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골로새서

골로새서3장,성도의 삶

호리홀리 2015. 6. 25. 12:42

본문을 잘 살펴보면 세 번 “그러므로”(1.5,12절)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결국 본문이 이 단어와 함께 세 단락으로 나누어 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 단락을 지배하는 핵심단어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이다.

 

첫째 단락에서(1-4절) 하나님은 신자들이 추구하는 '위"의 중심에 자리 잡고 계신 것(1절)과 신자들의 생명이 보호받는 "안"의 범위를 확보하고 계신 것으로(3절) 설명된다.

 

둘째 단락은(5-11절) 신자들이 땅의 지체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며(6절), 신자들이 옛 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0절).

 

셋째 단락에서(12-17절) 하나님은 신자를 선택하고(12~17절) 용서하신 것(13절)으로 소개되며 , 신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16절), 감사(17)절 것으로 언급된다. 하나님은 선택과 용서의 주체이시며, 찬양과 감사의 대상이시다. 본문은 대체적으로 결단과 헌신을 요구하는 2인칭 명령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본문은 언뜻 보면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자발적인 결단과 헌신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본문은 실제적으로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강력한 도전과 요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가 위엣 것은 찾아야 하며 땅엣 것은 버려야 하고, 세인의 생활을 벗어야 하며 신자의 생활을 입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그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런 삶을 추구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점이다. 그 힘은 신자 자신에게서 나오는가? 결코 아니다. 그 힘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첫째로 하나님은 신자가 추구해야 할 중심이시며, 신자가 거주해야 할 내부이시다(1-4절). 하나님은 중심과 내부로서 신자에게 능력과 생명을 공급하신다. 신자는 중심이시며 내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능력과 생명을 얻는다.

 

둘째로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형상은 신자에게 좌우로 완벽한 균형을 잡고 가까이 있다(5-11절). 신자가 순결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하기 때문이며, 신자가 변화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신자에게 순결을 지키게 하고, 하나님의 형상은 신자에게 변화를 구하게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선택과 용서는 신자의 실천의 원동력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말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어라'(12절).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피차 용서하라'(13절).또한 하나님에의 찬양과 감사는 신자의 생활의 추진력이다. 신자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에 교훈과 마음을 통제하며(16절), 하나님께 감사하기 때문에 말과 일에 조심한다(17절).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깊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신자의 바른 삶을 위한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성도의 삶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이것은 주로 세 가지 방면으로 진술된다.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의 관계 (3:1-4),그리스도인의 자신과의 관계(3:5-11), 그리스도인과 타인과의 관계(3:12-17 [4:6])

 


1)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의 관계 (3:1-4)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관계는 생명적인 관계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는것, 성도들의 계속되는 삶의 조건이다. 조건문에 주의하라 ("...이라면").
“함께 일으키심을 받다"는 말은 동거(同居)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거주의 관계가 아니라, 생명의 관계이다.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다(2:12). 이것은 단순히 함께 거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함께 생명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함께 일으키심 받은 것"은 생명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생동적인 결과를 가져다준다. 따라서 이 결과는 '위엣 것들을 찾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리스도인을 예수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하나의 큰 성격을 배우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위엣 것들을 찾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온 시야가 상향적이다. 그런데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위엣 것들은 도대체 어떤것인가? 사도는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위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명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위의 것들을 기독론적으로 이해시키고 있다.

 


성도들의 삶을 기독론적인 면에서 강조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첫째로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묘사함으로써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조명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위엣 것들을 찾는다는 말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하듯이,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해야 할 것을 배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듯 우리도 하나님의 우편에 있어야 한다. 둘째로 여기에서 우리는 아직은 부동(不動)의 예수를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아직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러나 언젠가 예수께서는 움직일 것이다. 그분은 '나타나신다'(4절).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의 생명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인가를 행할 것을 요청하신다는 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사도는 이어지는 단락에서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 것을 알려준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엣 것을 생각하는 자세이다(2절)
“위엣 것들을 생각하고, 땅엣 것들을 생각하지 말라'. 생각의 방향성에의 교정!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일은 생각의 방향을 교정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그리스도인들에게서 죽음과 생명이 교차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자들이며, 동시에 산 자들이다. 죽음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 6:14).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다. 생명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생명을 감추고 있는 자들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생명은 철저하게 확보된 것이며, 완전하게 보호를 받는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점이 있으며,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만큼 그리스도인들은 부요한 자들이다. 이 그리스도인의 부요함은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관계에서 성립된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만일에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면, 대단히 강하고 부요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도무지 상황의 변화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부요하게 만든다.

2)그리스도인과 자신의 관계 (3:5-11)
(1)이전과 이제 (5-8)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것을 확인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처음부터 엄격한 말을 전하고 있다. '땅에 있는 지체들을 죽이라'. 죽이라는 단어는 무서운 표현이다. 왜 사도는 이처럼 험악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가? 이것은 대상이 철저히 파괴해야 할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에게 한 조각도 남겨둘 수 없는 악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땅에 있는 지체들이라고 불리는 이것들은 일단 조금이라도 허락하면, 잠식당하고 결국은 멸망에 이른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죽이든가, 이것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든가 이다. 이처럼 죽여야 할 땅에 있는 지체들이란 "음란. 부정, 사욕, 정욕, 탐심"이다. 탐심에 대하여는 특별한 수식어를 달고 있는데 그것은 앞에 말한 모든 악한 것들의 근본을 탐심이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탐심은 근본적이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거부하게 만드는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땅의 지체들에 대하여 가지는 태도를 "이전"(7절)과 “지금"(8절)이라는 단어를 대조시켜서 설명한다. 이 두 단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 그리스도인이 된 후의 상태를 나타낸다


사도가 1:21-22에서와 같이 이렇게 시간적인 이분법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첫 상태를 구태여 언급하는 이유는 시간이 지나고, 잘못된 교리가 침투하여 지금 가지고 있는 구원의 가치가 희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구원의 위대함이 식상화되고, 변질된다. 이제의 큰 축복이 망각된다. 따라서 이전을 회상함으로써 이제의 가치가 회복된다. 이전의 상태가 더 이상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가 강화되기 위하여 이전을 기억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전에는 우리 모두가 이 땅의 지체들 안에서 .행하였다(7절). 이것들 안에서 살았다. 성도들도 과거로 말하자면 별 볼일 없는 인간들이다.
그러나 이제가 중요하다(8절). "이제는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있다'. 사도는 벗어버린다는 단어를 현재형(직설법)으로 사용하여 이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임을 표현한다. 성도들이 계속해서 벗어 버려야 할 것은 분, 악의, 훼방, 입의 부끄러운 말이다. 그런데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이러한 거룩함을 추구하는 모습 나타나지 않는 것이 무슨 까닭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더러운 말을 지껄이고, 욕설을 내뱉는다. 사람이 심장은 고쳐도 마음은 고치지 못하고, 이는 고쳐도 말은 고치지 못하는 법인데, 그리스도 안에서는 심장은 죽어가도 마음을 고치고, 이는 썩어가도 말을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자들로서 변화를 추구하라! 땅에 있는 지체들을 버리고,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향하라!

(2)벗음과 입음 9-11

 


이 잘은 변화로부터 사도가 요청하는 것은 서로에 대하여 거짓을 버리라는 것이다(9-10절). 이것은 단순히 서로를 상해하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성도됨을 속이는 일을 하지 말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은 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서로 거짓을 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상호 진실됨은 첫사람을 포기하고, 새사람을 입는 것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다. 사도는 이 일을 위하여 '벗으라‥‥ 입으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첫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은 그것을 장식하던 모든 장신구(행위)를 함께 벗어버리는 것이다. 옛 사람의 장신구는 음란 등등이다(5,8절). 옷을 벗는 사람은 옷의 장신구도 벗어버린다. 옷을 벗고 장신구를 다는 사람은 없다. 첫 사람을 벗으면 옛 행위도 벗는 것이다. 그러나 벗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제 입는다. 새 사람을 입는다. 사도는 새 사람을 입는 것이 너무나 감격적인 일이기 때문에 비슷한 단어를 두 번 사용하여 강조한다 '새사람, 새롭게 되는 사람" .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자연적인 변화도 아니며, 자의적인 변화도 아니다. 인간은 새로운 사람이 되는 일에 관한 한 수동적이다. 새 사람이 되는 일은 신적인 행위에 의한다. 이것은 내적인 표준에 의한 새로움이 아니라, 외적인 표준에 의한 새로움이다. 오직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된다. 처음 인간이 창조될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것과 같이 새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새롭게 된 사람들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인식에 새롭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인식에의 변화를 체험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아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된 사람은 바른 인식기능을 가지게 된다. 많이 아는 것보다 바로 아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구속된 새사람은 드디어 바른 인식을 회복한다는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 사람이 되어 바른 인식을 가지게 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창조주 없는 사고를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고, 하나님을 거슬리는 문화와 싸우는 것이 가능하다. 사도 자신도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었기에 "이론들과 하나님 지식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파하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킨다” (고후 10:5)라고 말한다. 사도는 바른 인식을 가지고 두 가지를 행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상이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하는지 통찰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사상과 싸운다.

3)그리스도인과 타인 (3:12-17)
(1) "처럼"과 "같이" (3:12-14)

사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입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이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분 때문에 그에 걸맞는 것을 입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 신분이 란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12절)과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라는 (13절)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 신분은 “성도"이다. 사도는 성도들이 입어야 할 것으로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을(12절) 말한다. 이것들은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는 것 (3:13)과 사랑을 더하는 것 (3:14)으로 실현된다. 이것은 상대방을 보충하는 은혜적인 수여이다. 말하자면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치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과 같이 우리도 은혜를 베푼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은혜사이에 등식이 성립된다.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충격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갈수록 은혜를 베푸는 일은 깊어진다. 이제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과 더불어 은혜를 실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데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사랑을 받은 성도들이다. 이 세상에 살아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어도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이들이다. 이 세상에서 거룩해야만할 자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낮선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성도라는 인식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사랑을 받는다는 하나님께의 소속을 의식하며 거룩함을 실천해야 한다. 이 거룩함을 위하여 입어야할 것들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할 것은 '서로'라는 단어의 변용이다. 우리는 '서로"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서로"는 인간 창조에서부터 시작된 개념이다. "홀로"의 그리스도교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서로"로서 성립되며, 그로써 가치가 있고, 강하다. 사도는 '서로"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완벽한 그리스도인들이 모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여기에는 다툼이 있고, 마찰이 있을 수가 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점이 있거든'(13절).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마찰이 두려워서 피하는 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을 극복하는 이들이다. 극복할 수 있기에 강하다. 인간(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긍정하며, 또한 이것을 해결할 것을 긍정한다.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는 용납과 용서로 실행된다. 사도는 아래에서 '서로'를 위한 예로 부부관계, 부모 자녀관계, 주종관계를 진술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모든 영역에서 '서로"를 실현한다.

(2)평강과 말씀 (3:15-17)

여기에 사도가 잊지 않고 우리에게 더하여 주는 권면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평강과 그리스도의 말씀에 관한 것이다. 진정한 평강은 그리스도의 평강이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아니고서는 어떤 평강이 가치가 있는가? 사도는 이 평강이 마음을 지배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이 평강으로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이 평강에 어떤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한 몸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평강을 가진 자들이 한 몸인 것을 안다. 그리스도의 연합에 대한 사도의 생각은 그리스도의 평강과 관련되어 있다. 이 그리스도의 평강 아래에 있는 자들이 결국 '감사하는 자들이 된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어느 정도 감정적인 면을 강조한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훨씬 지성적인 면을 강조한다. 사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이 거주할 것을 권면함으로써 우리의 지성체계에 변화를 강조한다(참조. 10절). 이미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었다면, 그가 새로운 지성체계를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거주로 가능하다. 이것은 풍성하게 거주해야 한다. 만일 이것이 실현된다면, 이제 우리는 지성의 변화로써 이 세상의 지성에 대하여 새로운 자세를 가지게 된다. 모든 이론을 파하는 강력을(고후 10:4)! 이로부터 파생하는 효과는 네 가지이다. 모든 지혜로 가르친다(3:16). 서로 권면한다(3:16). 찬송한다(3:17).감사한다.(3:17).

평강은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매여있을 때에 온다. 비록 이 세상에 살아도 그리스도에게 매여 있으면 이 세상에서 전쟁을 만나며 근심의 환경에 처해도, 그리스도에게 매여있으면 그분의 평강이 다스린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 모든 사람이 흔들리고 요동할 때에도 그리스도인이 평강한 것은 그리스도의 평강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