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잠언(구속사)

잠언2장,지혜를 찾는 자

호리홀리 2015. 4. 6. 09:40

2장

1-2절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아비” → 잠언에서는 선생의 대표적 모습이다. 선생이 피교육자에게 권하는 말, 이것이 christian education(기독교 교육)이다. 교육 내용이 전달되는 형식에서 계명을 말한다. 계명은 권위의 요소이다. 교육 내용은 지혜인데, 교육 내용의 전달 형식은 말 = 계명이다. 피교육자의 자세는 “지혜에 귀를 기울이라”, “명철에 마음을 기울이라”로 귀와 마음은 안과 밖으로 전심으로 귀를 기울인다는 의미이다. 참 지식은 하나님 경외를 토대로 하므로 이런 참 지식 교육에는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다. 심령을 기울이는 것이다.

3절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사모하는 간절한 삶이다.

4절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지혜를 소리쳐 부르며(3절), 숨겨논 보물을 찾듯이 찾아 뒤지라는 것은 지혜를 찾는데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함과 노력의 자세를 말한다. 피교육자는 철저히 지혜를 찾되 숨겨놓은 보물을 찾듯이 찾아야 한다.

5절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그러나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다. 그가 말씀하시는 것 즉, 계시를 통해 주신다. 조금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피교육자는 열심히 찾는다 할 때 자기 노력으로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둘은 인간의 지혜 추구 노력과 하나님의 지혜 주심을 깊이 있게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상호보완하는 관계를 경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이 숨겨진 보물을 찾듯이 찾아야 하나 하나님이 지혜를 계시 통해 알려 줄 때만 가능한 것임을 전제로 해야 한다.

지혜는 숨겨져서 아무도 접근을 못한다. 그 후에 지혜는 공개적 장소에서 외쳐지고 있다고 한다(1장에서). 상반된 표현 같다. 여기서도 숨겨진 보물을 찾듯이 찾으라 하고,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고 했다. 상반된 표현은 성경에서 많은 것을 가르치는 함축적인 경제적 표현이다. 서로를 상호 규정해 준다. 인간이 소리쳐 간절히 찾는 것 이 자세는 하나님이 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지혜 추구 자세는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그를 의지하는, 신뢰하는 믿음의 자세여야 하고, 은혜 구하기를 사모하는 기도의 자세이다. 지혜를 참되게 사모하는 자, 모든 영혼을 기울여 간절히 찾는 자가 하나님께 신뢰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알게 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사모하고 추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은혜로 베푸시는 이 둘의 관계는 신비로 남아 있다. 조금 전과 같은 표현 양식은 상반된 두 가지가 상호 규정하게 되어 있고, 그 같은 표현으로 지금 취급하는 대상이 신비로운 것이다.

6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여” 지혜 구하는 자에게 지혜 주신다. 지혜를 간절히 사모하여 찾을 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는데 하나님 경외를 깨닫게 된다고 했다. 모든 지식은 하나님 경외 틀 속에서 이루어지고, 하나님 경외를 그 목적, 목표로 한다. 지혜 추구의 자세, 모든 지식 추구의 자세가 하나님 경외 자세이다. 이런 의미에서 참된 지혜는 하나님 경외, 하나님 아는 것, 이것이 참된 지혜이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하나님 경외의 틀에서 벗어나 만들어낸 지적 추구 작업(문학, 과학 등)은 진리의 왜곡이요, 참된 지식은 아니다. 이런 형태의 진리 왜곡은 과학만이 아니고 예술, 문학 등에도 있다. 모든 참된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말씀해 주셔야만 한다.

지난 시간에 1장 20절 이하에서 지혜의 초청에 대하여 다루었다. 지혜의 부름에 응하는 것과 쓰이는 것에 대해서도 말했다.

2장에 들어오면서 1장에서의 지혜의 부름, 초청에 응답하는 방식이 나타난다. 이제는 삶의 각처, 도처에서 지혜의 소리가 들리고,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 방식은 소극적인 자세 아닌 적극적 자세이다. 귀를 기울이는 것이요,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요, 은처럼 소중히 여기는 자세, 보물을 찾듯이 파헤치는 자세, 지혜를 찾고, 소리 불러 외치는 자세라고 했다. 지혜를 숨긴 보물을 찾듯이 찾고, 소리 높여 외쳐 부르고, 은을 소중히 여기듯 지혜를 소중히 여기는 자세는 지혜가 공중 앞에서 외쳐 불리는 때의 이 지혜는 즉각적으로 파악이 가능하다.

Transprarenz(트란스프라렌즈; 명백한) 지혜가 도처에서 외치는데도 자연스럽게 포착 가능한 것은 아니다. 지혜의 관통성이라고 할까? Durchschanburkeit(뒤르히샨부르카이트; 관통성) 지혜의 편재성, 또는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포착이 용이한 것이 아니고, 지혜는 땅 속 깊이 묻힌 보배처럼 삶의 복잡성과 다양성 속에 숨겨져 있고, 삶 처럼 애매모호한 심오함이다. 이것을 삶의 표면에 드러내어 일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일상 사는 사람에게 포착 가능한 것은 상징으로 가능할 뿐 포착이 용이한 것은 아니다. 이와같이 지혜의 은밀성, 심오성은 지혜가 포착하려는 삶의 본질 자체가, 지혜가 포착하려는 세계 질서 자체가 인간 한계를 넘어선 창조주 하나님께 근원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 경외 자체이다. 그래서 지혜는 심오하고, 포착 어려운 애매모호한 것이다.

지혜를 찾는 자에게 하나님 경외, 하나님 찾고 깨닫게 된다. 지혜를 찾고 추구하는 자는 경건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 지식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 편에서 지혜를 찾는 자세는 반드시 결실을 본다. 이것은 인간이 지혜를 찾는 수고로만 가능하다고 여기면 잘못된 오해이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지혜의 본질은 하나님 경외, 하나님 지식은 관념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실제적 순종의 자세의 차원의 것이다. 신앙하는 자세 속에는 지식이 있다. 지혜에 대한 물음을 인간 편에서 사모하고 추구하는 것이 결실되는 것은 인간 스스로 지혜를 찾는 결과가 아니고, 하나님이 지혜, 지식, 긍휼을 주시기 때문이다.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 은혜이지 인간 스스로 포착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이성은 삶의 본질을 꿰뚫어서 파악을 못한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가능하다. 인간은 하나님을 신뢰, 의지, 그를 바라보고, 오직 그의 긍휼과 은혜 베푸시는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 경외이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데만 기대한다. 지혜가 하나님 편에서 오는 것이면, 인간 편에서 지혜 찾는 노력은 하나님 경외, 신뢰하는 믿음의 틀에서 이루어진다. 지혜를 귀한 것으로 여기고 찾는 것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앙 행위여야 한다. 이런 믿음 안에서 내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결실된다. 하나님의 신실성 즉, 은혜로우신 분으로 여기는 우리 믿음에 대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하나님의 신실성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까지 발전이 가능하다.

7절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그에게 지혜와 명철을 주시어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을 깨닫게 하도록 하신다고 했고, 온전한 지혜를 예비하시고, 온전한 자의 방패가 된다고 했다.

8절 “대저 그는 공평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는 공의의 길을 지키신다고 했다. 여기까지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보호적 기능으로 우리에게 방패가 되며, 지혜 찾는 자에게 길을 주신다고 했다. 좀 자세히 보면 지금까지 말한 것과 상충되는 듯하다. 지혜가 약속된 대상은 누구인가? 옳바른 사람, 온전히 행하는 사람이다. 욥기 1장에 하나님을 경외하여 온전한 자라고 나온다. 경건한 자에게 이르시기를 참 지혜를 그를 위해 간직하신다. 지혜가 주어지는데도 조건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7절 한 구절만 떼어 본다면 그같은 느낌이 정당화될 수 있으나 1장 1절부터의 내용을 염두에 둔다면 구별된다.

처음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이 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편의 조건이 인간편에서 지혜를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신다고 했다. 여기 7절에서의 경건한 자, 온전히 행한 자의 의미는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에게 은혜로 주신다는 표현을 전제로 하는 것이 옳다. 특히 그같은 믿음을 가진 자, 하나님이 경건을, 하나님이 지혜 주시는 전제 조건이 아님에도 지혜와 경건이 밀착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하나님 경외를 토대로 하고, 그 틀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 자체가 하나님 경건을 목적하므로 믿음과 경건이 분리될 수 없고, 지혜와 경건이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 경외하게 하는 지혜 주신다는 것이니까 여기서 경건이라는 말 속에는 지혜를 얻기 전의 전제 조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혜 얻기 위한 전제는 오직 믿음 뿐이다. 하나님 경외를 목적으로 하는 지혜에서 그같은 믿음 주면 결실 맺게 되므로 경건과 자연스럽게 맺어진다.

7-8절에 보면 하나님 지혜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을 올바른 자로 부른 것은 이유가 있다. 지혜 주시는 목적이라 할까? 근본 목적이 지혜주시는데 있어 지혜의 보호적 기능을 말한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지혜를 바라는 자에게 은혜로 지혜를 주시는데, 그 지혜는 보호 기능을 한다. 그 보호 기능에 대해 말하기를 그것이 방패가 된다고 했다. 또 공의의 길을 지키시기 위함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온전히 행하는 자에게 방패되시고, 경건한 자를 보호하신다. 지혜의 보호 기능 통해 공의를 유지하시려는 적극적 의도가 암시되어 있다. 단순히 하나님 경외하는 자를 보호하신다는 차원을 넘어서 공의를 유지하시려는 태도가 8절 상반절에 나타나 있다.

9절 “그런즉 네가 공의와 공평과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 여기서 앞과 잘 연결 안된다. 끊어지는 것 같다. 형식적 고려가 이 부분 이해에 도움이 된다(미슈파트) → 법정 용어, 옳고 그름의 기준이다. “공의”라는 번역은 오역이다. 앞의 내용을 전제할 때 지혜를 간절히 외치는 자에게 모든 선한 길을 찾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체가 영생이다. 9절 자체가 선한 것이다. 공의와 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 통치자로서 여호와께서 옳고 바름의 하나님이시요, 그의 통치 본질의 속성이 그렇다. 하나님의 세계 내에 최선의 길은 순종하는 것이 명약관화하다.

어떻게 선하고 옳고 바른 길을 깨닫게 될 것인가? 10절에 나온다.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에 즐겁게 될 것이요” 사람이 옳고 바른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지혜가 그 마음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요, 이 지혜가 사람에게 파고 드는 것이다. 지식이 네 마음에 기쁨이 되리라는 것은 지혜가 마음 속에 파고 들어가 일으킨 변화로 그의 계명을 순종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바로 지혜의 성격이기도 하다.

11절 이하에는 7-8절에서 말한 지혜의 보호적 기능을 구체적으로 상세히 설명한다. “분별(근신)이 너를 지킬 것이요,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12절에서 구체적으로 말하기를(11절의 말씀) “악한 자의 길과 편벽되이(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내리라”

12절 이하 지혜의 보호 기능에 대해 “악한 길에서 너를 보호할 것이요 편벽된 데서 너를 구할 것이요”

13절 “...어두운 길로 행하는 자”

14절 “악한 자의 패역을 기뻐하는 자”

여기서도 지혜의 보호 기능이 위의 상식과 어긋나는 듯 하다. 악인에게서 보호라는 뜻은 악인이 우리에게 끼치는 폭력으로부터 보호인데 여기서는 악한 길에서의 구출이다. 이는 악인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지혜의 보호 기능이다. 흔히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혜로 보호한다 할 때 세상 악행에서 나를 보호하는 것으로 아는데, 내가 악한 길에 들어가지 않도록 지키신다. 보호기능의 뉘앙스가 다르다.

지혜의 보호기능은 악행자로부터 피해를 지키는 것도 보호기능에 속하나 우리로 악의 길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은 근본적 보호기능이다. 행악자의 악행의 피해는 함께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우리에게 악행을 하지 않게 지키는 것이 근본적 보호기능이 되는 것은 결국은 세계를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의 판단 기준, 갚으심을 안다. 참으로 우리가 두려워 할 처벌은 악인으로 인한 해악이 아니고, 영과 육신을 함께 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손으로부터 보호가 근본 보호기능이다. 하나님의 심판 근원은 악이다. 이 악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근본 보호기능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말씀은 우리 안에 간교히 숨겨져 있는 것을 찌르는 말이다. 우리는 선하다고 스스로 여기고, 타인을 악하게 여긴다. 여기서는 너로 하여금 악인의 악에 오염되지 않게 하셔서 행악의 길을 보호하신다는 것은, 범죄 길에서 보호하셔서 나의 연약한 부분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여기보면 12절의 ‘남자(개역성경은 악한 자)로부터 너를 지킬 것이다’ 남자와 관련된 보호기능, 남자의 악은 어떤 성격의 것인가? 바른 것 버리고 악을 좋아하는 형태로 본다.

14절 남자와 관련된 악은 폭력과 결부되어 있고, 타인을 억울하게 한다. 남자는 힘의 상징인데, 이것이 왜곡되면 폭력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여자는 아름다움의 상징으로서, 이것이 왜곡되면 유혹으로 나타난다.

16절 이전에서는 남자와 관련된 악이나, 여기서는 여자와 관련된 악을 말한다.

(이솨 자라 나크리야) 여기서 (자라)는 낮선 자로서 어떤 집단에 속하지 못한 자요, (나크리야)는 국적이 다른 여자를 말한다. 이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낮선 여자( = 음녀)” = ‘이방 여인’이다. 어떤 이는 솔로몬이 말하는 직접 대상은 자기 후에 이스라엘 다스릴 왕의 교육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왕에서 큰 위협은 정략상 외국 여자와 결혼하는 것인데, 이것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 경외를 모르는 이방 여인의 위험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좀더 넓은 의미에서 잠언을 이해하자. 물론 후손(후에 왕들) 교육도 포함한다. 여기서 (낮선 자)는 이질적으로 다른, 삶의 공유가 불가능한 이질적 대상이다. 이질적인 자와 삶을 함께 하면, 그 자신의 삶 또한 변질된다. 그렇다면 여자와 관련하여 생긴 위험은 그런 종류의 악을 포함한 것으로 대표적으로 말한 악이다. 여기서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삶과 이질적 삶을 말한다. 이런 형태의 모든 삶에 대한 경고이다. 남녀의 대조 자체가 모든 종류의 사람이요, 여기 여자와 관련된 악도 모든 종류의 악이다. 대표적인 여자의 악을 말한 것이다.

여성의 죄악의 본질은 무엇인가? 범죄의 유형이 여성적이지 남자도 짓는다. 그 본질은 우선 말을 매끄럽게 한다고 되어 있다. 그 말 속에는 강한 유혹성이 있는 것이다. 매끄럽다는 것은 그 외에 위선, 거짓이 있다. 그 다음 지적이 17절이다.

17절 “그는 소시의 짝을 버리며 그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여기 죄를 여성의 간음죄와 밀착시켜 이해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죄는 어떤 죄의 대표적 성격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 여자는 과거의 남자를 배신하며 그녀의 하나님의 언약을 잊는다” 여기서 (에트 베리트 엘로헤하 샤케하)는 ①그녀의 하나님 언약 → divine covenant, 신적 언약, ②그녀의 신적 언약 → 혼인 관계, 혼인이 하나님 차원에서 언약, 혼인은 하나님 앞에서 언약, 혼인의 신성함에 대한 증거 구절이다.

(엘로헤)를 남편에 좁게 국한 시키지 말고 넓게 해석한다면 친밀한 사람의 관계를 배신하는 것만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불성실한 것으로 해석해도 좋다.  ①남자와 관련시키면 남편 배신한 죄가 된다. ②혼인의 신성함을 나타내는 하나님 앞에서 언약. 여성 언급이 여성의 악의 대표로 죄를 언급한다. 마샬이 비유적 상징적이므로, 여기서 너무 축소해서 하지 말고 넓게 보는 해석이 필요하다.

지혜의 보호기능은 편벽된 길에서와 이방 여인에게서의 보호 성격 기능 이상의 대응이다. 모든 여성 특유의 감정, 유혹으로 사람을 오도하는 그런 종류의 위험에서 보호, 바른 길에서부터 벗어나게 하는 위험으로부터 탈출하게 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 쪽은 남성적 형태, 다른 한 편은 여성적 형태의 오도에 대하여 말한다. 지혜의 보호 기능에 있어서 목적 중 소극적 목적은 ......에서부터 구출하는 것이며 적극적, 궁극적 형태의 지혜의 기능은 20절에서 언급된다. “지혜가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우리도 악에서 이처럼 구원한 후 선한 길로 가게하기 위함이다. 물론 선한 것이 무엇이고 의로운 자의 길이 무엇인가 하는 구체적 내용은 짐작하기 어려우며 나중에 나오나 미리 이야기하면 선한 길 = 하나님의 뜻 = 지혜. 선하고 의로운 길 걷게 하기 위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지혜의 보호적 기능이 될 수 있는가? 악에서부터 구조해 내는 것이 지혜의 보호적 기능이 될 수 있는가?

21절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올바른 자가 땅에 거하면 악인은 그 땅에서 끊어지고, 소멸된다. 여기보면 매우 중요한 개념이 땅이며, 선하고 의로운 길을 걷는 목적이 땅에 거하기 위해서이다. 이유는 이 땅은 정직과 온전한 자만이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땅에 거한다는 구체적인 뜻이 무엇인가? 이 땅이라 하는 것이 우리가 노래하는 삶의 터전과 공간으로서, 쉽게 말하면 이 땅에서 잘 산다는 그런 뜻인가? 여기 말하는 땅의 특수한 의미는 혹자는 모든 사람의 삶의 공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잠언의 표현성을 강조하는 자들이 이같이 강조한다. 여기 잠언에서 모든 사람에게 다 개방되어 있는 땅으로, 영역으로 지시하는 듯한 표현이 많다. 그렇다면 여기 21절은 어떤 의미를 가리키는가?

역으로 이 땅에서 의인과 정직한 자만 잘살고, 악인은 징벌을 당하여 그들에게 지상의 삶의 영역이 거부되고 있는가? Yes로 대답하기 힘들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데로 이 잠언은 솔로몬이 교회의 지도자로 하나님의 백성 위해 이야기한 것이다.

21절의 내용은 신약의 표현과 비교 되는데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요”(마 5:5) 여기서 땅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 처럼 하나님 백성이 사는 특수한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선한 길을, 지혜의 길을 가야 하는가? 정직한 자만이 땅에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의롭고, 정직하게 사는 것은 이 땅에 사는 것의 조건이 되는가? 우리가 의롭게, 선하게 살아야 그 나라에 들어가는가? 신약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많다. 한 쪽에서는 은혜, 한 쪽에서는 율법주의로 가리키는가? 이는 그 나라에 거하기 위한 조건이라기 보다는 그 나라에 사는 자로써의 삶의 본질을 가리킨다. 그 나라에 속한 자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은혜로 그 나라에 속한 자에게서 이것이 나타난다. 의외로 이 순서를 이해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은혜에 속하다가 어떤 경우에는 율법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야고보서가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 나라에 속했다 하면서 삶이 다를 때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라에 들어 가는 것은 공로와 관계 아니며, 삶과 관계 아니다. 은혜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은혜 속에는 그 심령이 그 나라 삶에 적합하도록 변화되는 은혜가 역시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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