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창세기

창세기12장,구속사

호리홀리 2015. 2. 4. 12:41

 

창세기(תישׁארב; Genesis)

 


 


 

창세기 12장은 이스라엘의 역사 즉, 교회의 역사의 시작을 다루고, 창 1-11장은 인류의 보편사이다. 12장부터의 이스라엘의 역사란 선택된 백성의 역사이다. 이를 구속사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전면에 나타나고 여타의 역사는 필요할 때마다 나타난다.

 

창 1-3장은 매우 압축되어 있어 이 부분을 다루면 성경전체를 다루게 된다. 그러므로 매우 방대하다. 1-3장이 이스라엘의 역사와도 연결된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아브라함부터 시작했으나 이는 셈으로 연결된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 누가복음은 아담,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 상태에수부터 시작한다. 1-3장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와 연결된다. 구속은 창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창 11장은 바벨탑 사건이다. ‘동방으로 이주하다가 시날 땅에서 한 평야를 발견했다. 그리고 거기서 정착해서 살았다’ → 12장 1절의 땅의 주제가 11장에서도 나온다. 따라서 11장, 12장의 structure가 같다.

 


 

׃םשׁ ובשׁיו רענשׁ ץראב העקב ואצמיו םדקמ םעסנב יה2

 

ינפ־לע ץופנ־ןפ םשׁ ונל־השׂענו םימשׁב ושׁארו לדגמו ריע ונל־הנבנ ׀ הבה ורמאיו4

 

                                                                   ׃ץראה־לכ

 

(11:2 와예히 베나스암 밐퀘뎀 와임체우 비크아 베에레츠 쉬네아르 와에쉐부 샴)

 

(11:4 와요메루 하바 | 니베네-라누 이르 우믹달 웨로쇼 바샤마임 웨나아세-라누 쉠 펜-나푸츠 알-페네 콜-하아레츠)

 

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ריע;이르 이 중요한 것이다. 탑(망대)은 ריע의 부속물로서 짓자는 것의 주요 대상은 ריע이다. 여기서 ריע는 도시 보다는 국가의 의미이다. 당대는 국가의 경계가 분명한 것도 아니요 한 성을 중심으로 국가를 이룩했다. 즉 11장에서도 하나의 나라 건설을 다루고 있다.

 

역사 속에서 아브라함 소명 사건을 조명해 보면, 11장 바벨탑 사건과 나라 건설이라는 유사성이 있고, 한편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나라는 축복의 나라인데 다른편 11장의 나라는 그 종국이 흩어지는 결과 즉 분열과 멸망, 저주받은 나라로 끝난다.

 

언어의 혼잡 : 의사소통의 단절은 인류사의 분열이며 특히 그 내적분열을 의미한다. 고대사회는 농경사회이므로 땅과 유리될 수 없는 때이다. 따라서 자신의 정착지를 떠나지 않는다. 역병, 기근, 전쟁 등 목숨을 내놓는 그런 사건시만 자신의 땅을 떠나는데 따라서 정착지 땅을 떠나는 것은 저주를 뜻한다.

 


 

창 12:1-3절은 아브라함의 소명사건이다(각 사건은 전체 역사와 연관되므로 문맥은 중요시된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 시각으로 아브라함을 보았으나 창 12:1-3절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지 않는다. 성경은 구속사와 발맞추어 기록되었다).

 

    창 12장의 key word는 다음과 같다.                  11장에는

 

 Land           지시할 땅(רשׁא ץראה             시날평지

 

 Nation    =    큰 민족 לודג יוג            큰 성과 대

 

 Blessing        네 이름을 창대케 함               자기 이름

 

   (name, 모든    복의 근원이 됨                  저주받음

 민족에게 축복의 매개자)     

지시할 땅(하아레츠 아쉐르),

큰 민족(고이 가돌)

 


 

이에 앞서 11장에는 바벨탑 사건이 나오는데 성과 대를 쌓는 일이 나온다. 그 이유는 자기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다. לדגמו ריע ונל־הנבנ   절; 니브네-라누 이르 우믹달)

 

이 두 가지 사건은 크게 대조되는데 둘 다 나라(왕국건설)에 관한 것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은 어떤 땅에 나라를 건설하고, 그 나라는 축복을 받고, 그 나라를 통해 만민이 복을 받는다. 11장의 사건은 자기네들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으셨다. 이것은 저주를 의미한다(땅을 떠나도록 한 것, 바벨론 포로는 하나님이 흩으신 저주의 대표적인 예). 하나는 세계 만민의 축복의 나라이고 하나는 저주의 나라이다. 왜 이런 상반된 결과를 낳는가? 여기서 서로 다른 것은 무엇인가?

 

12장에 나타난 동사는 하나님 1인칭으로 되어 있다. 왕국건설의 주체가 하나님이다(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왕국). 반면 11장의 동사는 사람들(1인칭 복수)이다(우리 이름을 내고 건설하자. 즉 사람이 주어인 인간의 왕국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이 2개의 unit가 공통점이 있으나 한편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축복과 저주). 이 근본적인 차이는 사람을 위한 왕국건설과 하나님이 세우신 왕국건설(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운)이라는 것이다.

 

인간왕국은 왜 저주로 끝나고 하나님의 왕국은 축복으로 끝나는가? 이 두 사건은 대조로 시작하여 대조로 마친다. 두 사건 모두 주제는 왕국건설이다. 그러나 아브라함(동사의 주어가 하나님,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은 축복의 왕국이고 다음은 저주의 왕국(주어가 사람, 사람의 나라)이다. 두 왕국의 건축자가 다르다. 그런데 창 12:1-3 앞에는 셈-데라의 족보가 나오고 11:1-9 앞에는 노아 후손의 족보가 나온다. 홍수 후 노아 후손의 역사는 홍수 이후의 새 인류의 역사이다. 10장에서는 홍수 이후 인류가 어떻게 세계로 흩어지는가를 나타내는데, 그 다음이 바벨탑 사건이라고 하면 홍수 이후 인류의 새로운 역사의 특성을 드러내주는 전형적인 Topical-event라 하겠다. 홍수 이후 은혜를 입은 노아 후손의 새 역사는 시날 평야에서 자기 이름들을 내기 위한 것으로 특성된다. ‘하늘에까지 닿는 탑’이 상징하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자세인데 이것은 하나님께 도전하고 반항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같은 상태를 흩어버리셨다. 저주하셨다. 족보의 기능은 ㉠ 지금 시작한 역사는 이전 역사의 근원으로 올라가고, ㉡ 그 역사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이 세우는 나라는 왜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는가? 창 6장의 문맥으로 살펴보자. 창 6:5에는 ‘ובל תבשׁחמ רצי־לפ’(콜-에체르 마쉐보트 리보) 그 마음에 생겨먹은 꼴이 원래(항상) 악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간은 그 생각의 근원이 악한 것이다. 인간은 속속들이 썩었다. 완전히 썩은 상태 즉, core(핵심)까지 완전히, 또한 평생 동안 악했다. 즉, 전적 타락, 부패하여 전혀 돌이킬 수 없었던 상태이다. 이것이 홍수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창 5장에 시작된 아담의 역사로부터 악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두 쓸어버리기로 하셨는데 노아만이 은혜를 입었다.

 

그런데 8:22에 보면 사람의 내적, 심적 부패성은 치료되지 않은 채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약속하시며, 사람이 근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이것으로 저주하지는 않겠다고 하신다. 이것은 홍수의 근본 원인인 ‘사람의 악함’이 홍수 후에도 없어지지 않은 채인 것을 아시고 잠정적인 말씀을 하신 것이다. 새 인류는 그 근본부터 심판과 멸망이 자초되도록 되어 있다. 탑의 성격은 그것이 종교적인 건축물인지 어떤지는 상관 않고도 탑의 의미가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해 보겠다는 의미이다.

 

노아의 세 아들의 새 역사가 결국 바벨탑에서 드러나듯이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려고 함으로써 근본적인 마음의 악이 처리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악의 표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흩어짐). 그러므로 인류의 보편역사는 저주와 심판의 역사이다. 근본적으로 악한 인간의 역사는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결국 망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벨탑 사건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벌이는 어떤 노력이나 왕국은 하나님의 심판밖에 불러오지 않는다. 인간이 자기를 구원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 멸망받음을 나타내 보여준다.

 

창 11:10부터는 셈-데라의 족보이다. 아브라함 역사의 근원은 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노아의 술취한 사건과 셈의 행동을 통해서 인류의 운명이 결정되어버린다(창 9장).

 

9:26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라’고 노아가 셈을 축복한다. ‘...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최초로 나타나는데 ‘셈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셈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실 것이라는 것이다. covenant fomular는 ‘나는 네 하나님 되고 너는 내 백성’인 것인데 특별한 관계를 표현할 때 쓰인다.

 

홍수 이후 인류가 새롭게 시작하지만 그 역사는 망하기로 운명지어진 역사이다.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축복의 나라를 건설하시려는 위대한 큰 경륜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겠다는 약속이 12장의 약속이다. 심판과 멸망을 자초할 인류 역사와 인간 나라 속에서, 그 배경 속에서 생명과 축복을 주시는 축복의 나라를 건설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바벨탑 사건 이후에 아브라함의 새 역사가 시작되면서 셈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는 심판과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를 전제로 하고 또 다른 줄기로 셈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심판과 저주 가운데서 한 sign으로서 셈의 역사는 은혜로 이루어진다. 셈과 함께 하신 은혜의 역사는(데라로부터) 아브라함으로부터 큰 진전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셈의 약속이 구체화되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새 왕국 건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셈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것이다. 스스로 인간의 힘으로 하는 모든 노력은 멸망으로 끝남을 보이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 왕국의 건설을 선언하신 것이다(창 12:1-3).

 

창 12장의 아브라함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한 형태가 그 이름을 창대케 하고, 만방에 알리겠다는 것, 그리고 열방들이 그를 듣고 그를 통해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왕국 건설의 약속을 주시고 있다. 성경은 역사적 흐름을 따라 기록되었으므로 메시지를 이해함에 있어서 역사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역사적 흐름을 따라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왕국건설의 약속을 곧장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시키는 것은 성경에 대한 가난함이다. 아브라함의 왕국건설의 약속은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이해의 폭을 넓혀가야면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연결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바로 아브라함을 통해 생명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아브라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건설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에 대한 성취이다. 아브라함의 축복의 한 형태가 그 이름을 창대케 하고 만방에 알리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방들이 그를 듣고 그를 통해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장

 

Abraham - David(구약에서의 하나님 왕국의 형성)

 

  David - Captivity(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한 왕국의 와해)

 

 Captivity - Jesus Crist(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왕국의 재건 → 왕국의 소망)

 

그러므로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였다(하나님 왕국의 도래). 히브리서 11장 8-9절의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친히 건설하시는 한 성, 왕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에 근거를 두고 있다. 모든 역사의 핵심은 하나님의 왕국건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건설자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다. 따라서 구약의 모든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결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다. 히 12:10절의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는 말은 창 12:1-3절의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대한 약속으로 봐야 한다.

 

참고) 폰 라드 - 성경의 중심주제는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적 역사보다도 각 시대마다 그 공동체에 있어서의 의미를 추구했기 때문에, 당시 각기 나에게 주는 의미를 따지다보면 중심 주제는 없어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역사의 일반적 흐름을 찾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개별적 역사로서 분리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전체로서 일관된 흐름의 한 가운데에서 의미를 가진다. ‘일관된 무엇’ 곧 중심주제를 골자로 하여 형성되는 사건이다. 연속적 흐름으로서의 역사의 증거는 성경에 있어서 족보기록이다. ‘족보’는 과거의 사건과 현재가 연결된 의미를 주고 그 근원을 파내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주제 아래 그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내 왕국을 세우시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를 ‘족장사’(Patriarchal History)라고 한다.

 


 

* 족장사의 구조(frame)

 

아브라함(11:27-)

 

  이    삭(25:12-)

 

 야    곱(36:1-) 이 큰 세 덩어리로 구분된다.

 

이 역사는 성경에서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 있다. 여호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으로 지칭된다. 이 3 구조는 전체로서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

 


 

* 족장사의 관심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12장) :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나라를 허락하시자 4절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갔더라’고 기록한다. 롯도 함께 간다. 함께 간 의미가 13장에 나온다. 6절 이하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고, 그 도착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온다. 세겜 땅 모레 = 가르치는 사람(종교적 점치는 자). 7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의미는 지시하신 땅이 바로 이 땅이며 이 땅을 후손에게 주겠다 하시며 이 땅에 왕국을 세우실 것을 확인하신다. 하나님 자기 나라를 세우실 땅이 바로 가나안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였다.

 

8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이 말은 창 4:26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와 같은데 이것은 예배와 같은 의미이다. 부르는 것은 예배의식에서 한다. 도움을 간구한다. 예배를 드린다의 의미이다. ‘단을 쌓고’ 대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 곳에 단을 쌓는다. 신을 예배하는 곳에 성전을 짓고 신을 예배했다는 것이 종교적 풍습이었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 자체는 옳을 수 있으나 종교적 풍습이라고 격하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사람을 만나셨다는 의미로서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전제하면서 성막이나 성전의 기능 혹은 의미를 상기시켜 준다. 그런데 8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말씀하셨으며 여기에 단을 쌓았다는 것은 다른 의미,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사 19:19 애굽에도 단을 쌓겠다 ⇒ 애굽 백성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리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라는 말씀과 관련하여 제단을 쌓은 의미를 살펴보면 이 땅은 하나님이 섬김을 받는 땅이요,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나라가 세워질 땅임을 확인하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 말씀, 계시, 교통하시며 인간의 섬김을 받으시는 곳이 바로 제단을 쌓는 곳이라는 의미라면 이 땅이 바로 하나님이 섬김을 받는 땅이요, 하나님이 다스리는 땅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실 왕국의 약속을 받은 자이다. 하나님의 왕국건설에 관련된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는 하나님 왕국의 진정의 역사이다. 창세기의 역사에서 왕국건설의 실현(예비적 성취)이 가나안 땅이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제사와 아울러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표현한다).

 

10절에 극심한 기근으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다. 애굽은 삼각주로서 나일강의 범람으로 아주 비옥한 땅이다. 하나님이 지시하지 않는데 애굽에 내려갔던 일은 죄로서 더 큰 죄를 짓게 된다고 종래 해석해 왔다. 아내를 이용하여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며 애굽 왕에게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한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시했는지 않했는지 기록이 안나왔지만 지시했을 수도 있고, 기근 때문에 내려갔을 수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성경의 모든 사건을 도덕화하는 것을 moralize한다고 한다. 선악으로 모든 사건을 구분하려 하는 것이다. 이 사건을 moralize할 수 있다. 그 근거가 있다. 그러나 기근으로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간 것은 탐욕 때문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단순하게 moralize할 수 없다. 저자가 그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저자의 기록의 목적, 그리고 저자의 관심이 아브라함이 선한가 악한가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셨다. 즉 그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약속받은 자와 사라를 보호하셨다에 point가 있다.

 

하나님이 사라를 보호하심에 주된 관심이 있었다(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룰 즉 아브라함의 후손을 낳을 사라를 보호하셨다). 즉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이루심이다. 물론 아브라함의 행위가 책망받을 만한 것이었다는 것은 바로의 책망을 통해서 볼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도덕적 차원의 문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아브라함과 함께 사라도 약속을 받은 자(bearer of promise)이다. 그들을 바로로부터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 : 약속 자체에 대해 신실하심을 보여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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