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강해

4.요한계시록의 특징

호리홀리 2014. 12. 15. 12:08

4.요한계시록의 특징


1)종말론


  5장을 보면 누가 책의 인을 뗄 것인가?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라고 나오고 있습니다. 단8:17,19,26절을 보면 ‘인자야 깨달아 알라 이 이상은 마침내 될 일, 끝에 관한 일이다 이상을 간직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12장9절에서는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라, 봉함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을 뗀다고 하는 것은 종말이 온다는 것입니다. 단8,12장의 종말의 성취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양에 의해 시작된 것이지요. 이것이 계시록의 관점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에 의하여 종말이 시작된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하나님나라는 단2장에서 잘 보여줍니다. 느브갓네살이 꾼 꿈은 바벨론부터 시작되는 세상나라를 보여줍니다. 바벨론-페르시아-헬라-로마로 이어지는 세상나라를 뜨인 돌(아람어로 기록되었다. 당시의 세계 공용어)이 부셔버리는 장면입니다. 뜨인 돌은 예수그리스도이며 하나님나라의 영원성과 세상나라의 멸망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로 인한 종말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 땅에 종말이 도래한 것이지요. 동시에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형성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주제는 기독론, 종말론, 교회론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2)교회론


  교회론에는 종말론이 밑에 깔려있습니다. 2, 3장의 7교회, 4장의 24장로, 7장, 14장의 14만4천과 셀 수 없는 무리, 11장의 두 증인, 12장의 여인, 19장의 혼인잔치의 신부, 21장, 22장의 새 예루살렘은 모두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처음과 끝이 교회로 시작되고 마쳐집니다. 이 땅에서의 고난, 혼란, 무질서에 대한 교회의 사명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고난의 때에, 혼란의 때에 무질서의 때에,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계시록2-3장에 나오는 우리말 성경의  ‘편지하기를’이라고 되어있는 것은 원문에는 ‘쓰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기록하라, 전하라’와 같은 선지자적 명령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기록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서신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편지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1) 예수그리스도는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2:1절에 ‘일곱 별 일곱 촛대사이에 다니시는’ 일곱이란 완전수의 사용은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인 것을 선언합니다. ‘이기는 자에게는’(2:7,11,17 2:26,3:5,15,21)말 역시 7번 반복되는 완전수를 사용합니다. 무슨 의미인가? 일곱 교회 즉 오고가는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사탄과 영적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1차 수신자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이지만 그다음 수신자는 모든 교회 즉 우주적 교회를 의미합니다.  전투하는 교회와 성도가 계시록의 중심인 것입니다.


(2)4장의 24장로

  우리의 신분은 엡2:5, 6절과 같이 하나님나라에 있는 존재입니다. 4, 5장은 하늘 성전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청중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이루어져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4, 5장은 배경이 하늘나라이지만 4장은 창조주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5장은 구속주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창조와 구원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 구원은 창조의 회복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창조의 회복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작이지 끝이 아닙니다. 끝으로 오해하면 계시록은 끝의 성경이지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입니다.


  4장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즉 4장은 보좌를 강조합니다.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지요. 보좌를 둘러싼 24장로, 그들은 흰옷, 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 대상24:3-29에서 백성들을 대표하는 제사장을 상징하는 것 같이  24장로는 신구약 모든 성도의 대표입니다.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은 승리한 공동체, 승리한 성도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제자를 상징하는 모든 성도들의 모습은 이미 승리한 자들인 것입니다. 이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은 영적싸움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를 격려하는 것입니다.(요16:33)


(3) 7, 14장

  계시록에 제일 많이 나오는 숫자는 ‘7’입니다. 하늘의 수‘3’과 세상의 수’4‘가 합한 수이지요. 곱한 수는 12가 되는 것입니다. 7은 가감할 수 없는 완전수로 실제적인 수입니다, 일곱 안수집사 중 니골라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여리고성 7번, 나아만의 7번 요단강에 잠그기, 계시록의 일곱 인,일곱 나팔, 일곱 대접 등입니다. 12는 상징적인 완전수로 채워져야 할 수이기에 12명의 제자 중 맛디아를 선택했으며,14만4천 역시 채워져야 할 숫자인 것입니다. 6은 완전수 7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수이며 결코 완전해 질 수 없는 수인 동시에 하늘의 수 3이 적용된 666입니다. 이는 곧 사단의 수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그들의 결국은 실패요 패망이라는 것이 숫자에 암시되어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늘의 수, 셋 666을 쓰고 있으나 이것은 미혹하는 것이며 그들의 결국은 멸망인 것입니다.


  성경의 숫자의 의미를 계시록을 중심으로 잠간 생각해보십시오.

  1은 유일의 숫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습니다. 하느님(하나님의 'ㄹ‘탈락현상: 최현배)이 아닙니다. 또한 일신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범신론사상은 모든 것이 신이라고 믿는 것이지요. 그중에 하나를 믿는 것이 일신교입니다. 즉 다른 신의 존재도 인정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유일신은 다른 것은 모두 인간이 만든 우상일 뿐 하나님만이 유일무이한, 살아계신 하나님인 것을 믿는 것이 유일신론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우려할 것이 있는데 타종교와의 대화라든지 포스트모더니즘사상을 믿는다든지 하여 기독교를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3은 하늘의 숫자이며 하나님의 숫자입니다. 그러므로 3위1체는 숫자로도 하나님의 수 ‘3’인 동시에 ‘1’체인 것입니다. 히브리적 사고는 3중 구분이지요.  부정에서 정결로 나아가는 중간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2중 구조에 익숙합니다. 흑 과 백, 여 와 야, 내편이 아니면 무조건 적이라는 논리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3중 구조는 중보와 조정과 이해함에 익숙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의 중보자요 예수님역시 중보자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3중 구조는 성경적이며  3중 구조를 생활화 한다면 성경적이면서 세상은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 절기도 3대절기인 유월절, 맥추절, 장막절로 나누며 희생제물도 3년 된 것,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3년간 과일을 먹지 말 것 등이 있습니다.


  4는 땅의 숫자입니다. 4방향, 4각형, 4귀, 4바퀴 등 완전한 피조물인 에덴동산에는 네 개의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계시록에는 땅은 4로 나오고 있으며 땅의 심판도 4개로 나타납니다.


  숫자의 조합은 기본적인 암호구조입니다. 3+4=7, 3X4=10, 7+3=10, 4X10=40(고난의 수=땅의 수의 10배수), 4X100=400, 12X12=144, 12+12=24, 인간의 수명을 정하신 숫자도 40X3, 혹은 12X10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14장은 천국의 완전한 모습을 12의 숫자를 쓰며 집중적으로 강조합니다. 크기는 12000스타디온, 성벽의 높이가144큐빗, 12진주문, 12지파, 12기초석, 12사도의 이름 등입니다.


  24장로는 제사장적 기능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있습니다. 지상의 일곱 교회와 천상의 24장로는 대조를 이룹니다. 동시에 같은 교회공동체를 상징합니다. 7장(지상: 셀 수 없는 무리)과 14장(천상:14만4천)도 대조를 이룹니다. 7장의 교회들은 불완전한 교회로서 환란과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그들의 모습을 14장에서 승리한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엡2:5-6, 골3:1-3)


  6:12-17절까지 6번째 인이 떼어지고 8:1절부터 7번째 인이 떼어집니다. 그러므로 7장은 삽입장면입니다.  6:17절, ‘하나님의 진노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아무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7장은 그 해답을 보여줍니다.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 그것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칠 때까지 바람을 잡고 심판을 지연시키고 있습니다. (7:3) 1:1절은 계시의 경로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예수께, 예수그리스도는 요한에게, 요한은 종들에게, 즉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들은 목 베임을 당한자이며 이긴 자이며 승리한 자, 순교자인 것입니다.


  7장의 기록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란 것입니다. 7장은 1-8, 9-17절, 두개의 관점으로 보여줍니다. ‘붙들고 있어라, 이마에 인 칠 때까지’. 인을 치는 것은 소유권입니다. 이마는 가장 잘 보이는 곳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소유란 것이지요. 종들의 숫자는 14만4천입니다. 이는 ‘12X12X10X10X10’ 이지요. 구약의 12지파가 기초를 이룹니다. 민수기1장의 언약백성들입니다. 각 지파별로 12000명, 지파의 수를 통일 한 것은 14만 4천이 모인 실제수가 아니라 상징적인 완전수인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우상숭배한 단지파가 빠진 것 역시 언약백성의 상징인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7:15-17절과 21, 22장은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저희와 함께 계시나니 다시 사망이 없고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표현이 비슷합니다. 21, 22장은 분명 미래적 사건입니다. 현재 교회공동체의 환란은 21, 22장, 하늘에서 누리는 축복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난을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계시록의 기록 목적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믿는다면 현재의 어떤 고난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미래와 연결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합, 소돔, 노아홍수) 최후의 심판이 계시록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심판과 구원은 동시에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인 것입니다.


(4)11장의 두 증인

  두 증인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4절의 두 촛대는 일곱 교회의 촛대에서 보듯이 교회를 상징합니다. 12장의 여자도 교회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양육하는 것은 교회공동체를 양육하는 것입니다. 11:8절의 예수님이 죽임 당하신 곳에서 죽고 3일 만에 부활하고 12절 승천하는 것은 예수님과 같습니다.


(5)14장의 14만 4천

  7장의 땅의 성도는 전투적공동체이며 14장의 하늘의 공동체는 승리한 공동체입니다. 둘은 같은 것입니다.


(6)13장의 두 짐승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적 그리스도입니다. 이것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 14장의 승리한 성도들입니다.


(7)21, 22장

새 예루살렘은 천국의 모습이 아닌 완성된 교회공동체입니다. 성벽의 높이는 144규빗, 가로, 세로는 12000스타디온, 12문, 12지파의 이름, 12기초석, 12사도의 이름이 기록된 12진주문은 교회 공동체의 완성입니다. 에덴의 회복이며 생명나무의 회복이지요. 계시록의 종말론은 창조로 다시 시작됩니다. 에덴의 회복은 회귀가 아니라 더 이상 저주가 없는 영원한 은혜, 승리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두려움을 주는 성경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에 대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역동적인 신앙을 갖게 합니다. 또한 각종 이단과 사설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승리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