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미가서(구속사)

미가서6장,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호리홀리 2015. 7. 22. 12:57

미가6:1-8은 미가서의 절정에 이르는 부분으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미가6:1-8의  구조
 1-2절 : 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소송을 제기하심
 원고 : 야훼 

 피고 : 내 백성 (하나님을 배신하고 불평하는 백성)
 야훼의 법정대리인 : 예언자
 증인 : 산, 언덕, 땅의 기둥
 고소 이유 : 언약의 위반자는 야훼가 아니고 오히려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밝혀야 하기 때문


 3-5절 : 하나님의 의(義)의 변호
 야훼의 반문 (3절):
 내가 너희에게 무엇(meh)을 행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meh) 짐(고통)을 지워주었느냐?


 야훼의 자기 소개 (4-5절)
 출애굽 구원을 베푸신 자 (4절)
 발람의 축복을 이끌어내신 자 (5a절)
 요단강을 건너게 해 주신 자 (5b절)

 

 6-8절 : 야훼께서 원하시는 것
 패소자의 다섯 가지 질문 (6-7절) : 야훼께서 원하시는 것은 (6a)
 일년 된 송아지 번제물(6b)인가?
 수천 마리의 양(7a)인가?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기름(7b)인가?
 나의 맏아들(7c)인가?
 나의 몸의 열매(7d)인가?
 미가의 답변(8절) :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물(what)이 아니라 다음 세 가지를 행하는 너(who)다!"
 공의를 실천하는 너 (8a)
 헤세드(인자)를 사랑하는 너 (8b)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너 (8c)

 

 


 법정 소송의 형식으로 시작된다(1-2절).  왜냐하면 히브리어 [리브](소송하다)가 이 1-2절에서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말은 법정 용어로서 구약 예언서에서 주로 예언자적 고발 용어로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비교 사1:2-3, 18-20 ; 3:13-15 ; 41:1-5, 21-29 ; 43:8-15 ; 44:6-8 ; 45:20-25 ; 렘2:4-13 ; 호4:1-3, 4-6, 12:2-14 ; 말3:5 등)  그러나 주목할 만한 점은 고발자가 여기서는 분명 야훼 하나님이시면서도 (2절 참조), 그 야훼 하나님이 오히려 원고로서가 아니라 언약을 위반하고 한 때 고발을 받은 피고였던 것처럼 등장하고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야훼께서 여기서 스스로 자신을 한 때 '피고'였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은, 즉 야훼 하나님께서 마치 한 때 언약을 위반했던 자처럼 비난받기도 했었다는 것은 (3절 참조), 분명 이러한 소송 사건이 제기된 그 어떤 역사적 상황을 분명하게 암시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 본문의 역사적 환경은 아마도 앗수르 세력에 의하여 황폐해진 유다 왕국의 참담한 몰락상과 좌절감을 이스라엘이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어서 마침내 야훼와의 언약 관계를 배신하고 그에게 불평하게 되었던 그 상황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시대를 반드시 히스기야와 므낫세 시대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하여도, 기원전 8세기 말엽의 유다는 야훼의 무능(Dew absconditus!)을 심각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때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야훼와의 언약이 야훼의 무능에 의하여 깨어졌다고 탄식하며 동시에 야훼를 하나의 '고통스러운 짐' (3절)으로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던 것아다.  그러므로 야훼는 이제 이스라엘을 향하여 소송을 제기하시고 자신의 '의'(5C절)의 진실을 규명하려고 나서셨던 것이다.  그리고 산들과 언덕, 그리고 땅을 받치고 있는 견고한 기둥들을 증인으로 불러 모아서(1-2절) 이 법정 소송을 우주적 성격으로 확대시키신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고역(민20:14), 광야의 고통(출18:8) 그리고 원수들의 억압(느9:32 ; 애3:5 ; 말1:13)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었다.  동시에 그들은 야훼의 구원을 통하여  어려움으로부터 해방 받았던 더욱 감격스러운 은혜의 경험도 또한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은 겪은 구원의 그 놀라운 감격은 잊어버리고 있었다.  단지 현재 앗수르로부터 겪는 - 또는 바벨론으로부터 겪는 - 패배감이 '야훼의 의'에 대한 불평과 불만 그리고 불신을 조장하고 심화시켰던 것이다.
 야훼의 의에 대한 야훼의 자기 변호 (3-5절)는 이러한 상황에서 전개되기 시작한다 ; "내 백성아, [들어라]!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짐 (고통)이라도 되었다는 말이냐?  어디,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 [시험해 보아라]" (3절).  이 질문은 단순한 질문과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단순한 대답의 요구라기보다는 상대방이 갖고 있는 불안이 정말 정당한지를 증명해 보이라고 촉구하는 법적 요구이고 동시에 그러한 불안의 소지란 살펴본 즉 전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자기 변호의 질문(defensive question)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스라엘의 불만과 불평을 반박하고, 언약의 위반자는 야훼가 아니라 - 야훼의 침묵 (Deus absconditus)이 아니라 - 이스라엘 자신이 바로 다름 아니 위반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야훼는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역사적 구원 행위에 관한 고전적이고 규범적인 (classic and normative)  구원사, 즉 출애굽 해방(4절), 발람의 축복(5a절), 그리고 요단강 도강(5b절)의 과정을 통한 [약속-성취]의 구원사를 '기억하라' (zegar- n h)고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요구는 계약에 대한 야훼의 '신실성'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반박의 여지없이 증명하는 증언이라고 하겠다.  언약에 신실하신 분으로서의 야훼의 정체성은 바로 이러한 모범적인 (정경적인) 구원사(참조 신26:5-9 ; 수24:1-13)를 낭송함으로써 밝혀져 왔다는 것이 이스라엘 제의의 현실이었다.  이러한 증언이 지니고 있는 설득력은, 특히 본문(4-5절)에서는, 그 구원사 회상이 언약적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즉 출애굽은 '몸값을 치른 해방 행위'(pedh tdh kh )로서(4a절) 묘사하고 있다.  말하자면 출애굽 사건의 속량적 성격이 강조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나의' 백성으로 성격 지을 수 있게 된다(3절).  그리하여 야훼는 언약의 주로서의 공의와 신의를 밝히 증명하게 된다.  이 사실은 이 모든 구원 행위가 야훼의 의를 알게 하기 위하여 이루어졌다는 증언(5c절)에서 더욱 밝히 드러난다.  말하자면 야훼의 의는 그의 은혜로운 구원 행위를 통하여 그의 언약적 신실성을 입증함으로써 비로소 확인되었던 것이다.
호세아4:1에서처럼 여기서 말하는 '지식'도 또한 야훼에 대한 이론적(교조적) 지식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이 지식은 오히려 야훼의 의(구원)의 행위에 대한 경험적 지식과 야훼의 율법 계시에 대한 실천적 지식, 즉 야훼와 맺은 계약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며 이 지식이 없으면 죽음의 심판을 받게 되는 그런 성격의 지식 (비교 호4:1-3, 6)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불평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 야훼의 소송의 결론이다.  즉 야훼의 구원의 의를 '기억하면' 언약 파괴자는 야훼가 아니고 다름 아닌 이스라엘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야훼의 소송 제기는 야훼의 구원사를 회상시킴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의 '배신'(언약위반)의 죄를 인식하게 해 준 것이다.  패소자요 동시에 언약위반의 죄인임을 깨닫게 된 이스라엘은 이제 비로소 야훼에게로 나아가는 가장 빠른 길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그리고 야훼께서 가장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감히 묻게 된다.


 야훼께서 가장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또 그 대답을 얻는 일 (6-8절)은 자신이 언약위반의 죄인임을 깨달은 자들에게는 필수적인 과업이다.  그런 점에서 6-8절은 1-5절과 밀접한 내적 연결을 갖게 된다.  이러한 내적 연결성은 야훼를 '높으신 하나님' (엘로헤 마롬 ; 6절)과 일치시키는 과정에서도 엿보인다.  즉 이스라엘은 야훼를 무능한 신으로 탄핵했던 이전의 자세 (3절 참조)에서 방향을 바꾸어 이젠 그를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부름으로서 그 훼손된 야훼의 명예를 회복시켜 되돌려드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야훼에게 나아갈 때에, 즉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이 물음의 삶의 자리는 분명 이상의 문맥과 연결시킬 때 자신이 깨뜨린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회복하려는 곤경 속에 빠진 한 평신도의 비장한 결의가 작용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겠다.  이 경우 이 평신도를 사로잡는 일반적인 신앙 전통은 "너희는 빈 손으로 내 앞에 나와서는 안된다" (출23:15 ; 참조 출34:20)는 제의 전통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게 마련이다.  죄에 대한 두려운 감정과 속죄의 용서에 대한 필요성의 절박한 의식은 제물의 목록을 점점  과장되게 많이 제시하게 한다.  즉 일년 된 송아지 번제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일까 (6b절)?  아니면 수천 마리의 양의 번제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일까 (7a)?  아니면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기름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일까 (7b)?  아니면 나의 맏아들 제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일까 (7c절)?  아니면 내 배(몸)에서 나온 열매로 드리는 제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일까 (7d절)?  점점 고조되어 가는 이 질문을 통하여 우리는 참회자의 내적 불안이 어느 정도인지를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물질(what) 제사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다는 논리는 - 히브리 전통에서는 - 절대로 성립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일년 된 송아지 → 수천 마리의 양 →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기름 → 맏아들 → 자기 몸에서 태어난 열매'로 점고되어가는 제물의 열거는 일종의 풍자적 비난이 내포되어 있는 하나의 시니컬한 문학적 기법으로 보인다. 

 

논의의 여지없이 분명하게도, 하나님과의 순순한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열망의 해결을 더 나은 희생 제물의 헌납 행위에서 찾으려는 환상적인 시도에 대해서 우리의 본문(8절)은 철저히 침묵한다.  즉 열납받을 제물이나 제사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기대된 정보도 우리의 본문은 제공해 주시 않고 있다.  오히려 우리의 본문은 희생제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동시에 일체의 희생제 요구에 대해서 배척하는 예언자적 전통의 입장에 서있다. (참조 삼상15:22 ; 암5:21-24 ; 호6:1-6 ; 사1:10-17 ; 렘6:19-20 ; 7:21ff ; 14:11). 

 

 본문(8절)은 오히려 제물(what)이 아니라 '착하다'라는 이름 아래 야훼께서 추구하시는 인간(who)윤리적 행위들을 그 유일한 대답으로 제시할 뿐이다.  그리하여 대답자(예언자)는 인신희생제로까지 발전하는 '지나친(무도한) 경건의 모델'에 관한 종교적 환상 - 아들까지도 제물로 바치겠다는 종교적 열정 - 을 단호히 배척한다 (참조 창22:11).  비록 배고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제물을 달라고는 하시지 않을 분이시기 때문이다. (시50:12).  여기서 우리는 What으로부터 Who로 전이(轉移)되어 가는 예언자적 정신의 신학적 대 전이를 보게 된다.  즉 송아지나 양이나 기름이나 맏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제의적 일, 그것이 아니라공의(미슈팥)의 실천과 신의(헤세드)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겸손(하츠네아하)만이 하나님이 추구하시는(도레쉬) 선(토브)일 뿐이라는 것이다.
너 사람(아담)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 무엇을 야훼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지 그분께서 이미 너에게 말씀하셨다.  오직 공의를 행하는 것, 신의를 사랑하는 것, 너희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겸손, 그것뿐이니라(8절).
'사람(아담)아!'라는 말은 3절에서 '내 백성아'(암미)라고 한 말보다는 훨씬 더 보편화된 것으로서 하나님과 마주 대하여 있는 모든 인간 피조물이 들어야 할 가르침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보편적 개념(아담)이 그 질문자를 반드시 야훼 하나님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는 이스라엘인이라는 범주를 꼭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에서 온 말은 아니라고 하겠다. 
'공의(미슈팥)를 행하는 것'은 법적으로나 일반적 삶에서나 야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상은 아모스5:21-24와 이사야1:10-17의 예언자적 요구와 부합하는 것으로서 제의를 반대하는 고전적 사상이다.  물론 이 사상은 약자의 권리를 보호해 주려는 의지를 담고 있는 사상이지만 (참조 렘7:5f. ; 22:3ff), 제의적 행위로서 하나님의 호의를 살 수 있다는 제의 지향적 사고에 대한 전면적 거부의 사상이라고 하겠다(what→who).
신의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로 호세아 예언자의 사상의 중심 주제인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적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한 용어이다.   그러므로 헤세드를 사랑한다는 것은 선택 행위와 그 선택한 자에 대한 헌신과 신의를 지켜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공의와 신의는 모두 언약과 같은 사회적 결속 관계 안에 있는 자들에게서 기대하는 용어로서, 사랑조차도 또한 계약적 문맥 안에 들어있다고 하겠다.  이 두 개념(공의와 사랑)이 강조된 것은 이 두 개념의 상호관계성, 즉 공의는 신의의 사랑에 기초되어 있다는 상호관계성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겸손(하츠네아하)'은 위의 두 주제와 분리된 독립된 개념이라기보다는 위의 두 주제의 총괄적인 요약의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겸손'이라는 말은 - [처네아하]라는 동사 - 지혜문학의 본문들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으로서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행위'를 가리킨다.  이 말은 특히 여기서는 오만스럽게 자기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길을 가는 행위, 즉 창세기 5장의 에녹의 경우처럼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사는 것을 가리킨다.  만일 이 말의 의미를 '임마누엘의 신앙'과 결부시킨다면, 이사야의 메시지의 중심 주제(사7:14)와도 부합한다고 하겠다.  '걷는다'를 의미하는 [할라카]는 유대교에서는 윤리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따라서 어떻게 걷느냐는 것 - 누구와 함께 걷느냐 하는 것 - 은 인간의 윤리적 과제 중에서 최대의 것이라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미가6:1-8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격 이외의 그 어떤 희생물(what)이 아니라 인간 삶 자체를 하나님과 그분의 길에 내어 맡기는 인격(who)이라는 것을 예언자적 경고의 형식으로 전해주는 본문이라고 하겠으며, 그러므로 종교의 본질은 제의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반제의적 윤리를 강조하는 예언자적 메시지라고 하겠다.  따라서 우리의 본문은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등의 기원전 8세기 예언자들의 반제의적 교훈을 요약, 집합하고 있다고 하겠다.


 본문 6:6-8은 예배에 참여하려는 자의 자격을 묻는 물음과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그 주요구성 내용으로 하고 있다.  우리의 본문은 "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아갈 때 무엇을 갖추어서 나아가면 됩니까?"라고 묻고 그 여러 가능한 대답들을 제시한 다음 그 일반적 가능성들을 - 주로 제의종교적 관념들을 - 부정하고 그 대신 진정한 예배 참여의 조건들을 간명하게 대답하고 제시하는 것으로 끝나는 특이한 문학적 구조를 갖고 있는 본문이다. 

신앙인이 회의와 위기에 직면하는 것은 주로 하나님과의 거리감(소외감)을 느끼거나 또는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있다고 느낄 때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적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을 이스라엘 제의 종교는 그 오랜 제의사를 통하여 충분하게 습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그 겪는 고난의 위기를 극복할 때는 주로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역사를 예배(제의)를 통하여 회고(짜칼)하고 그 구원사를 되풀이(reciting, retelling, reactualization)함으로서 그 위기를 극복하는 전통에서 발견할 수 있다.
미가6:1-5는 그러한 예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좋은 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소송을 제기하고 이스라엘을 법정에 고발한다.  그 고발의 이유는, 3절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평'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언자는 곧 이러한 탄식의 소재를 소멸시킨다.  즉 야훼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 행적을 요약, 재연함으로써 탄식자는 즉각 그 잘못된 길에서부터 돌이켜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정로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고(6-7절) 그 물음에 대한 대답(8절)을 얻어낸다.
실로 고난으로 인한 절망과 탄식의 분위기가 구원 확신과 희망찬 찬양으로 바뀌는 분위기 전환의 예는 탄원시들 속에서 무수하게 그리고 충분하게 발견할 수 있다.  신의 침묵으로 인하여 고뇌를 겪고 있는 모든 신앙인은, 그러므로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사를 회상하고 현재화하는 신앙훈련을 꾸준히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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