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열왕기하

열왕기하의 역사적배경

호리홀리 2015. 1. 12. 12:43

배경

 

열왕기하는 주전 9세기 북왕국 아합의 죽음부터  주전562년 까지 290년간 남,북의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다. 아람은 길르앗 라못을 국경으로 북 이스라엘과 대치하고 있었다.

아합이 살아있을 때 이스라엘은 강성했으나 아람과의 전투에서 패한 이후 이스라엘의 영향력은 급속히 위축된다.

 

왕하1:1절은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던 모압의 배신이 기록된다. 

 아람은 이스라엘을 이겼으나 오히려 엘리야에게 아람장군 나아만이 무릎끓고 항복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밖에는 온 세상에 신이 없다고 선언한다.”

북 이스라엘이 약해진 것은 그리고 망한 것은 군사력이 약해서가 아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여러번 나라를 구해낸다.

그들이 망한 것은 언약을 지키지 않아서이다.

 

왕하 8:16-10:36은 북왕국의 실패한  예후의 개혁(주전841-814)을

 11-12장은 유다 요아스의 개혁을 다룬다(835-796).

13-15장은 북이스라엘의 계속된 패배는 신명기적 저주인 것을 강조한다.

 산당을 제하지 않은 연고로 유다의 웃시아는 나병에 걸리고 북쪽은 내리막을 걷게된다.

 

왕하18:1-12.히스기야는 북이스라엘을 정복한 앗수르에 대항하기위해 블레셋을 비롯한 작은 국가들을 정복한다.

 결과 앗수르를 자극하였고  주전 701년 히스기야 14년,

 유다를 침공한 앗수르는 46개 성을 함락시키며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받고 철수한다. 

 앗수르는 18:17-36절 재차 공격 하였고 히스기야의 기도로 앗수르 185,000의 군사는 파멸한다.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아버지의 노선과 반대로 친 앗수르 정책을 써서 봉신국가로 전락한다. 

 북이스라엘의 남은 백성과 남유다의 지방에 산당을 복원시킨다.

 백성의 마음을 추스르기위한 정책이었다.

앗수르에게 짓밟힌 지방사람들의 마음을 추스르기위한 정책이었다. 

 대하33:11-13에 보면 정신교육을 받으러 앗수르에 다녀 오기도한다.

앗수르에서 유행하던 마술과 점술이 예루살렘에서도 흥왕했고 사람을 태워 신께 드리는 의식,성전안에 앗세라 목상을 비롯한 우상설치등 기상천외한 방법들이 동원된다.

 

요시아의 종교개혁은 므낫세의 잘못을 일시에 고치는 특단의 조치였다.

당시 국제정세는 앗수르에서 바벨론으로 패권이 넘어가는 시기였다. 

 요시아는 반앗수르 정책과 남북의 옛영토회복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애굽이 앗수르를 도우러 북진하는 것을 막으려 므깃도에서 벌인 전투로 39세에 죽고만다. 

요시야의 죽음으로 유다는 23년만에 망한다. (주전587년)

 


 

경고-심판-회복

 

열왕기하에는 엘리야-엘리사 그리고 선지학교에서 배출한 수많은 선지자들이 활약한다. 

특히 첫 기록선지자인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에서.

그리고 호세아도 이스라엘에서 사역한다.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남쪽엔 이사야 예레미야등 위대한 선지자들이 집중 사역했던 시대이다.

그들의 멧세지는 세부분으로 요약된다.

 

즉 경고-심판-회복이다

 

1.경고

 

우상숭배는 언약의 파기이다.

왕국의 분열은 솔로몬의 우상숭배 때문이었다. (왕상11:1-13)

 

북왕국의 죄는 “여로보암의 죄,혹은 ”길”을 경고한다.

금송아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가 이어진다.

멸망의 원인은 우상숭배였다.

 웃시야 이후 유다도 우상숭배에 빠졌다.

 

2.심판

 

요시야의 개혁은 온국민에게 깊이 퍼진 우상숭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다윗언약은 영원하지만 계속된 언약의 파기는 바벨론 포로라는 징계를 가져왔다.

 

3.회복

 

므낫세는 55년을 통치하며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므낫세는 눈물로 회개한다.

 

므낫세는 예표로 보여준다.

유다백성들의 죄 그러나 회개할 때 하나님의 헤세드는 그들을 회복시킬 것이다.

포로는 끝이 아니다.

오히려 7의배수인 70년 포로는, 땅의 안식이다.(대하36:21)

“토지가 안식년을 누렸다”

하나님나라의 역사의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