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여호수아서1

여호수아서 24장 세겜2차언약

호리홀리 2014. 12. 19. 13:15

24장: תירב םכשׁ

 


 

여호수아는 모세가 모압에서 모압언약을 체결한 것 같이 그리고 세겜언약을 체결하게 한 것처럼 마지막에 세겜언약을 완성하며 세겜언약을 지킬 것을 서약케한다.

 

  왜 ‘길갈’이 아니고 당시 수도격인 ‘실로’도 아닌가?

 

길갈의 뜻이 뭔가? 요단을 건널 때 기념 돌을 세운 곳, 기념 돌을 세워 후손들에게 기억하게 하려는 매우 귀중한 장소이다. 이는 לארשׂי의 옛 수치가 굴러갔다는 의미 있는 장소이다.

 

‘실로’는 법궤가 있는 곳으로 לארשׂי의 중심지이다. לארשׂי 백성에게는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으로 여긴다. 그런데 왜 세겜이었을까?

 


 

24:32~33을 보면 “또 לארשׂי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그들이 그를 그의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하였더라.” 애굽에서 가져온 요셉의 뼈를 묻었고 여기가 야곱이 산 땅이고 요셉의 기업이라고 한다.

 


 

창세기 50:22~25을 보자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לארשׂי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의 시신을 애굽에서 입관하였다. 장래의 종결을 의미함이 아니다. 장래는 임종에서부터 염, 입관 등 여러 단계를 거치며 결굴 땅에 묻으면서 종결이 된다. 그런데 요셉은 입관에서 멈추었다. 요셉의 장래가 종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요셉의 장래는 역사적으로 가장 긴 장래기간을 가진다.  24:32절에 와서 비로소 요셉의 장래가 마무리 된 것이다. 창세기에서 한 요셉의 유언이 이제 여호수아 시대가 지나가면서, 그리고 가나안 땅 정복이 마무리 되면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짐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이 자신과 백성에게 한 약속, 반드시 성취됨을 말한다. 세겜에서 기억하게 함은 약속인 것이다.  그러면 이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만 붙잡고 올곧게 약속을 지켜왔는가? 절대 아니었다. 엄청난 거역과 불순종과 반목이 있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의 그 고집과 불순종과 반목을 뚫으시고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 오셨음을 말하신다.

 


 

24장 전체를 보면 3절 이후부터 매절에 주어가 누구인가? “내가” “내가”.......“내가”를 반복하며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하셨음을 담고 있다. 결국 이는 인간의 불순종을 뚫어내시고 구원의 긴 역사를 하나님이 이루어 내시고 있다는 것을 확고하게 각인시키고 자 하는 여호수아의 의도가 넘친다.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사투와 걸음을 내가 완성했는가 돌아보자.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가! 우리가 세상의 마지막에 남길 말이 무엇인가 생각해 봤는가?

 

은혜로만 말 할 수 있음이 된다. 여호수아가 요셉을 향한, 조상들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세겜에 서서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이 하셨다”하는 것이다.

 


 

24:14절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자! 여기 참 우리가 그 끈질긴 인간의 속성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렇게 애타게 하나님이 조심시키고 지도자를 세워서 야단을 치고 재앙을 통해서 가슴 아픈 사랑의 방법을 쓰셨지만 여전히 가나안의 감각적인 눈에 들어오는 문화에 또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 내면에 세상에 집착하는 것 멸절시키지 못하였다. 뿌리 뽑지 못하였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항상 경고하시는 것이다.

 


 

24:15절을 보자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이 말씀이야 말로  여호수아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선택을 말한다. “택하라! 우상과 하나님 중에서..” 나는 인생들이 가는 길로 가겠지만 “우상을 택할 것이냐!” “하나님을 택할 것이냐!” 이것이 정말 이쪽이나 저쪽을 선택하라는 강요의 표현일까? 성경을 보면서 늘 강조하지만 문자적의미를 넘어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이 갈사람 가고 남을 사람 남으라는 선택을 강요함일까? 선택을 강요하고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다. 역 발상으로 강요하는 것은 너희에게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우리 아버지이시다 하는 표현이다. 선택권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너희를 인도하신 여호와 우리 아버지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음을 권면하는 것이다. 나는 인생들이 가는 길로 가지만 너희는 제발 여호와 하나님만 믿어라 하는 여호수아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24:16-18을 보자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여호수아의 설교에 대한 백성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다. 백성의 반응이 간절하고 긍정적이며 너무 귀하다.

 


 

그런데 24:19절을 보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참으로 이상한 반응이고 이상한 문구이다. 앞뒤 연결이 안 되는 표현이다.

 

나는 인생들이 가는 길로 간다. 그러나 정말 호적을 파서 나가 네 마음대로 살래?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며 아버지 집에 살래? 하고 묻는 과격한 질문 앞에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살겠다는 고백을 듣고도 그 대답에 맞지 않는 질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지금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하나님만 택하라고 하는 말을 역설적이고 반어법적 방법으로 권했고, 이에 따라 백성들이 하나님만 믿고 따르겠다고 고백을 했다. 그런데 왜 그러는가?

 

우리가 부모 입장에서 자녀들을 보면서 “내가 한두 번 속냐!” 하는 투이다. “너 한번만 더 그러면 알지!”하는 부모 앞에 대개의 자녀들이 “다시는 안 그럴께요.” 한다. 그러면 대개의 부모가 이 말을 마음에 담는가? 언제가 또 그럴 것을 안다. 24:19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다. 이 질투라는 용어의 원 뿌리, 즉 전제하는 의미는 사랑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질투하신다는 말, 마음에 감이 오는가? 자기 여자의 어긋남에 질투가 없다면 이는 사랑이 없다는 증거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질투하신다고 한 것도 לארשׂי 백성들이 마땅히 이 가나안 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의지해야 함을 말한다.

 

사랑의 속성은 전부 아니면 전무이다. 한 청년이 한 자매를 90% 사랑하고 다른 자매를 10% 사랑한다면 이 사랑이 성립이 되는가? 90% 사랑받는 자매가 10% 다른 자매에게 향한 사랑 때문에 불편해 하고 불평할 때 이 청년이 "왜 그래? 뭐가 문제야? 네가 90%나 사랑 받잖아!” 한다면 이게 가능한 사건인가? 아니다 하나님도 하나님만 섬기라, 하나님만 사랑하라 하시는 것이다. 우리 삶의 방식과 개념의 전부를 소유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표현한 질투라는 개념이 도입 되었다.

 


 

24:19을 다시 읽어 보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절대 죄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강력한 표현이다.

 

이사야서에 보면 “안식일 날에 오락을 금하고...뭣도 금하고... 뭣도 금하고..”하심은 무슨 표현이라고 했는가? 이것은 문자적으로 문법적으로 무엇을 하면 되고 무엇을 하면 안 되고 하는 하지 말라는 것에 기준을 둔 율법적인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여라 하는 말씀이다. 사랑의 차원에서 받아야 하는 개념이다.

 


 

24:20-21“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 자 여기를 보면 백성이 두 번이나 걸쳐 하나님만 섬길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런데도 여호수아는 계속하여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백성은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길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줄 당기기를 계속한다.

 


 

23-28절은 여호수아가 לארשׂי 백성과 언약을 세운 내용이다.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לארשׂי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고 말했고 그들은 그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고 대답하였다.

 


 

그 날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백성과 언약을 세웠다. 그것은 그들이 말한 대로 다른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겠다는 공적 약속이었다. 그것은 לארשׂי 백성이 시내산과 모압 평지에서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출 24:4-8; 신 29:10-13)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또 여호수아는 거기에서 그들을 위해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고 그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책은 모세 5경을 가리킨다. 여호수아는 여호수아서를 그 율법책에 첨가하였다.

 


 

또 그는 큰 돌을 취하여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웠다. ‘성소 곁에’라는 말은 그 당시 회막이 세겜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성막은 성소(聖所) 곧 거룩한 곳이다.

 


 

여호수아는 모든 백성에게 말하기를,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라. 그런즉 너희로 너희 하나님을 배반치 않게 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고 하였다. 그 큰 돌은 여호수아와 백성이 맺은 언약에 대한 증거의 돌이었다.

 


 

24장에 반복되는 중심 단어는 “아바드”이다 “섬기다”라는 뜻. 명사는 “에베드”종이다. 우리는 가나안의 주인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바드”하는 “에베드דבע”이다. 이것을 확인하는 세겜언약이다. 모세가 죽기 전 모압언약을 체결 한 것 같이 여호수아는 죽기 전 세겜언약을 체결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세겜에서 시작한 언약이 이제 같은 장소인 세겜에서 성취된 것이다. 씨와 땅의 최종 언약이 성취된 것이다. 이제 언약 백성인 그들은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우상을 “아바드”하며 그들의“ 에베드”가 될 것인가. 이것이 사사기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