속죄에 있어서 NO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온전한 속죄를 위한 번제에 있어서는 양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YES가 된다. 즉 인신제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심과 통한다. 이삭 자신은 죄인으로 죽어야 할 자라면 양이 대신 죽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는 것이다. 후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표적인(암시적인) 사건으로 봤을 때 너무나 풍부한 의미를 갖는다.

 

믿음은 곧 헌신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공로(merit)가 아니다. 믿음은 자기 부정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자기를 부정하고 모든 가능성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의와 가능성을 부인하며 자신의 생명의 가능성을 하나님께로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은 공짜로, 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그에게 던지는 것으로 내가 그의 것이 되어 그의 것을 누리는 것이다. 믿음 자체가 헌신을 포함한다. 믿음 자체가 헌신을 내포하고 있다. 믿음의 성격이 행동으로, 헌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경건도 하나의 믿음이요, 헌신이다. 공로가 아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헌신 한 것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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