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여호수아서1

여호수아서 23장 마지막 권면

호리홀리 2014. 12. 19. 13:10

23장: 고별설교

 


 

여호수아서 23장과 24장은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의 내용이다. 숙연한 내용이 가득하다. 설교 내용이 23장과 24장 내용이 대등하다. 그러나 그 대상이 다르다. 23장은 지도자들에게 행한 고별설교이고, 24장은 לארשׂי 백성들에게 행한 설교이다.

 


 

23:1절 “הוהי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לארשׂי을 쉬게 하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여기 “쉬게 하신 지 오랜 후에”라고 했다. 개혁성경 이전 버전에는 “안식을 לארשׂי에게 주신 지 오랜 후에”라고 되어 있다. 여기 ‘안식’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이 더욱 좋다. 이 안식에 대하여 창세기에서 그 개념을 다시 정리하여 보자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였다고 했다. 6일 동안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고, 사람을 창조한 후에는 보시기에 심이 좋았더라고 하셨다. ‘좋았더라’ 하는 표현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말하는 미적인 개념이 아니라 완벽하다는 표현이다. 완전성과 충족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리고 7일째 안식하셨다. 그러면 8일째는 뭐하셨을까? 대개 한국 남성들에게 이 질문을 하면 다시 일하셨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쉬셨다. 8이라는 숫자는 영원한 완전수 이다. 7일째 안식하였다는 개념, 쉬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모든 피조세계를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것은 앞서 표현 했듯이 그분의 완전성과 충족성을 담고 있다. 이 두 개념이 잘 담겨져 있고 녹아져 있는 것이 안식의 개념이다. 더 이상 어떠한 것도 필요가 없는 상태, 완벽함과 충족함이 채워진 상태의 개념이 안식의 개념이다.

 


 

하나님이 7일째 쉬시고 무엇인가 더 할 것이 존재하여 다시 무엇을 더 하신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의 안식의 개념은 하나님의 속성을 잘 들어내는 날이다. 우리가 천지창조에서 갖는 안식의 개념을 정확히 갖는 것이 신앙의 정립에 있어 중요하다. 23장 1절에 왜 안식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을까?

 


 

“안식을 לארשׂי에게 주신 지 오랜 후에”라고 표현하여 안식이 주어졌음을 표현한다. 단순히 아무것도 안하고 쉬었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안식을 주신 오래 후에”라고 하는 표현은 결국 이 가나안 전면의 역사를 누가 하였다는 것인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우리가 땀 흘리고 노력해서 쟁취하는 땅이 아님을 강조한 말씀이다. 1절 말씀의 표현 속에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었다”라고 했다. 사람은 늙어 간다. 여호수아도 지나감을 말하고 있다. 3절을 보자 “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 여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하는 문구가 있다. 같은 주장을 반복하여 사용함은 강조용법이다.

 

23장 총 16절 중에 14번이나 이 구절이 반복적으로 들어가 있다.

 

여호수아가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역사 앞에 쓰임을 받았지만 자격이 된 것이 아님을 담아내고 있다. 가끔 교회에서 보면 사람 중심 현상을 본다. “이분이 은퇴하면...........어떻게!” “이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분 때문에....” 정말 그런 것인가? 아니다.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 사이에 있어, 사람이 영광을 받거나 그 사람을 너무 지나치게 기념하는 일도 사실은 옳은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칫하면 대상자 되는 그 사람에게 조차 해가 되는 일이 될 수 있다. 교회는 모든 초점이 그리스도에게로, 하나님께 맞추어져야 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여호수아서 23장 구조가 어떤가?

 


 

안식하게 하셨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하신 일이 완전하고 충족하심을 나타낸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늙어서 지나가고 있다고 했다. 다윗도 지나갔다. 여기 오늘 당신도 불사조도 아니지 않는가! 당신도 반드시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는 누구신가! 누가 싸운다고 하시는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싸우신다”라고 했다. 23장 전체가 이 이야기 이다.  이 방법이 성경에서 사용하는 반복 강조법이다.

 


 

23:14-15절을 보자 “보라 나는 오늘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은 마음과 뜻으로 아는 바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너희에게 임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모든 불길한 말씀도 너희에게 임하게 하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를 멸절하기까지 하실 것이라.”

 


 

이 본문을 읽다 보면 15절 하반절에 이해가 어려운 상반되는 표현이 나온다. 특히 “너희를 멸절하기까지 하실 것이라.” 이게 무슨 이야기 인가? 이런 예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아이들 때문에 속상할 때 “공부 안 할려면 나가서 칵 죽어라!” 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저주를 위해 저주의 문구를 사용하심이 전혀 없으신 분이다. 어느 부모가 공부 안하고, 못한다고 “정말 죽어버렸으면...”하겠는가? 악을 쓰고 때리고 할지라도 정말 집을 나가 죽어주었으면 하는 부모는 세상에 없다.

 


 

여기 이 표현이 그런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걱정이 뭘까? 하나님의 걱정은 섞기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섞기는 것을 걱정하는 동시에 우리 속에 섞여 있는 것을 멸절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