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시편(구속사)

시편8편,인자가 무엇이관대

호리홀리 2015. 5. 4. 20:45

시편 8:1~9
시편 8편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비하가 대조를 이루며 두번이나 반복하여 나타납니다. 즉,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하늘에 두셨지만(1절 하),자신을 낮추사 어린아이와 젖먹이를 통하여 권능을 세우시는 분이십니다(2절). 또한 주님은 태양과 달과 별들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만드사 하늘에 두신 분이지만(3절), 자신을 낮추사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는 인간을 생각하시는 분이십니다(4절). 도대체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인간을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들을 불쌍히 여기사 찾아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은 높으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찬양하다가, 갑자기 그의 비하에 나타난 사랑을 느끼고 전율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비하
나아가 그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인간의 천함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허무한 존재이지만(4절),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씌워 주셨습니다"(5절). 그러나 인간의 영광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영광입니다. 이리하여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1, 8절)라는 찬양과,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5절)라는 감사가 인간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씌운 것에 감격해 하는 5절을 통하여 아름답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비하, 그리고 인간의 비천함과 존엄성이 시편 8편의 구조를 결정해 줍니다.
첫 절과 마지막 절이 이 시의 뼈대를 잡아줍니다. 어쩌면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는 노래는 회중들의 응답인 것 같습니다. 시인과 모든 회중들은 하늘과 땅, 어린아이와 주의 원수, 젖먹이와 피의 보수자, 해와 달과 별들과 사람과 인자, 만물과 우양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모든 물고기를 생각하지만, 궁극적으로 온 땅에 참으로 아름다운 주님의 이름을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에는 우리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과 그의 영광을 기뻐하는 것(출 33:18이하, 사 6:3참조)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이 네 소절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서론적인 찬양인데, 1절에서 주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2절부터 4절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비하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인간의 존엄성과 그의 임무가 5절에서 8절까지 나오고 있으며,
넷째로 9절에는 결론적인 찬양이 나오는데, 주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첫째 소절과 마지막 소절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로 두미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둘째 소절과 넷째 소절은 '하늘'의 영광(1절 하)과 '하늘'의 새(8절)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셋째 소절과 넷째 소절은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것’(3절)과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6절)을 통해 잘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찬양(1절)
시인은 여호와를 '우리 주'라고 부릅니다. ‘주’(adonai)라는 칭호는 일반적으로 왕을 가리킬 때 사용되나(왕상 1:11, 43, 47), 시편에서는 주로 하나님에게 사용됩니다. 가장 빼어난 제왕시인 시편 110편 1절에서는 ‘주’가 다윗왕을 가리킵니다. 여호와는 '온 땅의 주'(시 97:5)시며, ‘주의 주’(136:3, 135:5, 147:5)이시고, 온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주님은 그 '이름'으로 자신이 어떤 분인지 잘 보여줍니다. 출애굽기 3장과 6장을 보면, 주님은 ‘스스로 계신 자’라는 뜻을 가진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존재론적인 뜻보다 구속사적인 뜻을 가진 것으로 하나님은 항상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위해 싸우시는 분임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주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면서, 자신이 어떤 분인지 소개하십니다(출 34:5~6).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에서 주님의 이름과 영광이 평행을 이룰 뿐 아니라, 땅과 하늘도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땅’이 하늘보다 먼저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여기서는 먼저 나오고 있습니다. 1절에서 ‘온 땅’을 먼저 언급한 이유는 9절에 다시 나타날 ‘온 땅’과 짝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1절 하반절은 뜻으로 볼 때, 2절과 이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비하(2~4절)
‘온 땅에 아름다운 주님의 이름’과 ‘하늘 위에 자신의 영광을 두신’ 주님을 찬양한 후, 분위기가 급전하여 주님의 원수와 대적 그리고 이들과 맞서 싸우는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나오기 때문에 2절은 주제 발전의 측면에서 보면 너무나 갑작스럽고 돌발적으로 느껴집니다.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라고 노래한 후, 왜 갑자기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나오고 있습니까?

그 이름이 아름다운 이유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아름다운 이유는 주님께서 약한 자들을 통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며, 약한 자를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2절에는 주의 대적, 원수, 보수자가 어린아이와 젖먹이와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창조 세계에 나타난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창조 시편에서 주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등장하는 것도 독특합니다. 시편에서 주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주로 애가나 신뢰의 노래나 제왕시에 많이 나타나는데 여기 찬양시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신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신 분을 대적할 자들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요? 여기의 대적들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주권과 역사 속의 통치를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이름을 통해 나타난 계시도 인정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어린아이와 젖먹이는 연약과 겸손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창조계에 나타난 주님의 영광과 계시를 믿는 자들입니다.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은 이런 연약한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권능을 세우십니다.  이들은 주님께 기도하는 자들이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을 인정하는 약자들과 어린아이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시편 8편 2절의 사상은 구약에서 흘로 떨어져 있지 않고, 구약 사상의 핵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시편 113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다(4절)고 노래하면서,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5절)라는 수사 의문을 던집니다. "아무 대답도 없다"는 답이 이미 깔려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같은분이 없는 이유는, 주님께서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6~9절). .이 신앙고백은 한나의 기도(삼상 2:1~10)에 나타나며 마리아의 송가로 이어집니다(눅1:47~55).
어린아이와 젖먹이를 통해 주의 대적의 패역한 논리를 꺽는 첫 대조에 이어, 두번째 대조가 3~4절에 나타납니다. 시인은 천지창조(창 1:1~2:3)와 인간창조(창 2:4~23)를 생각하면서, 원대한 하늘의 세계(3절)와 연약한 인간(4잘)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시인은 먼저 하늘과 거기에 떠 있는 달과 별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그는 달과 별이 빛나는 밤의 창공을 바라보면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길래
하늘의 파노라마를 볼 때, 시인은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넓은 우주를 볼 때, 인간이 얼마나 작은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 때 인간을 알 수 있고, 인간을 알 때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칼빈은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참된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이 크신 하나님을 직면할 때, 우리는 인간 존재가 철저히 무의미함을 느끼게 됩니다. 무한과 유한,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인간의 슬픔과 불안과 하늘의 평화가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이 무엇이길래'로 집약됩니다. '인간은 도대체 무엇인가?' 즉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넓은 우주를 볼 때, 인간 존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아주 미약한 존재입니다.
나아가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지상의 존재입니다. 그는 천상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약하고 유한하며 무의미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연약하고, 무기력한 존재입니다(시 9:20, 90:3, 103:14).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은 땅에 속한 인간 본성을 뜻합니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다"(욥:1)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돌보십니다.
인간이 무엇이길래 주님은 그를 ‘생각하시며, 돌보십니까?’ 여기서 두 동사는 주로 애가에 나타납니다(렘 15:15). 이 두 동사들은 위험 가운데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용됩니다. 시인은 우리로 하여금 어린아이처럼 속수무책인 연약한 자신을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끝없는 우주를 만드신 분이지만, 너무나 작은 개인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무섭고 놀랍습니다. 우리는 늘 자신을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은 자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항상 화내고, 무섭고, 역정을 내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하고 가련한 인간을 생각하실 뿐 아니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루터는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이런 하나님의 일은 믿음을 통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그의 임무(5~8절)
4절 이후에 저자는 잠깐 하나님의 영광과 비하 주제에 대한 묵상을 쉬고, 5절로부터 새로운 생각을 하며 세번째의 대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인간을 돌보실 뿐 아니라, 그에게 큰 잠재력과 임무를 주셨습니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는 원어대로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이런 번역이 너무 불경건하게 보이기 때문에, 칠십인역이나 여러 번역들(시리아어, 탈굼, 벌게이트)이 “천사보다 잠깐 못하게 하셨다”로 바꾸었습니다(히 2:5, 7). 그러나 원래의 의미는 대조를 통한 강조에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강한 대조를 좋아합니다. 시인은 인간의 위대함을 노래하기 위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말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는 표현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였다”를 설명해 줍니다. '영화'는 ‘빛나는 화려함과 위엄’입니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는 것은 왕권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시 21:5). 물론 하나님 자신이 영광과 위엄으로 나타납니다(시 29:1, 104:1). 따라서, 하나님의 왕적 영광과 위엄을 인간에게 위탁한 것입니다. 너무나 작고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을 대리하며 다스리는 자가 됩니다. 윈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창 1:26~28, 2:19). 하나님의 이름은 온 땅에 나타나고, 그의 영광은 온 하늘에 있었는데, 이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가 됩니다. 해와 달과 별들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5~8절 가운데 5절에서 중심 주제를 제시하고, 이어 6~8절은 5절을 설명해주는 긴 설명절이 됩니다. 먼저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다”라는 표현이 독특합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창조자시요, 세계의 통치자이신 여호와께서 인간을 이 세상의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시 2:8). 그러나 인간 통치의 영역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과 구별됩니다. 인간의 통치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습니다. 인간의 통치력은 위탁받은 권세일 뿐 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시는 자신의 일을 대표적으로 주셨습니다. ‘우양’은 가축으로 길들인 짐승이요, 들짐승은 야생동물입니다. 옛날 창조 기사에서도 만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그들에게 다스리는 임무를 주셨습니다(창 1:26). 인간의 문화는 동물을 다스림으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인간과 동물은 너무나 다르지만 인간은 말로써 동물과 통하며, 동물은 그를 따르고 복종합니다. 시인의 관점에서 볼 때, 육축을 다스리는 능력은 인간의 능력 중 최고의 것입니다.

결론적인 찬양(8절)
시인은 인간이 땅을 다스리고, 그가 왕으로 행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마지막 생각은 첫 생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생각하며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자신을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인간들에게 계시하시고, 또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기억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다가, 인간에게 왕권을 부여하신 은총을 생각해왔습니다. 이제는 다시 아름다운 주님의 이름으로 돌아갑니다. 이 두미일치법을 통해 이 시가 통일성 있는 문학 작품임을 알게 됩니다. 시인은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아갑니다. 이리하여 이 시의 끝에서 다시 시작을 알려 줍니다. 이 시편에서 인간에 대한 묵상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시편 8편의 최종적인 목적입니다.

시인은 “주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 어찌 그리아름다운지요”라는 고백적 찬양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신약의 맥락에서 보면, 우리는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0). 하늘과 땅, 예수님의 이름과 주되신 예수에 대한 모든 표현은 시편 8편 1절과 너무나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이 마치 시편 8편 1절의 말씀을 기독론적으로 이해한 것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 영광스러운 주님의 이름은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에게 계시되었고, 주님은 이들을 통하여 자신의 대적을 물리치십니다. 시편 8편 2절은 신약의 사상과 아주 잘 일치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5~26절을 보면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를 먼저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우리 주여' 와 너무나 유사합니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마 11:20~24)도 시편 8편 2절의 맥락과 거의 같습니다. 같은 사상이 고린도전서 1장 27절에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십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 보잘것없는 것을 통해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십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어린아이들이 먼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환호(마 21:15~16)한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시편 8편 5절은 신약성경에서는 이 구절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새로운 해석이 시도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아담입니다. 그는 잠깐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되었지만, 그의 부활을 통해 영광과 존귀로 관씌움을 받습니다. 나아가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주의 손으로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수난을 통해 "천사보다 잠깐 못하게 되었으나" 그의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만물을 그 발아래 두었습니다(히 2:6~8, 고전15:2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아름다운지요”라는 찬양을 새롭게 드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