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6장,무엇을 심고 계십니까?

호리홀리 2015. 6. 12. 09:34

갈 6:7-10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것은 자연 법칙에서 가져온 대단히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원리(7b-8절)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농사짓는 법에 대해서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님니다. 분명히 영적인 원리를 가르치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심는다는 것은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간 속에서 행하는 모든 행동을 말합니다. 우리가 시간 속에서 투자한 대로 그 열매를 거둘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대로” 거두리라는 것을 힘주어 말합니다. 심는 그것을 바로 거두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심는 것에 관한 중요한 자연 법칙 중의 하나는 무슨 씨를 뿌렸는가에 따라 그것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오이씨를 심고 아무리 열심히 물을 주고 빌어도 고추가 열리지는 않습니다.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추를 심고 아무리 열심히 소원을 빌어도 오이를 거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힘주어서 말하는 것은 씨를 심은 다음의 노력보다도 어떤 씨를 심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실 열정적인 사람으로 열심히 인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유대교에 있을 때는 무슨 씨를 뿌리는가보다 열심히 물을 주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13-14에서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런데 바울은 열심히 물을 주는 것보다 무슨 씨를 뿌렸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8절 말씀에 보면 우리가 인생에서 뿌리는 씨는 여러 가지인 것 같지만 결국에는 두 종류로 귀결됩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입니다. 씨로 말하자면 “육체의 씨”와 “성령의 씨”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인생에서 뿌리는 씨앗은 둘 중의 하나 밖에 없습니다.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절대 선과 절대 악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 같이 한 인간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인생에서 뿌리는 씨앗은 백 아니면 흑, 선 아니면 악, 둘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다양하지만 사람이 뿌리는 씨앗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는 바울이 바로 앞 장에서 잘 대비해 놓고 있습니다. 육체의 열매란 한 마디로, 육체로 각 개인이 구별되듯이, 인생이란 한 개인이 개인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곧 육체의 열매란 이기심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불신자는 이게 무엇이 나쁜 것이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신자는 기본적으로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진리로 보면 인간은 피조물로 사는 것이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또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육체의 씨를 뿌리는 삶입니다.

반면 성령의 씨를 뿌리는 것은 자신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사는 살을 말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다른 사람과도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앞에 있는 갈라디아서 5:22-23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대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지요. 갈라디아서 5:24에 있는 것처럼 그 정욕과 탐욕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삶입니다.


바울은 씨의 열매에 대해서 말합니다. 육체를 위해서 심는 자는 썩어질 것, 즉 멸망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둡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열매요 결과입니다. 우리가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하늘 아래서 살지만 우리가 무슨 씨를 뿌리고 사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과연 무슨 씨를 뿌리고 있는가?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9절)

크리스천은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이것이 현실적으로는 반대로 현상이 나타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야 하는데 거꾸로 현상도 많이 봅니다.  선교, 봉사자로 갔던 사람이 죽고 억류되어 있는 것이 그 예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정직한 사람이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회사에 들어가도 실력이 있는 사람보다도 이른바 “빽”이 있는 사람이 승진을 더 빨리합니다. 정직하게 장사하는 사람보다 편법을 쓰는 사람이 성행합니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보다 아부하는 사람이 승진합니다. .... 

이럴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결국 나중에는 믿을 것은 돈과 권력 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9절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즉 하나님의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을 끝까지 믿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때가 이르매 거두리다.” 그 때는 언제인지 우리는 정확히 모릅니다.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때로는 그 때는 이 세상에서는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행동을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7a절)

본문의 핵심 단어는 “심다”라는 동사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7b절)라는 것이 핵심 교훈입니다. 또 그것에 대한 설명이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에 대한 것입니다(8절). 또 한 가지 교훈은 하나님의 때에 이 법칙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9절). 그런데 여기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7a절). 언뜻 보면 이것이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과 무슨 연관이 있나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연관성이 높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을 바울이 왜 이야기 했는지 이유가 바로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영적인 원리를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대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요, 이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면박을 주지 않아도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하면 사실 그 사람을 조롱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중요한 영적 원리를 무시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업신여기심을 당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한 것을 다 보고 계시고, 심판하시기도 하시고 상을 주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살게 되는 일이 많은데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스스로 하나님을 완전히 따돌렸다고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참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속인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6:3에서도 이미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과대망상에 빠진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스스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자기 합리화, 정당화, 이 모든 것은 이 부류에 하는 것입니다. 교만, 열등감 등은 모두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는 것도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인생 최대의 속임은 자기가 피조물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하나님처럼 스스로가 스스로를 위해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을 바울이 한 것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하자는 구호가 아닙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심는 그것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심은 그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성령을 위해서 심는 것, 아니면 육체를 위해서 심는 것. 우리의 삶을 돌아봅시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심고 있습니까?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썩을 것을 위해서 심고 있습니까? 아니면 영생을 위해서 심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