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여호수아(구속사)

여호수아14장,언약의 사람 갈렙

호리홀리 2015. 4. 13. 13:13

갈렙은 여호수아의 그늘에 숨겨진 영원한 이인자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오직 일인자만 기억하여 주며, 일인자를 일인자로 만들어준 주위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잊어버린다. 그러나여호수아가 위대할 수 있었던 것은 갈렙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의 전체적인 문맥을 살펴보면 6‐7장에서 여리고 정복,8장에서 아이성의 정복, 9장에서 중부 산악고지에 위치한 기브온의항복, 10장의 남부 연합군격파, 11장에서는 북부 연합군의 격파가

있다. 마치 사막의 폭풍 작전처럼 초기에 중앙돌파가 끝난 셈이다.

이제부터는 이스라엘 여러 지파들이 각자 제비 뽑은 땅으로 가서 자신의 기업을 획득해야 한다.

이런 배경 속에서 갈렙이 등장하며 여호수아에게 헤브론 산지를기업으로 달라고 요청하며, 결국 헤브론에 살고 있는 용사들을 내어쫓고 그 땅과 성을 차지하였다. 그의 용맹스러운 결단으로 15장에는

유다 지파가 기업을 얻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여기에는 여호수아서에서 기업을 얻은 지파들 이야기 가운데 가장 상세하고 구체적이며, 동네 이름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열거되고 있다(20‐63절, 총

43절). 이 목록은 요셉 지파의 목록에 비하여 매우 정교하며, 상세하다(16:10). 달리 말하자면, 갈렙이 헤브론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유다지파는 열심히 싸워서 자신의 기업을 거의 다 차지할 수 있었다.

갈렙 한 사람이 자신의 몫을 다 하였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편안하게 살고 있다. 이리하여 갈렙은 ‘여호수아 시대를 가장 빛낸 인물’로소개되고 있다.

현재 여호수아는 길갈에 본부를 두고 있다(6절). 이때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나아와서 약 45년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회고하며 말하고 있다. 갈렙은 40세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정탐꾼이었다(7절). 그때 다른 정탐꾼들은 불신앙적 보고를 해서백성들을 두렵게 하였다. 갈렙은 그 때를 회고하면서 그들이 백성들의 “간담(肝膽)을 내려 앉게 하였다.”고 말한다(8절). 그러나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약속의 땅은 아름다운 땅이다. 주님이 주시면 가질수 있다.”는 신앙적인 보고를 하였다(민 14:6).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 땅에 대하여 악평을 할 때에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신앙적인 안목

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왕따를 당하거나

집단 구타를 당할 수 있다. 그러나 갈렙은 사물을 정확하게 보았고,

또 믿음으로 보았다. 그는 약속의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을 보았으며, 주님이 주시면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고, 친구와

동료들의 불신앙적인 보고를 일축하였다. 그는 그 당시를 회고하면

서,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고 한다(8절). 즉,

그의 행동 배후에는 그를 몰고 가는 선한 동기가 있었다. 아무리 사

람이 좋아도 동기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가정도 교회도 마찬가

지이다.  동기만 있으면, 아무리 높은 산

도 넘고 아무리 험한 바다도 건널 수 있다. 갈렙은 ‘주님을 온전히

따르겠다’는 영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서 주님이 영

화롭기를 소원하였다. 이 세상에서 손해를 보고, 인생이 좀 더 고달

파도 주님의 영광이라며 기꺼이 가겠다는 동기를 갖고 있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갈렙은 ‘참 신자의 화신’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온

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신다.

 갈렙이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

고 할 때, 그것은 갈렙의 독백이 아니었다. 모세도 이 사실을 뒷받침

해 주었다.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쫓았다.”(9절).

그는 언약의 사람이다.

신앙 고백과 이웃의 인정이 일치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가

스스로 열심히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부모나 형제들이 인정을 안 한

다면 우리는 더욱 성숙해야 한다. 특히 모세는 갈렙의 스승이다. 스

승이 제자에게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쫓았다”고 인정

해 주는 것 보다 더 큰 칭찬은 없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도 갈렙에 대해 동일한 평가를 내려 주신다. “오

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

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

지하리라.”고 말씀하셨다(민 14:24).

한 걸음 더 나아가 여호수아서의 저자도 갈렙에 대하여, “헤브론

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

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고 평

가하고 있다(수 14:14). 역사가의 평가란 무섭다. 인생은 은퇴로 끝나

는 것이 아니며 죽은 후에도 나에 대한 평가는 나를 따라 다닌다.

역사가는 갈렙이 죽은 후에도 그에 대하여 살아 있을 때와 동일한

평가를 하고 있다.

성경에 따르면 모세, 여호수아, 다윗, 아사, 히스기야, 요시야, 예

수 그리스도는 모두 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른 인물로 나타난다. 그런

데 갈렙은 주님을 온전히 따른 인물로서 사중적인 증거를 받고 있다.

모세도, 여호수아서의 저자도, 하나님도, 그리고 자신의 양심도 주님

을 온전히 따랐다고 한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른 갈렙에게 약속이 있었다. 그는 주님으로부

터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민 14:24). 이제 주님의 약속을 받은 날로부터 45년이

지났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

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

신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세입니다.”(10

절).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는데 45년이 지나 그의 나이 85세가 되었

으니 얼마나 긴 세월이 지나 갔는가!

 

갈렙은 스스로 자신의 나이가 85세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85세가

되면 대부분 죽을 것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에 대해

서는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갈렙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갈 곳이 있고 지금도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나의 인생은 아

직도 끝나지 않았다. 나는 은퇴하였지만, 여전히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갈렙은 노욕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

다. 이제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을 마쳤고 요단강 동서편의 많은 땅을

정복하였다. 이제 갈렙은 쉴 때도 충분히 되었다. 당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전쟁을 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모두 안정을 원했으

며, 불로 소득을 원하였다. 그들은 편안한 것을 더 좋아하였다. 우리

도 점점 ‘편안한 가정, 편안한 직장, 편안한 교회’를 원하게 된다. 그

래서 힘든 봉사가 점점 없어지게 된다. 우리가 편안한 것을 좋아하

면, 안일과 나태에 빠지며 영적인 야성을 잃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주님을 결코 ‘온전히 따를 수 없다.’ 안일함과 물질을 사모하는 자는

더 큰 약속을 받지 못한다. 우리도 시련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영적인

싸움을 포기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갈렙도 편히 살 수 있었다. 그에겐 현 시점에서 부족한 것이 없

었다. 그도 광야 생활을 40년이나 하였으며, 정복 전쟁을 5년이나 하

였고, 나이도 85세가 되었다. 후손들에게 효도 받으며, 여행 다니고

편히 살고 싶었을 수 있다. 인생도 변하고 환경도 변하고 시대도 변

했는데 갈렙은 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의 믿음이 변하지 않았

다. 45년 전, 갈렙은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였고(민 13:30), 이제

갈렙은,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찌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고 말한다(수

14:12)

“이제 나는 믿음으로 옛날에 내가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행하

겠습니다”고 갈렙은 말한다. 그는 45년 동안 주님의 약속에 대한 믿

음을 변함 없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다. 그와 하나님 사이에는 아직까지 끝내지 못한 일이

남아 있으며, 이 일을 이제는 마무리 하여야 한다.

갈렙은 45년 전의 꿈을 버리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처음처럼’

살고 있다. ‘처음’에 잘 못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 처음에는

준비를 잘 한다. 그런데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어렵다.

이 점에서 갈렙은 우리의 사표가 된다. 그는 젊은 시절에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고 나이 들어서도 그 길을 버리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잘 관리하였다.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

하다.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갈렙이 싸울 사람들과 정복할 성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

다. 아낙 사람들과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하였다(12절). 그러나 갈렙

은 “산지”를 달라고 한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12절상). 이 세상에서 누가 ‘산지’를 원하는가?

 그러나 갈렙은 “산지”를

구하고 있다.

갈렙이 원한 산지는 차지하기 쉬운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아

낙 족속이 살고 있었다. 가나안의 장수들이 살고 있는 곳이며, 성도

견고한 곳이었다. 그곳은 ‘높은 성벽 속에 거인들이 진 친 곳’이었다.

그와 함께 간 다른 정탐꾼들의 눈으로는 불가능하게 보였던 곳이 바

 로 헤브론이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견고한 성 세 곳을 꼽으라고 한

다면, 북쪽의 하솔, 중부의 므깃도, 남부의 헤브론이다. 갈렙은 젊은

이들도 쉽게 도전할 수 없는 “헤브론 산지”를 구하고 있다. 원수의

강력한 진이 있는 헤브론을 차지하고자 한다.

왜 갈렙은 헤브론을 원했는가? 왜냐하면, 바로 헤브론에 아브라함

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가 묻혀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족장들의 무

덤이 있는 동네이다. 갈렙이 헤브론을 취하였기 때문에, 이후 다윗은

헤브론에 첫 도읍을 세울 수가 있었다. 갈렙이 없는 다윗을 생각할

수가 없다. 갈렙이 다윗 왕조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는 길고 긴

인생을 살면서, 젊은 시절에 가졌던 꿈을 버리지 않는다. 헤브론은

가장 어려운 성이지만,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취할 수 있다고 믿는

다.

갈렙은 인생을 살면서 삶의 원리를 바꾸지 않고 있다. 수십 년

간 믿고 살아온 원리를 따라 살아간다. 그가 정탐꾼이었을 때도 하나

님 앞에서 신실하였고 여호수아 아래서도 확신을 가지고 전쟁을 계

속하였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업을 취하러 가겠다고

선언한다. 다른 사람들은 안정을 누리고 조공을 받는데 급급하여 전

쟁을 쉬고 있을 때 갈렙은 전쟁을 계속한다. 그것도 ‘산’을 원하고

있다. 그는 젊은 시절에 가졌던 헤브론 산지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

고, 평생 간직하며, 이루어내고 있다. 갈렙은 후손들을 위하여 확실한

기업이 필요하다고 믿었고, 그것을 몸을 바쳐 이루어내었다. 갈렙은

정말 그에게 주어진 땅으로 올라가서 싸워 취했다(15:13‐19).

갈렙이 차지한 헤브론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갈렙에게 헤브론은 바로 주님이 그에게

주신 ‘영적인 기업’이다. 우리는 기업이 없이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비빌 곳이 없는 것이다. 구약 성서의 기업이란 ‘하나님의 통치’에 대

 

한 그림자이다. 이스라엘 땅이란 영원한 천국의 그림자이다. 주님께

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주신 것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천국을 주실 것에 대한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다. 주님은 자신의 백성

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과 함께 하시길 원하신다. 주님께서는 갈렙

과 함께 하셨고, 갈렙은 주님과 함께 하였다. 갈렙은 주님께 온전한

충성을 바쳤고, 주님은 갈렙의 모든 꿈을 다 이루어주셨다. 주님의

능력과 은총이 늘 갈렙과 함께 하셨다. 그리하여 갈렙은 자신의 후손

을 위하여 아름다운 기업을 마련할 수 있었다.

우리도 갈렙과 같이 “이 산지를 내게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존 낙스는 “주님,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의 기도는 어떻게 응답

되었는가? 1863년 스코틀랜드 성서 공회 총무였던 윌리암슨(A. Williamson)

은 1865년 9월 한국 선교를 희망하던 토마스(R. J. Thomas) 목사

에게 한문 성경을 주어서 한국 서해안을 방문하게 하였고, 토마스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평양까지 가서 한문 성경과 전도 책자를 전하

였으나 1866년 9월 2일 대동강 가에서 순교하게 되었다. 이후 윌리

암슨은 중국 상해에 선교사로 온 존 로스 목사를 만주로 파송하였다.

로스는 1873년 윌리암슨으로부터, 6년 전에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에

서 순교한 소식을 들은 후, 한국 선교에 뜻을 두었고, 1874년 10월

9일 첫 번째 고려문 여행을 나섰으며, 이때 의주

상인으로서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수세자가 된 백홍준의 부친을 만나

게 되었다. 그는 1876년 4월말에서 5월 초에 두 번째 고려문 여행을

나섰으며, 이응찬을 만나고 “1877년부터 성경 번역이 시작되었다”(성

서공회사 1, 37)라고 말했다. 그 이후 그는 서상륜을 만나게 되고 그

에게 요한, 마가복음에 이어 누가복음 번역을 맡기게 되었다. 이리하

여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처음으로 성경 번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어가 거듭난 사건’이었다. 당대의 한국 사람들조차 한글

 

을 글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한글은 ‘성경을 담는 글’이 되었다. 당

대의 사람들은 한글로서는 완벽한 의사 표현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

하고 한문만을 고집하고 있었는데, 한글이 ‘경전을 담는 글’로 새롭

게 태어난, ‘문명사적 전환’을 이룬 역사적이고 섭리적인 사건이 되

었다. 이 성경이 이후 언드우드가 주축이 되어 만든 “구역”(이후 개

역)의 저본이 되었다. 그리고 이 말씀의 씨앗이 자라서 100년 전에

평양 대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국은 동북 아시아에서 가장

연약하지만, 가장 큰 영적 부흥을 이루었다. 왜 ‘평양’에 부흥이 있

었는가? 왜냐하면 그곳은 당대의 세계에서 가장 절망적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은총은 그 깊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울부짖

는 심령들에게 임하였다. 주님께서는 한국 교회에 부흥의 기업을 주

셨다. 참된 회개를 통한 갱신을 체험하게 하여 주셨다. 한국 교회는

우리 선배들의 피와 눈물의 터전 위에 세워졌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온전한 헌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