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시편(구속사)

시37편,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복

호리홀리 2015. 12. 15. 12:52

여호와를 의뢰하라

 '행악자'에 해당하는 원어 '라아''상하게 하다', '괴롭히다', '깨뜨리다'라는 의미이고, '불의를 행하는 자'에 해당하는 원어 '아사''불쾌하게 하다', '와우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을 사람에 대해 사용할 경우, 여호와를 신뢰하고 선을 행하는 자를 '대적하는 자'들을 총칭한다(28:3 ; 119:3 ; 3:5, 13).

 

 불평하지 말며 - 여기서 '불평하다'에 해당하는 원어는 '하라'로서 '불타다', '불타오르다', '뜨거워지다' 등을 뜻한다. 이것은 분노가 그 사람을 점점 달아 오르게 하는 것을 가리킬 때 쓰인다(31:36 ; 34:7 ; 삼상 15:11 ; 삼하 19:43). 본절은 악인의 번영이나 불의를 행하는 자의 성공을 보고 계속적으로 그 분한 마음을 키우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과 그들의 소유는 머지않아 소멸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분한 마음을 갖는 일은 여호와의 공의에 대하여 의혹을 품는 것괴 상응한 일이된다(37;3). 본절과 글자까지도 동일한 내용을 잠 24:19에서 찾아볼 수 있다(A. A. Anderson, D. KIDNER).

 

 ...푸른 채소 - 일시적인 것 특히 하나님이 다시 새롭게 일으키지 않으시는 무상한것을 묘사하는 직유(直兪)로 흔히 사용되는 용어들이다(90:5 ; 103:15 : 129: 6 ; 40:6 ; 6:30 ; 1:10, 11).

 

 속히 - 문자 그대로'재빨리', '신속히'란 뜻으로 당장 시작하지는 않지만 일단 시작이 되면 신속히, 곧 처리될 어떤 일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부사이다.

 

 땅에 거하여 - 이를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쉐콘 에레츠'로 문자적인 뜻은 '땅에 거하라'늘 명령이다. 그러나 '땅에 거하는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된 특별한 축복(25:13 33:28)임을 고려할 때 본 표현은 바로 앞 문구에서 주어진 명령에 대한 이행의 결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래서 '그리하면 땅에 거하게 될 것이다'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의 유언성을 위해서도 좋다(Perowne, Anderson). 그렇다면 이에 이어지는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 도 동일하게 전제된 명령의 이행에 따른 결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아주 다양하다. , 이에 대한 히브리어는 '르에 에므나'인데 이는 (1)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품다'(2:4), (2) 진리와 신실함을 '소중히 여기다' 혹은 '기뻐하다'로 해석될 수도 있으며 (3) '안전 보장을 즐거워하다 혹은 기뻐하다', (4) 안전 보장 속에서 양육되다' 등으로 해석된다 이중 유력한 혜석은 문맥의 흐름과 타 구절(33:6)의 지지를 받는(3)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결국 본 구절은, 여호와의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는 자를 대적하는 행악자와는 달리(1, 2절 주석 참조) 땅 위에서 하나님이 보장해 주시는 안전 속에서 기쁨을 누리고 살게 될 것임을 가르쳐 준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 '기뻐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그''부드럽다','유연하다', '즐거워하다'란 뜻이다. 그래서 본 표현은 여호와로 인하여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기쁘게 됨'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본 히브리어의 어원을 '분투(奮鬪) 이후에 찾아오는 어떤 기쁨, 희열'로 보는 견해도 있다(D. Kidner). 또한 '너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어지는것을 허락하다'를 뜻한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VonRad). 이것은 물질적인 어떤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 하고 기쁨을 발견하는 삶을 살 것을 권하는 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22:26 ; 27:10 ; 58:14).

 

 네 마음의 소원 - 이러한 사실은 오직 백성의 소망과 기대를 이루시는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다(20:4 ; 21:2 ; 5:33 ; 12:31).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 '맡기라''갈랄'로서 문자적인 뜻은 '옮기다','굴리다', '흘러 내려오다', '신뢰하다' 등이다(22:8 ; 16:3 ; 벧전 5:7). 그리고 ''은 삶의 모든 여정뿐만 아니라 그 여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것. 즉 계획들이나 행동들, 그 계획에 따르는 잇슈(issue)들이나 결과들을 가리킨다(10:7) 한편, 세상 사람들은 이것들을 운명이라고 부르지만(Anderson), 신앙인에게는 오직 이것이 여호와께만 있음을올 믿는다.

 

 저를 의지하면 -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너의 전생애를 하나님의 방법들에 맞추면'(16:20 ; 28:26)이다.

 

 저가 이루시고 - '이루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아세'로 문자적인 뜻은 '...에게로 돌리다'이다.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살면 그에 따른 혜택을 그에게 돌리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혜택이란 복된 결과의 보장, 유익을 지켜줌, 해받지 않음 등을 가리킨다고 본다(Barnes).

 

 네 의 - '미쉬파테카'로서 문자적인 뜻은 '', '재판', '정당함' 등이다. 인간의 삶을 살펴볼 때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하여 잠시 동안 진정한 삶의 가치가 불투명해 보일 수있지만, 여호와께서 언약 관계에 있어서 책임을 완수하실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알려진 그분의 약속에 의거한 축복 혹은 저주를 판결 받듯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62:1).

 

 빛같이 - 하나님의 중재 및 간섭은 어두움 속에서 드러나는 빛의 모습처럼 분명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11:17 ; 58:10 ; 51:10).

 

 정오의 빛 - 원어는 '차하림으로 ''을 뜻하는데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일차적인 뜻은 '이중의 빛'이 되겠다. 그런데 한편으로 히브리어에 있어서 사물의 복수형은 강조 및 그것의 특성의 강력성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따라서 '정오의 빛''가장 분명하고 환한 빛'으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뜻에 좀더 가깝다(A. Anderson,J. A. Alexander).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의, 즉 정당함을 밝힘에 있어 완벽하게 분명하면서도 명쾌히 그것이 드러나게 하실 것이다(3:4)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 이것은 자포자기나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함으로써 불평하거나 의심하는 마음을 바꾸기 위하여 적극적이고 긍적적인 노력을 기울이라는 것을 뜻한다. 진정 인간이 당면한 문제의 해결은 오직 하나님 그 분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62:1, 5; 30:15).

 

 자기 길이 형통하며 - 문자적인 뜻은 '그의 방식에 따라 번영하며'이다. 여기서 본 시편 기자는 물질적인 면에 있어서 성공한자를 염두에 두고있다(73:3). 특히 구약 시대에는 물질적인 번영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였다(42:10).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베이쉬 오세 메지모오트) - 문자적으로는 '목적을 수행하는 자'를 뜻하는데 문맥에 따라 '그 성격이 수상하고 간교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자'로 번역하는 것이 무난하다(Anderson).

 

 분을 그치고 - 악인이 수월하게 악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을 때, 분노하고 불평하지 말고 참고 기다리며 하나님께 대하여 중얼거리지 말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순간만 악인의 번영과 성공을 허락하실 것이기 때문이다(Bares).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 일순간적인 악인의 번영과 성공을 볼 때 분을 품고 노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할 까닭을 설명한 문장이다. , 그와 같은 흥분 상태로 말미암아 자신도 동일하게 어느 사이엔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인의 진영에 들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Anderson).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 - 행악하는 자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의 가나안 민족들이 맞았던 것과 동일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이다(12:29:19:1). , 가나안 족속이 멸망한 것처럼 행악자는 파멸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 -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이다. 왜냐하면 '기대하는'에 해당하는 원어 '카와''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 '대망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표현은 경건한 자로서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를 섬기는 자의 신앙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땅을 차지하리로다 - 원문에는 '' 앞에 '그들'(, 헤마)이라는 강조사가 있다. 따라서 원문의 감각을 살려서 번역하면 '그들 ! 바로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이다.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 즉 그를 경외하는 자들, 그들만이 진정으로 여호와의 땅에 거하는 권리를 누리게 될 것이다(2:21 ; 10:30 ; 57:13 ; 60:21 ; 65:9 ; 5:5).

 

 살필지라도 - 이에 대한 원어는 '히트보난타'로 가상의 완료 시제로된 전제절이다. 원문상 본절과 11절은 한 덩어리로서 한 주제를 담고 있는데 그 주제를 서술하는 전제, 즉 도입 부분이 바로 이 구절이다. 더구나 가상의 완료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미래에 될 그 일의 분명한 성취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해주고 있다. 성취의 내용은 온유한 자(11)와는 달리 악인은 땅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한 원어는 '이해하다',' 숙고하다', '생각하다'로 눈으로 응시하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온유한 자 - 문자적인 뜻은 '겸손한 자'이나 문맥으로 보아 고통받고, 눌리고, 궁핍하고 사회적 신분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온유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고, 겸손한 자로서, 자랑하고 묘만한 악인과는 달리 드러나는 품성에 있어서 대비가 되는 자이다. 이런 자를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로 부른다(Barnes). 악한 상황 가운데서도 이와 같은 자들이 긍정적인 성품을 유지하게 되는 까닭은 언젠가는 도래하게 될 완전한 공의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바라고있기 때문이다. 5:5에서 주님이 인용한 말씀이 바로 이 구절이 아닌가 생각된다.

 

 풍부한 화평(, 로브 솰롬) - 문자적인 뜻은 '많은 평강'이다. 이는 물질적인 부요 그 이상의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에 기초를 둔 일반적인 의미의 안녕을 가리킨다(Anderson).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를 때에만 진정한 평강을 누리게 되기 마련이다. 총체적인 삶의 영역에 있어서 어떤 한 부분이라도 평강이 없다면 틀림없이 현재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악인이...이를 가는도다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9절과 32절을 참조하라. 때로 악인은 자신들의 순조로운 번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인의 의로움을 질투하여 악행의 음모를 계획한다(Dahood). 더욱이 자신들의 번영이 아직 미래에 있는 것으로 보여질 때 그런 일을 행한다. 분노하는 악인은 혼히 그 이를 갈아보이는 들짐승과 흡사하게 극대의 증오심을 나타낸다(35:16 ; 112:10 ; 16:9 ; 2:16).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 악인의 음모는 결국 열매 없이 끝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계산이 하나님은 인간의 일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가정 위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악인의 가정이 잘못된 것이기에 본 시편 기자의 묘사는 는 적절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악인의 방자함과 잘못된 음모에 웃으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날이 이름을 보심이로다 - '그 날'이란 악인의 파멸의 날, 그 행위를 계산받는 죽음의 날이다(삼상 26:10 ; 18:20). 일반적으로 성경은 이때를 종말의 심판때라고 언급하고 있다(17:31 ; 3:19 ; 벧후 3:7).

 

 ...- 본절은 은유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므로 칼, 활은 폭력과 억압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그래서 칼을 빼고 활을 당긴다는 표현을, 의인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고 준비하는 악인의 모습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Barnes).

 

 활을 당기어 - '당기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다라크'로 문자적인 뜻이 '짓밟다' '걸다', '시위를 얹다'이다. 이러한 표현은 활을 땅위에 놓고 밟은 후 그 줄을 당기는 악인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겠다. 또한 이것은 의인을 겨누어 죽이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악인의 모습을 엿보게 해준다. 한편 크라우스(Kraus) 같은 학자는 본절 전체의 내용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하여 그 내용의 순서를 바꿔 '악인이 정직한 자를 죽이기 위하여 칼을 빼고 가난한 자를 맞추기 위하여 활을 당기나'라고 읽는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본절이 은유적 기법으로 묘사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문장 호응에 있어서 약간 어색한 면이 있다 해도 내용의 순서 변경을 거 치지 않고 그 의미를 그대로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고 이해된다. 사실 성경의 어떤 부분이 어색해 보이는 이유는 본문에 대한 해박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생길 수 있다.

 

 행위가 정직한 자(, 이슈레이 다레크) - 문자적인 뜻은 '그 길이 곧은 자'이다. 이러한 사람은 삶의 방식 혹은 행위에 있어서 흠잡을 데가 없는 자이다(29:27). 한편 이러한 유형의 사람을 묘사하는 성경의 일반적인 표현은 '마음이 정직한 자'이다(7:10 ; 11:2 ; 32:11, Anderson).

 

 그 칼은....마음을 찌르고 - 죄는 궁극적으로 죄인을 파멸시키며 악행은 그 행위의 주인공에게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에 대한 굳은 신념을 피력하고 있다(7:4 ; 2:19 ; 5:25,A. A. Anderson, Alexander).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 - 악인의 음모,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특히 그들의 음모를 이루는 수단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것이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토브 므아트 라차디크) - 문자적인 뜻은 '의인의 적음이(...보다) 좋다'이다. 본 구절의 강조점을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봐 수 있다. 하나는 흔히 볼 수 있듯이 의인은 이 세상의 부()를 조금만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의인의 그 적은 소유는 좀더 큰 축복을 동반하고 있는 것으로서 악인이 소유하고 있는 풍성한 소유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한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의인이 이 세상의 부를 조금만 소유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기 때문이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많은 소유보다 가치가 있는 까닭은, 가진 바 적은 소유로 인하여 하늘 나라의 큰 소유를 대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의 강도만 변하지 않는다면 땅의 소유를 많이 갖는 것도 악하지는 않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듸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셨다. 그러기에 본절의 이 주제는 결국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16:19-31 참조).

 

 악인의 풍부함 - '풍부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몬'은 비가 내리거나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 발생하는 '시끄러운 소음', 어떤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많은 재물, '부요함'을 뜻한다. 그래서 이 용어는 소유의 획득에 수반되는 소동 혹은 야단법석이나 그 소유를 관리함에 따르는 무질서함, 불안, 고요하지 못함(Alexander)을 의미하기 때문에 앞 문구와 연결시켜 볼 때, 악인의 많은 재물의 가치는 의인의 적은 소유보다 훨씬 저급하다고 이해함이 옳은 듯하다. 즉 악인은 소유 획득에 있어서 야단법석, 소동, 소란, 잡음이 수반되는 것이 사실이며 그 소유를 획득한 자의 마음이 항상 평안과 고요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 남을 해롭게하는 악인의 능력의 망실(亡失)에 대한 실감나는 장면 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에 해당하는 원어 '제로아'는 흔히 '' 혹은 '강함'을 상징하며(77:15 ; 89:10), 그것의 부러짐은 그 '소유주'의 무능력해짐을 상징한다(10:15 ; 38:15 ; 48:25 30:21). 한편 의인은 그 힘이 강하든지 약하든지 결코 요동하지 않는데, 그 까닭은 그 힘이 꺾이우거나 무력하게 될수 없는 여호와에 의하여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인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원어에서 이 ''이 복수형으로 되어 었기 때문에 '자원들'로 번역하는 학자도 있다(Dahood). 그러나 때때로 이 '제로아'는 전체로서의 개인을 암시하기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은 없다(26:2, Johnson).

 

 완전한 자의 날 - (,예메이 테미멤). 문자적인 뜻은 '곧 은자(隱者)의 날들'이라는 복수형은 여호와께서 곧은 자, 곧 의인의 궁극적인 운명을 보살피실 뿐 아니라 그의 하루하루의 실존에도 관심을 두신다는 것을 암시한다(Anderson).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 '기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나할,로서 문자적인 뜻은 '유산'이며, 이 땅위에서와 영원한 저 세상에서 의인이 누리게 될 포괄적인 의미의 '축복'을 가리킨다.

 

 부끄럽지 아니하며 - (,로 예보슈). 문자적인 뜻은 '시들지 않으리라' 이다. 원래 여기의 '시들다'는 물을 구하기 위하여 샘이나 냇가에 왔다가 그것이 마른 것 을보고 실망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25:2 , 3 ; 6:20). 그렇기 때문에 본절에서 환난 때 의인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재난이나 고통의 때에도 하나님을 기대하고 그 분으로부터 필요를 기대하기에 의인은 결코 실망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Barnes).

 

 어린 양의 기름같이 - (, 키카르 카림). 문자적인 뜻은 '어린 양들 중에서 가장 비싼 것'이란 말이다. , 한때 양들 중의 최고와 같았던 그들은 곧 소멸되리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표현은 악인의 멸망 전후(前後)의 극적인 대비(對比)를 통해 악인의 운명의 급박한 변화를 암시하며 동시에 악인의 멸망의 참담함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 이것은 악인에게 닥칠 극심한 가난의 상태, 혹은 가난 했을 때 악인이 취하는 태도에 대한 묘사이다(24:16). 한편, 왕하 4:1 ; 4 ; 50:1 ; 2:6 ; 8:6 ; 18:25등을 통해 볼 수 있듯이 채무를 불이행한 채 무자가 받는 징벌은 매우 혹독했다.

 

 의인은 은헤를 베풀고 주는도다 - 반면 의인은 스스로의 필요를 채울 충분한 소유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 위치에까지 서게 된다는 것이다(15: ; 28:12, 44). 이처럼 소유의 유무로 악인과 의인을 비유한 것은 매우 현실성이 있고 실제적인 경험에 바탕을 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복을 받은 자는 땅을...저주를 받은자는 끊어지리로다 - 본 구절이 제시하는 핵심은 내용이 언급하는 바와 같이 서로 상반된 결과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당하는 것은 인간의 어떤 공로, 즉 의인의 자선,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절대적 은혜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축복과 저주는 언약에 근거하여 빈틈없이 시행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산물이다(대상 29:11 : 28:1, 15).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 여기에서 '정하신다 '는 말은 '명하신다', '세우신다' '적절하게 하신다', '지도하신다'는 뜻이다. 즉 인간의 삶의 여정은 하나님의 안내와 통제 아래 있다는 의미이다. 영역본들은 '사람' 앞에 '선한'을 삽입하여 선한 사람으로 읽고 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원문상에는 없는 것이다. , 원문대로 하면 '선한'을 생략하고 '사람'으로만 적고 있는 개역 성경이 옳다. 그러나 문맥이 의미하는 대상이 '선한' 경건한 의인'임이 분명함을 고려할 때 '선한'을 삽입한 영역본도 취할만하다. 하나님은 의인의 인생 여정을 계속해서 지도, 인도하시며 곁길로 나가려고 할때 통제하기도 하신다.

 

 기뻐하시나니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하페츠'로서 문자적인 뜻은 '유지하다','보존하다', '기울다' 등이다. 이는 의인의 여정에 대한 여호와의 계속된 관심, 지도를 드러내는 표현이다(Anderson).

 

 넘어지나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이폴'의 원형 '나팔'은 문자적으로 '한번 넘어지다', '떨어지다', '내동댕이치다' '던지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의인이 죄에 빠져든다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불행해지고 실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 묘사는 여행하는 나그네가 때로 땅위에 넘어지는 모습, 즉 항상 성공적이지만은 않은 인생의 여정을 드러내 주지만 그 넘어짐이 아주 종국적 멸망은 아니다.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땅에 몸이 닿을 정도로 넘어지지는 않는다'이다. ,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넘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의인이 역경이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아니나 그 고통이나 역경이 의인의 종국적 멸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145:14 ; 24:16 ; 7:8). 왜냐하면, 여호와의 손이 그와 함께 언제나 계시기 때문이다.

 

 내가 어려서부터...보지 못하였도다 - 이제 나이가 든 성인(成人)인 시편 기자는 자신의 경험에 의존하여서 의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거나 그 자식이 구걸하는 것을 결코 보지 못했다고 확인하고 있다. 이 주장을 문자 그대로 절대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 본 시편 기자가 의인의 고통에 관한 언급을 많이 했었기 때문이다(7, 12, 9, 19, 8, 32, 33, 7, 40절 참조). 그러므로 그가 지적하는 바 핵심은, 경건한 의인은 하나님에 의하여 영원히 버림받지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10:3).

 

 종일토록 - 의인의 한 성품을 암시하는 부사이다. 의로운은 사람은 계속해서 자비를 나타내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 습관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다(Bar-nes).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 의인은 번성할 뿐 아니라 그의 풍성함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자이다(Kirkpstrick). 그의 경우, '꾸어 주는 일'은 사업의 수단이 아니라 빈핍한 자를 돕는 방편이다. 한편, 히브리의 율법에 의하면 가난한 자에게 빌려준 돈에 대한 이자는 받지 않도록 되어 있다(22:25).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 '그 자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제라''열매 맺다'에서 유래한 한 용어로'열매', '자손', '아이' 등을 뜻한다. 그런데 흑자는 이를 '그의 팔'로 본다(Dahood). 본절에서 그의 팔이 복을 받는다는 것은 그의 팔이 축복이 된다는 것을 나타낸다(Anderson). , 이는 팔이 축복의 근원 및 그 중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8:13).

 

 악에서 떠나 - 본절 하반절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조건이다. 문장 구조가 34:14과 매우 유사하다(3:7).

 

 영영히 거하리니 - 몇몇 주석가들은 본 구절 바로 뒤에 '이 땅에'(29) 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른 의미 파악에 도움이 된다 하겠다. 여기서 본 시편 기자는 영원한 생명보다는 조상의 유산을 소유하는 의인의 후손들을 생각하고 있다(102:28).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 여호와께서는 공평히 행하시며 당신의 종들에게 동일한 행의를 요구하신다. 문맥에 비추어 좀더 부연 설명하면 하나님께서는 정직하고 의로운 자에게는 번영의 상을 내리시지만 악인은 그 땅에서 끊어 버리신다는 것이다(33:5).

 

 그 성도(, 하시다우) - 이에 해당하는 원형'하시드''인자한', '경건한', '거룩한'이란 의미이다. 그러기에 본 표현은 '그의 충성된 성도들'(30:4 ; 86:2)을 뜻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저희는...끊어지리로다 - 본 구절은 의미상으로 분명하게 의인과 악인을 대비시키고 있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개역 성경의 '저희''의인(the tighteous)으로 대치시키고 있다. 그러나 원문이 그것을 분명히 생략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의미상으로는 그것이 옳다 해도 원문 그대로 놓아두고 수정하지 않는 것이 옳은 듯하다.

 

 의인의 땅을 차지함이여 - '차지하다'에 해당하는 '야라쉬''차지하다,''점유하다', '상속하다'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상속자로 삼으신다는 것은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취급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자녀로 삼는 상속의 개념은 창 12장에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을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의 상속자로 인치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3, 18, 27; 12:1-4).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 이것은 의인의 말 속에서 드러나는 진지함, 정직함, 진실됨, 순결함, 그리고 태도의 친절성, 곧음 등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특성은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땅 위에서 번영하고 장수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가 이와 같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이유는 여호와 경외에 바탕을 둔 바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 속에서의 삶의 경험 때문이다(1:7, Anderson).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 이것은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31:33 ; 36:27 참조)라고 적고 있는 예레미야의 새 언약 기사를 상기시키는 표현이다. 율법을 돌 위에 새기거나 두루마리 위에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율법은 사람의 마음의 비에 새겨져야만 한다. 그래서 그의 전생애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의 완고함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야 한다(Anderson). 율법이 그 마음의 비에 새겨져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그 법을 묵상하고 그 법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일컫는다(Barnes).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로 티마드 아쉬라이우) -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그 가는 것이 미끄러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의인의 여정(旅程)이 분명하고 곧으리라는 것과에 넘어지지 않고 그 삶이 번영하고 행복할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법을 만들려고 애쓰지 않고 하나님과 그분의 법에 인도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 '엿보아'(, 초페)의 원형 '차파''면밀히 관찰하다', '뚫어지게 쳐다보다', '먼곳을 응시하다'로서 깊은 탐색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악인이 의인을 깊이 탐색하는 이유는 그의 범죄 행위의 완전성을 위해서 일 것이다. , 악인은 의인의 소유를 빼앗을 목적으로 의인을 살해한 후(왕상 21:8-10) 자신의 범법(犯法)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음모의 과정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의인을 깊이 탐색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절에 분명히 나와 있지 않는 악인의 의인 살해 목적을 소유 획득이라고 보는 이유는 본 시편 전체가 반복적으로 땅의 소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9, 11, 29, 34). 한편, 12-5절에 이어 본절은 악인의 의인에 대한 핍박이 사실을 반복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악인의 의인 핍박이 성경에서 일반화된 사실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이 사실은 선지자들, 사도들, 교회사 속의 많은 순교자들의 경우 그리고 주님의 경우를 통하여 진실로 입증되었다.

 

 여호와는 저를 ...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목적을 성취하도록 의인을 그 세력하에 두지 않고 구원하여 내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본 시편 기자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악인의 악한 의도로부터 구원하는 사실이 금생(今生)에서도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현세에서 항상 이루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경향이다. 즉 신적(新的) 간섭및 조정의 경향은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체적으로 신적 간섭 및 조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들을 향한 유리한 덕목이 된다. 그것은 금생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특권이다. 그런데 그것은 미래의 세상에서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사실, 진실이 될 것이다. 의인은 모두 그리고 영원히 악인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Barnes).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리로다 - 문자 그대로 의인이 판결을 받았을 때 그를 죄인으로 간주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그의 동료들에 의하여 의인에게 형()의 선고가 내려져서 그가 공적(公的)으로 죄인임이 인정되는 경우에도 하나님은 그를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좀더 타당한데, 그것은 문맥의 분의기가 내세보다는 현세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큰 세력,( 아리츠) - 원래의 의미는 '굉장한', '분발케 하는 힘'으로서 하나님이나(20:11) 강한 열방들에 적용되었다(25:3). 그러나 이 용어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그럴 때에는 폭력, 맹렬함, 무법함, 폭정 등의 의미로 나타난다(15:20 ; 27:13 ; 13:11 ; 25:4,5). 한편, 여기서 이 단어는 '번영하고 강한 힘을 가진 자'를 말하나 그 영향력이 선을 베푸는 목적보다는 불의, 억압, 그리고 악을 시행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악한자의 세력을 가리킨다.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 - 원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푸른 월계수 나무'이다. 그러나 '월계수 나무'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즈라'가 문자 그대로의 월계수 나무인지는 원문상 분명하지 않다. 이 용어는 '자라'에서 유래했는데 그 뜻은 '일어나다' 혹은 '자라나다'이다. 그리고 명사로 사용되면 '그 토지에서 자라난 나무'를 가리킨다. 특히 명사로 그 의미가 쓰일 경우는 그 본토에서 자라난, 이곳 저곳으로 한번도 옮겨 다닌 적이 없는 나무를 가리킨다. 그래서 이 나무는 본토인(외국인이 아닌)을 가리킬 수도 있다(16:29 ; 18:26). 여기 소개된 나무는그 원래의 토양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옮겨 다닌 나무보다 더욱 튼튼하고 큰 성장을 이룰 나무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단어가 사람에게 적용될 경우, 번영하고 힘이 강한 자를 가리킬 것이다. 본절에서는 한 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모든 세력을 키우되 한번도 좌절하거나 실패하지 않고 승승장구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평지 풍파(平地風波)나 실패가 없는 조용한 번성만을 이루어 왔기 때문에 모든것이 안전하고 든든한 것으로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종말은 다음절에서 시편 기자가 말하는 그런 식의 종말이 될것이다. 한편, 맛소라 본문(MT)을 수정한 70인역(lxx)을 따른 RSV, AV 등은 여기 '푸른 월계수 나무''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평균 키가300미터 이상이며 고급 목재로 인기를 끄는 나무이기 때문에 힘 과 영광의 상징으로 흔히 사용되는 점을 고려하여 이렇게 번역한 것은 문맥이 지시하는 의미와 비교할 때 인정해 줄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수정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는 받아들이기가 곤란하다.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와야보르에하네예이넨누) - 직역하면 '그가 소멸되었다. 보라 '그가 소멸되었다. 보라 그가 없도다'이다. 물론 본 구절이 가리키는 대상은 문법적으로 따지면 인간과 나무 두 경우에다 적용되지만 여기서는 인간을 가리킨다. 여기서의 인간이란 악인을 가리키는데, 그의 경험과 영예로 미루어 볼 때 영원히 그 땅에서 살 줄 알았으나 결국 그는 죽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원문에 사용된 히브리어 '하네'(*)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어떤 일을 목격했을 때 사용하는 감탄사인데 이것은 여기에서 악인이 그 땅으로부터 분리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기 때문에 본절이 의도한 의미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 악인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확증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된 말이다 (Barnes).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 '곁국 '(, 아하리트)'종말',''이라는 뜻이다. 이 용어의 종말론적 성격은 73:17 ; 49:1 ; 23:10 ; 24:20; 2:2 ; 10:14 ; 4:1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편안'은 참신앙의 결과를 암시하는 데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다. 이 말은 하나님과의 화해, 그리고 그분과의 우애, 하늘의 소망으로 야기되는 평온, 정돈됨, 행복 등을 가리키기도 해 참 평안의 의미를 잘 나타내 준다(14:27 ; 16:33 ; 5:1 ; 8:6 ; 5:22 ; 4:7). 한편, 이 용어는 특별히 여기에서 신앙의 결과로서 죽을 때 조성되는 의인의 평온, 완전한 평화, 또한 영원한 평화가 있을 미래의 완전한 구원의 모습(상태)을 나타내 준다고 볼수 있다(Barnes). 통상적으로 경건한 자는 소망과 하나님의 임종을 맞으며 그들은 죽음 너머의 영원한 행복을 맛보게 된다.

 

 함께 멸망하리니 - '함께'(, 야흐다우)의 문자적인 뜻은 '그들의 연합체, 공동체'이다. 이것은 어떤 한 목적을 의하여 애쓰는 (25:11) 동일한 한 장소(18:6), 혹은 한 시간(4:8)에 모인 하나로서의 전체(14:3)를 가리킨다. 본절이 의미하는 바는 악인들 모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함께 멸망할 것이며 그 예외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본절은 그들이 동일한 한 장소에서 같은 시각에 똑같은 형태의 징벌을 받아 멸망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분명히 밝히는 것은 악인은 동일하게 그 종국이 멸망이라는 사실이다(Barnes).

 

 악인은 결국 - 여기의 '결국'(,아하리트)의 문자적인 뜻은 ''이다. 끝이 끊어진다는 표현에 대한 해석으로는 '미래가 없다'(Weiser), '번영이 사라진다'(Anderson), '그 후손이 없다' 등이 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한 가문의 후손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큰 복이었고 따라서 그 후손 전체가 단절되는 것이 가장 큰 불행이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세 번째 해석이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문맥의 종말론적 성격을 감안할 때 미래 세계, 즉 주님 재림 시대에 있어서 악인은 영원히 소망과 행복으로부터 단절된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그 강조점은 대체적으로 둘로 나눠어진다. 첫째, 악인은 끊어지는 반면 의인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악인의 끊어짐에 비교한 의인의 구원에 강조를 두는 것인데 이것은 시편에서 자주 사용하는 대구법 중심의 해석이다. 둘째, 의인의 구원 사실보다는 그 구원의 근원 및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강조를 두는 것이다. 이것은 원문에 '여호와 앞에 출처,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 ''가 사용되었다는 것과 이어서 그 구원의 출처되신 하나님에 대한 부연 설명이 있다는 것을 중시한 해석이다. 문맥을 취하여도 무리는 없으며 이 두 해석 중 어느 해석을 위하여도 무리는 없으며 두 해석은 상호 보완적인 성격이 있으므로 둘 다를 취하여 사용해도 좋을 듯 싶다.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키 하수보)의 뜻은 '그에게서 피할 곳을 찾았기 때문이다'이다. 본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피난처를 구하려고 하는 자들을 도우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증함으로써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래서 이 시를 읽거나 듣는 이에게 오직 의의 길로 행하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강력히 암시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