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골로새서

골로새서3:18~4:18,그리스도인의 관계

호리홀리 2015. 6. 25. 13:03

골로새서는 '기독론'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1-2장의 중심주제)을 받은 후 이제는 '위엣 것' (3:1-4)을 찾는 '새 사람 (3..10)을 입은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 공동체적 거룩함(3:5-11)과 사랑(3:12-14)으로 그리스도의 평강과 감사를 누리는 삶(3:15)을 살도록 권면을 받는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씀의 가르침과 신령한 노래의 찬양함과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행위와 감사드리는 삶(3:16-17)은 그리스도인들의 적이나 자연스럽고 밝은(긍정적인) 삶의 모습이다(3:15-17)에서 감사를 반복하는 것에서 이 부분에서의 이 주제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16절의 '감사'는 본래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사'와 '은혜'는 사실 같은 의미의 맥락에 있다).이런 맥락에서 본문을 살펴봐야 한다. 다시 말해, 앞부분, 특히 3장 12-17절에서의 긍정적이고 밝은 어조는 감사'의 강조점과 함께 3장 18절 이후의 내용들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3장 18절-4장 1절은 그 당시의 가장 대표적인 상호)대인관계와 관련된 말씀인데 감사등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밝고 아름다운 삶이 먼저 전제되고 그 위에 구체적인 삶의 실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실제적인 삶,3:17)이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특정 관계에서 서로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 안의 일반적인 삶의 원칙(거룩함, 사랑과 용서, 감사, 말씀, 찬양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골로새서의 마지막 부분인 3장 18절~4장 18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3장 18- 4장 1절은 그리스도인의 특정관계에 대한 말씀이고 4장 2-6절은 주로 비그리스도인(외인)과 관련된 말씀이며 ,4장7-18절은 골로새 교회에 대한 바울의 마지막 인사말이다.

A.가정과 직장에서의 대인관계(3:18-4:1)
특정관계(부부관계, 부모 - 자녀관계, 주종관계)에서 서로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 할까를 가르치는 말씀인데, 이 세 가지 관계는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일반(대표)적인 관계의 유형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쌍둥이 서신인 에베소서에서도 이 세 가지 관계의 순서는 동일한데 맨 처음에 부부관계가 나온다는 점에서 당시의 부부관계도 신앙적 시각에서 볼 때 심각한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바울이 오늘날에 서신을 다시 쓴다면, 그 말씀의 근본은 그대로이겠으나 현대를 대표하는 관계의 유형 선택이 조금 바뀌거나 그 배열순서도 약간 다르게 하실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결혼이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이며 따라서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관계라는 점에서 부부관계가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관계임은 불변할 것이다.

 

먼저 이 세 관계와 관련해서 함께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

 

첫째, 부부관계와 부모 -자녀관계는 한 문장씩 다뤄지는 데 비해 주종관계. 특히 증과 관련된 내용의 분량이 많은 것으로 보아 다른 관계보다 이 부분이 가장 이슈가 되고 있었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그 이전에 기록된 갈라디아서 등의 주이슈)와 관련된 문제였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다. 육체적 주인이든, 종이든 모두 한 분 예수님만이 유일한 주인이 되신다. 그래서 종들이 육체의 주인에게 제대로 순종하려 하지 않았을 수 있다. 또한 자유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주인들이 종들을 세속적으로 다 켰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더 상세히 강조한 것으로 이해된다.

 

둘째, 왜 당시의 약자(아내, 자녀, 종)에게 먼저 권면하고 그 다음에 상대적으로 강자인 그룹(남편, 부모, 상전)에 권면한 순서로 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것은 바울의 수사적 선택이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순서를 바꿔 강자에게 먼저 권면하고 그 후에 약자에게 권면했다면 어떤 결과를 낳겠는가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이런 경우, 강자에게 하는 권면(그것은 그릇된 자들에 대한 강력한 꾸짖음일 수도 있는데) 때문에 약자들에게 주는 권면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 있을 것이다. 약자를 먼저 권면함으로써 약자들을 깊은 말씀의 순종으로 이끌고 그 후에 강자들에게 말씀함으로써 두 쪽 모두에 권면의 강도를 인식시킨 것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싶다.

 

셋째, 이 부분과 관련해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비교해 보면 전자는 부부관계에 더 많은 초점을 두고 후자는 주종관계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그것은 전자가 부부관계를 주님과 교회관계로 비유하는 ‘교회론’이라는 본래의 목적과 연관되기 때문인 반면, 이단 등의 문제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권위가 문제시 되고 있던 골로새 교회의 경우에는 권위와 관련된 주종관계가 더 심각했기 때문일 수 있다.


1.부부관계(3:18-19)
아내와 남편에 대한권면이 모두 한 문장씩(호칭 후에 두 개의 절로 구성된 문장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보인다)이다. 아내에 대한 문장은 주절(방편에게 복종하라)과 종속절('이는 주 안에서 마땅한 것이니라 )로 구성된 반면, 남편에 대한 것은 두개의 대등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의 절은 긍정형(아내를 사랑하며'),뒤의 것은 부정형(괴롭게 하지 말라 )의 형태를 갖는다. 아내에게는 '복종하라' 는 말씀을 주신다. 이 단어는 자신을 상대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것이다. 남편을 무시하지 말고 남편의 권위를 존중할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바울은 이것을 주 안에서 마땅한 것으로 보았다. 왜 그래야 하는지 논리적인 설명을 부연하지 않았으나 주 안에서 당연한 것이라 강조한 것으로 보아서 골로새 교회에는 이미 익숙한 교훈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골로새서와 비슷한 시대이지만 그 후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에베소서에서는 이 부분에 좀더 상세한 이유를 덧붙인다). 이것은 짧지만 강력한 말씀이다. 자신을 낮추고 남편을 높임으로 남편의 권위(위신)를 살려 줄 것을 아내들에게 권면하신다. 그것은 모든 아내들이 해야 할 적합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 이상의 말씀이 없다는 점에서 이에 대해 어떤 변명도 필요하지 않은 말씀이다. 이 부분이 결혼생활에 있어서 아내가해야 할 가장 중심 되는 부분이다. 남편에게 권면한 말씀은 앞서 살펴본 대로 '아내를 사랑하라’는 긍정형 명령과 '괴롭히지 말라 는 부정형 명령으로 되어 있다. 아내를 사랑할 것을 강력히 주문하신 것은 아내를 쉽게 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여인을 쉽게 취할 수 있었던 당시의 문화적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명령이다.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통해 다른 여인들을 사랑하지 말 것과 그 자신의 아내를 더 사랑하고자 계속 힘쓸 것을 촉구하는 것인데 이 말씀이 요즘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할 말씀으로 결혼한 그리스도인 남성들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예전이나 오늘이나 사람의 인성은 별로 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를 사랑과 연애의 대상으로 여기라고 바울은 명령한다.
여기서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은 가사노동 등의 중압감과 관련된 말씀이기보다는 그 인격과 마음을 소홀히 하는데 따른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육체적 수고를 덜어 주고자하는 것도 사랑이란 점에서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씀의 영역에서 제외시킬 필요는 없다. 아내의 마음을 쓰라리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앞의 '사랑하라’는 말씀의 다른 표현이다.
아내에 대한 말씀과 남편에 대한 말씀은 너무 간략하기 때문에 그만큼 핵심적인 것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서로에 대해 가장 기본적인 것을 행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본문은 주 안에서 이뤄진 가정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 어떤 변명이 필요 없다. 상대가안 하는 것 때문에 불평하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2.부모 - 자녀관계(3:20-21)
가정에 있어 두 번째로 중요한 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다. 자녀들에게 하는 권면과 부모들에게 하는 권면 모두 각각 주절('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라 )과 같은 기능(이유)을 가진 종속절('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낙심할까 함이라 )을 가진다. 이 문장 패턴은 앞의 아내에 대한 권면과 같은 형태로서(남편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이 같은 권면 형태의 일반적 유형이라 말할 수 있다.아내와 남편에 대한 권면이 각각 (헬라어로) 9개, 10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유사하게 아비(부모)들에 대한권면도 모두 10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저자가 일정한 운율(리듬)을 가지고 본문을 쓰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식이다. 다만 자녀에 대한 권면은 모두 13개의 단어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일에'라는 부사구가 강조를 목적으로 첨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녀들에 대한 말씀에서 이 부사구는 강조된 목적을 살려 이해해야 마땅하다.
'순종하라' 는 단어는 아내에게 권면한 '복종하라’ 는 단어와 다른 것이다. '순종하라'는 말은 상대의 말을 주의해서 듣고 따르는 것을 주로 뜻한다(그래서 종들에게도 이 단어를 사용해서 주인에게 그 같이 하라 권한 것이다. 자녀들이 해야 할 일은 그들의 부모에게 귀를 기울여 듣고 따르는 것이다. 자녀들이 해야 할 그 어떤 것보다 핵심적인 것으로 바울은 이 단어를 선택했다. 특히 '모든 일에' 라는 구를 덧붙임으로 순종해야 할 영역은 자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물론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 그 자체는 타협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 외의 영역은 '모든 알 이라는 것 속에 포함된다. 이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다. 주님께서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그 자신들의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듣고자 하고 따르는 것이다. 여기에는 변명이 없다. 유교 문화가 오랫동안 지배했던 동양의 경우에서처럼 바울 당시에도 가정에서 부모(특히 아버지)가 갖는 권한은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부모(아비)에게 하시는 말씀은 특이하게 부정형 명령으로 격노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자녀들이 그들의 부모 때문에 분이 차 어찌할 줄 모르게 만들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 부모가 자녀로 분을 내게 만드는 일이 어떤 경우인지 돌이켜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자녀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선 역시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자녀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세워줄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격노케' 하는 것과 ‘낙심'하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부모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으로 인해 분노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자녀들이 쉽게 심'하고 마는 것은 흔한 일이다.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육체의 부모에게 맡기신 그분의 자녀들이라는 점을 잊는다면 격노케' 하고 ‘낙심'하게 하는 일은 쉽다. 자녀들이 분노하는 일 그 자체에 대해선 인격체인 이들 자신의 책임을 무시 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자녀들을 도와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일은 부모의 당연한 몫이 아닌가 싶다. 흔들리는 자녀들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부모에게 있음을 인식할 때 부모는 부모대로 주 안에서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마음이 낙심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듯이 육체의 부모들도 그같이 해야 할 줄 안다. 그러므로 이 일의 영원한 모델이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행하신 것을 따라야 한다.

3.주종관계(3:22-4:1)
바울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 보면 주종관계도 부부관계나 부모 - 자녀관계처럼 가정 안에서의 인격관계라 할 수 있지만 오늘의 상황에서는 직장 등에서 인격 간에 맺어진 관계로 확대할 수 있는 부분이다. 헬라단어 10개를 전 후로 사용했던 앞의 명령들의 구문(syntax)의 일관성이 이곳에선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나 첫 문장만큼은(호칭으로 시작해서) 명령과 목적어 등으로 구성된 앞의 문장 패턴이 지켜지고 있다.
종들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하라고 한 것과 동일한 명령(복종하라 )을 듣는다 (특히 문장의 헬라어 첫 세 단어 '모든 일에 순종하라 와 같은 데서 저자의 의도적인 단어 선택이 드러난다). 이 부분은 두 관계의 유사성이 짐작되는 대목이다. 종들은 주인의 말에 귀 기울이고 따를 것을 명령 밀지만 주인에게 순종하려 하지 않는 것은 종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늘의 상전' 이신 주님과 대조해서 '육체의 상관 (주인)으로 표현된다. 하늘의 주인을 섬긴다고 당시 그리스도인 종이 육체의 상전을 섬겨야 할 의무가 감면되는 것은 아니다. 섬기는 태도와 관련해서 ‘눈가림'과 성실한 마음 (마음의 성실함)은 대조가 되면서 바람직한 종의 자세가 무엇인지 말씀해 준다. 보일 때만 하거나, 보이려고 하는 그런 태도가 아니라 마음으로 성실하게 육체의 상전을 섬길 것을 권고한다. 주님을 두려워하는(경외하는) 자는 마땅히 그같이 하는 것이다. 주님을 섬기듯 상전을 섬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23절의 말씀은 앞의 말씀을 더 강화한다. 종은 '무슨 일을 하든지'(또는 '무슨일 인가 하려 한다면')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아야 한다. 종으로서 해야 할 그 일이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어도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로 알고 마음(목숨을 다하여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주께 하듯 하고'(여기서의 '주는 육체의 상전이 아니라 하늘의 상전이신 주님을 가리킨다)에 담긴 뜻이다.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인정과 칭찬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 말씀은 참으로 혁명적이다. 그 당시의종들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어서(눅17:7-10 참조) 종들이 어떤 의욕을 갖고 일을 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이치였다. 주인이 시키는 것만 하고, 주인이 있을 때나 하고, 또 혼나지 않을 정도만 적당히 하는 것은 이런 종들에게는 상식일 것이다. 일부러 애써 열심을 다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제도 하에 있는 종들에게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는 명령은 상당히 지나친 말씀처럼 보인다. 상식을 뒤엎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놀랍게도 오늘날 상전을 모시고 있는 모든 이들(특히 직장인들에게) 상당부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다. 밑의 직원들이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회사는 철저한 감시 시스템을 가동한다. 그래도 직원들은 빈틈을 살피기 마련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들 하라는 이 말씀은 그래서 오늘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이다. 쉴 때 쉬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눈치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맡겨진 일을 제대로 해내려는 성실함을 구하는 밀음이다.
종이 주께 하듯 진실되게 일을 한다는 것은 곧 이 땅에서 맡겨진 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당연히 그 상급은 주님으로부터 받는다(-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않이니' .25절). 육체의 상전이 종에게 상급을 주지 않는 것이 당연했던 문화에서. 눈치를 보며 일에 게으를 수 있던 종이 주님을 믿으므로(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께 하듯 성심껏 행한 것이라면 그 상급을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은 당연하다. 결코 종의 수고가 상실되지 않는 것이다.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그 어떤 일도 주님과 무관한 것이 없다. 주님은 영원한 주님, 모든 이들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하라고 하신 일을 잘하면 상급을 그로부터 받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때는 상급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사실 충격적인 말씀이다. 그것은 그 말씀을 이해하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 말씀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우리네 삶 때문에 충격적이다. 이 말씀은 교회생활이나 주님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처럼 보이는 일만이 주님을 섬기는 일이 아님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모든 일이 다 '주님의 일’이며 주님께서 주신 일이고,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본문은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교회생활 보다 직장생활을 더 중요시 하라는 말씀도 아니고 그 반대의 말씀도 아니며 직장에서의 일도 그 역시 주님의 일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섬기는 이들은 모든 일을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행하며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인정받지 않은 수고를 갚아주실 것을 믿는다. 결국 그 어느 수고도 낭비되는 것이 아니다. 25절의 말씀('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은 일단 22-24절과 연속된 말씀으로 종에 대한 말씀을 마무리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누구든지 불의(잘못) 뜻을 행하는 자는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는 것인데 주님은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시는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종으로서 '눈가림'으로 일하는 사람은 하늘의 주인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종들에게만 아니라 상전'(주인)에게도 적합한 말씀이라 볼 수 있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즉 4장 1절과 상당한 연관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첫째, 3장22-24절의 긍정적인 톤이 25절에서 부정적인 톤으로 바꿔다. 22-24절의 문장 간 결속이 25절에서 약간 느슨해지는 부분이다. 둘째, 내용상 25절은 앞부분과 뒷부분 모두와 연계된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앞부분과 연계해서 해석한다면, 25절은 (육체의 상전에게서 상급을 받지 못하는) 종이 최선을 다하지 않고 눈가림으로 하는 '불의(잘못)를 행했을때 그 보응을 받을 것을 경계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주인이 ‘의와 공평'으로 종들에게 대하지 않는 것을 불의(잘못)를 행하는 것이라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다. 셋째, 이 불의의 문제와 연계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오히려 종들에 대한 말씀이기보다는 주인과 관련된 말씀일 가능성이 많다. 즉, 주님께서는 신분이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주인이거나 종이거나 불문하고 잘못을 행한 자는 보응을 받는다는 것으로 이해되는 말씀이다. 이는 종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말씀이지만, 특히 주인과 관련된 말씀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넷째, 이렇게 볼 때, 저자는 25절을 종과 주인의 중간 부분에 삽입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종에 대한 연속된 말씀으로 보게 되지만 실제에 있어선 양쪽(종과 주인) 모두 이 말씀에 주목하게 하는 수사적 효과를 의도 했을 가능성이 많다.1
술어가 먼저 나왔던 이제까지의 문장 패턴과 달리, 상전'(주인)과 관련된 구절(4:1)은 목적어('의와 공평을 )를 먼저 씀으로 이 내용을 강조했다. 즉, 상전에겐 의와 공평을 행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의 상전들이 종에게 의례 그렇게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되는데 여기서의 ‘의'는 종들이 억울하게 대우밀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공평'은 말 그대로 종들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편애하지 말라는 뜻과 함께, 혹 모든 인간이 한 주인(주님) 앞에서는 인격적으로 동등하다는 ‘평등사상'을 암시하는 단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하신 이어지는 말씀이 이것을 지지한다.
빌레몬서 등에 나타난 바울의 노예제도에 대한 견해는 결코 혁명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말씀의 내면을 흐르는 정신은 노예제도를 분명 거부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제도상 이 제도 자체를 폐지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세속과는 다른 노예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사상이었다.
'하늘의 상관은 육체의 상전의 모델이 된다. 그분이 그의 종들을 대하듯이 그들도 종들에게 그같이 대하라는 것이 바울의 권면이기도 하다. 혹독한 징계와 억압은 불의한 것이다. 일에 따른 마땅한 상급(꼭 물질이 아니더라도)은 당연한 것이다(의). 반면에 모든 인격이 동등하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 또한 중요하다(공평).이 두 가지의 기준은 윗자리에 있는 이들이 그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행사해야 할 지도력의 기본 원리가 된다. 이 둘은 서로 보완적 관계를 가진다. 수고한 사람의 수고를 인정하는 것, 그러나 동시에 능력이나 외모로만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인의지도력에 함께 필요한 요건이다. 앞서 언급한 적이 있듯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상호관계는 그 관계에 또 다른 인격(Person)인 하나님(주님)이 개입하심을 늘 전제한다. 따라서 주인이 종을 대할 때나 종이 주인을 섬길 때 그 사이에 주님(‘하늘의 상전')이 계신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 이것을 잊지 않으면 성공하는 것이다.

B.비그리스도인(외인)과의 판계(4:2-6)
이 단락은 기도에 대한 권면의 말씀(2절)으로 시작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주제는 비그리스도인(외람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가정과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를 다루는 앞의 말씀(3:18-4:1)에 이어 비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4:2-6)으로 이어진다. 한편으로, 그 이전의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된 주제들, 즉 거룩함과 사랑과 찬양과 감사 등의 연속된 주제들(일반적인 권면)의 나열(3:1-17)이, 조금 다른 각도(특정 대상들에게 권면하는)의 단락(3:18-4:1)으로 잠시 끓어진 듯 보이다가, 이 단락(4:2-6)에서 기도의 주제(일반적인 권면으로서)를 거론함으로써 그 이전의 단락들과 다시 연계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엿보인다(3:15-17에서 반복되었던 감사'와 '은혜'가 4장2절,6절에 각각 다시 나온다는 점도 그렇다.) 이런 점에서 3장의 흐름이 4장까지 연속된다

1.기도와 전도(4:2-4)
3장 18절~4장 1절의 독자들내의 상호관계(부부, 부모 -자녀, 주종에 대한 말씀이 기도와 관련된 이 부분에서 하나님과 독자들, 그리고 저자 그룹(바울의 그룹, '우리')의 삼방향 관계로 바뀐다. 여기서 기도의 주제는 이제 삼방향 관계와 관련되고 있다. 저자 그룹('우리')은 독자들에게 그들을 위해 기도(중보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다. 독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되 이 '우리' 그룹을 위해 기도하고 이 기도에 힘입어 '우리'는 담대히 전도한다. 이제 '우리'와 전도의 대상들과의 관계는 부각된다.3 우선 2절은 기도에 대한 권면으로 시작한다. 첫째, 이것은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지나침이 없다. 어쩌면 이제까지의 관계적인 모든 문제의 해결의 출발점이 기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기도해야한다. 둘째. 기도는 계속되어야 하며 기도는 늘 해야 할 그 무이다. 셋째. 기도는 생활화 되어야 한다. 즉 늘 기도로 깨어 있어야한다. 모든 일에, 모든 것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넷째, 기도에 감사함이 연계되었다. 기도의 자세와 관련해서 감사함을 말씀했다. 그것은 기도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간구의 성격만으로는 불완전한 것이고, 오히려 과거와 현재까지 이루신 일에 대한 감사와 미래에도 역시 이루실 것에 대한 소망과 믿음으로 인한 감사가 더해져야 함을 말씀하는 것이라 본다.이렇게 기도하는 자만이 사실 타인을 위한 중보기도의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골로새 교인들의 기도를 구하는 바울의 요청은 중보기도의 능력이 어떤지 아는 사도의 겸손함이다. 이들이 기도할 때에 또한 (동시에) '우리'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바울이 요청한 중보기도의 내용(3-4절)은 철저히 복음전파를 위한 것이다. '전도(말씀)의 문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사도의 심정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비밀' 에 심취해 있는지 그래서 얼마나 그 비밀을 전하고 싶은지 그 열정을 느끼게 한다. 그는 이를 위해 '매임'(감옥에 갇힘)까지 받았다. 그 어떤 비용을 지불해서라도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길 소원하는 사도는 그렇게 할 수없는 환경('매임')을 넘어서서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골로새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다. 바울('나')이 확신하는 것은 이런 기도를 통해 마땅히 할 말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복음시적, 선교사역에는 이같이 기도가 필요하다. 기도를 통해 문이 열리고 기도를 통해 증거의 힘을 얻는다. 물론 교회와 전도주체들의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열심과 각오도 중요하다. 그러나 기도가 없이는 담대한 능력과 지혜의 말씀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바울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2.외인에 대한 태도(4:5-6)
이 두 절은 골로새 교인들이 외인(교회밖에 있는 사람), 즉 비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를 권면하는 말씀이다. 첫째, '지혜로 행하라’ 말씀하신다(5절).이 말씀은 구체적이지 않은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 상제한 뜻을 파악하긴 어렵다. 그러나 골로새서에서 '지혜' 라는 말이 주로 하나님의 주시는 깨달음과 관련해서 사용되며(1:9),또한 이 '지혜'는 상대를 권하고 가르치는 것과 관련해서 쓰인다는 점(1:28:3:16)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다만 여기서 지혜로 가르치라 하지 않고 '지혜로 행하라(살라') 함으로써 그리스도인 자신이 먼저 행함, 즉 삶의 본을 보일 것을 말씀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혜로 행하라’ 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로 먼저 그렇게 살도록 권유하는 말씀이다. 둘째, '세월을 아끼라 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시간을 구속하라’ 는 말인데 이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최대한 이용할 것을 권면하는 말씀이겠다. 그것은 앞의 '지혜로 행할 것'을 보충해 준다. 지혜로 행하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쓸데없는 일에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일에 오히려 시간을 활용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말씀이다. 셋째, 외인에게 하는 말은 '은혜' 가운데 해야 한다(6절).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과 직접 , 간접으로 연계된 단어이다(3:16참조 개역에선 ‘감사' 로 번역). 그러므로 이 말씀은 말을 할때마다 항상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즉 그 사랑 안에서, 또는 그 사랑으로, 그리고 상대방에게 그 같은 은혜가 미치도록 (엡 4:29 즉, 덕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넷째, 앞의 말씀에 '소금으로 고루게 함(간을 맞춤)이라는 어구가 덧붙여진다. 이것은 말을 상황에 적합 (또는 적절)하게 하는 것을 할 것이다. 아무 때나 아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적절한 말을 적합한 때에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지혜로 행하는 것'과 관계될 것이다.
다섯째, 이같이 할 때 각 사람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알게 될 것이다. 개별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으 로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 이 말씀은 외인에 대한 전도나 복음전파(4:3-4;벧전3:15 참조)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중보기도의 요청에 이어, 외인에 대한 전도의 이슈로 시작했던 말씀(4:3-4)이 다시 전도의 주제(4:6)로 마무리된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4장 2-6절에서 본동사는 2절의 기도를 '힘쓰다’와 4절의 지혜로 '행하다'인데 이 말은 외인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다를 때 먼저 기도하는 것과 지혜로 행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전파나 전도하려는 시도도 이 두 명령(기도에 힘쓰는 것과 지혜로 행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해,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이 전도에 우선되는 것이다. 이 둘이 함께 전도를 가능케 하는 문의 역할을 한다.

C. 바울의 마지막 인사(4:7-18)
순회서신이라 할 수 있는 에베소서와 달리골로새서가 일차적으로 골로새 교회라는 특정 지역의 특정 교회를 위한 서신인 점이 이 부분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첫 부분(4:7-9)은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위해 보내는 인물들(두기고와 오네시모)에 대한 추천의 글로서 이 인물들은 바울의 심부름으로 이 서신(골로새서)을 가지고 그들에게 나아갔을 것이다. 두번째 부분(4:10-14)은 바울과 함께 있는 분들의 인사를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이 대신 전하는 내용으로 이글 또한 단순한 인사의 글만이 아니라 이들을 추천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문장 초두에 '문안한다’라는 단어가 세 번(10, 12 14절) 반복되어 나타나면서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 에바브라, 누가, 데마의 문안인사를 담았다. 마지막 부辯4:15-18)은 바울의 문안과 함께 마지막으로 당부할 것을 한두 가지 더 추가한다.

1.두기고와 오네시모의 추천(4:7-9)
두 사람의 파트너 가운데 두기고가 선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순서상 앞설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언급이 더 많기 때문이다. 두기고를 보내는 목적은 7절 앞부분과 8절 부분에 나온다. 이 두부분은 사실상 같은 내용을 반복한 것이다. (내 사정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그럼으로 그를 보내는 목적이 무엇인지 강조했다. 8절 뒷부분의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는 내용은 앞의 내용을 좀더 부연해 주는 것인데 로마 감옥에서의 바울의 형편을 알림으로 바울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인해 마음의 위안('위로’)을 받도록 하기 위해 덧붙인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바울의 감옥생활이 부정적이고 어두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승리의 생활방식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그 중간에 두기고가 어떤 존재인지 소개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 , 신실한 일군' ,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으로 소개된다. 처음의 것은 그가 사도등과 평소에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 주고, 두 번째 것은 그가 얼마나 주님의 시적에 충성된 존재인지를 보여 주며, 세 번째 것은 주님 안에서 바울과 함께 동역자로서 사명을감당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세가지 소개는 골로새 교인들로 두기고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도록 해준다. 이 소개를 인해 골로새 교인들은 그를 신뢰하며, 존귀하게 대접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결국 바울은 두기고를 세워 준 것이다. 두 번째 인물은 오네시모이다. 그는 빌레몬서의 그 '오네시오 ’인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여기서 그에 대해 세 가지 정보를 준다. 그는 믿음에 있어 '신실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두기고처럼 '사랑하는 형제' 이다. 또 그는 예전에 골로새 교회(또는 지역)에 있다가 바울에게 왔던 사람이다(오네시모의 육체적 주인이었던 빌레몬이 골로새 교회의 성도였을 가능성이 많다. 골로새서의 문안인사의 부분에 나오는 인물들, 즉 에바브라,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빌레몬서에서도 동일하게 나오는 것은 이 두 편지가 동시적으로 또는 비슷한 시기에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많음을 보여 준다. 이렇게 본다면 앞에서 3장22절~4장 1절의 주종 관계에 대한 말씀은 빌레몬서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즉 바울은 노예제도에 대해 급진적인 견해를 주장하지는 않았다는 점. 그러면서도 기본적으로는 노예나 주인이나 다 주 앞에 평등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 등이다. 이 부분은 앞에서 지적한것과 같다.
오네시모의 소개 다음에 또 다시 ‘저희가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는 내용의 말을 덧붙임으로써 앞서 동일한 목적과 목적 사이에 두기고를 소개했던 것처럼, 두번째 반복된 목적과 마지막으로 반복되는 목적 사이에 오네시모를 소개해서 문학적 패턴을 일치시켰다. 즉, 목적1 - 두기고 소개, 목적2-오네시모소개, 목적3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목적1,23은 의미상 같은 내용으로서 이런 패턴의 사용은 두기고와 오네시모를 각각 귀한 존재로 부각시키면서 이 두 사람의 공통된 목적이 어떠한지를 강조하는 데 목적이 있다.

2.문안하는 사람들(4:10-14)
10-11절에서 '문안한다’의 첫 번째 사용은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의 문안인사와 관련되어 있다. 아리스다고는 당시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그는 본래 바울과 함께 사역에 참여했던 사람이다(행19:29:20:4).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로서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바울의 1차 선교여행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온 인물로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선교여행을 할 때 그의 문제로 인해 서로 갈라지게 된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감옥 속에 있는 바울은 이제 마가를 다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딤후 4:11). 세 번째 인물은 유스도라 하는 예수이다. 예수는 유대식 이름이고 유스도는 로마식 이름이다.
이 세 사람은 모두 '할례당’(11절), 즉 유대인들이였다. 유대인 중에서 특별히 이들이('이들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함께'애쓰는(동역하는) 사람이라고 바울은 소개한다. 이들이 바울에게 위로가 된다고 덧붙인다. 많은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으면서, 주로 이방인들을 위해. 이방인들 안에서 사역해 온 바울에게 유대동족인 이 세 사람의수고가 바울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두 번째 '문안한다’ 는 동사와 함께 소개되는 사람은 에바브라이다(12-13절). 바울이 에바브라를 소개할 때 다른 사람에 비해 많은 단어를 사용하여 소개하는 것은 그가 바울과 골로새 교회에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또 너희에게서 온 인물’로 소개된다. 그는 항상 이들 성도들을 위해 기도 가운데 애를 쓰는데 그들을 위해 힘써 기도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충분히 성취되도록)서기' 위해서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흔들림 없이 온전한 성숙함을 얻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완전'과 ‘확신'이라는 말속에 기도가 계속되어야 할 이유와 목표가 있음을 본다. 13절에서는 에바브라의 기도의 대상을 확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골로새 교회만 아니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도 그가 많이 수고(기도)한다고 바울은 증거한다. 이렇게 그는 기도의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특별한 비중을 두고 소개한다.
세 번째 '문안한다’ 는 말과 관련된 인물은 누가와 데마이다(14절).누가는 의사라는 것과 그가 바울 등에게서 '사랑을 받는 자라는 데에서 특별한 인물임을 보여 준다. 아마 누가가 제일 마지막 부분에 소개된 것은 그가 골로새 교회와 특정한 연관성이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반면에 데마에 대한 소개는 아무것도 없다. 데마는 후에 디모데후서4장 10절에서 세상을 사랑해서 감옥에 있던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간 인물로 소개 되는데 어쩌면 골로새서를 쓸 이 때부터 그런 조짐이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3.마지막 당부(4:15-18)
이 부분에는 바울의 직접적인 인사말이 추가된다. 사도는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한다. 골로새 교회에 대한 인사말은 사실 1장 I~2절에 이미 나왔다. 여기선 이 서신이 후에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돌려 읽혀질 것을 염두에 두고(16절) 그곳의 교회에 대한 인사말을 덧붙인 것이다. 또한 바울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편지는 골로새 교회가 받아 읽도록 권유하고 있다.
바울은 마치 잊어버렸던 것이 생각난 듯이 아킵보에 대해 17절에 쓰고 있다. 그는 빌레몬서 2절에도 나오는 인물로 빌레몬의아들이나 빌레몬의 집에서 모이는 가정교회의 지도자가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아무튼 아킵보는 모종의 사역을 맡았다(혹시 그 사역이 빌레몬서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주 안에서 그 일을 성취해야 할 책임이 그에 있다. 둘째 . 그런데 3장 18절~4장 1절을 중간에 삽입 한 것은 이 부분을3장 1-17절과 연속해서 이해하게 하면서 동시에 이 부분의 내용(인격관계적인)을 부각시켜 강조하려는 언어적 효과를 목적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외인들과의 관계보다 주 안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상호관계가 늘 우선된다. 다른 말로 해서, 그리스도인 내적 관계가 출발점이라면 외인관례는 그 적용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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