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여호수아서1

여호수아서 22장: 언약의 표징

호리홀리 2014. 12. 19. 13:08

22장: 언약의 표징

 


 

22:10-12,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단을 쌓았는데 볼 만한 큰 단이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지파가 가나안 땅의 맨 앞편 요단 언덕 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편에 단을 쌓았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여호수아 22장은 요단 동편으로 돌아간 세 지파 장정들이 요단강 언덕에 큰 단을 만들었고 그 일로 오해를 받아 큰 싸움이 일어날 뻔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정복과 분배를 마쳤을 때, 여호수아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半)지파 장정들에게 권면하였다. 그는 그들이 모세의 명령과 자신의 명령을 다 지키고 순종했고 여러 날 동안 하나님의 명하신 책임을 잘 지키고 있다고 인정한 후 그들에게 말했다. “크게 삼가 모세의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고 그 계명을 지키고 그를 붙들고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여 그를 섬기라”(5절). 본장 5절에 ‘친근히 하라’는 원어(다바크)는 ‘붙들라’는 뜻이고, ‘성품을 다하여’라는 원어는 ‘영혼을 다하여’라는 뜻이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들을 돌려보내었다.

 

또 그들이 얻은 많은 노획물들, 심히 많은 가축들과 은금동철과 심히 많은 의복들을 그들의 형제들과 나누라고 말하였다(8절). 그들은 여호수아의 권면을 들은 후 요단 서편의 실로에서 요단 동편 길르앗 땅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요단 동편으로 돌아가다가 가나안 땅 요단강 언덕에서 큰 단을 만들었다(10절). 그것은 볼 만한 큰 단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세 지파 사람들이 “가나안 땅의 맨 앞편 요단 언덕 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편에”(11절) 큰 단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의 행위는 덕스럽지 못했다. 그들은  다른 지파 사람들과 의논한 후 했어야 했다.

 


 

12절은 “לארשׂי 자손이 이를 듣자 곧 לארשׂי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하니라”고 기록한다. 세 지파 사람들의 행위는 다른 지파 사람들에게 오해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들은 그 세 지파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동을 했다고 오해했다. 물론 그것은 오해였고 그들의 판단은 부족했고 성급했다. 사람의 생각과 판단은 부족과 연약이 많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문제가 잘 해결되도록 하지 않으셨다면, 그들 간에는 큰 전쟁과 분열이 불가피하였다.

 


 

לארשׂי 온 회중은 우선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제사장 비느하스와, 열 지파에서 한 명씩 열 명을 조사단으로 길르앗 땅에 먼저 보냈다. 비느하스는 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 좇는 데서 떠나서 자기를 위해 단을 쌓아 여호와를 배역(背逆)하고자 하느냐고 지적하였다(16절). ‘거역한다’는 원어(마라드)는 ‘배역한다, 배반한다’는 뜻이다.

 


 

비느하스는 또 브올의 범죄를 상기시키며 말하기를, “브올의 죄악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재앙이 내렸으나 오늘날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얻지 못하였거늘 그 죄악이 우리에게 부족하여서 오늘날 너희가 돌이켜 여호와를 좇지 않고자 하느냐? 너희가 오늘날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לארשׂי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고 하였다(17-18절). 브올의 죄악은 모압 평지 싯딤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한 것을 가리킨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셔서 לארשׂי 자손을 염병으로 치셨고 그들은 24,000명이나 죽었다(민 25:1-3).

 


 

비느하스는 또 말하기를, “너희 소유지가 만일 깨끗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를 취할 것이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 외에 다른 단을 쌓음으로 여호와께 배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배역하지 말라”고 했다(19절). 한글 성경에 ‘패역하다’고 번역된 원어(마라드)도 역시 ‘배역하다, 배반하다’는 단어이다.

 


 

비느하스는 또 아간의 죄와 하나님의 징벌에 대해서도 상기시키면서, “세라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에 대하여 범죄하므로 לארשׂי 온 회중에 진노가 임하지 아니하였었느냐? 그 죄악으로 망한 자가 그 사람뿐이 아니었느니라”고 말하였다(20절). 요약하면, 그 세 지파 사람들이 요단 강가에 큰 단을 만든 것은 하나님을 배역하고 범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이런 지적을 받은 세 지파 사람들은 비느하스와 이스라엘 조사단에게 자신들이 단을 만든 것이 하나님을 떠나 배역함이거나 범죄함이 아니고 어떤 목적이 있어서 행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22~23, 그들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엘 엘로힘 예호와 ),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엘 엘로힘 예호와)께서 아시나니 לארשׂי도 장차 알리라”고 말한다. 다시 번역하면, “신들의 신이신 여호와, 신들의 신이신 여호와께서 알고 계시며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 ‘신들의 신’이라는 표현은 참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또 그들은 “이 일이 만일 여호와께 패역함이거나 범죄함이거든 주는 오늘날 우리를 구원치 마시옵소서. 우리가 단을 쌓은 것이 돌이켜 여호와를 좇지 아니하려 함이거나 혹시 그 위에 번제나 소제를 드리려 함이거나 혹시 화목제물을 드리려 함이어든 여호와는 친히 벌하시옵소서”라고 말한다.

 


 

세 지파 사람들은, 그들이 그 단을 만든 목적은 לארשׂי 자손과 그들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하여 훗날에 לארשׂי 자손들이 자신들의 자손들에게 ‘너희는 לארשׂי 하나님 여호와와 상관이 없다. 요단강이 너희와 우리 사이의 경계선이다. 너희는 우리 하나님 안에 참여하지 못한다’라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27-28절).

 


 

그들은 또 “우리가 번제나 소제나 다른 제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성막 앞에 있는 단 외에 단을 쌓음으로 여호와께 패역[배역]하고 오늘날 여호와를 좇음에서 떠나려 함은 결단코 아니니라”고 분명하게 말한다(29절). 그들은 그 단을 ‘증거’(에드)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그 단이 לארשׂי과 그들 사이에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는 뜻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동족을 배반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훗날에 이스라엘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부정될까봐 염려한 것이다. 그들이 그 단을 만든 것은, 비록 덕스럽게 행하지는 못했지만, 믿음으로 한 것이었다. 비느하스와 이스라엘 회중의 대표자들은 세 지파 사람들의 말을 듣고 좋게 여겼다(30절). 비느하스는 그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 아노라’고 말했다. 비느하스는 돌아와 לארשׂי 자손들 앞에 보고하였고, 그의 말을 들은 온 회중도 즐거워하였다(33절). 큰 시험거리가 잘 해결되었고 큰 오해가 풀렸다.

 

23장: 고별설교

 


 

여호수아서 23장과 24장은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의 내용이다. 숙연한 내용이 가득하다. 설교 내용이 23장과 24장 내용이 대등하다. 그러나 그 대상이 다르다. 23장은 지도자들에게 행한 고별설교이고, 24장은 לארשׂי 백성들에게 행한 설교이다.

 


 

23:1절 “הוהי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לארשׂי을 쉬게 하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여기 “쉬게 하신 지 오랜 후에”라고 했다. 개혁성경 이전 버전에는 “안식을 לארשׂי에게 주신 지 오랜 후에”라고 되어 있다. 여기 ‘안식’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이 더욱 좋다. 이 안식에 대하여 창세기에서 그 개념을 다시 정리하여 보자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였다고 했다. 6일 동안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고, 사람을 창조한 후에는 보시기에 심이 좋았더라고 하셨다. ‘좋았더라’ 하는 표현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말하는 미적인 개념이 아니라 완벽하다는 표현이다. 완전성과 충족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리고 7일째 안식하셨다. 그러면 8일째는 뭐하셨을까? 대개 한국 남성들에게 이 질문을 하면 다시 일하셨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쉬셨다. 8이라는 숫자는 영원한 완전수 이다. 7일째 안식하였다는 개념, 쉬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모든 피조세계를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것은 앞서 표현 했듯이 그분의 완전성과 충족성을 담고 있다. 이 두 개념이 잘 담겨져 있고 녹아져 있는 것이 안식의 개념이다. 더 이상 어떠한 것도 필요가 없는 상태, 완벽함과 충족함이 채워진 상태의 개념이 안식의 개념이다.

 


 

하나님이 7일째 쉬시고 무엇인가 더 할 것이 존재하여 다시 무엇을 더 하신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의 안식의 개념은 하나님의 속성을 잘 들어내는 날이다. 우리가 천지창조에서 갖는 안식의 개념을 정확히 갖는 것이 신앙의 정립에 있어 중요하다. 23장 1절에 왜 안식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을까?

 


 

“안식을 לארשׂי에게 주신 지 오랜 후에”라고 표현하여 안식이 주어졌음을 표현한다. 단순히 아무것도 안하고 쉬었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안식을 주신 오래 후에”라고 하는 표현은 결국 이 가나안 전면의 역사를 누가 하였다는 것인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우리가 땀 흘리고 노력해서 쟁취하는 땅이 아님을 강조한 말씀이다. 1절 말씀의 표현 속에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었다”라고 했다. 사람은 늙어 간다. 여호수아도 지나감을 말하고 있다. 3절을 보자 “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 여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하는 문구가 있다. 같은 주장을 반복하여 사용함은 강조용법이다.

 

23장 총 16절 중에 14번이나 이 구절이 반복적으로 들어가 있다.

 

여호수아가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역사 앞에 쓰임을 받았지만 자격이 된 것이 아님을 담아내고 있다. 가끔 교회에서 보면 사람 중심 현상을 본다. “이분이 은퇴하면...........어떻게!” “이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분 때문에....” 정말 그런 것인가? 아니다.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 사이에 있어, 사람이 영광을 받거나 그 사람을 너무 지나치게 기념하는 일도 사실은 옳은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칫하면 대상자 되는 그 사람에게 조차 해가 되는 일이 될 수 있다. 교회는 모든 초점이 그리스도에게로, 하나님께 맞추어져야 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여호수아서 23장 구조가 어떤가?

 


 

안식하게 하셨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하신 일이 완전하고 충족하심을 나타낸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늙어서 지나가고 있다고 했다. 다윗도 지나갔다. 여기 오늘 당신도 불사조도 아니지 않는가! 당신도 반드시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는 누구신가! 누가 싸운다고 하시는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싸우신다”라고 했다. 23장 전체가 이 이야기 이다.  이 방법이 성경에서 사용하는 반복 강조법이다.

 


 

23:14-15절을 보자 “보라 나는 오늘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은 마음과 뜻으로 아는 바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너희에게 임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모든 불길한 말씀도 너희에게 임하게 하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를 멸절하기까지 하실 것이라.”

 


 

이 본문을 읽다 보면 15절 하반절에 이해가 어려운 상반되는 표현이 나온다. 특히 “너희를 멸절하기까지 하실 것이라.” 이게 무슨 이야기 인가? 이런 예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아이들 때문에 속상할 때 “공부 안 할려면 나가서 칵 죽어라!”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저주를 위해 저주의 문구를 사용하심이 전혀 없으신 분이다. 어느 부모가 공부 안하고, 못한다고 “정말 죽어버렸으면...”하겠는가? 악을 쓰고 때리고 할지라도 정말 집을 나가 죽어주었으면 하는 부모는 세상에 없다.

 


 

여기 이 표현이 그런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걱정이 뭘까? 하나님의 걱정은 섞기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섞기는 것을 걱정하는 동시에 우리 속에 섞여 있는 것을 멸절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