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2:16,믿음과 행위

호리홀리 2015. 6. 12. 09:21

갈 2:16; 약 2:24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갈 2:16; 롬 3:28 참조) 반면 야고보 2:24에서  “이로 보건데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바울과 야고보는 각자의 논증을 하기 위해 동일한 구절인 창세기 15:6을 예로 드는데 그것에 대한 해석도 완전히 배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서 4:3에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이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야고보서 2:22에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래서 기독교 역사상 이에 관한 수많은 해석이 있어왔습니다. 루터는 바울을 중심으로 야고보서를 해석하여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세기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은 독일의 튀빙겐 학파는 이것을 바울과 야고보의 정(正)-반(反)의 대립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우리 시대에는 끝나 더 이상 논쟁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의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교적인 매너 교육을 먼저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신자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2) 또 어떤 사람은 이제 교회 안에 들어오면 무슨 짓을 하는지 안심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은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바울과 야고보 사도가 믿음과 행함에 대해서 각각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각각의 목소리를 들어봅시다. 바울과 야고보의 입장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표현된  이면을 들여다보면 바울과 야고보의 입창 차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자는 대적자를 염두에 두고 반론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던 것인데 그 대적자가 달랐던 것이다. 

바울의 입장: 스스로 거세할 사람들아!(갈 5:12) 

먼저 바울의 입장.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대적자들은 할례를 받아 유대인처럼 살고 유대인의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주장대로 되면 복음은 사람을 율법에 예속시키고 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한, 위대인의 복음으로 축소되게 됩니다. 이에 바울은 복음을 왜곡시킨 무리들에게 “어리석도다 갈리디아 사람들아”(3:1)라고 말하며 급기야는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거세할 놈들아!”(갈 5:12)라고까지 한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에는 행위가 따른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의롭게 된 다는 것을 부정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족시켜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는 이론을 “사다리 신학”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늘에 사다리를 놓아 하나하나 공적을 쌓으면서 결국은 하늘에 이를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사람에게 어느 정도 만족감을 줍니다. 자신의 선행과 공적으로 하나하나 사다리를 올라가 결국 사다리 꼭대기에 있는 하늘나라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예를 들어, 전도를 많이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든지,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드려야 하나님이 구원을 주신다든지, 어떤 이는 효를 행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든지 이런 주장을 하는데 이런 것들이 대표적인 사다리 신학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믿음이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그냥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믿음이란 그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해한 믿음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를 넘어 신실까지 포함한 것입니다(갈 5:21). 헬라어로 ‘피스티스’라는 말은 한자의 믿을 신(信)자와 비슷해서 그 안에 신앙, 신실, 신뢰, 확신 등의 뜻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신실함으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을 말합니다. 믿음이 참 믿음인지는 그것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을 통해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터널의 비유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터널을 빠져 나오는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면 터널 입구는 신앙고백으로 시작한다면, 터널을 빠져 나오려면 신실이 있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 이 터널을 못 빠져 나오는 사람이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 사람에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입장: 골빈 사람들아!(약 2:20) 

한편 야고보가 설정한 대적자들은 바울의 복음을 잘못 이해하여 율법폐기주의 혹은 자유방임주의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믿음을 말씀에 대한 지적 동의로 이해하여 믿음이 행위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야고보는 지적 동의로서의 믿음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마귀들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약 2:19). 그러면서 야고보는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에 대해서 “골빈 놈들”(약 2:20; 한글 개역에서는 “허탄한 사람아”라고 번역됨)이라고 까지 합니다. 야고보는 입으로만 믿음을 말하고 그에 합당한 행위가 없는 사람들을 심하게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선언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유념해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란 행함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함이란 무슨 공적이나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당연히 따라오는 열매를 말합니다. 과실수는 그 열매로 그 나무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과나무 같이 겉모습은 생겼어도 후에 그 나무가 자라 배가 열린다면 그 나무는 배나무인 것입니다. 사과나무엔 사과가 열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겐 그리스도의 향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
1) 첫째는 신실의 열매입니다. 사실 믿음이라는 말에 신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2에 성령의 열매 중 충성이 있는데 헬라어로는 믿음입니다. 본 문맥에서는 신실이 더 좋은 번역입니다. 본래 신실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처음과 끝이 변함없이 같으신 분입니다. 중간에 자기 사적 이익을 위해 마음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신실입니다. 원칙에 충실해서 끝까지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신실입니다. 크리스천의 마음은 속이지 않고 신실해야 합니다.

2) 두 번째는 역시 사랑입니다. 사랑이 크리스천의 표식이라는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너희를 내 제자인줄 인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도  사랑이야말로 바로 크리스천의 표식이라고 말합니다.

3) 세 번째는 자비입니다. 물론 사랑 안에 자비가 있습니다. 자비는 너그럽게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나만 원칙에 충실한다고, 좋은 사람을 사랑한다고 사람간의 관계가 좋아지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허물을 그냥 받아주고 용서해 주고, 내게 잘못했더라고 자비를 베풀 때 용서해 줄 때 참으로 크리스천의 표식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3. 결국 바울과 야고보는 완전히 배치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수신자의 상황이 달랐고 믿음과 행위에 대한 정의가 달랐던 것이지 그 입장차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의롭게 된다는 것을 공격한 것이고, 야고보는 행동이 따르지 않는 입술로만 외치는 믿음을 경계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것이고, 야고보가 말한 믿음은 결국 행함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