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

창세기14장,하나님나라

호리홀리 2015. 2. 4. 12:48

14장의 등장 인물은 ① 시날(메소포다미아의 바벨론 = 이라크)왕 아므라벨(לפרמא;아므라펠   Hammurabi), 보수주의 입장에서는 아브라함이 Hammurabi와 같은 시대로 추정하며 동일인물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ל(라메드;‘ㄹ’발음이 남)자가 빠져서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시날왕은 강력한 나라의 왕이다. ② 엘라살왕 아리옥 = 이 사람은 정확치가 않다. ③ 엘람왕 그돌라오멜 = 페르시아(이란 동쪽)의 큰 세력으로 추측, ④ 고임(יוג(고이)의 복수, 민족의 복수로서 고유명사인지 소국가의 연합체인지 확실하지 않다)왕 디달(헷족속 = 지금의 터어키로서 애굽과 세력을 다투던 큰 세력이다. 애굽과 형제의 조약을 맺음). 이상의 왕과 요단 서편의 5개의 소왕국(소돔왕, 고모라왕, 아드마왕, 스보임왕 등)과의 싸움이 일어난다.

 

거대한 제국들 더구나 연합제국들이 이 작은 성들을 왜 쳐들어 왔겠는가? 더구나 아브라함이 318인으로 구해온 것이 가능한가? 설화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12년 동안 속국으로 지배를 받다가 13년에 이 다섯 왕들이 배반한다. 속국이 배반하자 연합하여 쳐들어 온 것이다. 성경을 볼 때 아마 다섯 왕만 배반한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전 지역에 해당하는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이 연합하여 함께 배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반란의 범위가 상당히 컸기 때문에 제국이 연합하여 침략했다는 것이 가능하다.

 

14:13에서 아브라함이 단, 호바까지 가서 롯과 재물을 찾아온다. 침공한 열강 대제국들이 아브라함의 318인에게 패퇴한다. 열강에 대한 아브라함의 승리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집안은 너로 인하여 큰 자손을 이루겠다는 약속의 집안이다. 그러므로 당시 아브라함의 집안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미래 역사의 전개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⑴ 아브라함의 왕국에 대한 태도와 행위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태도와 같다. 아브라함에 대한 대적은 하나님에 대한 대적이다. 아브라함에 대항하는 나라는 다 심판과 멸망으로 끝난다.

 

⑵ 하나님이 이미 창 12:1-3에 약속하신 나라가 이루어지기 시작함을 나타내며,

 

⑶ 하나님의 나라가 매우 강성한 것을 표현해 준다. 즉 세상 세력이 그 앞에서 전혀 무력함을 보여주신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아무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창세로부터 시작된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아야 한다. 인류의 유일한 소망인 하나님의 나라의 약속을 지닌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도착했고 하나님은 가나안이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땅이라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이 땅이 하나님을 섬기는 땅이 될 것을 체험하게 된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결별하는 것은 심각한 의미를 가지며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이 땅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어질 것라는 의미를 갖는다.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이제는 자연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의 성취가 그의 삶 속에서 서서히 이미 진행된 상태였기 때문에 항시 아브라함과 그 가족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려 318명을 데리고 가서 4대 강대국 연합국을 물리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강할 것과 어떤 다른 나라도 하나님 나라를 대적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즉 창 12:1-3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이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하리라’(םשׁ לודג; 가돌 샴, 4대 강대국이 아브라함에게 무릎을 꿇는다).  * Hammurabi법전 Second colum 6절에 함무라비가 주변의 모든 세력을 무찌르므로 바벨론의 이름을 존귀케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가간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한다는 의미가 나라와 나라의 싸움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17절에 아브라함을 맞이하는 사람이 2명이다. 이 둘의 태도가 매우 대조적이다. 살렘왕 멜기세덱 : ①살렘(예루살렘)의 왕, ②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Priestly-King, 신정일치시대의 제사장 겸 왕인 인물, ③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히 7:3).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신비스러운 인물이다.

 


 

* 멜기세덱에 대한 견해

 

1.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는 표현은 바로 특별한 사람이다라는 견해, 그래서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이는 신비스럽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가? 아니다.

 

2. 구약의 제사장은 다 혈통을 따라 제사장이 되었다. 멜기세덱은 혈통에 따라 된 제사장이 아니다.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 아비, 어미가 없는 인물이 아니라 레위족속, 즉 레위 혈통이 아니라 다른 혈통인데도 불구하고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왕직과 제사장직을 겸한 인물(제사장적 왕)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런 분이므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한 것이다.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에게 나아온다. 아브라함에게 정치적으로 구출해준 것에 대한 감사로 영접하러 나온 것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으나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왕으로 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직분으로 아브라함에게 나왔다. 당시 제사장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축복을 선언, 전달하는 자였다. 그래서 멜기세덱은 직분에 걸맞게 아브라함에게 나아와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선언한다. 이러한 축복은 아브라함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복 받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선언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대적을 아브라함에게 붙이신 사건 즉 아브라함의 승리를 하나님 허락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았고, 이로 인해 아브라함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본 것이다. 즉 창 12:1-3의 약속의 성취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아브라함의 위치는 하나님께 복 받은자요, 만민에게 복받게 할 근원인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바친다. 승리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며 이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승리, 영광, 명예, 이 사건을 통해 그가 획득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의미로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의 제사장, 하나님의 축복의 대리자로 멜기세덱을 인정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으나 멜기세덱에게 바친 것이다.

 

21절의 소돔왕의 태도 : 전혀 멜기세덱과 상반된 태도이다. 냉냉하고 사무적이었다. 진정한 감사의 마음이 아니라 상업적인 동기로 왔다. 구출해 준 것에 대한 상대방의 공로를 최소한 답례로 최대의 이익을 보려는 상업적인 동기로 나왔다. 소돔왕의 동기가 선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물건은 가지고 사람은 돌려달라’ 아브라함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승리, 축복에 대해 감사하지 않고 냉냉한 소돔왕으로부터 아브라함은 어떤 물건도 받기를 거절한다.

 

아브라함은 왜 물건 받기를 거절하였는가? 아브라함은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대변하는 자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인간적인 것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이므로,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일깨움을 받아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자가 마치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손으로 이루어주었다고 착각할까봐서 단호히 도움을 거부하고 있다.

 

내가 너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기 원치 않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와 함께 간 사람들에 대해서는 보상해주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 나라의 입장을 분명히 밝힌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도움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와 같이 간 사람은 세상 방법에 따라 세상의 가치 만큼 보상해 주라고 한다. 소돔왕은 불쌍한 자이다. 만민 속에 찾아온 하나님의 나라를 그러한 태도로 대하는 것은 자신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축복을 차버리는 태도이다. 아브라함을 대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나뉘어진다. 예로서 멜기세덱과 소돔왕을 들 수 있다. 이 둘의 상반된 태도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구약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16장,하나님나라의 위기  (0) 2015.02.04
창세기15장,언약체결식  (0) 2015.02.04
창세기13장,언약를 믿으며  (0) 2015.02.04
창세기12장,구속사  (0) 2015.02.04
창세기의 신학   (0) 2015.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