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2:20,그리스도인의 자아의식

호리홀리 2015. 6. 11. 13:03

 우리의 몸은 뇌의 지시를 받아 움직입니다. 단순히 손발이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뇌가 지시해서 우리의 몸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뇌는 생각을 몸에 전달하여 그것이 움직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행동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어떤 패턴대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뇌에는 일정한 패턴의 생각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태어나서 여러 경험으로 형성된 것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생각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생각은 무엇일까요? 어떤 생각이 발전해서 그 사람의 인격이 되고 사상이 되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이 자의식이라고 봅니다. 곧 자기의식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의식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사람은 신에 대한 의식, 삶에 대한 의식,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 등을 할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자의식이 바뀌면 생각의 틀이 바뀌고 그에 따른 행동이 바뀝니다. 

“당신의 가장 강한 자의식은 다음 중 어떤 것입니까?” 1) 나는 사람이다?-나는 남자다.-나는 여자다. 2) 나는 교수다? 3) 나는 가장이다? 4) 나는 교회 사역자다? 5)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장 강한” 혹은 “제 1의”입니다. 우리 각자는 복합 자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자의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나는 사람이다”라는 자의식을 “제 1” 자의식으로 가진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과거에 대부분의 사람은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했었습니다. 자신의 신분으로 주로 대접받았지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이 많이 발달했습니다. 특히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많이 형성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사회의 발전의 일부로 보고 이것을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습니까? 남자, 여자, 사람-이것보다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의식이 더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남자, 여자,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남자, 그리스도인 여자, 그리스도인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으로서, 남자로서 존중받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다른 사람이 제가 사람이라는 것을 무시할 때 화가 납니다. 하지만 그것은 참을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리스인으로서의 자의식이 더 크기 때문에 내가 사람으로, 남자로는 상대방을 용서할 수 없을지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직업인으로서의 자의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직업에 성공하는 사람은 마땅히 그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인 교수, 그리스도인 교직원, 그리스도인 주부, 그리스도인 공무원이지, 각 직업이 독립적인 자의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수, 공무원, 교직원, 회사원, 주부는 상황에 따라 포기할 수 있는 자의식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의식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의식보다 정치가와 같은 직업 자의식이 더 커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의식은 언제든지 “떼었다 붙였다” 합니다. 자기의 성공을 위해서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로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직업을 잃을지라도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 사역자로서의 자의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 전도사, 장로, 집사의 직분은 크리스천으로서의 자의식의 하부 자의식이 되어야지 이것이 신자의 자의식을 넘어가면 그 사역은 공허한 것입니다. 우리 생애에 있어서 목사로서 큰 교회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혹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큰 직분을 담당하지 못하더라도 크리스천으로서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올바로 산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큰일을 이루었을지라도 크리스천으로서의 자의식이  없는 사람은 실패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바울의 자의식

1. 사도 바울은 모든 신앙인이 닮고 싶어 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후 평생 선교사로 살다가 순교했습니다. 그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수많은 옥살이에도 신앙을 지켰고 우리에게 감동적인 편지글을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이러한 행동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위대한 행동도 사실 처음에는 한 조그만 생각에 불과했습니다. 그 생각이 기초가 되어 이러한 행동이 나온 것입니다.

2. 바울은 본래 유대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선민으로서, 선민 중에서도 바리새인으로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데는 어떤 사람도보다 열정이 많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자기의 의를 이루는 데 사용되어 졌다는 것을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의식을 새롭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3. 헬라어 성경에 보면 두 가지 삶이 명확히 대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앞부분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는 헬라어 성경에서는 19절입니다. 20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살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

이것은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속에 자기가 더 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죽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의미에서건 인간은 나름대로의 자아의식 때문에 삽니다. 거기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많은 경우 자기가 사는 이유는 아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 우리의 자아의식으로 삽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의 자아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4. 그런데 바울은 새로운 자아의식이 생겼습니다. 바로 자아의 집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사는 것을 넘어 아예 자아는 없어지고, 그리스도가 자신의 집에 산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다른 곳에서는 자신은 그리스도의 종이요,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말합니다(롬 1:1 참조). 바울은 고린도후서 5:17에서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의식을 가진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이러한 자아의식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본래 태어난 자아의식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거기로부터 완전한 단절을 하는 새로운 자아의식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는 무늬만 신자이지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의식을 형성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스스로를 점검해 볼 때입니다. “나는 자아의식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으로 변한 사람입니까?” 제가 여기서 질문하는 것은 완전히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은 성화된 인격이 되었느냐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과연 그 자아의식의 변화가 싹텄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랄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다음을 통해서 이를 점검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여러분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쓰는 말과 대화 가운데 드러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쓴 서신에서 말마다 그리스도가 나옵니다. 모든 생각이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저는 대화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한 번도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 사람을 가끔 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를 말하지 않으면서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를 질문해 봅니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2) 여러분은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결하려고 합니까? 이성으로? 경험으로? 말씀과 기도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떤 일이 있을 때 기도하려는 태도가 생깁니까? 아니면 어떻게 힘 있는 사람을 동원해서 이것을 해결해 볼까를 먼저 생각합니까?
3) 기도 가운데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고백합니까? 예수는 성현이요, 참된 사람이요, 성자라고만 생각됩니까? 내 삶의 주인은 아닌가요?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까? 아니면 이 복잡한 인간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신 분입니까? 예수님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분이지, 우리가 그분을 무조건적으로 따라가야 할 분은 아닌가요?

3. 우리 중에는 인생의 여러 경험을 하면서 두 가지 형태의 자아의식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1)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옛 자아가 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깨어졌을 때 새로운 자아의식을 형성하기 아주 쉽습니다. 바울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2) 자의식이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에 대한 생각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도 희미한 자아의식을 버리고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강한 자의식을 형성해 가야 합니다.

4. 여러분은 왜 교회에 나옵니까? 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합니까? 여러분의 제 1 자아의식이 무엇입니까? 저는 단연코 그리스도인이 저 자신의 제 1 자아의식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에게 목사, 교수, 가장-이 모든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만약 내가 그리스도인이란 자아의식이 위기에 처한다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이 떼어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내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이 자아의식만은 악세사리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자아의식이 없을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사실 괴롭습니다. 신앙이 내 인생의 문제에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늘 외부의 상황이 내 삶을 괴롭히고 나는 그것에 괴로워하게 되고, 인생이 나에게는 왜 그렇게 꼬이는지, 참 운이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생각할 때 이 모든 것이 한 번에 해결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얻고 그 안에서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