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여호수아(구속사)

여호수아서4장~5장,언약의 증표

호리홀리 2015. 4. 10. 12:48

 언약의 증표(수 4:1-5:1)

 

 

  본문은 우리의 세례와 성찬의 그림자와 모형이 되는 할례와 유월절 축제가 요단 강을 건넌 직후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호수아 4-5장에는 주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는 이야기가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1. 길갈에 세운 기념비(4:1-8)

       수 4:1-3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기를 마친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12 지파에서 한 사람씩을 뽑아서 요단 강 가운데 제사장의 발이 굳게 선 곳에서 ‘열 두 돌을 취하고’ 그것들을 길갈에 세우라고 명한다.
        여기에 12명의 헌신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들은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이미 선택되었다(3:12). 그들은 요단 강을 모두 건넌 후에 다시 요단 강 중앙으로 들어가, 각각 큰고 무거운 돌을 어깨에 지고 나오게 된다(5절). 그들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을 하고 있지만, 아무런 불평이 없이 철저하게 순종하였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완전히 이루었다. 이들의 수고로 길갈에는 12 돌 무더기의 기념비가 세워지게 되었다(8절).  

        2. 요단 강 안에 세운 기념비(4:9-24)

        그런데 여호수아는 또 다른 기념비를 요단 강 안에 세우고 있다.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 있더라”(9절). 즉 그들이 건넌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첫 돌비는 요단 강 안에 세워 두었다. 요단 강 밖에 있는 길갈에 세운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요단 강 속에 세운 것은 무슨 뜻이 있는가?
        여기에서 12 돌비가 세워진 장소가 흥미롭다.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 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 있더라”(9절). 백성들이 그 어려운 요단 강을 건널 때까지 제사장들은 물을 막는 보(洑)가 되어 서 있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요단 강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이었으며, 마지막까지 그곳을 지킨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기념하라

        여기에서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기념비를 세우라고 명령하신다. 요단 강을 건넜으면 건넌 것이지, 뭐 돌까지 세워야 하는가? 이 두 개의 기념비는 세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첫째로, 이 돌비는 ‘너희 중에 표징이 된다’(6절). ‘표징’이라는 단어는 앞에서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에게 요구하였던 것이다(2:12). 그는 ‘진실한 표’를 달라고 하였으며 라합의 집에 걸린 붉은 줄이 그를 구원할 ‘표징’이 된다. 그들은 그 표를 보고 라합의 집을 식별하였으며, 다른 모든 사람들이 죽는 상황에서 라합의 식구들은 생명을 보전하게 된다. 주님은 이 돌비들이 ‘너희에게 표징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경험했는지 마음 속에, 생활 속에 늘 새겨두어야 한다. 기도 응답의 표식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 우리의 추억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셨음을 확증해 줄 것이다.
        둘째로, 이것들은 미래의 세대를 교훈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여호수아의 세대가 역사에서 사라진 이후에 어느 아버지와 아들이 길갈을 지나가면서 이 돌들을 본다. 아이는 신기하여 "아빠 이 돌들이 왜 여기에 있어요?" 할 때(6절), 그들은 이렇게 답하여야 한다.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될 것이다”라고 대답하게 한다(4:7).

        혹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다”고 대답하여야 한다(23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 앞에 섰을 때, 이 세상 어떤 사람들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이 생겼다. 유유히 흐르던 요단 강물이 끊어지고 마른 것이다. 이것은 초자연적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온 우주의 권세를 다 사용하신다. 이 일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기념비를 세우라고 한다. 이 돌들을 보며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기억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새로운 길을 내어 주셨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우리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하여 기념비를 새겨두어야 한다. 우리에게 이런 책임이 있다. 구원의 은총은 자신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말한다. 그들은 신앙의 계대를 세우고 있다. 불행히도 사사시대의 사람들은 이 신앙의 계대를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계속적인 불신앙과 심판의 사이클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에게 신앙의 계대를 확고하게 이을 것을 부탁하였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으리라”(딤후 2:2).
        세 번째 목적은 다시 한 번 더 후손들의 질문과 어른들의 답변으로 제시된다. 후손들은 동일한 질문을 던지며(21절), 어른들은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대답한다(24절). 이 기념비는 선교적인 차원을 갖고 있다. 열국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의 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으로 살아계신 분이다. 그 분은 "온 땅의 주"시다(3:11). 그는 우주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날 때만 일하고 그친 분이 아니다. 한 동네, 민족에게만 제한된 신이 아니다. 구약의 구원사는 항상 선교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과 기사를 체험하는 것은 나에게 그쳐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영원토록 그를 경외하며, 또한 이방인들이 믿도록 전해야 한다. 


        3. 할례를 행하라(5:2-9)

        여호수아 4장에 세워진 두 개의 기념비는 5장에서 두 개의 새로운 기념비와 짝을 이루고 있다. 4장에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5장에는 마음의 기념비가 세워진다.
        제 5장으로 들어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자 말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고(2-9절)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을 내리신다(10-12절). 이 두 명령은 매우 이상한 명령이었다. 이제 그들은 적들을 치러 갈 준비가 끝났는데, 원수들 앞에서 무장을 해제시키고 있다.
        왜 이 순간 이곳에서 할례를 행하여야 하는가? 왜냐하면,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된 표식으로서 너무나 중요한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할례 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없었다. 모세는 시내산에 하나님을 만나 구원자로서의 부름을 받고 나왔지만, 자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애굽으로 가던 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그를 문자 그대로 죽이려고 하였다(출 4:24-26). 왜냐하면,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십보라는 차돌을 취해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질 때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아주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언약의 백성 가운데서 끊어지게 됨을 말해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하기 전에 분명히 언약의 표식인 할례를 행하였을 것이다. 출애굽 전날 밤에 그들은 유월절 식사를 하게 되었다. 유월절 식사의 참여 조건에는 할례가 선행되어야 했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찌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출 12:48).

        중요한 것은 요단을 건너자 말자 할례를 행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합리적인 일도 아니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행동이었다. 여호수아는 세심한 장군이요, 탁월한 군사 전략가였다. 그러나 요단을 건넌 순간 자신의 군대를 스스로 무력화시키고 있다. 원수의 이빨 앞에까지 전진한 후 그는 무장을 해제하고 있다.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게 하는 행동이다. 
         할례를 하는 것은 많은 위험이 있었다. 창세기 34장에 보면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할례를 받으라고 말하고, 이 조건에 근거하여 통혼을 하겠다고 말한다. 세겜 사람들이 할례를 행한 지 3일 후, 고통이 가장 심하게 임하던 날 야곱의 아들들은 잔인한 살상을 한다. 그들은 모든 남자를 죽였다고 한다. 여호수아는 이와 반대로, 원수의 목전에서 이스라엘 군대의 무장을 해제함으로써 죽음의 위협 앞에 자신을 던진 셈이 된다. 여리고 사람들은 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데 그 앞에서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너무나 무모해 보이는 행동이다. 뒤에는 요단 강이 있기 때문에 도망칠 길도 없다.
        요단을 건너자 말자 할례를 행한 이 사건은 여호수아 전체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여호수아는 우리에게 ‘거룩한 전쟁’을 가르쳐 준다. 그들에게 있어서 땅을 차지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 할례를 받지 않고 거룩한 전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많은 위험 앞에 자신을 노출시키면서 모두 할례를 받는다.
        왜 이런 순간에 꼭 할례를 행해야 하는가? 할례란 ‘언약의 표시를 몸에 지니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표징으로서 할례를 시행하도록 명하셨다. 즉, 할례는 언약의 표식이었다. 그러나 할례는 몸에 하지만, 영적인 차원을 갖고 있다. 모세는 육신적 할례가 참 할례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 10:6). 신명기 30:6 역시 할례의 영적인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다". 1) 즉 할례에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차원이 있다. 할례를 행하였다는 것은 이제 새 사람이 되었고, 약속의 땅에 살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여기에 상징성이 있다.

        (1) 할례는 우리가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2) 할례는 우리의 육신적인 욕심과 태도를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포도 나무의 가지를 쳐내는 것과 같다.
        (3) 할례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여호수아서로 들어오면, 언약의 표식으로서 할례는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5:9절이 독특하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어떤 점에서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물러가게 했는가? 애굽의 수치는 출애굽 순간에 벗어나지 않았는가? 여호수아서는 이 할례를 통해서 애굽의 수치를 완전히 벗었다고 말한다. 이제는 애굽과 완전한 결별을 하였다. 약속의 땅에 정착하면서, 문자 그대로 애굽과 결별하였고, 할례를 받으므로 정신적으로 애굽의 모든 때와 수치를 벗고 있다. 그 동안 40년 동안의 영적인 패배와 실패가 이제는 굴러가 버렸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새로운 목적 의식을 갖는다. 구약시대의 할례는 바로 우리에게 세례가 된다(롬 6:4-5). 할례를 통하여 유대인이 된 것처럼,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성도가 되며, 옛 수치와 패배를 모두 굴러버리고 새로운 능력과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신분을 얻게 된다.

        4. 유월절 축제를 지키다(5:10-11)  

        할례의식을 마치자 말자 여호수아는 두 번째의 성례인 유월절을 지키고 있다(5:10-11). 할례의식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유월절 축제는 모세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 사이에 약 500년의 세월이 흘렀다. 모세가 유월절 의식을 시작할 때 그는 할례의식과 같이 지켰다(출12:43-48). ‘할례를 받은 후에야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한다(출 12:48). 오직 할례를 통해서만 유월절 축제에 들어갈 수 있다. 여기에 두 개의 성례가 하나로 어우러진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행동 사이에는 통일성이 있다. 세월은 흘러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다루시는 원리는 동일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나기 직전에 유월절 규례를 세웠다. 유월절 규례를 통해 언약의 백성과 언약 밖의 백성을 구별하고 있다(출 12장). 이제 약속의 땅에서 들어서자 마자 바로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 식사를 하게 된다. 유월절 축제는 원래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의식이었다. 이집트인들의 장자들이 죽음을 당할 때,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재앙을 면제 받았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찌니라”(출 12:13-14).
        이리하여 모세로부터 시작된 유월절 축제는 여호수아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5:10-12을 보면 유월절을 지키면서 ‘그 땅 소산을 먹었고’, 그 다음 날부터 만나가 끝났다고 말한다. 그들은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만나를 먹었다. 이제 그 땅의 음식을 먹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실제적으로 참여함을 말해준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는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 구원을 되돌아 볼 뿐 아니라, 장차 올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잔치이다. 유월절은 과거의 구원을 바라볼 뿐 아니라, 더 큰 은총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유월절 잔치는 여호수아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이 축제가 신약으로 넘어올 때 성만찬으로 이어진다. 이 두 식사는 동일한 실재를 가리킨다(마 26:17-20; 20-36). 예수님은 성만찬을 나누시면서 ‘내가 지금 유월절을 지키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시대는 변해도 두 성례 사이에 본질적인 연속성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유월절은 어린 양을 죽여 이집트에서 구원 받았음을 기억하는 잔치이다. 성만찬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영적인 구원을 받았음을 기억하는 잔치이다. 의식의 외적인 형태는 변해도 언약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심화되고 넓어진다. 구약의 유월절이 신약의 성만찬이 되었다. 바울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의 만찬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주의 만찬은 주의 죽으심을 되돌아보며 그의 오심을 바라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