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여호수아(구속사)

여호수아서2장,구속사의 주인공

호리홀리 2015. 4. 9. 13:52

 

      여호수아서의 전체적인 주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전쟁을 통해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땅을 여호수아가 차지하는 모든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큰 신학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그 초반부에 바로 한 여인의 이야기를, 그것도 한 기생의 이야기를 부각시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인다. 
     주인공으로 부각된 라합은 너무나 하찮은 여인이었다. 이방인이었고, 여자였고, 그것도 창기였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멸시하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여호수아  2장에서 끝나지 않고, 제 6장으로 이어지며(17, 23, 25절), 마태복음 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5절),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의 선진으로(31절), 야고보서에서는 아브라함과 같은 반열에 선 행동하는 믿음을 가진 여인으로(2:25) 나타난다. 이리하여 라합은 구약성경 뿐 아니라 신약성경의 증거까지 받는다. 성경 저자들은 라합을 볼 때 우리처럼 성 차별적 시각에서 보지 않는다. 성경은 언약의 책이다.구속사의 위대한 주인공으로 라합을 소개하고있다.

        문학적 구조나 관점에서 보면, 1장에서 3장으로 넘어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호수아 1:10-11을 보면 여호수아가 백성의 유사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즉, “진중에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예비하라. 삼일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얻게 하시는 땅을 얻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고 하였다. 제 2장을 넘어 3장으로 들어가면 바로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삼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1-2절)로 이어진다. 즉, 1장은 여호수아가 유사들에게 삼일 안에 요단을 건널 것을 말하고, 3장은 삼일 후에 유사들이 여호수아의 말을 받아 백성에게 명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1:10-11은 이야기의 흐름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3장으로 이어지지만, 여호수아서의 저자에 의해 2장으로 단절이 되고 있다. 따라서 2장은 의도적으로 현재의 위치에 삽입된 것이다. 전체가 샌드위치기법을 쓰고있다.이것은 라합을 부각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라합이 이렇게도 크게 부각되었을까? 여기에는 분명히 여호수아의 저자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신학적 이유가 있을 것이다.

        1. 기생 라합(2:1-7)

        이 이야기는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보내면서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는 명령으로 시작하고 있다. 왜 하나님께서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다”(1:3)고 약속하셨는데, 여호수아는 ‘정탐꾼’을 보내는가? 이것은 불신앙이 아닌가? 하나님은 이미 이 땅을 주셨다. 정탐꾼을 보낼 필요도 없이 ‘돌격 앞으로!’라며 명령할 수 있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실 때, 늘 ‘기적’을 베푸시는 것은 아니다. . 기적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자신의 때에, 자신의 방법으로 이루신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기적을 함부로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파도를 타고 담대하고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기적’을 믿고, 게으르거나 주제넘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시 128:2,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는 말씀이 있다. 여호수아는 아직 이 성이 기적적으로 무너질 것을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직 그런 말씀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믿음으로 정복해야 할 뿐 아니라, 지혜로 정복해야 했다.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들은 “라합이라고 하는 기생 집에 유숙하더라”고 한다(1절). 왜 이들이 ‘기생 집’에 들어갔는지 분명하지 않다.  여기에 ‘기생’의 뜻으로 사용된 원어(zoneh)는 전문적인 의미에서 창녀이다. 성경의 강조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구약성경 뿐 아니라 신약성경도 라합이 창녀였으나 변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라합은 평소와 다름 없이 부도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날 그녀에게 찾아온 사람들은 평소 찾아온 손님과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이 만남을 통해 라합의 인생에 변화가 온다. 이 만남의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이 만남을 통해 라합은 삶에 큰 전환을 만든다.
        이 정탐꾼들이 창녀의 집에 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수 있다. (1) 외지에서 온 젊은이들이 이런 곳에 들어가는 것을 눈 여겨 볼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2) 이런 곳은 여리고의 정보를 얻는데 가장 좋은 곳일 수 있다. (3) 창녀는 꼭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희박할 것이다. (4) 라합의 집은 성벽에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5) 주님이 그들을 이곳으로 인도하셨다.

        2. 정탐꾼들의 위기(3-7절)

        그런데, 여호수아의 정탐꾼이 여리고로 들어간 소식을 여리고의 왕과 정보부는 바로 알아내었다(2절). 그들은 정탐꾼들이 라합의 집에 들어간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라합에게 나아와 위협적으로 말한다.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3절). 그들은 외부인이며, 우리 땅에 침입한 위험한 자들이다. 여리고 정보부원들은 이스라엘의 스파이가 들어와서 라합의 집에 숨어있는 것을 기정 사실화하고 라합에게 잡아 내라고 말한다.      바로 이 순간 네레이터는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고 말한다(4절상). 아마 라합은 정보부원들이 갑자기 오는 것을 보고 미리 숨긴 것 같다. 라합은 왕명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 라합의 태도에 따라 그녀와 집안 식구들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이때 라합은 너무나 재치 있게 대답을 한다.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또 어두워서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만, 급히 따라 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4-5절). 라합은 먼저 “과연 그들이 내게 왔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진실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믿게 한다. 정탐꾼이 왔다는 사실까지 부인하면, 라합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며 온 집안을 샅샅이 수색할 것이다. 그러나 라합은 진실을 드러내며, 또한 비밀을 지킨다. “나는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므로 별 관심이 없었고 그들은 어두울 때 즈음 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대답한다. 라합은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 그들은 반신반의하였을 것이다. 이때 라합은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고 명령한다(5절하). 라합은 급박하게, 거칠게, 힘있게 말한다. 대답할 여지도 주지 않는다. 바로 이 순간 네레이터는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에 숨겼더라”고 우리에게 일러준다(6절). 라합은 기가막힌 순발력으로 그들을 어느 정도는 감추어 두었다. 여리고의 정보부원들이 허겁지겁 뛰어나간다. 그리고 ‘성문이 닫혔다’고 말한다(7절). 이제 그들은 쉽게 빠져 나갈 수 있는 길도 없어졌다. 들어오기는 쉬웠지만, 나가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라합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예사 일이 아니었다.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의 생명을 왕에게 넘겨 주었다면, 굉장한 포상금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라합은 자신의 목숨을 건 위험한 선택을 하고 있다. 만약 진실이 밝혀 진다면, 그녀와 식구들은 잔인하게 처형이 될 터인데도, 라합은 이들을 살리기로 결심하고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다. 왜 라합이 이런 큰 결단을 내리게 되었을까?

        3.  믿음의 결단(2:8-11)

        이런 행동의 배후에는 라합의 믿음이 결단이 있었다. 라합은 지붕 위에서 이스라엘의 정탐꾼과 대화를 주고 받는다. 이미 밤이 되었다. 아열대의 향취가 가득 베인 여리고의 밤이 배경으로 나타나면서 라합은 왜 자신이 이들을 살렸는지 말한다(9-11절).
        라합과 여리고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리고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간담이 녹았다. 이 두려움은 상상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역사에 일어난 사건을 보고 생긴 것이었다. 그들은 출애굽 사건과 요단 동편의 두 왕 시혼과 옥이 망한 사실을 들었다. 가나안 동편의 큰 왕국을 이룬 시혼과 옥의 멸망은 큰 두려움을 자아 내었다. 이 들음이 라합의 마음 속에 믿음을 일으켰다.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라합은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이 소문들을 들을 때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것은 너무나 높은 신앙의 고백이지만, 라합이 듣고 생각하며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라합이 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이 어릴 때부터 듣고 본 가나안의 관능적인 신들과는 달리 참 하나님이요,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 하나님은 수 백년 간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주신 분이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라는 추론을 할 수 있었다.
        라합이 이런 믿음을 가진 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이 믿음은 신비로운 영적 체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라합은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유심히 듣고 귀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고, 때가 왔을 때 믿음의 결단을 내렸다. 라합의 들음은 믿음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듣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 라합이 들은 것은 역사 속에 일어난 사건들이었다. 이것을 들을 때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것을 믿게 되었다. 우리의 믿음도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신비로운 체험 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들을 때 생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 찾아 오셨다. 그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부름을 듣게 된다.
        바로 이 믿음을 갖자 말자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이 왔을 때 도와주기로 작정하였다. 라합은 정탐꾼이 오기 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소문을 들었고, 정탐꾼이 오자 결단을 내렸다. 라합이 이들을 돕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 목숨을 건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다. 이것은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다.  
        라합의 믿음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정탐꾼을 올바로 대접하는, 곧 그들을 살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 이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는 데 있다. 그 신앙고백이 여기에 명백하게 나타난다. 여리고의 모든 사람들은 맷돌짝까지 던질 전투태세를 하고 있을 때, 라합은 이 성이 이미 여호와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라합의 신앙고백에서 가장 두드러진 고백은 “이 땅을 너희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이 신앙고백이 여호수아 전체의 고백이다. 이 땅을 주었다는 고백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의 입에서 듣고 있다.

        4.  구별된 라합의 집(2:12-14)  

        라합은 단지 마음 속으로, 혼자 믿음을 갖고 살기로 작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믿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믿음은 보다 외적이고, 공식적인 표현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과 언약을 맺는다. 자신의 신분이 이제는 바뀌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라”(12-13절). 여기에서 ‘선대한다’는 것은 ‘위급할 때 손해를 무릅쓰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인자(헤세드:언약관계에서 베리트와 함께 사용되는 언약적자비 긍휼)함을 베풀었으므로, 이제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요청한다. 정탐꾼들은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다"(14절)고 대답한다.
 언약체결식이다. 이 언약은 반듯이 지켜야한다. 라합은 이것을 알고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라합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 가진 게 아니라,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 안으로 들어 오려고 한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 공동체로 들어오는 것이다. 신앙은 사회성을 지닌다. 누구든지 홀로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세우는 언약 공동체 안에서 살아야 한다.
        라합은 정탐꾼과 말로만 약속을 할 뿐 아니라 더 확실한 언약의 징표를 주고 받고 있다. 그들은 라합에게 “붉은 줄을 집에 걸어 두라”고 말한다. 이 줄은 정탐꾼들이 타고 내려간 줄이었다(18절). 이 붉은 줄을 통해 라합은 자기 집이 다른 사람의 집과 다르다는 표시를 하였다. 라합은 여리고가 곧 무너질 것을 알았지만, 이 줄을 즉시 걸었다. 라합은 정탐꾼들이 가자 말자 이 줄을 창문에 매었다. 라합은 이 줄을 통해 라합은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하였다. 이 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의 표식이요, 여리고 사람들에게는 멸망의 표식이다.
        교회사에서 많은 교부들은 이 붉은 줄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이 붉은 줄 사이에는 붉다는 색깔 외에는 같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렇지만, 이 붉은 줄은 ‘유월절에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이집트에서 죽음의 사자가 지나갈 때, 붉은 피를 바른 집은 구원을 받은 것처럼, 라합의 집의 창문에 드린 붉은 줄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에게 피할 곳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신앙에 확신을 주었다.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 간담이 녹더이다”(24절). 라합의 조그만 도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투를 할 수 있는 사기를 북돋우어 주었다. 여호수아의 군대는 전쟁에서 승리할 확신을 갖게 되었다. 라합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증거해 주었다.
        라합은 약속의 땅에서의 여호수아가 얻은 첫 열매이다. 첫 열매는 귀중하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어려움을 당하지만 그가 마케도니야에서 얻은 첫 열매인 루디아를 통해서 사역이 시작된다. 첫 열매를 보게 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라합은 여호수아에게 그 확신을 심어 주었다. 이방여인으로서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고 하나님의 구원사를 직접 체험하지도 않았지만 하나님 편에 서는 결단을 한 것은 너무나 귀하다.

         5. 행동하는 라합의 믿음(약 2:21-26)

        라합은 행동으로 그 믿음을 드러내었다. 혹은 그녀의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이었다. 여리고의 왕이 만약 라합의 행동을 알았다면 분명히 잔인하게 죽였을 것이다. 전쟁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합의 행동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바로 이 점을 야고보 사도는 포착하고 있다. 그는 라합을 아브라함과 같은 반열에서 소개하고 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1,25). 라합의 헌신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는 헌신과 같은 선상에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행동으로 천명된 것 같이 라합도 그러하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26).  
        라합의 믿음이 위대한 것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력을 거슬리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라합은 가나안의 신들과, 왕과 그 군대와 백성을 거슬리며, 결단을 내린다. 우리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담대한 믿음의 결단이었다. 여리고가 무너질 때까지 라합은 위기 속에서 살았다. 여리고의 왕과 그 군대를 거슬리며 자신의 입장을 지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아가 라합은 가나안의 문화를 거슬러 살아야 했다. 창녀의 문화를 떠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 이것은 여리고의 왕을 대적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몸에 베인 습관을 버린다는 것은 죽음을 통과하는 것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를 거슬리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라합은 어둠의 왕국에 살다가 빛의 왕국으로 그 본적을 옮기기 위해 무서운 결단을 내렸다. 우리도 여전히 사단이 다스리는 악한 문화의 영향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이 죄의 문화를 거스르며 영적인 전투를 하고 살아야 한다. 영적전투의 세계로 진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