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주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어질고 정작한 자를 택하여 그 아비의 위에 두고 너희 주의 집을 위하여 싸우라 - 곧, 요람의 아들들 중에서 왕이 될만한 자를 세우고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싸울 용의가 있으면 싸워보라는 도전(挑戰)이다. 이것은 예후가 사마리아에 있는 지도자들의 심리를 파악하기 위한 편지였다. 군대의 지휘자는 이렇게 병법상 지혜가 있어야 된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려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써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셨다(눅 14:31).
[왕하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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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후는 병법에 능한 사람이어서 싸우지 않고 이기기를 계획하여 그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사마리아에 있는 왕자들을 자기 손으로 직접 해하지 않고 그들의 보호자들의 손에 의하여 죽였다. 그는 적편(敵便)에 있던 자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하는 데 능하였다. 예후로 말미암아 아합의 가문이 전부 죽임이 된 것은 잔인한 일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비참한 죽음의 이면에는 보다 비참한 그들의 죄악이 그 원인으로 되어 있다. 그 사실을 생각할 때에는 아합 왕실에 대한 예후의 숙청 운동은 하나님의 지당한 심판 행위였다. 심판 사건 앞에서는 그 사건과 관련된 자들의 죄악의 참상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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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의롭도다(9절 상반) - 곧, 거기 모인 백성은 아합 왕실을 전멸시키는 일에 가담한 일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 여러 사람을 죽인 자는 누구냐(9절 끝) - 예후는 이 말로써 그의 간교하고 음흉한 성질을 드러낸 것이다. 실상은 자기가 아합 왕자 70명을 죽이도록 명령하고도 이제 와서 자기는 그 사건과 전연 관련이 없는 듯이 그들을 죽인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로 돌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합 왕실의 멸망이 여호와의 뜻대로 실현되었다고 하며 그것을 정당시 하였다. 그는 아합 왕자들을 죽인 자를 정죄하지는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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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10: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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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예후가 "유다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 42명을 죽인 사실에 대해 말한다. "아하시야의 형제들"이란 말이 여자적(如字的)으로 바로 번역되기는 하였으나 실상은 아하시야의 형제들의 아들들을 가리킨다(대하 22:8). 예후로 말미암아 이들이 죽임이 된 이유는 그들이 아합 왕실의 친속(親屬)들로서 이세벨의 우상주위에 깊이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일찍부터 아합 왕실과 깊이 교통한 것이 마침내 화근이 되고 말았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로 더불어 친근히 지내는 자들은 마침내 그 악인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그런 악인과 가까이 하지 말아야 된다. 요 1:10-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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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10: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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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갑"은 겐 족속에 속하였는데(대상 2:55), 모세의 장인이 이 족속에 속하였다(민 10:29). 이 족속은 사치와 방종을 피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데 엄격한 경건(敬虔)을 유지하려고 유목 생활을 택하였다. 삿 1:16, 4:11 참조. 예레미야는 레갑 족속을 경건의 모본으로 들어 타락한 유대인들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렘 35장 참조.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15-16) - 예후가 "레갑의 아들"(레갑의 자손이란 뜻) "여호나답"을 이렇게 높인 것은 자기의 혁명이 경건을 위한 다는 인상을 민중에게 주려는 정치적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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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10:18]
여기서 예후는 자신이 아합보다 바알을 더 많이 섬기리라는 말로 뭇 백성들을 쉽게 눈속임한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속일 수 있었던 것은 바아사와 시므리의 경우를 비교해 보며 설명할 수 있다. 즉 그들의 경우에 있어서 군사 혁명은 단지 자신의 이기심만을 충족시키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개혁의 의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이세벧이 예후를 시므리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9:31) 백성들 가운데서도 예후의 혁명을 시므리와 같은 성격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와같이 백성들의 생각을 미리 짐작하고 그것를 역이용하여 일을 진행시켜 나가는 예후의 기발함이 본장의 전반에 잘 나타난다(9,16절). 본절에 나타난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는 선포는 바알 숭배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그의 계략이었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많이'라는 말은 '증가하는', '능가하는', '철저한'이란 의미의 히브리어 '라바'에서 온 '하르베'를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이는 양 뿐만 아니사 질에서 매우 철저하다는 뜻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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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10:19]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오니 - 여기서 '제사'( ,제바흐)라는 말은 예후의 편에서 볼 때 재미있는 언어의 유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제바흐'는 수소나 양, 그리고 염소같은 동물들을 죽여서 드리는 '희생제'를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배교자들에 대한 '살륙'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왕상 13:2;왕하 23:20).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선지자와 제사장이 서로 구분되는 계급이었다. 즉 제사장은 '아브'라 하여 마치 백성의 아버지인 것처럼 존대되었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종'이라 하여 특별한 계급으로 생각되었다. 한편 베니게 지방에서는 선지자가 제사장보다 더 우대된 것 같으며 보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 같다(왕상 18:19-40). 그리고 여기서 '섬기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바드와 '멸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바드'가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인데 이것이 본절 전체에 대해 풍자성을 더 가미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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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10:20]
바알을 위하는 대회를 거룩히 열라 - 여기서 '대회를 거룩히 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드슈 아차라'는 예배 준비를 가리키는 공식적인 용어이다(욜 1:14;2:15). 그리고 본절에 언급된 '아차라'(*)가 '거룩한 대회'(solemn assembly)로 번역된 경우는 성경에서 빈번한데(민 29:35;신 16:8;대하 7:9;느 8:18;사 1:13)이 대회라는 말은 신 16:8과 레 23:36에 기록된 '성회'또는 '거룩한 대회'에서와 같이 절기 마지막 날에 폐회를 위한 성대한 제전을 의미한다. 한편 암5:21에서는 이 말이 이스라엘 회중이 지키는 '여호와외 성회'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것은 본래 세상일에 대한 금욕의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바알 숭배가 횡행하던 그 당시에는 바알을 높이기 위한 모임으로 자주 열렸던 것 같다. 그래서 예후가 이러한 모임을 선포해도 백성들로부터 의심을 사지 않았던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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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10:21]
바알의 당 - 사마리아에 있는 바알의 산당은 아합이 이세벧과 결혼한 직후에 세운 것이다(왕상 16:32). 이 산당은 바알의 제사장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수용했던 장소인 것으로 보아 대단히 큰 전(殿)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B hr).
이편부터 저편까지 - 이 표현에 대한 히브리 원문은 '페라페'이다. 그런데 이 말은 '훅불다', '불어 날리다'란 의미의 '파아' 가 전치사로 연결된 용어다. 여기에서 '페'는 '입', '가장자리', '부분'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본절의 뜻은 '입에서 입으로', 혹은 '열고 또 연다'란 것이다(B hr). 즉 이것은 최대한으로 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본 구절의 표현은 '바알의 우상이 있는 성소'에 사람이 가득차 있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흑자는 본 표현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라고 해석하는 것이다(Keil & Delzsch, Vol. III, p. 350-351; KJV, from oneend to another; NIV, Living Bible, RSV, from one end to other; NEB, from end to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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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10:22]
예복 맡은 자 - 여기서 '예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멜르타하'는 구약 전체 중 이곳에서 단 한번밖에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소하게 보일지 모르나 그 의미는 분명한 것 같다. 이 단어가 '시험', '증거'(proof)라는 뜻을 가진 아카드어 '말타크루'(maltaktu)와 관계가 있다는 주장(W.Von Soden)은 전후 문맥에서 볼 때 옳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동족어인 에디오피아어에서는 예복을 '알타'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포로 만든 옷이기 때문에 히브리어의 의미가 정확하리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한편 이방의 신전에는 거의 옷을 보관하는 방을 따로 두었을 뿐만 아니라그 옷을 관리하는 관리자도 있어서 제사를 드릴 때마다 예복을 입었다. 한편 바알 제사장들이 그렇게 예복을 입었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용이해 그들 모두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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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10:23]
여호와의 종은 하나도 너희 중에 있지 못하게 하라 - 본절에 사용된 '여호와의 종'은 '바알을 섬기는 자'와 대응되는 말이다. 이 단어가 비록 히브리어로는 똑같이 '에벧' 즉 '종'으로 나타나 있으나 이는 '여호와에 대한 열렬한 예배자'와 '바알에 대한 예배자'를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예후가 이러한 명령을 내린 것은 예후나 여호나답을 따르던 여호와의 종들이 영문도 모르고 그들 중에 섞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Rawlinson). 또한 바알 숭배자들도 자신들의 선성한 예식에 이교도가 섞여있다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므로 예후의 처사를 옳게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예후가 이 일을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으로 하여금 지켜보게 한 것은 여호아의 종들을 보호해 줌으로써 여호와에 대한 자신의 열심(16절)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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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10:24]
무리가...들어간 때에 - 여기에 '무리'로 번역된 말이 70인역(LXX)에는 '그'로 되어 있고 히브리 성경에는 '그들'로 되어 있다. 25절과 비교할 때 '그' 즉, 예후 자신이 혼자서 번제드린 것이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들어간 때에'로 번역한 본절은 '들어가니라'로 되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고 그가 제물과 번제를 드리려고 들어가니라'가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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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10:25]
번제 드리기를 다하매 - 이 구절의 주어가 3인칭 단수 접미어인 '오'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 혹자는 예후가 친히 번제를 드림으로써 자신이 열렬한 바알 숭배자인 것처럼 가장했다고 한다(Ewald). 그러나 3인칭 단수 접미어 '오'는 종종 부정적 주어로서 영어의 it나 They와 같은 용법으로 쓰인다(B hr). 그래서 70인역(LXX)과 벌게이트(Volgate)역에서는 본절의 주어를 3인칭 남성 복수형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예후와 여호나답은 바알 신당 주위에 80인의 호위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예배를 다 드릴 때까지 기다린 것 같다. 그러나 만약에 예후가 이방의 제사 의식에 참여했더라면, 예후에게는 곤란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즉, 그 행위가 본심에 의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하나님의 신실한 지도자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앞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뭉쳐진 신실한 백성들의 지지를 받기가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Wycliffe). 그래서 그는 이방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호위병과 장관들에게 이르되 - 호위병의 문자적인 뜻은 '달리는 자들'이다. 즉 그들은 왕을 보호하는 것을 최고 임무로 하는 정예 부대였다(삼상 22:7;왕상 14:27,28). '장관들'에 관해서는 9:25의 주석을 참고하라.
바알의 당 있는 성 - 여기서 '성'이란 뜻의 히브리어 '이르'는 '높은 요새'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바알 숭배자들이 들어가 있는 '제단' 또는 '내전'(內殿)을 가리키는 듯하다(Rawlison, Keil). 왜냐하면 바알의 신상이 있는 이 전은 높은 담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어서 그 모양이 마치 요새와 같았기 때문이다(B hr). 이것과는 달리 바알의 주상(主像)은 돌로 만들어져 있고 그 주상을 중심으로 작은 바알의 상들이 빙둘러 놓여져 있는데 그것들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한편 예후가 바알을 예배하는 모든 자를 죽이라고 그의 군사들에게 명한 것은 다음 두 가지 의미에서 교훈을 준다.(1) 이것은 윤리적인 차원에서 의아스럽게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한다는 의미에서는 충분히 정당화된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복하는 곳의 모든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셨는데(신 3:1-3;수 8:18-25),이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범죄자들에 내려진 심판으로 볼 수 있다(창 15:16). 이처럼 하나님께서 심판의 칼을 드시사,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듯 죄에 빠진 자들을 전멸시키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조금의 불의도 용납 될 수 없다는 공의의 속성에 기인한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이러한 공의의 하나님보다는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을 더욱 강조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이 잘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양 속성을 잘 조화시겨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참 지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2) 이는 예후의 과감한 실천의 표현이었다. 즉 그는 여호나답에게 여호와께 대한 열심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약속했다(16절). 그래서 그는 여호나답이 보는 가운데(23절) 바알에게 제사하는 모든 사람을 죽였다. 이러한 예후의 행동은 죄의 길에 서서 후회만하고 행동으로는 돌이키지 않는 우유 부단한 사람들에게 경고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미지근한 상태에 머무르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계 3: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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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10:27]
변소를 만들었더니 - 변소는 '성읍의 모든 불결한 것을 두는 저장소'이다(Rawlinson). 그런데 바알 신당을 이와 같은 용도로 사용하도록 했다는 것은 바알 신에 대한 모독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행위는 당시 근동지방에서 유행하던 최대의 모욕이었다(Keil & Delitzsch). 한편 맛소라 본문(Masoretic Text)에는 '변소'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모하라오트'를 '하수구'라는 뜻의 '모차오토'로 변형하고 있어 그 의미가 매우 완곡하게 표현 되었다(스 6:11;단2:5;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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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10:28]
본절은 예후가 바알 숭배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숙청을 가했지만 금송아지 숭배는 금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즉, 이것은 마치 남쪽 유다 왕들이 종교 개혁을 했울 때 산당을 전부 훼파하지 않은 것과 흡사하다(12:3'14:4;15:35;대하15:17;20:33). 본문은 특히 28절과 29절을 비교적인 관점에서 서술함으로 예후의 주된 활동을 한번 더 강조함과 동시에 그의 부정적 측면, 즉 금송아지 우상을 척결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강조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예후의 종교개혁은 반쪽짜리였다. 이유는 열심은 있었으나(16) 전심으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1)
왕이 되기전에는 열심을 품고 개혁에 임했으나 왕이 된 후 금송아지 숭배를 행하였다. 왕권을 유지하기위하여 남쪽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백성들을 저지해야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 우리의 개혁은 예후같은 반쪽짜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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